2018년 12월호

상속의 역사

입양의 풍속도 양자는 언제부터 상속권 가졌나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입력2018-12-12 17: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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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록 자신의 핏줄은 아니지만 한 생명의 부모가 되고자 입양을 결심하는 이가 적지 않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입양을 인정하지 않거나, 입양을 하더라도 양자에게 상속의 권한을 부여하지 않은 나라가 많았다. 한 시대의 풍습이자 문화인 입양 절차를 시대별, 국가별로 살펴보자.

    전세기로 미국에 도착한 입양아들.

    전세기로 미국에 도착한 입양아들.

    1980년대 후반, 필자가 독일로 유학을 떠날 때였다. 당시 나는 벨기에 가정으로 입양되는 아이 6명을 데리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브뤼셀 공항에는 파란 눈의 양부모님들이 서너 시간이나 연착한 우리 비행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들을 쓰다듬고 품에 안았다. 친부모가 무색할 정도의 애틋한 정이었다. 그 광경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나 벨기에 부모들은 까만 머리의 한국 아이들을 기꺼이 자식으로 받아들였다. 반면 아이들의 조국인 한국에서는 가엾은 아이들의 부모가 되겠다고 나서는 이가 거의 없었다. 20세기에는 많은 한국 아이가 미국과 유럽으로 입양됐다. 그중에는 훗날 이름을 떨친 운동선수도 있고, 고위 관료로 성공한 이들도 있다. 우디 앨런 감독의 아내 순이도 입양아다.


    입양을 몰랐던 시대

    과거에는 입양이란 풍습과 아예 거리가 먼 나라도 있었다. 영국이 바로 그렇다. 유럽대륙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 ‘로마법’의 영향이 미약했던 때문인지 19세기 말까지도 영국인은 입양을 하지 않았다.

    이슬람 사회도 입양을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코란’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들은 데려다 기른 아이라도, 결코 피를 나눈 친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는 입양된 아이라도 반드시 생부의 성(姓)을 따라야 했다. 그 아이는 자신을 데려다 기른 양부모로부터 아무 것도 상속받을 수 없었다.

    만약 여자아이를 데려다 기른 경우라면, 아이는 소녀가 되기가 무섭게 양부 앞에서 제 얼굴을 가려야 했다. 마찬가지로 양모 역시 자신의 양아들에게 맨얼굴을 보여서는 안 됐다. 요컨대 양부모와 양자녀는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내외의 법을 엄격히 지켜야 했다.



    이슬람에서는 고아를 거두어 기르는 일을 선행으로 믿어 권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가계 계승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서로 상속인과 피상속인 관계가 될 수는 없었다.

    로마제국은 입양을 법적인 관행으로 정착시켰다. 그 시절에는 입양이 성풍을 이루었다. 유명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Codex Justinianus. 529년)’에는 입양의 절차와 방법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가령 입양이 결정될 시점에, 양부의 연령은 60세 이상이어야 했다. 양자의 나이도 성년에 이른 경우가 많았다. 양자는 곧 양부의 가문을 온전히 계승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영유아의 입양이 존재하지 않았다.

    부모가 버린 아이들은 남이 거두어 길렀다. 그러나 수양자녀인 그 아이들은 장차 그 집안의 노예가 됐다. 조선시대에도 비슷한 법이 있었다. 로마의 노예 가운데는 수양자녀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 높았다고 한다. 법률적으로는 다소 복잡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던 것 같다. 법적으로 보면, 입양아는 일차적으로 생부의 재산으로 취급됐다.

    입양은 로마 귀족층의 정치 및 경제 측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은 입양을 통해 특정 가문과 정치적 연대를 강화했다. 더러는 최고 권력자인 황제 자리까지 입양을 통해 결정됐다.


    양자, 양손자, 양증손자에게로 이어진 카이사르의 권력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군장을 하고 연설하는 모습을 조각한 대리석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피디아]

    초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군장을 하고 연설하는 모습을 조각한 대리석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피디아]

    기원전 44년 2월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종신 독재관이 됐다. 그로부터 한 달 후, 그는 암살당했다. 공화정을 지키려는 일부 귀족들의 반발이 그처럼 강했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그의 막대한 재산은 당년 열여덟 살의 양자에게 돌아갔다. 옥타비아누스라는 무명의 젊은이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어릴 적에 생부를 잃었다. 사회 관습에 따라 그의 어머니 아티아는 재혼했다. 그녀로 말하면 카이사르의 조카였다. 정확히 말해, 여동생 율리아의 딸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손자뻘이었다. 그럼에도 그들 사이는 양부와 양자가 됐다.

    카이사르는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군사적으로는 무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그리파라는 명장과 함께 파르티아를 원정하게 했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양자는 원정 중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비보를 듣고 서둘러 로마로 돌아왔다.

    그의 정치적 수완은 참으로 대단했다. 야심가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카이사르의 권력과 부를 온전히 상속받았다. 당시 원로원의 귀족들은 옥타비아누스의 막강한 군사력을 두려워했다. 반면에 그는 상대가 자신을 결코 위험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 때문에 귀족들은 야심이 없어 보이는 옥타비아누스를 후원했다.

    결국 그는 부호들로부터 막대한 후원금을 끌어모았다. 그 돈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를 기념하는 성대한 스포츠 대회를 열었다. 그러자 인심이 그에게로 쏠렸다. 인기몰이에 성공한 옥타비아누스는 무난히 집정관에 뽑혔다. 이후 경쟁자들을 잇달아 물리치는 데도 성공했다.

    그는 공화정을 수호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밝히며 원로원을 안심시켰다. 심지어 로마의 최고귀족들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 즉 존엄자라는 칭호를 바쳤다(기원전 27년).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는 원로원을 무력화했다. 로마의 모든 권력은 옥타비아누스의 손끝에서 나왔다.

    옥타비아누스는 병약했으나 76세까지 권좌를 유지했다. 당시로서는 무척 장수한 편에 속한다. 그에게는 친아들이 없었다. 대신에 그의 배우자 리비아가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있었다. 그 이름은 티베리우스였다. 옥타비아누스가 리비아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유부녀였고, 세 살짜리 티베리우스가 딸려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리비아의 미모에 반해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차지하려고 했다. 마침내 그녀의 남편을 압박해, 리비아와 티베리우스 모자를 빼앗았다.

    나중에 옥타비아누스는 우여곡절 끝에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았다. 당시 티베리우스에게는 친아들 소(小) 드루수스가 있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조카 게르마니쿠스를 양아들로 삼았다. 게르마니쿠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였다. 요컨대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종손(從孫)을 입양한 터였다. 덕분에 다른 경쟁자를 따돌리고, 옥타비아누스의 후계자로 선정됐다. 참으로 어지러운 족보라 할 수 있다.

    기원전 13년, 티베리우스는 로마군 총사령관이자 종신 호민관에 임명됐다. 양부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사실상 로마의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 뒤 양부가 노환으로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자 홀로 대권을 거머쥐었다.

    집권에 성공한 티베리우스는 변경에 방어망을 구축하기도 했다. 또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초호화판 전차 경기대회와 검투사 경기 등을 중단했다. 덕분에 로마는 재정 건전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심성 지출을 억제한 까닭에 황제는 인기를 잃었다.

    요컨대 카이사르의 모든 것은 양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상속됐고, 이것이 다시 옥타비아누스의 양자 티베리우스에게로 이어졌다. 티베리우스의 모든 것은 다시 옥타비아누스 집안의 자손에게로 고스란히 되돌아가는 구조였다.


    양자 출신의 로마 황제들

    이 밖에도 로마 황제들 가운데에도 양자가 여럿 있었다. 악명 높은 네로 황제가 바로 그렇다. 그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의붓아들이자 양자였다. 또 티베리우스 2세와 유스티니아누스 1세도 양자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법전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긴 성공한 황제다. 그는 본디 유스티누스 1세의 조카였으나 그의 양자가 됐다. 유스티누스 1세는 이른바 군인황제였다. 자신감이 넘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학식이 부족했다. 나라를 다스릴 만한 지혜가 부족한 황제 곁에는 다행히도 지혜로운 조카 유스티니아누스가 있었다. 527년 4월, 삼촌은 조카를 양자로 삼아 공동 황제로 만들었다. 넉 달 뒤 유스티누스 황제는 세상을 떠났다. 이제 조카 유스티니아누스는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로 등극했다.

    그의 치세에는 허다한 업적이 쌓였다.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콘스탄티노폴리스)’이 건설된 것도 그때였다. 또 황제는 트리보니아누스를 기용해 로마법을 집대성했다(529). 이른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었다. 그의 치세에 확립된 법전을 후세는 ‘로마법대전(Corpus Juris Civilis)’이라 한다. 기존의 여러 칙령과 법률에 존재하는 모순을 없앴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서방에 있던 로마의 영토도 상당 부분 회복했다. 그는 기독교의 발전에도 기여해, 이른바 동방정교회의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러 명의 양자 출신 황제 가운데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가 그였다.

    게르만족과 슬라브족 등 중세 유럽의 주인공들은 로마의 입양제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혈통의 순수성이 중요했다. 중세가 되자 로마의 입양제도는 자취를 감추었다. 귀족 가문이든 왕실이든 뒤를 이을 자녀가 없으면 역사의 무대에서 퇴출됐다.

    가령 영국의 관습법(Common Law)만 해도 입양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영국 사회의 풍습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 제국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입양제도가 다시 등장한 것은 19세기였다.‘나폴레옹 법전’(1804)은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입양을 제도화했다. 로마법을 복구한 셈이었다. 이후 다른 유럽 국가도 하나둘씩 프랑스의 선례를 좇았다.

    ‘나폴레옹 법전’이 정한 입양 조건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우선 입양 당시 양자는 이미 성년에 도달해 있어야 했다. 입양 시점에 양부의 나이는 고령(50세 이상)으로서 생식 능력을 이미 상실했다는 사실을 의학적으로 증명해야 했다. 양부와 양자는 나이 차이가 15세 이상이라야 상속자의 자격을 갖춘 것으로 보았다.

    또 양자는 양부의 목숨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든지, 아니면 그와 반대로 미성년 시절에 훗날 양부모가 될 어른에게 장기간(6년 이상) 생계를 의존한 적이 있어야만 했다. 요컨대 양부모와 양자는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의 생명을 구한 특별한 관계라야 했다. 역사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처럼 까다로운 입양조건이 온전히 충족되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근대 교회의 새로운 역할

    1419년에 설계된 유럽 최초의 고아원 인노첸티. 1445년부터 공식적으로 고아원으로 사용됐으며, 현재는 아이들을 돕는 기관과 작은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위키피디아]

    1419년에 설계된 유럽 최초의 고아원 인노첸티. 1445년부터 공식적으로 고아원으로 사용됐으며, 현재는 아이들을 돕는 기관과 작은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위키피디아]

    근대 유럽 사회에는 유기아와 고아 문제가 심각했다. 많은 사람이 갓난아이를 교회 문 앞에 내다 버렸다. 가난 때문이기도 했고, 불륜 등의 이유로 원하지 않는 임신이 많았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할 수 없이 이 아이들을 직접 맡아서 길렀다. 더러는 입양이 가능한 가정을 찾아보기도 했다. 시일이 갈수록 관련 규정이 차츰 정비됐다. 일단 대세는 버려진 아이들을 평생 동안 수도원에 머물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수도원의 일꾼으로 각종 임무를 담당했다. 나중에는 교회의 구휼 제도가 발전해 고아원도 설립됐고, 유기아를 돌볼 병원도 세워졌다. 근대사회는 종교로부터 나날이 멀어졌으나 종교기관은 오히려 사회문제를 발 벗고 해결하는 양상을 보였다.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유기아 가운데서도 상당수 남자아이는 견습공을 거쳐 기술직 노동자가 됐다. 여자아이들은 성년이 되면 교회 및 관련 기관의 주선으로 가정을 꾸렸다. 비공식적으로 유기아동을 입양하는 기관 및 단체도 늘어났다. 값싼 노동력을 제공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17~18세기 유럽의 사정이었다.

    19세기가 되자 유기아 입양이 제도적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 사회가 새로운 변화를 주도했다. 미국인은 유기아와 고아를 정식으로 입양했다. 성년이 된 입양아는 양부모의 유산을 합법적으로 상속받았다. 물론 그들에게는 연로한 양부모를 부양할 의무도 있었다. 중세에 사라진 로마시대의 입양제도가 19세기 미국에서 온전히 부활한 셈이다. 그 후 미국의 입양제도는 유럽으로도 전파됐다.


    입양 천국은 조선 사회

    조선 후기에는 입양제도가 발달했다. 정조도, 철종도, 고종도 입양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양반 가문에서는 입양이 비일비재했다. 6부의 하나인 예조는 입양에 관한 사무로 분주했다.

    입양은 신분, 지역 및 계층을 초월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들 가계의 단절을 막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성리학 이념이 사회 전반에 깊이 파고든 결과로, 예조에는 입양 신청이 쇄도했다. 예조는 연도순으로 심의 결과를 정리해 ‘계후등록(繼後謄錄)’이란 책자를 만들었다. 그 일부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분량이 방대하다.

    입양을 둘러싼 친족 간의 갈등도 적지 않았다. 입양을 했다가 취소하는 소동도 자주 벌어졌다. 또 생전에 당사자가 어렵게 조정의 허락을 얻어 서자를 적자로 바꾸어(승적·承嫡) 자신의 후계를 마련했어도 사후에 친족들의 반발로 입양이 문제시되기도 했다. 1669년(현종 10), 윤선도 가문에서 일어난 한 가지 사건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실록에 따르면 국왕 현종도 입양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남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윤선도의 형수 원씨(윤선언의 아내)는 자신의 곤란한 처지를 글로 호소한 바 있다. 당시 사헌부가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을 간추려 보겠다.

    생전에 윤선언(원씨의 남편)은 친조카 윤의미(윤선도의 차남)를 양자로 정했다. 그런데 윤의미는 명이 짧아 일찍 죽고, 두 아들을 남겼다. 그중 큰아들은 또 일찍 죽었다. 차남 윤이후(당년 18세)가 유일한 혈손이다. 그런데 집안에 복잡한 문제가 생겼다. 윤예미(윤선도의 3남)도 대가 끊길 판이라, 윤예미는 윤이후를 자신의 양자로 삼으려 했다.

    원씨는 이 문제를 시동생 윤선도와 상의했다. 그들은 윤이후를 윤예미의 양자로 줄 수 없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그러나 1668년 겨울, 윤예미가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과거시험을 치러 서울에 올라온 김에, 현종에게 거짓 내용으로 호소해 윤이후를 양자로 만들어버렸다.

    졸지에 손자 윤이후를 빼앗긴 원씨는 억울함을 참지 못해 사헌부에 사건의 전말을 알리고 잘못된 입양을 시정해달라고 청원했다. 보고를 받은 현종은 사실관계를 확인해 윤이후를 윤선언의 사손(嗣孫, 대를 이을 손자)으로 확정했다.

    조선 사회에서는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이 사회적 책무였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조카(윤예미)의 잘못을 고발하기 위해 서울까지 올라간 원씨의 심정이며, 아버지(윤선도)의 명을 어기고 세상을 속여서라도 자신의 대를 이으려 했던 아들(윤예미)의 간절함이 피부에 와닿는다.

    요컨대 입양의 풍습에 가장 결정적인 것은 문화였다. 한 사회의 이념이었다. 가문의 계승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널리 공유된 곳에서는, 입양이 제도로 정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가문의 영속성이 신성한 의무로 여겨지던 문화권에서는 정반대였다. 21세기 한국 사회는 어디쯤에 서 있을까.


    백승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조선의 아버지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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