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부자인 까닭도, 왕자가 자라서 국왕이 되는 까닭도, 상놈이 상놈으로만 살아야 하는 까닭도 ‘상속’ 때문이었다. 상속 제도는 가진 자들에게는 너무도 고맙고 유용한 제도였다. 하지만 반대로 받을 게 없는 사람들에게는 부의 대물림 제도 자체가 탐탁지 않다.
라파엘로, 아테네학당, 1509~1511, 바티칸미술관.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면 시민들은 지혜와 용기, 절제와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주장이 대두되는데, 시민 모두가 소유욕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적 욕망의 절제를 통해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 옳으며, 이를 위해서는 통치자 집단이 일체의 재산을 공유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심지어는 처자까지도 공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사적 소유를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어느 한 개인이나 계층의 행복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행복을 추구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이른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신념을 극단까지 밀고 나간 이가 바로 플라톤이다.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공유제를 거세게 비판했다. 제자는 ‘정치학’에서 반론을 펼쳤는데, 만약 아내와 자식을 공유한다면 반인륜적 부작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서로 간에 별다른 애정이 없는 형식적인 근친 관계에서는 다툼과 비방, 폭력과 학대를 피하기 어렵고, 결국에는 근친 살해마저 일상사가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사실 인간 사회의 온갖 폐단은 사적 욕망의 무절제한 추구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는 이미 고대 민주정치의 황금기를 지나, 극도로 타락한 참주(僭主·고대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에서 비합법적 수단으로 지배자가 된 사람)들의 금권정치로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세상은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웠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이 주장한 공유제는 그리스 사회를 개혁하려는 일종의 극약 처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승의 공유제는 인간 본성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냉철한 비판이었다. 누가 옳았는지 섣불리 판단하기가 어려운 사안이다.
유가와 묵가의 뜨거운 논쟁
기원전 4~5세기 고대 그리스 사회를 뜨겁게 달군 공유제 논쟁은, 같은 시기 중국 사회에서도 전개됐다. 플라톤처럼 명시적으로 공유제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으나, 묵자의 겸애설(兼愛說)은 본질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묵자는 사적 관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했기 때문이다.겸애란 무엇인가? 친소 관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묵자는 나와 남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강자가 약자를 침략해 빼앗고 죽이는 일을 다반사로 여기는 까닭은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남을 깔보고 미워하며, 자신을 높이고 유별나게 아끼는 것도 남과 자기를 구별하고 차별하는 데서 비롯됐다. 이것이 묵자의 사회적 통찰이었다.
묵자의 해결책은 겸애였다.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면 신분적 차별도 소멸되고, 강국과 약소국의 갈등과 대립도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겸애를 실천하면, 사회적 약자들도 충분한 보호를 받을 것이며, 전쟁과 다툼이 사라져 조화롭고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유가는 묵자의 이와 같은 이상론을 강력히 비판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을 반박한 것보다 더욱 격렬하게, 맹자를 비롯한 유가의 스승들은 묵자를 공박했다. 유가 역시 인간관계에서 사랑(仁)을 강조했다. 그런데 인간의 사랑이란 친소 관계에 따라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마련이라는 주장이었다.
유가에 따르면, 나의 부모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확대해 이웃을 돌보고 아낄 수는 있다. 하지만 이웃에 대한 사랑이 부모형제를 상대하는 내 마음과 처음부터 동일할 수는 없는 법이라는 비판이었다.
잘 생각해보면, 묵자의 겸애설은 너무 추상적이다. 현실에서 구현될 수 없는 이상론에 치우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유가의 주장은 어떠한가. 이른바 ‘친친(親親)’이라 하여, 친한 이를 친하게 대접한다는 것이다. 친소 관계를 인간 사회의 순리로 인정함에 따라, 그들은 차등이 있는 예법을 정하게 됐다. 이것이 결국에는 ‘변등(辨等)’, 곧 등급의 차이를 엄히 결정하는 사회 관습으로 이어졌다.
지배층이 변등의 논리를 함부로 악용함에 따라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소수 지배자들이 특권의식을 내세우며 사회적 차별을 일삼았다. 유교 사회의 병폐도 적지 않았다.
부의 집중 막으려 애쓴 실학자들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경세유표’의 정전론(왼쪽)과 조선 실학자 성호 이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아DB]
겸병이 확대되자 다수의 농민이 자기 땅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그들에게는 경제적 보상이 없었다. 소작농들은 의욕을 상실한 채 지력을 고갈시켜 결과적으로 겸병된 경작지가 차츰 황폐해졌다. 이것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큰 손실이었다.
겸병을 통해 부호에게 예속된 소작농들은 부호의 권력을 이용해 군역에서 빠져나갔고, 국가의 요역과 세금도 제대로 내지 않았다. 17세기 조선 왕조는 세금감면 정책을 통해 자영농을 기르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조세 감면의 실질적인 혜택은 대농장을 소유한 부호들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유형원은 토지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는 것이 해답이라고 보았다. 모든 경작지의 소유권을 국가가 보유함으로써, 고대 유가의 이상인 정전제를 회복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정전제란 일정한 규모의 토지를 9개로 구획해 그중 8개는 농부들이 하나씩 차지하고, 중앙의 1개는 국가 몫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맹자’도 이상으로 삼았던 고대의 토지제도였다.
유형원의 개혁 사상을 계승한 이는 실학자 이익이었다. 그는 정전제의 이상은 당대의 현실과 거리가 멀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익은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이미 방대한 경작지를 독점하고 있는 부호들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점진적으로 경제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궁리했다.
이익의 생각은 영업전(永業田)에 미쳤다. 농가가 자립적으로 생활하는 데 필수적인 최소한의 토지를 영업전으로 정해, 거래를 금지함으로써 점차 자영농을 기르자는 것이었다. 또 겸병으로 비대해진 부호의 농장은 세대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분할되도록 유도해 수대가 지나면 저절로 해체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박지원과 정약용 등 조선 후기의 여러 실학자가 부의 집중을 막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대다수 농민을 구제할 방안을 다각적으로 연구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견해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두 가지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
첫째, 실학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법적으로 보장된 조선의 상속 제도 자체를 인위적으로 변경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상속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부의 집중을 완화할 방법을 찾았다.
둘째, 소작농 또는 빈농층의 경제적 자립을 핵심 과제로 인식했다. 요즘말로 ‘중산층 육성’이 국가의 과제라고 보았던 것이다. 물론 조선의 지배층은 이러한 실학자들의 주장을 잘 알고 있었다. 영조와 정조를 비롯해 역대 국왕들도 부의 과도한 집중으로 생기는 문제점에 주목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태를 관망하기만 했을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경제정의의 실종
동학농민운동 전봉준, 송영방 화백 그림. [동아DB]
미국의 허드슨 연구소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세상의 부는 극소수의 수중에 더욱 집중돼 있다. 2013년 기준, 미국의 상위 5% 부자들이 전체 자산의 62.5%를 소유한다. 30년 전에 비하면, 부의 집중도가 8% 이상 강화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는 사이 계층 간 소득 격차도 더욱 벌어졌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최상위 0.01% 부자들이 전체 자산의 22%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복잡한 수치를 일일이 인용해가며 비교할 필요조차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극소수 한국 재벌의 눈부신 활약을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미국 사회는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나은 점이 있다. 미국 400대 부자 중에는 자수성가한 경우가 69%나 된다. 한국은 전혀 다르다. 30대 재벌 가운데서 당대 창업자는 7명뿐이다. 나머지 23명은 순전히 상속을 통해서 돈방석에 앉았다. 한국의 부자들은 대개 상속 덕택에 그리 된 것이지만, 미국에서는 자력으로 부를 거머쥔 경우가 과반수다. 미국이 부럽지 않은가.
이런 사정을 외면하지 못해 한국은 상속세와 증여세 부담률을 상향 조정했다. 2014년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가운데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상속·증여세 부담률이 최상위권이다. 1위는 벨기에(부담률 0.7%)이다. 한국은 그 비율이 0.31%인데, 프랑스(0.47%)와 일본(0.38%)에 이어 4위를 기록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 법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재벌들은 온갖 편법을 써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해 굴지의 재벌들은 역대 정치권력과 유착해 상속세를 포탈한 혐의가 농후하다. 증여 및 상속세율을 아무리 높인다 해도 이미 상실된 경제정의가 완전히 회복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정의가 실종된 이 세상을 내손으로 고쳐보겠다고 나서는 시민도 적지 않다. 우연히 알게 된 ‘좋은 하루’도 그중 하나다. 이 모임에 참가한 시민들은 시민의 경제적 토대가 송두리째 망가진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고,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좋은 하루’의 회원들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값지게 살고자 한다. 그들은 채무 없는 생활을 의무로 삼는다. 회원들은 승강기가 필수적인 주거 방식을 거부하며, 1인당 10평 이상의 주거 공간을 소유한 사람은 거주 면적이 1평을 초과할 때마다 10평의 채소밭을 경작할 의무를 지닌다. 이 밖에도 ‘좋은 하루’의 회칙에는 일반 시민이 이해하기 곤란한 사항이 다수 포함돼 있다.
최근 내가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은 결국 한마디로 요약된다. 현실 국가와 사회가 양극화 문제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자, 일종의 대안적 시민운동이 여러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생활공동체를 구성해 노동과 주거, 양육 문제뿐만 아니라 삶 자체를 포괄적으로 재구성한다. 또 다른 이들은 생산, 소비, 여가 등에 관한 자신들의 견해를 관철하기 위해 활동 영역은 제한적이지만 목표가 매우 구체적인 단체를 만들고 있다.
어느 연구 결과에 따르면, 초기의 동학운동은 ‘유무상자(有無相資)’의 실천을 통해 큰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가진 자(유)와 못 가진 자(무)가 서로서로(상) 의지함(자)’으로써 단체 내부의 결속력도 강화되고, 그들 삶의 질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말이다.
동학농민운동 결집력은 ‘유무상자’
이러한 유무상자의 효력이 동학을 가장 앞장서서 비판하고 탄압한 양반 유생들의 ‘동학배척통문’(1863)에 나온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내용은 이렇다.“(동학의 무리는) 귀천이 같고, 등급과 지위의 차별도 없다. (그리하여) 백정과 술장사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그들은) 남녀를 차별하지 않는다. 포교소를 세우자, 과부와 홀아비들이 모여들었다. 재물과 돈을 좋아하여 있는 사람과 없는 이들이 서로 도우므로(有無相資), 가난한 이들이 (매우) 기뻐한다.”
동학도 가운데서도 유무상자의 유익함을 증언한 이가 있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충청도 서산의 접주로 활약한 홍종식의 체험담을 들어보자.
“죽이고 밥이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도인(道人·신자)이면 서로 도와주고 서로 먹으라는 (가르침 같은) 데서 모두 집안 식구같이 일심단결이 되었습니다.”(홍종식, ‘70년 사상의 최대활극 동학란실화’ ‘신인간’ 34호, 1929년 4월호)
1894년 동학농민군은 유무상자를 광범위하게 실천했다. 비단 동학농민군들끼리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부자의 재물을 거두어서 가난한 농민들을 도왔다. 간혹 남의 재산을 빼앗기도 했으나, 그것은 평소 농민들을 함부로 괴롭힌 악덕 지주의 재산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조차 동학농민군을 의롭게 여겼다.
독일 기업 ‘밀레’를 배워라
밀레 세탁기, 1915.
독일의 세탁기 회사 ‘밀레’가 생각난다. 밀레는 사람을 한번 기용하면 좀처럼 자르지 않는다. 고용 안정성을 보장함으로써 회사에도 이득이 되고, 노동자에게도 득이 된다니 이것이 바로 ‘현대판 유무상자’가 아닐까.
1899년에 창립된 밀레는 오늘날 진공청소기를 비롯해 세탁기, 오븐 등을 주로 생산한다. 관련 분야에서 유럽 내 시장점유율 1위이며, 연간 매출액이 4조5000억 원이다. 2017년 기준, 고용된 노동자 수만 1만8000여 명에 달한다.
이 회사는 평사원부터 CEO에 이르기까지 정식으로 채용되기만 하면, 65세까지 일자리를 보장받는다. 또 가족기업이지만, 후손들은 개인적으로 상속받는 자산과 사업을 목적으로 승계받은 자산을 엄격히 구분한다.
독일은 개인상속분 재산에 대해서는 사회정의를 실천한다는 차원에서 높은 세율을 부과한다(최고 64%). 그러나 사업을 위한 자산은 상속세를 크게 감면해주고, 대신에 고용을 확대할 공적 책무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밀레는 독일 경제가 최악이던 2004년 재정이 악화돼 구조조정이 절실했지만 그 순간에도 직원을 해고하지 않았다. 회사는 전자센터를 설립해 연구개발 비용을 확대해 제품을 혁신했다. 매출 실적이 올라가자 위기는 저절로 사라졌다.
상속 제도는 나라마다 큰 차이가 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모든 제도는 그 자체에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다. 그것을 하나씩 알아가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제도를 초월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정의롭고 따뜻하게 만들어가려는 참된 노력이다.
백승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조선의 아버지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