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것’은 바로 소음이다. 우리는 점점 더 ‘소음의 세상’ 속으로 밀려나고 있다. 갈수록 시끄러워지는 세상이다. 문명사회란 대체로 갖가지 소음으로 소란스럽지만, 특히 대한민국은 소음에 관대하고 소음을 쉽게 용인한다는 측면에서 더도 덜도 아닌 소음 사회다. 소음과 그것이 일으키는 진동들은 내 삶과 일상 세계의 중심을 관통한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내면의 소음들이다.
“심리적 혼란과 광기는 내면의 소음들이다.”(마르크 드 스메트, ‘침묵 예찬’)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외부의 소음과 내면의 소음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지! 그 와중에 침묵이라는 자원은 고갈되고 침묵은 우리 내면을 성장시키고 삶을 유의미하게 바꿀 수 있는 천연자원이다.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소음이 그 침묵을 도처에서 살해하고 있다.
소음은 선(腺), 내장, 심장, 혈관 같은 신체의 내부기관에 영향을 미친다. 소음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은 혈액순환, 심장 건강, 선 분비에 장애를 겪을 수도 있다. 초저주파음과 초음파들은 불안, 두통, 이명 등을 유발하며, 소음이 일으키는 피자극성, 공격성, 초조함을 방치하면 정신분열증이나 편집증 환자가 될 수도 있다. 소음은 청각만이 아니라 몸과 정신, 그리고 존재 자체를 위협한다.
소음의 상당 부분은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종류의 소리를 내고, 그 소리의 일부가 소음으로 변질된다. 그러니까 사람은 소리를 내는 발성기관과 더불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고 있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엄존하는 자연 생태계 안에서 동물은 기본적으로 침묵하며 먹잇감들의 낌새를 예측하거나 포식자들이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를 들었다.

교통체증
주변의 소리를 더 잘 듣게 하는 귀의 증폭 기능을 맡는 중이(中耳)는 다른 한편으로 소리의 완화 기능을 한다. 이렇듯 귀는 살아남기 위해 소리를 키우고 한편으로는 자신이 내는 목소리를 죽이며 진화해왔다.
1930년 도쿄위생연구소 소속 과학자들이 유의미한 실험을 시작했다. 의사인 후지마키와 아리모토는 흰 쥐 40마리를 20마리씩 둘로 나눈 뒤 두 무리를 큰 소음을 없앤 방과 시끄러운 환경에 놓아두고 양쪽 무리의 몸에 나타난 변화와 건강상태를 견주어봤다. 두 의사는 날마다 기차 1283대가 지나가는 고가 철로 밑의 소음 속에서 자란 쥐가 더욱 신경질적이고, 성장이 더디고, 새끼의 사망률이 높고, 번식력이 떨어지고, 더 자주 먹는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하지만 반전이 숨어 있었다. 소음 속에서 자란 쥐들의 삶은 확실히 고약했지만 수명이 특별히 짧지는 않았다. 고가 철로 밑의 소음 속에서 자란 쥐들은 소음이 차단된 환경에서 자란 쥐보다 53일을 더 살았다. 소음이 수명을 단축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의 질을 확실하게 떨어뜨린다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어쨌든 호기심 왕성한 두 의사 덕분에 우리는 소음이 생명체에 어떤 식으로든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음 중독자로 산다는 것
우리는 소음과 ‘뒤엉켜’ 살며 소음의 지배를 받고, 소음이 끼치는 나쁜 영향을 지속적으로 몸과 마음으로 받으면서도 더러는 소음을 사랑하기도 한다. 소음을 괴로워하면서도 소음을 사랑한다는 이 모순적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조지 프로흐니크는 소음이 일으키는 피해를 조사하고, 인류가 침묵하지 못하면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탐색하기 위해 의사, 신경과학자, 진화학자, 음향 전문가 등을 만났다. 휴대용 음악 기기들의 확산, 고막을 자극하는 시끄러운 음악이 울려 퍼지는 쇼핑센터와 패스트푸드 음식점들, 몇 년씩이나 울려 퍼지는 거리의 공사 소음들, 대도시의 거리를 점령한 엄청난 차량들이 내지르는 갖가지 소음의 홍수 속에서 침묵의 공간은 사라져간다. 조지 프로흐니크는 소음에 관련된 전문가와 일상에서 침묵을 추구하는 사람을 만나고 직접 소음과 침묵을 경험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침묵과 소음의 관계를 추적하면서 우리 사회가 어째서 이토록 시끄러워졌는지, 침묵하지 못하면서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따져들어간다. 그의 목표는 분명해 보인다. 그는 우리가 잃어버린 ‘침묵의 권리’를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풀어나간다. 그는 이렇게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