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호

‘불안의 시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 장석주| 시인 kafkajs@hanmail.net

    입력2011-08-23 11: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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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사회는 ‘불안증폭사회’다. 끊임없이 증폭되는 불안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다. 저출산, 청년실업, 물가, 주택난, 범죄, 북한의 핵위협, 기후변화… 등 모두 불안요인이다. ‘한국 사회 자체’가 불안의 원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다가오는 ‘빙산’을 예측하지 못하는 타이타닉과도 같다. 그러나 불안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불안은 종종 사람을 마비시키지만, 또 인간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때로는 불안이 생존을 보장한다.
    ‘불안의 시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일탈 꿈꾸는 50대, 외로움에 빠진 20대.

    눈을 감아도 잠이 쉬이 오지 않는다. 온갖 일이 파노라마로 스쳐 지나간다. 불길한 예감과 나쁜 생각들이 스멀스멀 퍼져 뇌를 잠식한다. 나는 영원히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를 받은 느낌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불안이라는 수수께끼다. 불안은 한국인의 유전자에 각인된 또 다른 본능이다.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불안에 잠식된 영혼을 갖고 산다. 주변에 늘 불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은행이 불안해서 돈을 맡길 수 없고, 화재에 대한 불안 때문에 가스레인지의 잠금장치를 거듭 확인하고, 자물쇠를 믿을 수 없어 집을 불안해하고, 살이 찔까봐 불안해서 마음껏 먹지도 못한다. 어디 그뿐인가. 아이의 장래가 불안하고, 부동산이 불안하고, 미래가 불안하다고 한다. 우리는 불안을 먹고 불안을 낳으며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불안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삶의 조건”이고 산다는 것은 “하나의 불안을 또 다른 불안으로 바꿔가는 과정”(알랭 드 보통, ‘불안’)인지도 모른다.

    불안에는 두 종류가 있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위험에 대한 불안과 불합리하고 근거가 없는 병적인 불안이 그것이다. 수험생이 수능시험을 망칠까 걱정하는 것, 집에 불이 날까 염려하는 것, 방금 문을 잠그고 집에서 나왔는데 도둑이 들까 조바심치는 것, 직장에서 해고될까 두려워하는 것, 운전하는 사람이 사고가 날까 걱정하는 것…, 이런 불안들은 현실을 근거로 한 구체적인 상황에서 비롯한 것이다. 반면에 병적인 불안은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하고 모호한 원인에서 비롯한다. 그런 불안은 불안장애라는 질병을 가리킨다. 비정상적이고 병적인 불안과 공포로 인해 일상생활에 장애가 되는 정신질환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어느 정도의 불안과 공포는 건강한 정서 반응이다. 불안과 공포로 인해 교감신경이 흥분해서 두통이 생기고, 심장 박동과 호흡수가 증가하고, 소화 분비계에 이상 증상이 생긴다면, 그것은 불안장애다. 그들은 사회생활이나 일상생활을 건강하게 꾸릴 수가 없다.

    ‘타이타닉’은 우리 사회다

    ‘불안의 시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

    한국 사회를 ‘불안증폭사회’라고 한다. 심리학자 김태형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이 심리학자의 진단에 따르자면,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불안의 만성화와 총량의 증가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우리가 타고 있는 ‘한국호’라는 배는 지금 저출산, 청년실업, 자살률 세계 1위, 긴 노동시간, 물가, 주택난, 범죄, 만성적인 빈곤, 지나치게 높은 사교육비, 사회의 양극화, 중산층의 붕괴, 자영업에 덮친 불황, 낮은 행복지수, 승자독식사회, 학력차별주의, 신자유주의라는 괴물, 북한의 핵위협, 기후변화, 금융대란 등등의 파도가 몰아치는 불안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중이다. 우리는 배 위에서 불안이라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배는 부서지거나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말 것이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우리 마음 안에는 불안과 공포가 증식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여기서 빨리 벗어날 수 있을까? 그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에 불안과 공포는 임계점을 훌쩍 넘어선다. 우리는 점점 더 견딜 수 없다. 남은 선택은 미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다. 벌써 많은 사람이 불안이라는 바닷속으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재난영화 ‘타이타닉’을 떠올려보자. 사람들은 다가오는 ‘빙산’을 예측하지 못한 채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에 탔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들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즐거움과 행복들은 돌연 사라지고 현실은 악몽으로 바뀐다. ‘타이타닉’에 승선한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포함해서 모든 귀중한 것을 한꺼번에 다 잃는다. ‘타이타닉’은 곧 ‘우리 사회’다. 자크 아탈리는 이렇게 적는다.



    “‘타이타닉’은 우리다. 거들먹대는, 제 잘난 듯한, 눈뜬 장님인, 위선에 가득 찬 우리 사회다. 불쌍한 구성원들에게 냉혹한 사회, 모든 것이 예측되지만, 예측의 수단만큼은 예측되지 않는 사회다.…우리는 모두 우리 앞에 빙산이 다가오고 있음을 짐작하고 있다. 어딘가 알 수 없는 미래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결국 우리와 충돌하고, 우리를 장엄한 음악 소리와 함께 물밑으로 가라앉힐 것이다.”(자크 아탈리, ‘Le Titatanic, Le mondial and nous’’, 르몽드, 1998. 7.3. 여기서는 지그문트 바우만, ‘유동하는 공포’, 재인용)

    우리가 왜 불안한지 분명해지지 않는가? 파도는 더욱 난폭해지고 그에 따라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는 ‘타이타닉’호에 함께 타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자크 아탈리는 ‘타이타닉’이 ‘우리 사회’라고 말한다. 그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이 예측되지만, 예측의 수단만큼은 예측되지 않는 사회”다. ‘한국호’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바다를 항해한다. 미래는 불확실한데, 그것은 우리 삶이 예측불가능한 위험들 속에 있다는 반증이다. 그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이 우리 삶을 집어삼킬지도 모른다. 이 ‘불확실성’이 우리 마음에 불안을 키운다. 어느 때보다도 불안하고 우울하며 무기력하고 분노하는 한국인을 주목하고 경제위기 이후 큰 정신적 외상을 겪은 한국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에 대한 보고서로 썼다는 김태형은 ‘불안증폭사회’에서 우리의 불안이 개인의 일탈이나 가족관계, 혹은 유전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는 문제가 ‘한국 사회 그 자체’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의 한국 사회가 강제하는 부정적 감정의 양이 적어도 가족관계나 유전자 등이 유발하는 부정적 감정의 양보다 더 클 거라고 확신”해 “한국인들에게 고통을 강요하는 주범은 한두 명의 이웃이 아니라 잘못된 한국 사회 그 자체”(김태형, ‘불안증폭사회’)다. 우리는 날마다 불안하고, 짜증이 나고, 낮은 행복감 속에서 허덕이며 살아간다. 부정적 감정이 불안을 낳는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에서 도피하려 하므로 도피행동을 활성화시키는 감정인 두려움, 즉 불안과 공포가 유발될 수밖에 없다.”(김태형, 앞의 책)

    불분명한 불안과 공포

    우리 마음 안에 도사린 우울감, 무력감, 허무감, 죄책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뿌리가 불안이라는 것은 드러났다. 문제는 불안이 줄지 않고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끊임없이 증폭되는 불안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불안이 ‘한국 사회 자체’라는 것은 알지만, 그 실체가 너무 크고 복잡함으로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그 근원적 실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할 수도 없다. 불안은 어디에나 있고, 그것들은 퍼져나간다. 어디에 살든지, 불안을 피할 수는 없다. 사람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누구나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한국 사회는 그 정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단일체가 아니다. 그것은 모호하고 복합적인 괴물이다. 우리가 내면의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것과 싸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분명하고 불확정이고 불확실하다.

    불안과 공포는 한 짝이다. 그것들은 하나만 오지 않고 언제나 한 쌍으로 온다. 불안이 만성화된 공포라면, 둘은 하나의 본질에 속하는 두 가지의 감정이다. 그렇다면 가장 무서울 때는 언제일까? 불안이건 공포건 간에 그 정체가 ‘불분명’하고, 그 위치가 ‘불확정’이고, 그 형태가 ‘불확실’할 때다. 분명히 있지만, 그 정체가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어떤 형태로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불안과 공포는 증폭된다. 왜? 그것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고, 그 대처할 수 없음은 직접적으로 생존을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모든 공포 영화의 공식은 이 원리를 충실하게 따른다.

    “공포가 가장 무서울 때는 그것이 불분명할 때, 위치가 불확정할 때, 형태가 불확실할 때, 포작이 불가능할 때, 이리저리 유동하며, 종적도 원인도 불가해할 때다. 어떤 규칙성도 합리적 이유도 없는 공포, 그 낌새가 여기저기서 선뜻선뜻 나타나지만, 결코 통째로 드러나지는 않는 공포야말로 가장 무시무시하다. ‘공포’란 곧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위협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 그래서 그것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에 달려들어 맞서 싸우려 해도, 싸워볼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지그문트 바우만, 앞의 책)

    9가지 심리코드

    ‘불안의 시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경쟁사회가 낳은 스트레스가 불안을 키운다.

    ‘불안을 증폭시키는 9가지 심리코드’가 있다고 한다. 그 심리코드들은 이기심, 고독, 무력감, 의존심, 억압, 자기혐오, 쾌락, 도피, 분노다. 자, 불안을 낳고 그것을 키우는 9가지의 심리코드를 살펴보자. 첫째, 이기심. “이기심의 만연은 한국인들을 한편으로는 범죄자의 길로 떠밀고, 다른 편으로는 정신병동으로 밀어 넣는다.”(김태형, 앞의 책)

    이 말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한국 사회에 이타주의자보다는 이기적인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다 범죄자가 되거나 미쳐서 정신병동으로 가지는 않지만, 이기심이 정신건강을 좀먹는다는 건 분명하다. 이기주의자들이 득세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이기주의자들의 사회에서 타자는 “온통 내 밥그릇을 빼앗으려는 적들”이다. 그래서 이기주의자가 많은 사회에서는 대인불신감과 사회불신감이 커진다.

    둘째, 고독. 경제위기 이후 피도 눈물도 없는 무한경쟁의 원리가 퍼져나갔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누구나 자기가 경쟁에서 탈락할까, 불안해한다. 무한경쟁 사회는 내가 죽거나, 아니면 네가 죽거나의 사회다. 경쟁에서의 탈락은 곧 죽음이다. 그러니 경쟁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이런 경쟁사회가 낳은 스트레스가 불안을 키운다. 불안은 사회공동체를 파괴하고, 전체에서 떨어져 나온 개인은 하나의 파편으로 고립한다. 고독은 그 고립의 결과물이다. 우리 사회에 왜 그렇게 자살자가 많은가? 고립감과 고독 때문이다.

    셋째, 무력감. 그것은 거듭되는 욕구의 좌절로 인해 생겨난 분노가 외부를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향할 때 생겨나는 부정적 감정이다. 나중에는 이 분노조차 고갈된다. 제 운명통제권이 ‘돈’이나 물질, 혹은 자기와 무관한 집단이나 권력에 넘어갔다고 느낄 때, 그래서 운명통제 욕구를 실현하지 못할 때 무력감은 더욱 커진다.

    넷째, 의존심. 사람이 무기력할 때 제 생존을 누군가에게 의탁해 유지해야 한다. 그게 의존심이다. 대중이 고통과 좌절을 겪는 시기에 자기도 모르게 자기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존재에게 의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파시즘이 발호하기 좋은 사회적 조건이다.

    다섯째, 억압. 한국 사회는 ‘억압 사회’다. 아직까지도 건재한 국가보안법이야말로 그 ‘억압’의 대표적 사례다.

    여섯째, 자기혐오. 최근 우리 영화를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지나치게 잔인한 폭력과 극단적인 가학으로 스크린이 벌건 피로 물들기 일쑤였다. 한 국내 영화잡지에 기고한 영화평론가 데릭 엘리도 한국 영화에 엄청나게 증가한 폭력에 주목한다. 영화에 묘사된 “극단적인 가학과 폭력은 심리적으로 위험하다”는 것과 함께 “이런 유의 극단적인 가학과 폭력 그리고 그에 따른 극심한 자기혐오는 다른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김태형, 앞의 책, 재인용)라고 적는다. 상대를 향한 가학적인 욕망과 극단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들에서 우리 안에 숨은 ‘극심한 자기혐오’를 집어낸다.

    일곱째, 쾌락. 한국 사회를 점령한 병적인 성문화, 쾌락에 대한 지나친 집착, 끊이지 않는 정치인들의 성추문…, 이것들은 어떻게 불안과 연관되는 걸까? 심리학자는 우리 안의 결핍 욕구를 주목한다.

    “결핍욕구 충족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결국 변태적으로 변해가는 것은 쾌감의 질과 양이 고정되어 있는 결핍욕구의 반복적인 충족에 만족할 수 없어서, 그들이 인위적으로 그 쾌감의 양을 증가시키려고 애쓰기 때문이다.”(김태형, 앞의 책)

    지나친 쾌락의 추구, 문란한 성문화는 거기 빠진 사람들을 우울증, 절망감, 불만족으로 이끌고, 마침내 삶을 파괴로 이끈다.

    불안은 장애물이자 가능성

    여덟째, 도피. 불안은 현실에서 도망치게 만든다. 돈 있는 사람들은 해외 이민을 택한다. 그럴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은 온갖 중독에 빠짐으로써 현실에서 도망간다. 알코올 중독, 도박 중독, 마약 중독, 일 중독, 섹스 중독, 종교 중독, 인터넷 게임 중독 이 그것이다. 모든 중독은 ‘대상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심리적 의존’에서 비롯한다. 우리 안의 도피 심리는 현실에 대한 불안과 낮은 행복감 때문이다.

    아홉째, 분노. 지속적인 욕구 좌절이 분노를 낳는다. 본디 분노는 자기를 보호하고 방어하려는 동기에서 비롯한다고 한다. 분노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분노의 누적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욕구좌절 사회다. 이게 화를 돋우는데, 그 화를 풀 방법이나 기회는 막혀 있다. 밖으로 분출되지 못한 분노는 내면에 쌓인다. 분노를 자기 내면에 누적한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불안을 증폭시키는 9가지 심리코드’를 짚고 난 뒤 심리학자는 결론에서 이렇게 적는다.

    “IMF(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 이후 우리 한국인들은 놀랍도록 이기적이고 고독하고 무기력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압의 족쇄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고 무한경쟁은 더 극심해졌다. 삶이 곧 고통이 되어버린 우리 한국인들은 힘센 권력자들에 어린애처럼 의존했고 자기혐오와 쾌락주의, 중독이라는 지하 동굴로 들어감으로써 현실에서 도피했다.”(김태형, 앞의 책)

    그렇다면 불안은 나쁘기만 한 걸까? 그렇지 않다. 정신분석학자 메다드 보스는 “불안은 자기실현의 원동력이다”라고 말하고, 심리학자 보르빈 반델로브는 불안이 장애물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기회고 도전이라고 말한다. 그는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은 사람을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을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을 인용한다. 그는 때때로 불안이 생존을 보장한다는 예로 다음과 같은 실험을 소개한다. 캐나다에서 물고기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다. 실험자들은 수족관에 구피(송사릿과의 관상용 열대어)들과 그 천적인 농어를 함께 넣고 60시간 동안을 지켜본다. 결과는 어땠을까? 농어를 결사적으로 피해 도망 다닌 물고기들의 생존율은 40%였다. 가끔씩 농어에게 다가간 물고기들, 약간의 불안과 두려움을 지닌 물고기들은 15%만 살아남았다. 그러나 아무 불안이나 두려움 없이 농어 가까이에 있었던 물고기들 중에 살아남은 것은 한 마리도 없었다. 이 실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불안이 때로는 생존에 유용한 기능을 한다는 사실이다.

    “불안이 생존을 보장해준다는 것은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불안을 느껴야 한다.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사람, 문을 잘 잠그는 사람, 낙제에 대한 불안 때문에 시험 준비를 철저히 하는 사람에게는 이점이 있는 것이다.”(보르빈 반델로브, ‘불안, 그 두 얼굴의 심리학’)

    ‘불안의 시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장석주

    1955년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입선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 출강

    저서: ‘느림과 비움의 미학’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몽해항로’ 등


    불안은 미래를 준비하게 하고, 불확실성의 조건들을 확실성의 조건으로 바꾸도록 우리를 이끈다. 아울러 불안이 성공을 위한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증거는 많다. 괴테, 브레히트, 사뮈엘 베케트, 카프카와 같은 유명 작가들도 불안장애를 앓았다고 한다. 소설가 존 스타인벡은 불안과 공포증 때문에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고, ‘절규’라는 걸작을 남긴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와 정신분석을 하나의 학문으로 창시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불안장애를 앓았다. 이들에게 불안은 장애가 아니라 탁월한 예술창작이나 위대한 학문을 낳은 원동력이 되었다. “불안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일부다.”(보르빈 반델로브, 앞의 책)

    이미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어버린 불안은 누구도 피해 갈 수가 없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현실적 근거가 있는 불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김태형 | ‘불안증폭사회’ | 위즈덤하우스, 2010

    ● 보르빈 반델로브 | ‘불안, 그 두 얼굴의 심리학’ | 한경희 옮김, 2008

    ● 지그문트 바우만 | ‘유동하는 공포’ | 함규진 옮김, 산책자, 2009

    ● 알랭 드 보통 | ‘불안’ | 정영목 옮김, 이레,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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