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항 북부해수욕장에서 만난 한 관광객은 “호미곶 영일만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여름 겨울이면 꼭 포항에 온다”며 이같이 말했다.
‘갈매기 나래 위에/시를 적어 띄우는/젊은 날 뛰는 가슴 안고/수평선까지 달려 나가는 돛을 높이 올리자/거친 바다를 달려라/영일만~친구야.’(최백호,‘영일만 친구’)
새마을운동 정신
박승호(54) 경북 포항시장에게 ‘영일만’은 각별한 뜻이 있다. 포항제철소로 상징되는 ‘영일만 신화(神話)’를 이어 꿈꾸는 ‘영일만 르네상스’ 때문이다. 박 시장은 이 노래를 좋아하고 잘 부른다. 포항시에 전화를 걸면 이 노래가 흘러나올 정도로 영일만은 곧 포항의 현재이며 미래다. 포항(浦項)은 ‘큰 바닷가’ 정도의 뜻이지만, 영일(迎日)은 더 깊은 뜻을 품고 있다. 가수 최백호씨는 지난해 명예포항시민이 됐다.
박 시장은 최근 9일 동안 아프리카의 섬나라 마다가스카르를 비롯해 베트남과 필리핀을 방문해 ‘포항표’ 새마을운동을 선보였다.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마다가스카르에 메디컬센터도 지어줬다. ‘새마을운동’과 ‘포항제철소’ ‘영일만 신화’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는 “이들 나라가 우리보다 경제력이 약하지만 뭘 도와줬다기보다는 포항이 오히려 스스로 힘을 키우는, 새마을정신 중에 ‘자조(自助)’를 더욱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박 시장이 꿈꾸는 영일만 르네상스는 새마을운동의 연장선이다. 제2, 제3의 영일만 르네상스로 이어지는 에너지도 모두 새마을운동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박 시장은 “새마을운동은 곧 영일만 정신”이라고 했다.
1971년 9월 박정희 대통령은 국무위원과 전국 시도지사, 시장 군수와 함께 경북 포항시(당시 영일군) 북구 기계면 문성마을에 들러 “문성동 같은 새마을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항시가 이 마을을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라고 확신하는 이유다. 당시 전국적인 가뭄으로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한 상황에서도 이 마을 주민들은 지하수 개발 등으로 이를 극복하고 마을 모습을 크게 바꾸었다. 마을 주민들은 1972년 4월 마을 입구에 박 대통령 시찰 기념비를 세웠다. 포항시가 2009년 이곳에 새마을운동 기념관을 짓고 동남아 등 국내외 새마을지도자 교육을 하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영일만 신화’는 1970년대 전국 3만3000여 개 마을 가운데 문성리가 가장 모범적이라는 평가에서 싹을 틔웠는지 모른다.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는 상황에서 이장을 중심으로 “서로 도우면서 힘을 모아 잘사는 마을로 가꾸자”며 마음을 모은 것은 포항제철소 탄생 정신과 다를 바 없다. 박 시장이 “문성리의 새마을운동은 마을 단위 일이었고 포항제철소는 국가적으로 중대한 문제였지만 ‘우향우 정신’이 없었다면 둘 다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향우 정신은 1968년 포항제철소 건립을 시작할 때 박태준 현 포스코 명예회장이 “해내지 못하면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자”고 한 데서 유래한다. 제철소 오른쪽이 영일만이다.
‘산업의 쌀인 제철소가 필요하다’는 당위성 외엔 가진 것이라곤 거의 없던 상황에서 제철소를 설립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1973년 국내 첫 용광로에서 흘러나오는 쇳물을 볼 때까지 포항시민들은 “정말 제철소가 생기긴 하느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 시장은 “지금은 나라를 먹여 살리는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한 포스코를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아무것도 없던 어촌마을이 이렇게 된 과정을 생각하면 하루에도 몇 번씩 뭉클해진다”며 “외국에 가서 ‘포스코가 있는 도시’라고 하면 바로 통하는 걸 보면 기분이 좋고 더 큰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