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 신유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량수밍.
서구문명에 대한 불안감은 주로 서구인들 사이에 퍼져 있지만 이는 비(非)서구인에게도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서구를 모델로 사회변화를 한창 추구하던 민족과 국가에 서구사회와 그 문명의 위기가 결코 남의 일만은 아니었다. 성격은 다르지만 자신의 문명에 대한 실의감과 공허감은 19세 후반~20세기 초 비서구인의 일반적인 정서였다. 19세기 문명담론은 비서구 지역 문명의 ‘낙후성’에 대한 승인을 요구했고, 이는 당시 서구와의 각종 불평등 조약만큼 불합리했지만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서구의 기술을 중심으로 한 물질문명과 생활방식, 제도 등 서구문명을 빠르게 수용했지만 정신적 측면에서는 ‘가치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을 야기했다.
전족(纏足)과 정신질환
20세기 초 중국에서 중국인의 육체적, 정신적 문제를 잘 표현해주는 단어는 ‘전족(纏足)’과 ‘정신질환’이었다. 전자가 기존 중국문명의 병태성에 대한 기호였다면, 후자는 그러한 병태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투하는 중국인의 심리적 질환이었다. 이는 서구문명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정신과 물질의 시간차에 의해 발생하는, 일종의 근대화 이원성의 결과였다. 이러한 문제가 중국사회의 주요 의제로 제기된 것은 1910년대다. 특히 1911년 신해혁명으로 동양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수립된 후 중국사회의 과제는 이러한 제도에 걸맞은 정신문화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앞서 말한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서구 사회 내부로부터 제기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서구 지식계의 일부에서는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에 동양문화, 특히 중국 전통문화의 장점을 입히기도 했다. 이는 중국과 일본 지식계의 주목을 받았다.

인도는 풍족한 자연환경으로 자연을 정복해 물질적 욕구를 채워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형이상학이 흥했다고 량수밍은 분석한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러시아혁명과 같은 세계적인 변화와 중국 내의 공화체제의 위기가 도래하면서 중국 내에서 사상논전이 전개됐다. 동서문명의 문제도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였다. 여기에는 ‘동방잡지’와 ‘신청년’ 등 신문화파 진영의 잡지를 비롯해 여러 언론매체가 참여했다. 또 중국 내 지식인과 서구 유학파, 서구학자 등이 직간접적으로 동서문화 담론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러한 담론을 간단한 당파적 논쟁에서 좀 더 체계적인 학술 담론으로 끌어올린 사람이 바로 ‘최후의 유자(the Last Con-fucian)’이자 ‘현대 신유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량수밍(梁漱溟·1893~1988)이다.
량수밍은 1893년 베이징(北京)의 쯔진청(紫禁城) 부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량지(梁濟·1858~1918)는 몽골족 출신으로 내각중서(內閣中書) 등의 직위에 올랐지만 개혁파 못지않게 서학과 서구제도의 도입을 주창했다. 즉 중국과 서구문명의 충돌에서 중국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구에 대한 학습이 급선무라고 보았다. 그러한 부친 영향을 받아 량수밍도 일찍이 소학(초등학교)부터 서학을 접하고, 중학시절에는 반청(反淸) 혁명조직인 동맹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그 기관지인 ‘민리바오(民立報)’의 편집 기자를 맡기도 했다. 량지와 수밍 부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서학을 중시하고 개혁활동에 적극 참여하면서도 사상적으로 중국의 덕성을 강조하거나 아니면 인생의 가치문제에 그 누구보다도 천착했다는 점이다. 앞서 말한 동아시아 근대화의 이원성에 따른 긴장이 이들 부자의 사유 속에 그대로 반영돼 있었던 것이다. 이 이원성의 긴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1912년 량수밍의 두 차례 자살시도와 1918년 량지의 자살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