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령
첫째,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와 싸운 일이 이른바 페르시아 전쟁 중이던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있기는 했다. 기원전 480년경의 일이다. 스파르타 300명, 테게아 등 1000명, 아르카디아 1000명, 보이오티아 등 1500여 명에, 포키스 군대 1000명이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군의 진격을 저지했지만, 페르시아의 정예부대에 레오니다스 왕의 군대가 전멸하면서 그리스 해군이 살라미스섬으로 후퇴하고, 크세르크세스 왕은 아테네로 입성한다(톰 홀랜드 지음, 이순호 옮김, ‘페르시아 전쟁’, 책과 함께, 2006).
스파르타인 300명은 레오니다스 왕의 친위병이었다. 그리스 동맹군 등이 소수의 병력으로 페르시아의 진격을 저지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전투에 참가한 병사를 300명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같은 300명의 모티프가 다른 데도 있었다. 이것이 오늘의 주제 중 하나인데, 레오니다스 왕의 연설과는 너무 동떨어진, 차라리 희극이라고나 할 아르고스와의 전투가 그것이다.
둘째, ‘300’에서 묘사하듯이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왕이 그렇게 야만적이거나 흥분 잘하고 신비주의적 사고에 심취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중하고, 그 신중함 때문에 일을 그르칠 정도로 합리적으로 사유하는 인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300’은 할리우드의 오리엔탈리즘을 흔히 하는 표현대로라면 ‘쌩얼’로 보여준 영화임에 틀림없다. 거듭 말하지만, 상상의 허구 때문에 ‘300’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관점의 차이 때문도 아니다. 어쩌면 이순신 장군이 몽고군과 싸웠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영화, 세종대왕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했다고 하는 영화라면 그냥 지나가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300명’의 기원
먼저 ‘300’에 등장하는 300이란 숫자의 연원에 대해서 알아보자. 스파르타인 300명이 전원 전사하면서 전설로 남은 것은 사실이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레오니다스 왕의 유골을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로 옮겨 매장했고 그 묘소에 기념비를 세웠는데, 이 비에 300명의 이름이 새겨졌다고 전해졌다. 그런데 너무도 흡사한 300의 모티프가 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스파르타는 티레아라는 지역을 둘러싸고 아르고스와 분쟁에 돌입했다. 티레아는 본래 아르고스의 일부였는데 스파르타가 이곳을 떼어내서 자기들 땅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아르고스의 서쪽 말레아 곶에 이르기까지의 지역도 본토에 있던 부분은 물론, 키테라 섬을 비롯한 그 밖의 섬들까지 아르고스령이었다(지도 참조). 아르고스 사람들은 빼앗긴 자국령을 되찾기 위해 달려갔다.
회담 끝에 쌍방으로부터 300명씩 병사를 출전시켜 이기는 측이 문제의 지역을 소유하기로 하는 협정을 맺었다. 양군의 본대는 각각 자국으로 철수해 전투하는 곳에는 남아 있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본대가 그곳에 남을 경우 어느 쪽이든 자군의 형세가 불리하면 응원하러 달려나올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양군은 이러한 협정을 맺고 철수했다.
쌍방에서 선발된 병사들이 뒤에 남아 싸웠다. 양쪽은 서로 백중지세로 싸웠는데, 마침내는 각각 300명씩, 600명 중 3명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즉 아르고스 쪽에서는 알케노르와 크로미오스 두 사람이, 스파르타에서는 오트리아데스 단 한 사람이 남았다. 이 세 사람만이 남았을 때 해가 졌다. 아르고스 쪽의 두 사람은 자신들이 이겼다고 생각하고 달려서 아르고스로 되돌아갔지만, 스파르타 측의 오트리아데스는 아르고스군의 전사한 시체에서 무기를 빼앗아 그것을 자군 진영으로 가져왔다.
이튿날 양군은 결과를 보기 위해 도착한 뒤 서로 자기편이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한쪽은 살아남은 자의 수가 많으므로 자기편이 승리했다고 말하고, 다른 쪽은 상대는 도망쳐 돌아갔지만 자기편의 병사는 남아 적의 전사자 무기까지 빼앗았기 때문에 승리라고 주장했다. 듣고 보면 둘 다 일리가 있었다. 마침내 이러한 말다툼 끝에 전투가 벌어져 쌍방 모두 다수의 전사자를 낸 뒤 스파르타군이 승리했다.
이후 아르고스인들은 머리를 길게 기르던 관습을 버리고 머리를 빡빡 깎았다. 그러고는 티레아를 탈환하기까지는 아르고스 남자는 누구도 머리를 기르지 못하며 여자는 황금 장신구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관례를 만들었다. 스파르타는 반대의 관습을 채택해, 이때까지 머리를 기르지 않았던 것을 이후 머리를 기르기로 했다. 또한 300명 중 오직 홀로 살아남은 오트리아데스는 같은 부대의 전우들이 전사했는데 자기 혼자 스파르타로 돌아온 데 부끄러움을 느끼고 티레아에서 자결했다고 한다(나중에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살아남은 판티테스 역시 치욕을 견디다 못해 목매 죽었다).
‘역사’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는 같은 도시국가 아르고스와 스파르타 사이에 전투가 있었음을 전해준 사람은 서유럽에서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투스다(헤로도투스 지음, 박광순 역, ‘역사’, 범우사, 1987).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다룬 ‘역사’라는 책을 썼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역시 헤로도투스의 ‘역사’와 같은 제목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마천과 헤로도투스라는 두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역사학도들인 셈이다.
그의 ‘역사’ 권7이 영화 ‘300’의 근거였다. 우물에 사신을 차 넣는 장면, 300명의 친위대 등은 물론 전편에 걸쳐 모든 사료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현명한 왕비 고르고의 일화도 그렇다. 단 고르고의 어린 시절은 권5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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