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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나는 ‘가족살인’ 피붙이라 더 잔혹하다?

안구 파내고, 아킬레스건 끊고…

늘어나는 ‘가족살인’ 피붙이라 더 잔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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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인사건은 해마다 줄지만 가족 간 살인은 증가세다. 2009년 발생한 살인범죄는 1374건. 이 중 17.2%가 가족살인이었다. 2013년엔 살인범죄가 929건으로 줄었지만, 가족살인 비율은 20.7%로 4년 전보다 높아졌다. 가족 간 유대감이 유독 강한 한국에서 왜 가족살인이 늘어날까.
늘어나는 ‘가족살인’ 피붙이라 더 잔혹하다?
막바지 여름 더위가 한창이던 지난해 8월 말, 잠을 자던 중학교 1학년 정모 군은 새벽녘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깼다. 육중한 체구의 남자가 자신의 몸에 올라타 양손으로 목을 조르고 있었던 것. 합기도 유단자인 정군은 반사적으로 배치기를 해서 상대를 쓰러뜨렸다. 남자의 정체는 정군이 친부(親父)로 알고 함께 살던 ‘아빠’였다(실제로는 정군이 3세 때부터 그의 어머니와 사실혼 관계).

일격을 당한 남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건조한 목소리로 “자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방을 나갔다. 그때만 해도 정군은 불과 몇 초 뒤에 벌어질 끔찍한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다. 이불에서 빠져나와 무릎걸음으로 방문을 닫으려고 손을 뻗은 정군의 눈앞에 식칼을 든 남자가 나타난 것. 좁은 방에서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남자가 휘두른 칼이 정군의 몸 곳곳에 크고 깊은 상처를 입혔다. 맨손으로 칼날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정군은 죽음의 공포가 닥친 순간 그대로 자리에 쓰러졌다. 남자는 정군의 몸을 이불로 덮어 가린 채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죽은 척 쓰러져 있던 정군은 밖에서 남자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이불 밑으로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끌어당겼다. 신경이 끊어져 못 쓰게 된 오른팔 대신 피투성이 왼손으로 힘겹게 전화 버튼을 누른 정군은 경찰에 “우리 집 현관 비밀번호가 ○○○○번이다. 절대 사이렌을 울리지 말고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와서 작은방에 있는 나를 구해 달라”고 했다. 비록 친자식은 아니지만 11년간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며 믿고 따르던 정군을 잔혹하게 칼로 찌르고 방치한 남자는 출동한 경찰에게 안방에서 체포됐고 살인미수죄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한순간을 못 참고

정군의 어머니 김모 씨는 “홀로 살던 친정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져 병간호 때문에 두 사람을 남겨두고 잠시 집을 떠나 있던 사이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일정한 직업 없이 집에서 지내던 남자를 참다 못한 김씨가 “집을 나가라”며 면박을 주자 김씨의 피붙이인 정군에게 느닷없이 화풀이를 한 것으로 보인다.



“아이가 두 차례 대수술을 받았지만 지금도 오른팔과 양손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아직 정신과 치료도 받고 있다. 그나마 전학한 뒤로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어 대견하다. 두 번 다시 떠올리기 싫은 끔찍하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린 나이에 용기를 내서 침착하고 의연하게 대처해 스스로 목숨을 구한 아들이 자신감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족이 소중한 것은 세상살이가 아무리 험하고 고달파도 언제나 곁에서 든든하게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치열한 삶의 전쟁터에서 안식처이자 피난처가 되는 것도 가족이다. 그런데도 이런 믿음과 기대를 무참히 깨뜨리는 ‘가족 간 살인’이 끊이지 않는다.

10월 2일 강원도 횡성에서 30대 초반의 박모 씨가 아버지를 둔기로 때려 살해한 뒤 집에 불을 지른 사건이 발생했다. 술에 취해 운전을 하려던 그를 아버지가 꾸짖으며 말리자 격분해서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 특별한 직업이 없는 박씨는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와 수개월째 갈등을 겪어온 것으로 드러났다.

같은 날, 남편과 불화를 겪던 40대 초반의 김모 씨가 결혼 13년 만에 얻은 생후 53일 된 친딸을 살해해 구속됐다. 경찰 조사 결과 김씨는 남편과 육아 문제로 다투다 남편이 “이혼하고 딸을 데려가서 못 키우게 되면 보육원에 보내겠다”고 하자 아기를 물에 빠뜨려 숨지게 했다. 9월에는 제주에서 50대 초반의 가장 고모 씨가 재혼한 아내, 아내와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남매를 흉기와 둔기로 무참히 살해한 뒤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살인범죄는 점차 줄고 있지만 가족살인 비율은 높아지고 있다. 경찰 통계에 따르면, 2009년 발생한 살인범죄는 1374건으로 피의자 1515명 중 17.2%가 가족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4년 후인 2013년엔 살인범죄가 929건으로 줄었지만, 이 가운데 가족살인은 20.7%를 차지했다.

김밥 때문에 親父 살해

가족 간 살인범죄의 유형엔 분노에 의한 범죄, 금전을 노린 범죄, 정신질환에 의한 범죄 등이 있다. 분노에 의한 범죄는 평소 분노를 적절하게 해소하지 못하고 쌓아오다 순간적으로 화가 폭발하면서 발생한다. 여러 가족이 모이는 명절 연휴에 폭행이나 살인 같은 범죄가 많이 일어나는 것도 평소 떨어져 지내며 제때 풀지 못하고 묵혀둔 서운한 감정이나 불만이 한순간에 폭발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범죄행동분석팀 권일용 경감의 설명이다.

“가족 간 살인을 부르는 금전 문제나 부부갈등, 가정불화, 가정폭력, 외도 같은 요인은 과거에도 늘 있어왔다. 예전에는 다들 겪어내고 참아내던 일들을 지금은 못 참기 때문에 분노 범죄로 연결된다. 고교 3학년 남자아이가 김밥 때문에 친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인 사건도 있다. 학교 갔다 와서 먹으려고 감춰둔 김밥을 아버지가 여러 번 찾아내 먹어버리자 화가 치솟은 것이다. 분노를 촉발한 건 김밥이지만, 저변에는 어릴 적 가정폭력과 부모의 이혼 등으로 인한 고립감, 배제감 같은 부정적 감정이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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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경 객원기자 | siren5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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