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건복지가족부는 지난해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의뢰해 친족 성폭력 실태와 피해자 보호지원체계를 조사·분석했다. 지금껏 가려져 있던 가정 내 성폭력 피해 양상이 낱낱이 드러났다. 가해자 대부분은 아버지였고, 피해는 1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반복됐으며, 피해자는 그 과정에서 2차, 3차 피해에 노출됐다.
4촌 이내의 혈족과 2촌 이내의 인척, 즉 아주 가까운 친족 사이에서 발생하는 강간 및 강제추행을 친족 성폭력이라고 한다. 친족 성폭력은 존재 자체가 터부시되는 범죄다. 가부장제 사회의 작동 원리인 ‘혈연 중심의 가족주의’ 신화에 정면으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친족 성폭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내심 이것이 극소수 가정에서 일어나는 정신병리적 현상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대검찰청 범죄분석 통계에 따르면 2005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아동 성폭력 785건 중 18.6%(146건)가 친족 성폭력 사건이었다. 2006년의 경우에도 이 비율은 16.9%에 달한다.
친족 내의 성폭력 사건은 최근 증가 양상을 보이기까지 한다. 이정선 한나라당 의원이 여성부와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2007~09년 가정폭력 발생현황 자료에 따르면 관련 범죄는 2007년 120건에서 2009년 352건으로 3배 가까이 늘었다.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한인영 교수는 “이제는 친족 성폭력을 둘러싼 ‘침묵의 공모’를 깨야 할 때”라고 말한다.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을 모른 척하는 것은 또 다른 친족 성폭력을 만들고, 기존의 피해를 장기화·심각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불편할지라도 이 범죄에 대해 드러내놓고 논의해야 하는 이유다.
‘신동아’는 지난해 당시 보건복지가족부가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의뢰해 우리나라 친족 성폭력 실태와 피해자 보호지원체계를 조사·분석한 자료를 단독 입수했다. 지금껏 성폭력상담소 등 민간단체에서 자체적으로 관련 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은 있지만, 국가 기관의 공식 통계를 이용해 체계적인 분석이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어진 활동가는 현장에서 접한 친족 성폭력 사건의 특징으로 “가해자의 대다수가 아버지이고, 피해가 지속적이며, 사건이 외부로 노출되기 어렵고, 고소율이 낮다”는 점을 들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연구는 이러한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가해자 중 절반은 친아버지
연구진은 2007~08년 당시 보건복지가족부가 실시한 12~14차 청소년대상 성범죄자 신상공개 심사 자료를 분석의 기초로 삼았다. 이 기간 신상공개 대상자 951명 중 친족 성폭력 가해자는 136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절대 다수(79.6%)가 피해자의 아버지였다.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친아버지(44.9%)에 의해 일어나는 성폭력이 의붓아버지(34.7%)에 의한 것보다 10%포인트 이상 많았다. 친척(19.0%), 친오빠(1.4%)에 의한 성폭력이 뒤를 이었다.
연구책임자인 강은영 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친부가 성폭력 가해자가 될 경우 피해자는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신뢰와 친밀감 때문에 양가감정을 갖게 되고, 더욱 큰 고통을 받는다”고 설명한다. 이 때문에 A양처럼 장기간 지속적으로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 가운데 성폭력을 1회만 경험한 경우가 30%에 불과한 것은 이 때문이다. 가장 많은 35%의 피해자가 ‘1년 이상’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당했고, ‘1~5개월’(18.2%), ‘6개월~1년’(9.1%), ‘1개월 이하’(7.7%)가 뒤를 이었다.
친족 성폭력의 경우 가해자가 대외적으로 피해자의 보호자 구실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피해 사실을 신고한 뒤 오히려 피해자에게 비난이 집중되는 사례도 발생한다. A양의 경우 평소 큰아버지 가정과 교류를 가져왔지만, 아버지의 자살 뒤 이 사건의 실질적인 가해자 취급을 받으며 심리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지난 4월 서울고법 형사8부는 친딸을 성폭행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은 B씨의 형을 징역 4년으로 감경했다. B씨는 14세 딸을 두 차례에 걸쳐 성폭행하고 세 차례 강제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법원은 그의 범행을 인정하면서도 “피해자녀를 비롯한 가족이 이씨를 용서해 선처를 탄원하고 있고, 이씨가 장기간 구금돼 있는 것보다 생업에 종사하며 피해 자녀를 비롯한 가족의 생계를 지원하는 것이 상처회복에 오히려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
친족 성폭력 범죄의 가해자들은 어느 정도의 처벌을 받을까. 1심 선고를 분석한 결과 73.5%가 ‘유기징역형’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형기는 ‘4년 초과~5년 이하’가 33.6%로 가장 많았고, ‘1년 초과~2년 이하’(26.9%), ‘2년 초과~3년 이하’(23.1%)의 순이었다. 선고 당시 친족 성폭력 범죄의 법정형이 강간은 5년 이상, 강제추행은 3년 이상인 점을 감안하면 법원이 친족 성폭력의 경우에도 감경 사유를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월15일 제정된 현행 성폭력특별법은 형량을 늘려 친족 간 강간은 7년 이상, 강제추행은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게 했다). 징역형을 받지 않은 가해자들은 ‘집행유예’(12.5%), ‘집행유예와 보호관찰, 수강명령, 사회봉사’(10.3%), 벌금(1.5%) 등을 선고받았다.
김지영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우리나라에서는 가족 보호, 피해자 양육 등을 이유로 가해자의 형기를 줄여주는 경우가 많다”며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한 가해자와 다시 한집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피해자 보호인지에 대해서는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아버지가 가해자인 경우, 경제 자립 능력이 없는 어머니나 다른 가족들이 피해자를 원망하고 탄원서 제출을 강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 때문에 김 연구위원은 “가해자가 구속돼도 남은 식구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주거 공간 마련, 직업 훈련 기회 제공, 생활비 보조 등의 제도적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숨어 있는 남매 간 성폭력
이번 보고서에서 또 한 가지 눈길을 끄는 부분은 친족에게 성폭력을 당한 뒤 보호시설에 입소한 69명에 대한 심층 조사 결과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30.1%)는 가해자를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증거 불충분’(27.6%), ‘가족이나 친척의 만류’(20.7%), ‘가해자에 대한 애정’(17.2%) 때문이었다. 범죄기관의 공식 통계에 나타나지 않은 피해자들이 있는 만큼, 성폭력의 양상도 전자와 다소 다르다. 가해자의 절대 다수가 아버지(70.3%)인 것은 동일하지만, 친부(54.1%)와 의붓아버지(16.2%)의 비율 차이가 40%포인트 가까이 났다. 오빠(13.5%)가 가해자인 경우가 많다는 점도 주목된다.
강 부연구위원은 “친족 성폭력 중에서도 친부와 친오빠에 의한 사건은 드러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라며 “특히 오빠가 가해자인 경우 가족 내에서 더 철저히 은폐하고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주의 깊은 접근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시설에 보호된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은 신상공개대상 사건의 피해자에 비해 피해 지속 기간이 더 길었다. ‘1개월 이상 1년 이하’동안 피해가 이어진 경우가 37.3%로 가장 많았지만, ‘3년 이상 4년 이하’라고 답한 응답자가 19.4%에 달했고, ‘4년 이상’ 지속적으로 피해를 당한 경우도 16.4%였다. 신상공개대상자의 경우 전체 피해자 가운데 65%가 ‘1년 미만’의 기간에 성폭력을 당했다.
C양(11)은 어머니가 자주 집을 비워 어릴 때부터 방임 상태로 자랐다. 집안일을 도맡아 했고, 8세 때 처음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했다. 이후 지속적으로 피해를 당했으며, 그 과정에서 이웃 아저씨, 그 아저씨의 아들, 친할아버지로부터도 성폭행을 당했다. C양은 현재 아동보호시설에서 생활한다.
C양의 사례는 시설 입소자들의 피해 기간이 왜 더 긴지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혹은 최소한의 관심을 기울여줄 수 있는 존재조차 없는 환경에서 양육된 것이다. 본인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최초로 인지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49.3%는 ‘아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어머니’라는 답변은 21.7%에 불과했고, 본인 외엔 아무도 피해 사실을 알지 못해 직접 상담소를 찾거나 경찰에 신고한 경우도 5.8%나 됐다.
무기력한 어머니
가족 구성원이 범죄를 눈치 챘지만 나서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피해 당시 어머니는 90%가 생존해 있었으나 이 중 절반 이상(53.3%)이 직업이 없는 상태였고, 나머지도 일용직(15.6%)과 임시직(15.6%) 등에 근무했다. 자녀를 적극적으로 보호 및 양육할 수 없는 환경인 셈이다. 피해자의 어머니 가운데 상당수는 남편의 폭력,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우울증 등 각종 정신질환을 앓는 상태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딸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았을 때 분노(23.8%)하고 죄책감(22.2%)을 느낀 사람 못지않게 ‘관심 없었다’(15.9%)고 답한 이도 많았다. 이 때문에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은 C양의 사례처럼 제2, 제3의 성폭력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들은 본인이 직접 보호시설에 입소(11.3%)하는 방식으로 이런 고리를 끊으려 했다. 타인의 조력을 받은 경우에도 어머니(7%)보다는 원스톱 지원센터(22.5%)나 성폭력상담소(16.9%)에 도움을 청한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친족 성폭력 피해를 줄이려면 ‘친족 이외의 보호자’에게 강력한 신고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현행 성폭력특별법에는 ‘18세 미만의 사람을 보호하거나 교육 또는 치료하는 시설의 책임자 및 관련종사자’는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이 친족 성폭력 범죄 피해자인 사실을 아는 즉시 수사기관에 신고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조인섭 변호사는 “이 규정만 잘 지켜도 친족 성폭력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다”며 “미국의 경우 아동학대 신고 의무가 있는 기관이나 사람이 24시간 내에 범죄 사실을 신고하지 않으면 벌금 혹은 최고 6개월의 금고형을 받을 수 있다는 처벌 규정을 만들었다. 우리도 신고 의무자에 대한 처벌 규정 마련을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가해자가 아버지인 경우, 빠른 격리와 피해자 보호를 위해 친권을 박탈하는 것도 필요하다. 2007년 7월 신설된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는 청소년 성범죄 사건을 수사하는 검사가 가해자의 친권상실선고를 청구할 수 있게 해두고 있다. 그러나 2009년 9월에야 최초의 친권상실 청구가 있었을 만큼 이 조항이 널리 적용되지 않았던 게 현실이다. 검찰은 내부 지침을 통해 친족 성폭력 가해자의 친권 상실을 적극적으로 청구하기로 했지만 피해자들은 이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도 시설 보호 피해자 가운데 30.8%만 친권상실에 대한 안내를 받았고, 친권상실을 청구한 사례는 10.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자들은 대부분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 10명 가운데 9명꼴로 ‘우울 및 불안’(28.0%), ‘분노’(22.9%), ‘죄책감’(8.6%), ‘보복심’(7.4%), ‘남성혐오’(5.1%) ,‘수면 장애’(5.1%) 등 한 가지 이상의 심리적 문제를 호소했다. 학교에서 ‘학습부진’(35.5%), ‘무단결석’(25.0%) 등의 문제 행동을 보이는 경우도 많았다. 이에 대해 김 연구위원은 “가해자가 자신의 보호 안에 있는 자녀를 성폭행한 순간 이미 그 가정은 해체된 것”이라며 “죄질이 나쁜 범죄자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친권을 제한하거나 박탈하고, 피해자들을 사회가 어떻게 보호하고 양육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는 게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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