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호

‘나라는 망하여도 도시엔 봄이 오고’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입력2011-08-23 09: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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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지 창간 80주년을 기념해 한국 근대의 풍경을 새로운 시선으로 살펴보는 연재를 시작한다. 이 글은 한국 근대의 한복판에 해당하는 1920년대의 역사적 사건과 사실을 소재로 한 논픽션이면서, 신문기자이자 늦깎이 문학도인 한림 (韓林)이라는 허구의 화자(話者·narrator)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독특한 다큐멘터리다. 지금 우리 삶의 근대적 형태는 80~90년 전 서울과 당시 사람들에 많이 기대고 있다. 이 글은 그 뿌리를 더듬는 흥미로운 여행이 될 것이다. 이 글은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주로 활용했으며, 기타 참고자료와 서적은 잡지 기사 형식상 연재 말미에 실을 예정이다. <편집자>
    #제1장

    ‘나라는 망하여도 도시엔 봄이 오고’

    1919년 서울 숭례문 일대 거리.

    겨울의 개울이 얕게 흘렀다. 서린동(瑞麟洞)을 지나던 신문기자 한림(韓林)은 걸음을 멈추었다. 축대 아래 개울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흰 치마저고리와 쪽찐 머리들 뒤로 하천부지는 흙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청계천은 장마철 아니면 물이 온전히 차는 일이 드문 건천(乾川)이다. 범람 아니면 가뭄. 개천은 두 모습 중 하나다. 한 길 높이의 석축 벼랑에는 아이 키만 한 가마니들이 빨랫감을 가득 채우고 줄지어 섰다. 광주리 한두 개씩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빨래터는 엊그제부터 풀린 날씨로 활기를 띠고 있다.

    이상한 겨울이다. 얼마 전 12월 중순에는 봄날 기온 같고 여름 장마 같은 날씨가 일주일이나 이어졌다. 그러다 동지(冬至) 녘에 사나흘 평년 기온을 되찾는 듯하더니 요 며칠 또 기온이 올라갔다.

    이상 난동 현상은 12~13일부터 전국에 수해를 몰고 왔다. 평안북도 선천(宣川)군에서는 3일간 내리 비가 내려 여름 장마를 방불케 했다. 거기다 산과 들에 쌓인 눈, 개천에 한 척(尺) 이상 얼었던 얼음까지 다 녹아내렸다. 수로는 죄다 범람하고 육로는 모조리 잠겼다. 평양과 신의주를 잇는, 이 전통의 교통 요충은 마비됐다. 바로 위 용천(龍川)도 폭우로 말과 자동차 통행이 두절되고 우편물 배달이 중단되었다. 겨울의 물난리에 노인들은 처음 보는 기후라고 수군댔다. 때 아닌 비와 포근한 날씨로 초유의 엉뚱한 겨울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림은 기사에 썼다. 전국의 지국(支局)에서 올라오는 소식을 사회부 선임 기자 한림은 사흘째 종합하고 있었다.

    몇 개월 동안 계속된 가뭄에 눈도 비도 구경 못하고 새벽마다 물 길어 나르던 함경남도 홍원(洪原)군 주민들은 때늦은 겨울 폭우에 어이없어 했다. 3일 동안 퍼붓는 빗속에 도로는 진흙바다가 되어 통행두절이었다. 충청남도 공주(公州) 지방은 온난화로 보리농사에 해를 입지 않을까, 전염병이 돌지는 않을까 우려가 높았다. 동해안에는 예년보다 명태가 많이 올라와 상인들은 가격 폭락을 걱정했다. 남해안에는 따뜻해진 바닷물로 대구가 종적을 감췄다. 농작물이 전멸한 데 이어 어장까지 망쳤다고 인심이 흉흉했다.



    봄부터 비가 오지 않아 혹독한 가뭄 피해를 본 경상남도 밀양(密陽)에서는 올 시기에는 안 오더니 오지 않아야 할 시기에는 온다고 원망이 쏟아졌다. 경상북도 성주(星州)에서는 닷새 동안 그치지 않는 비로 연못이 넘치고 가옥이 잠겼다. 김천(金泉)에서는 흙비가 내렸다. 3일 연속 그야말로 한시도 쉬지 않고 뿌린 빗줄기에 보리 이삭은 마구 패었다. 수십 년 이래 처음 보는 겨울 장마였다. 올 벼농사를 가뭄으로 망쳐버렸는데 보리까지 전멸 지경이니 내년 보릿고개 넘기는 더욱 힘들게 됐다. 주요 항구마다 화물은 쌓여 있고 하역 못한 배들로 만원이었다.

    이상 기후·음산한 비

    오래 내리는 궂은비에 전국은 음산하게 젖어들었다. 마치 갑오(甲午)년 기후 같다는 둥 온갖 음산한 풍설이 돌아다녔다. 갑오년이라면 1894년을 말한다. 동학(東學)교도와 농민들이 관군(官軍)과 청군(淸軍) 일군(日軍)과 부딪치며 내전(內戰)을 벌였던 해,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땅과 바다에서 대전(大戰)을 벌인 해다. 35년 전이다. 그로부터 시작된 15년간의 아수라 세월을 거치고서 조선은 일본에 병합되었다. 그리고 다시 20년이 더 지났다. 갑오년 같은 아수라장이 더 남아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올해 봄과 여름은 혹독한 가뭄이었다. 가뭄 끝에 단비는 끝내 오지 않았다. 한바탕 홍수가 짧게 지나갔을 뿐이다. 그렇게 한 해 내내 말라 시든 산천에 겨울의 폭우가 세밑을 쓸고 간다.

    지방 각지에서 올라오는 상황들을 보면서 한림은 ‘가뭄 끝의 쓴 비’라는 제호를 떠올렸다. 하지만 주제넘게 나서지 말자고 생각했다. 자네 소설에나 쓰지. 부장(部長)은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날 기사의 제목은, ‘처음 보는 이상 기후-음산한 비(陰雨)’로 나왔다. 두 주 전의 일이다.

    조선왕조에서라면 이쯤 되면 기청제(祈晴祭)를 지냈을 일이다. 1418년 8월7일의 태종실록은 전한다.

    지진(地震)이 나고 큰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쳤다. 도성 밖은 물이 넘쳐서 말이 빠져 죽고 곡식이 크게 손상되었다. 기청제를 행하였다.

    왕이 직접 제단에 나서는 기청제를 지내는 대표적인 곳은 도성 바깥의 경우 남단(南壇)이었다. 남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린 낮은 구릉의 끝자락에 위치한 남단은 이제 조선주둔군사령부의 영내로 편입돼 자취를 찾기 힘들게 되었다.

    경성(京城)은 비 피해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상한 기후이긴 했다. 올해 12월은 비 온 날이 안 온 날보다 많았다. 사진기자는 어디서 개나리 움트는 사진을 찍어왔다. 음침한 장안에 개나리의 때 아닌 봄빛. 사진은 그러한 설명을 달고 신문의 사회면을 채웠다. 겨울비와 이상기온은 하순 들어서야 겨우 주춤해졌다.

    최고 인기가요 ‘낙화유수’

    한림은 천변(川邊)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개천의 수량은 겨울치고는 많은 편이다. 시린 손길들이 서둘러 빨래를 헹구어낸다. 얼음 안 언 것만도 다행이다. 한쪽에서는 장작불을 피워 끓는 물에 빨래를 삶아낸다. 동짓달 맨발 벗고 물 길을 때 짚신 삼아주던 시아버지 생각난다더니, 속담이 아니어도 동짓달은 겨울이다. 온종일 영상 기온을 유지하는 이런 날씨가 아마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동지를 지나면서 낮은 조금씩 길어지고 있으나 매서운 추위는 이제부터다. 음기(陰氣)가 극성하다는 동지와 가장 춥다는 소한(小寒) 사이, 오늘은 동짓달 그믐날이다.

    십일월 동지에 만물이 미생(微生)하니 일양(一陽)이 초동(初動)이라. 겨우살이 준비에 바빠진 어머니는 이맘때 밤이면 반짇고리 뒤적이며 사친가(思親歌) 한 대목을 부르곤 했다. 해 짧아 덧없고 밤 길어 지루하다. 농한기의 아버지는 그 곁에서 새끼 꼬며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가락을 흥얼대었다. 추위와 어두움은 깊고 길지만 광명과 생명은 여기서 움튼다는, 동지의 뜻을 담은 음률들이다. 시절에 곁들여 자연사와 인간사를 노래하는 이들 가사(歌詞)는 조선(朝鮮) 오백년간 시조(時調)와 함께 보통 교양인의 생활 풍류였다.

    요즈음 가사나 시조를 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좀 교양 있다는 양반들도 다들 가요(歌謠)를 즐겨 한다. 신분으로서 양반(兩班)은 이미 조선조와 함께 소멸했다. 나라도 임금도, 양반도 상민도, 주인도 노비도 사라진 산하에서 다들 이 양반아 저 양반아, 서로를 불러댄다. 군밤타령이나 한오백년 같은 민요는 이제 저잣거리 서민들도 하품하고 외면한다. 지체가 높건 낮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새로 나타난 신식 노래에 한껏 빠져들고 있다. 올해 최고의 인기 가요는 단연 낙화유수(落花流水)였다.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졌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밤을 홀로 새워요

    가사는 세련되고 가락은 신선하며 창법은 우아하다. 신여성의 모던한 음색을 타고 흐르는 3절의 낙화유수는 저무는 1920년대의 끝자락, 조선인의 가슴에 아련한 물결을 일으키며 흘렀다. 신예 이정숙(李貞淑)은 중앙보육학교(中央保育學校)에서 음악을 공부한 인텔리 여성이다. 올해 일본에서 귀국해 중앙보육학교 교수로 부임한 홍난파(洪蘭坡)를 사사(師事)했다. 중앙보육학교는 훗날 중앙대학교의 전신(前身)이 된다.

    낙화유수라는 제목의 활동영화가 단성사(團成社)에서 상영된 것이 2년 전. 이화학당을 거쳐 일본(日本) 유학을 다녀온 복혜숙(卜惠淑)이 유부남 화가와 비련에 빠져드는 기생 역을 맡았다. 무성영화 낙화유수는 흥행에 성공했다. 낙화유수가 상영 중이던 1927년 가을, 열 편 가까운 영화가 상영 중이거나 개봉을 앞두고 있었다. 활동 중인 영화제작사도 열 개에 달했다. 바야흐로 영화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그때 이런 기사가 있었다.

    조선영화제작계는 제작소의 수효로 보아 끔찍이 번창해졌다. 영화가 나타나는 수효로 보아도 10월과 11월이 영화 시즌이라 그런지, 번창의 조짐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정도로 보아서는 지나치게 번창하여가는 모양이다. 두 달 동안 금강키네마의 ‘낙화유수’, 계림영화협회의 ‘먼동이 틀 때’가 개봉되었다. 11월에 들어서는 조선키네마의 ‘뿔 빠진 황소’가 막 조선극장에서 개봉돼 상영 중이며, 곧 나운규프로덕션의 ‘잘 있거라’가 단성사에서 개봉될 모양이다. 뒤이어 고려영화제작소가 제작 중인 ‘혈마(血魔)’가 개봉 예정이고 그 다음에 조선영화제작소의 ‘운명’이 개봉될 모양이라 한다. 대구(大邱)에서 만경관(萬鏡館)을 중심으로 프로덕션이 하나 일어나서 영화를 제작 중이라 하며 평양(平壤)에서 평양키네마라는 것을 세워 듀마 원작의 춘희(椿姬)를 제작 중이라 한다. 개성(開城)에서 청년들이 모여가지고 영화제작을 하기 시작하여 거의 촬영을 끝마치게 되었다 한다. 그 외에도 영화제작에 뜻을 두는 사람들이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영화 낙화유수는 단성사와 조선극장(朝鮮劇場)의 주임 변사(辯士) 김영환이 대본을 쓰고 감독 이구영(李龜永)의 여동생 이정숙이 주제가를 불렀다. 영화 낙화유수의 인기를 타고 해설집 소리판이 올해 출시되었다. 거기에 낙화유수의 주제곡이 ‘강남달’이라는 곡명으로 실렸다. 콜럼비아레코드사가 제작한 이 음반은 영화 못지않은 인기를 끌었다. 이 노래는 음반으로 출시된 최초의 창작 가요였다. 그때까지 가요는 민요를 변형하거나 일본 엔카(戀歌)를 번안한 노래 일색이었다. 명실상부한 국산 가요의 시대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3년 전에 발표된 윤심덕(尹心悳)의 ‘사(死)의 찬미(讚美)’는 요시프 이바노비치가 작곡한 루마니아의 왈츠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인 일종의 번안곡이었다. 그래도 ‘사의 찬미’는 최초의 가요 취입, 그것도 성악가가 부르는 예술가요 취입이라고 해서 장안이 떠들썩했다.유부남 애인과 현해탄(玄海灘)에 몸을 던진 그녀가 쓴 노랫말은 유언처럼 남았고 오사카(大坂) 닛도오(日東) 레코드에서 취입한 음반은 10만장이 팔려나갔다. 그해 1926년의 경성(京城) 인구가 30만명 선이었다. 일본인과 기타 외국인을 뺀 경성 거주 조선인은 약 20만명이었다.

    빅터레코드사가 명창 이동백(李東伯)의 판소리를 취입해 처음으로 소리판을 발매한 지도 20년이 넘었다. 이제 소리와 창가, 명창과 가수는 소수의 전유물이 될 수 없었다. 소리판 혹은 레코드, 유성기 혹은 축음기의 보급이 늘어가면서 사람들은 신분 고하에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음악을 공유하고 향유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요의 인기는 눈에 띄게 높아갔다. 기생집에서 소리판을 트는 것은 기본이 되었다. 기생이 굳이 노래를 불러주지 않아도 더 멋진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축음기와 음반을 갖춘 다방과 카페도 따라서 늘어갔다.

    가요의 확산에 불을 지핀 것은 라디오였다. 2년 전 1927년에 호출부호 JODK 선명하게 새긴 경성방송국이 정동(貞洞) 언덕에 설립되고 라디오 방송이 개시되었다. 레코드와 축음기가 신기하게 보인 것도 잠시, 이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전파를 타고 노래가 흘러나온다. 명창 가객을 대면하지 않고도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축음기 세상이 열렸다 했더니, 축음기 없이도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세상이 잇달아 도래했다. 매일같이 새로운 무엇이 나타나고 있다. 전차와 기차 그리고 자전거와 자동차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4반세기 전의 일이다. 그 모든 것은 서양에서 일본을 거쳐 들어오고 있다. 음반업체의 후원을 받는 기생들이 방송에 출연해 노래를 부르면서 상품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대형 상점들은 저마다 고급 라디오를 입구에 틀어놓고 손님을 끌고 있다. 목욕탕과 식당, 그리고 술집도 조만간 그 뒤를 이을 품새를 보이고 있다. 경부선 열차에도 라디오가 설치되었다. 청취료 2원은 너무 비싸다고 말들이 많아 1원으로 내렸다.

    경성에 자전거 1만대

    동짓날 밤바람에 설취한 술도 다 깨어버렸다. 어젯 밤 청진동(淸進洞) 술집을 나서면서 한림은 염상섭(廉想涉)에게서 들었던 구절을 떠올렸다. 세 살 위의 염상섭은 한때 한림의 신문사 동료였다. 다른 신문사에 근무하는 지금도 자주 어울린다. 그의 조언에 따라 한림은 퇴근 후나 출근 전 틈틈이 소설을 써보고 있다. 종로통의 전차(電車) 길을 건널 때는 정말이지 방금까지 마신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날씨 탓만은 아닐 것이다. 올해 들면서부터 생긴 현상이다. 이번 달은 직원들의 술자리가 많았다. 연말이라고 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이상한 해다.

    술자리가 흥이 나지 않으니 숙취가 생길 일은 없다. 개울 건너편에 시선이 머문다. 난간 없는 축대 위에 두 돌은 되었을까 싶은 아기가 코를 흘리고 앉아 있다. 손톱길이만하게 솟아오른 머리카락은 밤톨만큼씩 두어 군데가 뭉텅 빠져나갔다. 제 어미가 있는 듯 개천 쪽을 바라보며 혼자 노는 아이 뒤로 자전거가 지나간다. 바람결에 흙먼지가 일어난다. 경성에는 벌써 자전거가 1만대 가까이로 늘었다. 댕기머리를 허리까지 내린 예닐곱 살 소녀가 빨래 광주리를 이고 한손으론 치맛단을 걷어 올린 채 돌계단을 디뎌 흙길로 올라선다. 축대는 한림처럼 구두에 양복 차림이 훌쩍 뛰어내려도 큰 무리 없이 착지할 듯싶은 높이다. 정방형과 장방형의 돌을 쌓아 올린 축대는 개천부지와 천변 길을 나누고 있다. 축대는 한양(漢陽)을 둘러싸고 사대문과 사대 산을 잇고 있는 초기 도성의 성곽 벽과 닮은 느낌으로 축조되어 있다. 1763년 영조(英祖) 시절에 쌓은 석축(石築)의 원형이 많이 간직되어 있다.

    이곳 서린동은 인왕산(仁王山)에서 흘러내리는 백운동천(白雲洞川)과 북악산 계곡으로부터 발원하는 삼청동천(三淸洞川)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이 천변 길을 밟은 지도 벌써 십년. 1920년 봄 신문사에 기자로 입사해 매일처럼 이 주변을 지나는 동안 한림은 이십대 청년에서 삼십대의 성년이 되었다. 하루를 보내는 기분으로 일주일이 갔고, 한 주를 보내는 느낌으로 달을 보냈다. 그렇게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지나 어느새 1920년대가 저물고 있다. 조금 후면 석간신문이 거리에 깔릴 것이다. 오늘 석간은 소화(昭和) 4년 12월31일자로 날짜가 박혀 있다. 단기(檀紀)도 아니고 서기(西紀)도 아닌 일본 연호(年號)다. 날짜 앞에 무엇이 붙건 조선인들이 보는 조선인의 신문이다. 이곳이 경성(京城)이건 한성(漢城)이건 서울이건 때는 연말이고 오늘 신문은 송년호다. 내리누르는 듯한 흐린 하늘을 보며 신문사로 출근했는데 한두 방울 물기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직도 습기가 남았는가. 세밑 경성에 부슬비가 내린다. 1929년 12월30일이었다.

    도성 압도하는 총독부 건물

    발길을 서둘러 모전교(毛廛橋)를 건넌다. 남쪽 길모퉁이는 토산 과일을 파는 가게, 모전(毛廛)이 있던 곳이다. 개천 너머 광경은 남쪽과 북쪽이 사뭇 다르다. 북쪽 종로통(鍾路通)과 그 너머로 즐비한 기와집, 그리고 대궐, 그 좌우로 펼쳐지는 풍광은 인왕(仁王)에서 북악(北岳) 그리고 응봉(鷹峰)을 거쳐 낙타(駱駝)에 이르는 산세의 품에 고요히 안겨 있다. 3년 전 가을 경복궁(景福宮) 안에 완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는 등 뒤로 궁궐을 막아서고 정면으로 도성 전체를 굽어보는 모양새로 완강히 버티고 서있다. 하지만 대리석과 화강암의 그 거대한 르네상스식 골격도 인왕의 암산(岩山)을 약화시키지 못하고, 육중하고 강렬한 기세로 치솟은 철제 돔과 첨탑도 백악(白岳)의 정수리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3년 전 여름 순종(純宗)이 창덕궁(昌德宮)에서 숨짐으로써 조선왕조는 명실 공히 끝을 맺었다. 10년 공사 끝에 모습을 드러낸 조선총독부청사는 그 모양과 체구에서 조선의 도성(都城)을 압도했다. 조선인은 경외감과 모멸감을 동시에 받는 듯하였다. 하지만 전통의 건물이 유폐되고 쓸려나간 자리에 어떤 인공 구조물이 들어서건 산하(山河)는 여전히 제자리에 그대로 있다. 한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두보(杜甫)의 시 춘망(春望)의 한 소절을 떠올린다.

    나라는 망하여도 산하는 그대로이고

    성 안에 봄이 오니 초목이 무성하다

    ‘나라는 망하여도 도시엔 봄이 오고’

    1930년 전후 조선총독부 건물.

    3년 전 조선총독부 낙성식이 열리기 몇 달 전 이상화(李相和)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로 시작하는 시를 발표했다. 순종의 국장(國葬)을 앞둔 1926년 6월이었다. 그의 시는,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로 끝맺고 있다. 한림은 그 시에 새겨진 울분과 저항감을 잘 이해한다. 그런데 어느 쪽이냐 굳이 말하라면 두보의 심정에 더 끌린다. 미묘한 차이이긴 하지만, 감정을 보다 억누르는 그 비장한 정조에 더 공감이 가는 편이다. 사대주의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중화(中華)에 대한 숭모(崇慕)는 그것이 진심이었건 허식이었건 갑오 다음해인 1895년 청일전쟁(淸日戰爭)의 종전과 함께 종언을 고했다. 일본군은 그해 청국군을 격파해 조선에서 몰아내고 조선 진주(進駐)를 기정사실화했다. 그리고 전쟁의 승전물로 넘겨받은 대만(臺灣)을 최초의 해외 식민지로 삼아 대만총독부를 설치했다. 오백년간 중국의 사신을 영접해온 조선의 모화관(慕華館)은 그 뒤 독립관(獨立館)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모화관 입구의 영은문(迎恩門)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이 세워졌다. 왕실의 후원을 받는 서재필(徐載弼)과 이완용(李完用)의 독립협회가 추진한 일이다. 일본군은 조정 궁궐과 독립문을 두루 내려다보는 남산 북사면에 청일전쟁 전승기념탑을 세웠다. 일본은 병합 이래 조선 전래의 많은 건축물을 없애거나 치워버리면서도 독립문은 손대지 않았다. 독립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고, 그 독립을 이뤄준 것은 일본이라는 생각인 것 같았다.

    한림은 같은 또래인 이상화를 현진건(玄鎭健)의 소개로 만난 적이 있다. 현진건과 이상화는 문학동인지 ‘백조(白潮)’의 창간동인이었다. 여러 신문사에 근무한 현진건은 동갑인 한림과 어언 십년지기 동업자 관계가 되었다. 7년 전 창간된 백조의 발행인은 배재고보 교장 아펜젤러 2세였다.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1885년에 설립하고 2년 뒤 학교 옆에 정동제일교회를 세운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의 아들이다.

    배재학당 지하실에는 삼문(三文)출판사라고 하는 감리교 선교부 출판사가 있었다. 국문 한문 영문 활자를 갖춘 이곳에서 미국시민권자인 서재필은 1896년부터 왕실의 후원금을 받아 독립신문을 인쇄했다. 두 해 뒤 서재필의 지도를 받은 이승만(李承晩)이 배재학당 학생회 간부 자격으로 제작한 협성회 회보(協成會 會報)라는 이름의 주간신문도 여기서 인쇄되었다. 태종(太宗)의 장남이고 세종(世宗)의 형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16대손인 이승만은 1894 갑오년에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배재학당에서 주 1회 강의를 맡은 서재필은 서구식의 민주적 회의운영방식을 가르치기 위해 협성회란 이름의 학생자치조직을 만들었다. 협성회는 토요일마다 일반인까지 참석하는 토론회를 정동 감리교회에서 열었다. 이곳은 청년 이승만의 정치적 요람이 되었다. 백조 2호에 동인 박종화(朴鍾和)는 1922년 백조 창간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문단 풍토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때의 문학의 주조가 낭만과 상징, 그리고 테카당에 흐르게 된 것은 정치적으로 압박을 받는 환경 속에 있고, 또한 3·1운동을 치른 뒤에 오는 절망적인 길로 우리의 젊은 문인을 끌고 들어가게 만들었으니 모두 다 한이요 애수요 자포자기요 유미탐구뿐인 것이다.



    백조에 실린 시들은 그 제목만으로도 염세, 허무, 퇴폐의 뜻을 담은 박종화의 데카당(decadence)이란 말을 뒷받침한다. 박종화의 시는 ‘밀실로 돌아가다’ ‘흑방(黑房)의 비곡(秘曲)’ 유의 제목을 달고 있다. 홍사용(洪思容)은 ‘나는 왕이로소이다’, 박영희(朴英熙)는 ‘꿈의 나라로’, 이상화는 ‘나의 침실로’. 김기진(金基鎭)의 시만이 다소 결연한 느낌의 ‘한 갈래의 길’ 그리고 ‘한 갈래의 불빛’ 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상화는 1922년 파리에 유학할 생각으로 동경(東京)에 가서 프랑스문학을 공부하던 중 다음해 동경대지진이 일어나자 경성으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이상화는 1925년 8월에 김기진과 함께 카프의 창립회원이 되었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격인 매일신보(每日申報)의 기자로 있으면서 사회주의적 문학활동을 표방한 팔봉(八峯) 김기진은 이후 다른 신문사들로 옮겨가며 계속 일하고 있다.

    카프에 앞서 그해 4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 창립되었다. 조선공산당 창건의 주역인 박헌영(朴憲永)은 한 달 뒤 근무하던 신문사를 떠났다. 입사한 지 1년 남짓 되었는데 그동안 한림이 회사 안에서 박헌영을 본 것은 가끔이었다. 박헌영이 신문사에 들어온 것은 1924년 4월15일이다. 31년 뒤 미국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그를 사형시키게 되는 김일성(金日成)이 김성주(金成柱)라는 이름으로 압록강 이북 땅에서 만 12살 생일을 맞은 날이다. 박헌영과 김일성은 쥐띠로 띠 동갑이다.

    한림과 동갑인 박헌영은 처음 판매부의 서기 직책으로 입사했기 때문에 편집국의 한림과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12월 지방부 기자로 발령받고서 6개월쯤 더 근무하는 동안에도 박헌영은 신문 일보다는 다른 일에 더 바빠 보였다. 지방의 사회주의 연설회에 내려가 연설하곤 했다. 그는 1921년부터 책임비서로 활동해온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 사업과 그 기관지 발간 일에 분주했다. 신문사의 사장 직무대리를 맡고 있던 변호사 허헌(許憲)이 취직을 주선해준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허헌은 좌우합작의 합법적 독립운동단체로 1927년 출범한 신간회(新幹會)의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훗날 김일성대학교 총장이 된다.

    남촌과 북촌 문화 차이

    청계천 북쪽에 새로 총독부가 들어선 것보다 더 큰 변화가 개천 이남에서 벌어지고 있다. 도성을 양분하는 개천을 경계로 궁궐과 종묘 사직, 주요 관청과 지배층의 주거지가 이북에 들어서고, 이남은 중하층민 생활공간 위주로 편성되어온 오백년의 공간배치는 깨어졌다. 시세(時勢)는 완연히 청계천의 남쪽으로 기울었다. 그것이 짧게는 지난 10년 길게는 20년간의 변화다. 북악 아래 황제의 궁궐은 목멱산(木覓山·남산) 기슭 북사면에서 내려다보아온 총독부와 헌병사령부에 의해 장악되고 해체된 지 오래다. 그 배후에는 남산 남쪽에서부터 한강에 이르기까지 등을 돌리고 앉은 조선주둔군사령부가 있다.

    1910년 경술(庚戌)년의 병합 이래 일본제국의 입김은 남산 기슭으로부터 내려와 본정(本町)과 황금정(黃金町) 거리를 형성하면서 차츰 북상하였다. 남촌이 권세와 재물 모든 면에서 북촌을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망국 20년, 한성은 이름과 함께 풍경도 바뀌었다. 이제는 천남(川南)이 천북(川北)을 능가하는 모습이 되었다. 100곳을 넘어선 주식회사는 주로 황금정과 본정, 남대문통, 그리고 용산(龍山) 일대 한강통(漢江通)에 밀집해 있다. 남촌은 남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산을 넘어 한강변까지 확대되었다.

    한림은 무교정(武橋町)을 따라 남측 천변 길을 걸어 다옥정(茶玉町)을 지난다. 천변 길가로 약방과 병원, 물감집이 줄지어 있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다동(茶洞)이었다. 1914년의 구획획정으로 조선 전래의 동 이름은 절반 이상이 바뀌었다. 그때부터 동(洞)과 정(町)이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어 혼재하고 있다. 장차 1936년이 되면 전국의 모든 동(洞)과 리(里)는 정(町)으로 통일된다. 조선 조정에는 다도(茶道)와 차례(茶禮)를 주관하는 사옹원(司饔院)이 있었는데, 사옹원에 속한 다방(茶房)이 이곳 다동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방골이라 부른다. 그 다방은 이름만 남기고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 신식 다방이 이곳저곳 들어서는 중이다. 다점(茶店) 혹은 끽다점(喫茶店)이라고 부르는 그곳에서 유행을 좀 안다 하는 사람들은 커피를 마신다.

    개항에서 병합까지 35년을 거치는 동안 커피는 이미 조선인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 되었다. 쓴맛 나는 서양 탕약, 잠을 쫓고 기운도 내는 양탕(洋湯)으로 불린 것도 옛말이다. 고종(高宗)은 일찍이 러시아공사관(公使館)에 피해 있던 시절 커피에 입문하여 경운궁(慶運宮)으로 옮긴 뒤에도 낙으로 삼았다 한다. 1902년 정동(貞洞)에 2층 회색 벽돌로 세워진 손탁호텔의 1층 식당 옆 다실에서 고관들과 개화인사들은 일찍이 커피를 맛보았다. 조선총독부 철도호텔이 문을 연 1914년 가을부터 조선의 유명 인사들은 장곡천정(長谷川町)으로 몰려들었다. 철도호텔 혹은 조선호텔 커피숍은 그때나 이후 지금까지 장안 최고의 명소다.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丘壇)을 헐고 독일풍의 이 3층 호텔이 지어졌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던 날 천신(天神)께 이를 고하고 왕국의 명운이 길이 이어지기를 기원하던 곳이다.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의 집터가 있었다 해서 작은공주골 혹은 소공동(小公洞)으로 불려온 조선호텔 주변 마을은 이제 장곡천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러일전쟁 때 조선주둔군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살던 동네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세가와는 러일전쟁 승리의 기세를 몰아 ‘을사조약’ 체결 때 병력을 동원하여 코앞의 경운궁을 포위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혼마치(本町) 일대를 중심으로 1920년대 초부터 일본인들이 세운 다방은 남촌 곳곳으로 확산되었다. 그 유행은 조선인 다방으로 이어졌다. 1927년 영화감독 이경손(李慶孫)이 관훈동(寬勳洞) 입구에 카카듀, 1년 뒤 작년에는 배우 복혜숙이 종로 2정목에 비너스를 개업했다. 요즘 제일 인기 있는 다방은 지난달 종로2정목에 개업한 멕시코다. 그 다방이 개업한 11월3일에 전라남도 광주에서는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그 여파가 지금 경성에 날로 확산 중이다. 이제 커피는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호텔 커피숍과 다방에서만 마시는 것도 아니다. 지금 조선은행(朝鮮銀行) 광장 분수대 앞 본정 1정목에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미쓰코시(三越) 백화점이 완공되는 내년이면 백화점 안에 커피숍이 생길 것이라고 한다. 옥상에 노천카페가 들어선다는 소문도 있다. ‘커피 끓이는 법’이라는 제목의 신문기사가 2년 전에 있었다.

    가을도 다 되었고 겨울이 옵니다. 커피차 애용의 계절입니다. 각 가정에서는 커피차가 맛나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여 주부 되는 분들이 짜증을 내는 예가 많습니다. 커피도 카모, 자바 혹은 하와이 등으로 종류가 많습니다. 이것이 더 맛날까 저것이 더 맛날까 하여 각 종류를 다 사들여서 만들어도 신통하게 되지 않는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취급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커피라도 참맛이 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커피의 장점은 그 풍부하고 윤택한 향기에 있습니다. 한번 넣은 커피에 물을 갈아 넣어가면서 여러 번 우려먹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아주 잘못하는 것입니다. 번번이 커피를 갈아 넣어야 합니다. 번번이 냉수를 새로 끓여서 써야 합니다. 우유를 넣어 먹는 경우에는 반드시 더운 것을 넣어야 합니다. 최근에는 크림을 사용하는 것이 유행입니다. 독특한 맛이 있어서 모두 좋아하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블랙커피라 하여 밀크나 크림을 안 넣고 먹는 것이 유행하게 되어 각 나라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애프터 디너 커피라고 하여 모카커피만을 사용합니다. 커피는 흥분성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간 활동 시에 사용하면 뇌와 심장의 작용을 강하게 하고 혈액의 순환을 양호하게 하는 특효가 있습니다.

    다동이 다옥정으로 변했어도 다방골 사람들의 자부심은 여전하다. 여기서부터 광통교(廣通橋)를 지나 장통교(長通橋)를 넘어 수표교(水標橋)에 이르는 개천 남쪽은 중촌(中村)이라 불려온 지역이다. 북촌처럼 벼슬아치 마을은 아니지만 남촌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중촌에는 전문기술을 보유한 중급 관리나 시전상인 같은 중인(中人)들이 모여 살았다. 알부자도 많다고들 한다. 저기 박태원(朴泰遠)의 집이 보인다. 물감 집을 끼고 앉은 약국과 병원이 있는데, 박태원의 부친은 약국을 경영하고 숙부는 병원을 경영한다. 전형적인 서울 토박이 중인 집안이다. 박태원은 올해 경성제일고보(京城第一高普)를 졸업하고 유학 가서 동경법정대학 예과 1학년이다. 공부가 재미없었는지 단편소설 비슷한 글을 한 편 보내와 신문에 8일간 연재했다. 지난주에 마지막 회가 끝났다. 박태원은 다음해 예과 2학년을 중퇴하고 귀국해 문학에 전념하게 된다. 그는 유학 가기 전에 이광수(李光洙)로부터 소설 지도를 받았다. 박태원의 글이 실린 신문에는 이광수의 장편소설이 새해부터 연재된다는 알림기사가 났다. 삽화는 산수화가 이상범(李象範)이 그린다고 한다. 이상범은 올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상 이름은 창덕궁상이었다.

    다옥정이 끝나가는 길목, 광통교를 앞두고 카페가 보인다. 단골 문인 기자들과 가끔 들르는 집이다. 여급 하나코(花子)가 문을 열고 나온다. 우미관(優美館)에 가는 길인가. 광통교 건너 관철동(貫鐵洞)은 하나코의 낮 나들이 코스다. 그중에서도 우미관은 그녀 생활의 가장 큰 낙이다. 그녀는 4년 동안 이 2층 벽돌집에서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시대’로부터 ‘파우스트’까지 구미의 명작 무성영화를 거의 빼놓지 않고 보았다. 요즘은 소리 나는 활동사진, 발성영화가 나와 그 재미가 끝간 데를 모른다.

    극장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1000명 정도가 앉을 수 있게 놓인 기다란 나무의자, 이른바 호떡집 걸상은 빈자리가 없는 날이 많다. 객석은 바로 옆에 붙은 변소에서 지린내가 풍겨오지만, 변소 바로 앞자리도 비는 적이 별로 없다. 별달리 놀 만한 곳이 없는 조선인에게 영화관람은 최대의 놀이가 되었다. 인사동(仁寺洞)에 최신 3층 벽돌건물로 지은 조선극장(朝鮮劇場)은 변소가 복도 건너에 있어 사정이 훨씬 나았다. 우미관은 수익이 워낙 좋아 올해부터는 수익금 일부를 직원들에게 나눠줄 정도가 되었다. 동양영화회사의 극작가 이서구(李瑞求)는 이달 초 신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한림과 같이 1920년에 기자생활을 시작한 십년지기다. 신문사를 두 번 옮기더니 올해 기자직을 접고 극작가의 길을 가고 있다. 한림처럼 한 곳에 10년을 머무르는 기자는 별로 없다.

    폭발적 인기 누리는 영화관

    ‘나라는 망하여도 도시엔 봄이 오고’

    창작무용극 ‘경성1930’의 한 장면.

    몇 해 전만 하더라도 활동사진 상설관 수효보다 배급업자의 수효가 적었는지라 상설관에서는 배급업자에게 가서 고두백배(叩頭百拜)를 하고 활동사진을 빌어다가 손님에게 구경을 시켰었다. 그러나 조선이 어수룩하다는 소문이 높아지자 그야말로 세계 각국의 유명한 활동사진회사에서는 거의 다 지사나 대리점을 두게 되니 이제는 상설관 수효보다 배급업자의 수효가 초과되어 버렸다.

    경성에 영화관은 10개 가까이 된다. 극장마다 경쟁이 치열하게 붙어 악대와 자동차를 동원한 가두광고가 벌어지곤 한다. 남촌으로 내려가면 본정통의 황금좌(黃金座)나 희락관(喜樂館), 앵정정(櫻井町)의 대정관(大正館) 같은 일본 극장이 많다. 완벽한 실내장식과 위생시설을 자랑하는 대정관은 변소가 아닌 제대로 된 화장실은 물론, 다방과 흡연실을 갖추고 있다. 우미관에는 너도나도 담배를 피워 물기 때문에 중학생들까지도 어둠 속에서 슬쩍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그래도 하나코는 가까운 우미관을 찾는다. 그전에는 남촌에 즐비한 일본인 극장을 다녔었다. 명치정(明治町)의 일본인 바에서 여급으로 일할 때였다. 가장 즐겨 찾은 곳이 가까운 중앙관(中央館)이었다. 단골인 용산 조선군사령부의 장교를 따라 한강통의 경룡관(京龍館)에도 더러 갔었다. 갈 때마다 놀라고 불편한 것은 자리안내인이었다. 에이프런을 두른 퉁명스러운 안내인은 방석을 팔려고 성화를 부린다.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는 화로도 안긴다. 안 빌려도 그만이지만 방석 없이는 의자가 딱딱하다. 딱딱거리는 대접 받기는 더욱 싫다. 먼 훗날 일본인이 조선을 떠난 후 한참 뒤에 중앙관은 중앙극장으로, 경룡관은 성남극장으로 바뀌게 된다.

    어수선하고 지저분할지언정 우미관은 그런 면에서 불편이 덜하다. 조선인 구역으로 카페를 옮기고 조선인 단골손님을 따라와 본 뒤로 익숙해져 별 불편을 못 느낀다. 극장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을 가리는 것은 아니다. 무성영화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변사(辯士)가 남촌 지역에서는 일본인이고 북촌에서는 조선인이다보니 관객들이 갈려져왔다. 이제는 일본말과 조선말을 다 구사하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늘어나고 있어 구분은 점점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언젠가는 ‘남북’이 통일될 것이다. 더구나 무성영화는 유성영화에 급속히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종합예술인 대접을 받으며 장안의 명사로 군림해온 변사는 어느새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다.

    카페, 일상의 해방공간

    ‘나라는 망하여도 도시엔 봄이 오고’

    1920년대 신문에 실린 라지 자전거 광고.

    카페는 이제 축음기, 라디오, 영화와 더불어 생활 풍속의 하나로 추가되었다. 다방에서는 차를 팔지만 술도 판다. 바(Bar)도 그러하다. 카페는 술이 우선이고 차는 뒷전이다. 카페의 양대 요소는 술, 그리고 술을 마시게 만드는 분위기다. 분위기를 조성하는 두 주역은 음악과 여인이다. 축음기를 타고 나오는 서구의 최신 음악, 조선의 전통의상에서 벗어나온 웨이트리스. 카페는 누추한 일상에서 해방의 공간이다.

    카페에 구비된 술의 종류는 풍성하다. 위스키와 칵테일, 그리고 일본주, 조선 청주. 아카다마(赤玉) 포도주도 구색을 맞추고 있다. 조세(租稅) 전체에서 주세(酒稅)가 차지하는 비중은 1909년 1.4%이던 것이 1919년 8.2%로 크게 늘었다. 다시 10년 만인 1929년에는 28.7%가 되었다. 술 제조에 세금을 매기는 주세법이 공포된 1909년에 20만원 선이던 주세 총액은 1926년에 100만원을 넘어섰다. 술은 지세(地稅)를 추월하고 조세 비중 1위로 올라섰다. 요 10년 사이 생겨난 제조업체 중에 양조업체 수가 1위다. 주류 생산액은 전체 공산물 생산액의 15%에 이르렀다. 술은 1920년대의 조선 경제를 순환시키는 혈액과도 같이 보였다.

    면허를 받은 양조장만이 술을 주조하도록 한 주세령이 시행된 1916년에 50만석(石)에 못 미치던 탁주(濁酒) 생산량은 이미 1920년에 100만석을 돌파했다. 소주(燒酒)는 1916년 8만석 규모였다가 1925년에 20만석을 돌파했다. 1926년을 기점으로 탁주의 증가세가 꺾이는 반면 일본술은 양조와 수입 모두 늘어 매년 10%씩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소주도 조선 소주는 탁주와 마찬가지로 차츰 기세가 꺾여드는데 일본 소주는 늘고 있다.

    조선의 음주량은 해마다 증가하는 동시에 일반의 기호성도 점차 향상하여 탁주보다 약주로, 약주보다 일주와 맥주로 소위 문화생활을 하여가는 반면으로 재래 조선품은 점점 쇠퇴하여가는 경향이 있다.

    1929년 1월 말의 기사다. 대단위 소주 제조사인 대선(大鮮)양조주식회사가 올해 대일본주류(大日本酒類)주식회사의 부산(釜山)공장으로 세워졌다. 미쓰이(三井)물산이 위탁 판매한다. 평남 용강에서 5년 전에 문을 연 진천(眞泉)양조회사는 소규모임에도 진로(眞露)라는 상표의 국산 소주를 내세우고 일본 거대자본들 사이에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1919년 3월1일의 만세운동 이래로 조선사회에는 많은 종류의 운동이 있었다. 사회운동 노동운동 예술운동 소년운동 문맹퇴치운동 물산장려운동…. 이제 금주운동이 그 반열에 올라 있다. 미국에서는 10년째 금주법(禁酒法)이 시행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식량을 절약하고 작업능률을 향상한다는 취지였다. 재즈의 시대, 격동의 20년대, 별난 1920년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이 시기는 금주법으로 인하여 무법의 10년이라는 이름이 또 하나 추가되었다. 이 특징적인 십년을 접는 단계에서 미국은 대공황을 맞았다. 두 달 전 뉴욕 주식거래소의 주가는 대폭락했다. 일본과 조선의 주식시장도 그 영향을 받았다. 지구촌 시대다. 주류의 제조 판매 운반 및 수출을 못하게 하는 금주법은 월스트리트의 붕괴와 더불어 사실상 소멸했다. 대공황의 시작과 함께 술은 음지에서 기어 나와 미국인의 일상으로 당당히 복귀했다. 술의 벗은 역시 공포와 불안이다.

    현진건의 소설 제목대로 조선은 술 권하는 사회임이 분명했다. 현진건은 일찍이 1921년에 그렇게 진단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새벽 2시에 만취하여 귀가한다. 누가 이렇게 술을 권했느냐 안타까워하는 부인에게 그는 말한다. 조선사회가 술을 권한다. 1921년 문단에 등단하고 신문사와 잡지사에 기자로 취직해 실업자는 아니었지만 현진건은 많은 술을 마셨다.

    술에 의지해 사는 사람이 많았다.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그 한 부류였다. 마땅히 할 일도 갈 곳도 없는 이 새로운 계층은 부랑자(浮浪者)라 불리는 온갖 종류의 건들거리는 유한계급(有閑階級)들 사이에 고개를 들이밀고 카페를 출입했다. 요즘 소위 지식인은 조선 역사상 처음 나타나는 새로운 계층이다. 사대부도 아니고 선비와 또 다르다. 벼슬은 물론 없고 건사할 농토나 사업이 있는 것도 아니다. 듣고 본 신지식은 그런대로 넘쳐나나 그것을 풀어낼 자리는 없다. 취업이 안 되니 직장이 없고 돈이 없다. 있는 것은 시간이다. 그 넘치는 시간에 공상과 소망과 불만과 분노를 담아 보낸다. 그 결과로 매일 남아나는 것은 절망과 회한이다. 그렇게 비 피해 처마 밑으로 모여드는 제비들처럼 식민지 조선의 인텔리들은 없는 돈에 카페를 피난처로 삼았다. 다방이 낮의 휴게소라면 카페는 밤의 위안소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다방에 우두커니 반나절을 버티고 앉은 자를 벽화(壁畵)라고 부르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지식인에 대한 인상을 말하라면 사람들은 어느새 무기력, 나태, 궁핍, 그리고 진퇴유곡(進退維谷)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나라는 망하여도 도시엔 봄이 오고’

    1920년대 ‘카페’를 묘사한 당시 동아일보 연재소설 삽화.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는 청춘은 해가 갈수록 늘어간다. 그러나 이들을 받아줄 곳은 부족하다. 총독부와 산하기관의 조선인 수는 제한되어 있고 그럴듯한 회사는 일본인 위주로 구성돼 있다. 그 틈서리에 요행히 들어앉아 한 자리 차지하는 조선인은 몇 안 된다. 신문사는 3월이 다가오면 우선 두 가지 기사와 논설을 준비한다. 3·1만세운동 몇 주년이라는 점을 검열을 통과할 수 있게끔 요령껏 알리는 것이 그 하나고, 대학 졸업생들의 취업난에 대한 대책 없는 걱정이 또 하나다. 논설반(論說班)은 올해도 예년과 비슷한 사설을 써냈다.

    이번 봄에는 전문학교 이상의 졸업생이 내외를 통 털어 300여 명에 달하리라 한다. 진실한 일꾼 뛰어난 청년을 긴급히 요구하여야할 오늘의 조선에서는 삼백의 졸업생이 오히려 부족한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사실로 말하면 최근 몇 년간 문제가 되어오는 것은 불과 몇 백 명 되는 전문졸업생을 어떻게 처치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직업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얼마나 큰 모순된 현상이냐. 2000만 명이 활동하는 조선사회에서 몇 백 명의 신진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은 수긍할 수 없는 괴상한 일이다.

    한림은 십년 전 맥주라고 하는 괴상한 액체를 처음 입에 댄 순간, 서양식 보리 탁주구나, 생각했다. 단골 카페에서는 삿포로맥주가 인기다. 삿포로맥주는 식민지 조선에서 기린맥주와 사활을 건 판촉전을 벌이고 있다.

    하나코의 고향은 삿포로에 있다. 하나코가 일을 파하는 시간은 새벽 1시나 2시는 기본이다. 손님이 있으면 3시까지 갈 때도 있다. 그래도 여긴 약과다. 우미관 입구 종로 2정목에서 일할 때는 새벽 4시까지도 손님들이 북적댔다. 본정(本町)과 명치정(明治町)의 일본인 카페들은 1시면 끝내고 손님을 받지 않는다. 밤새워 노는 이른바 ‘오전족(午前族)’들은 본정 쪽에서 이리로 원정을 오기도 한다. 여급 20~30명을 두고 있는 그 카페에는 일본인 여급과 조선인 여급이 고루 있다. 기모노 차림에 일본 이름에 일본말을 쓴다고 다 일본여인은 아니다. 푸르고 붉은 등불 아래 폭발적인 재즈가 소용돌이치는 카페는 종로 일대에만도 여러 곳이 생겨났다. 남촌 일대에는 수십 군데나 된다. 여급은 수백 명인데 빠르게 늘고 있다.

    치우고 청소하고 나면 네다섯 시가 거의 되어야 자리에 눕게 된다. 곧 잠이 들지도 않는다. 흥분되었던 신경과 흩어진 마음자리가 가라앉지 않아 이불 속에서 뒤척대는 때가 많다. 쓸쓸한 잠자리에 외로운 꿈을 깨고 새벽을 맞을 때면 구름처럼 가슴에 떠오른 말 못할 탄식은 남이 곧이듣지 않을 설움이다. 한림의 소개를 받은 기자가 하나코의 얘기를 듣고 쓴 이색 직업여성에 관한 기사에는 하나코의 말이 그렇게 표현되어 나왔다. ‘웨이트레스’혹은 ‘여급’으로 불리는 이 직업을 부러워한다는 여자들도 있다지만 이 같은 고생이 없다. 여기서 먹고 자는 것뿐, 월급은 없고 손님들이 주는 팁을 모아 매월 30~40원이 된다. 하나코 주변 여인들은 대개 빚을 지고 있다. 한물간 여배우들도 더러 있다.

    올해 봄 당국의 집계로는 경성에 등록된 기생(妓生)은 일본인 463명, 조선인 571명이다. 기생집은 일본인 경영이 84곳, 조선인 경영이 54곳이다. 조선인 기생은 한성권번(漢城券番) 소속이 압도적 다수였고, 일본인의 경우 혼마치(本町)와 신마치(新町)에 밀집해 있다.

    창기(娼妓), 즉 매춘부는 일본인 488명, 조선인 422명이다. 이는 공창(公娼)에 등록된 공식인원만을 집계한 것이다. 지난 1년간 조선인 창기를 찾은 유흥객이 대략 조선인 4만7000명, 일본인 9000명 선이고 지불한 금액은 조선인 13만8000원, 일본인 2만5000원가량이었다. 일본인 창기를 찾은 일본인은 13만7000명, 조선인 4000명이었고 지불한 금액은 일본인 127만원, 조선인 2만7000원가량이었다. 창기 1인당 연간 평균수입을 계산하면 조선인 창기가 400원, 일본인 창기가 3000원 선으로 큰 차이가 있다. 창기들은 쌍림동(雙林洞)과 묵정동(墨井洞) 언저리를 일본식 지명으로 고친 신마치(新町)의 유곽(遊廓)에 고용되어 있다. 동쪽은 조선인, 서쪽은 일본인 유곽촌이다. 시설과 운영체계, 요금에서 차이가 크다.

    카페는 기생집으로 분류되지 않고 카페 여급은 기생으로도 창기로도 분류되지 않았다. 조선은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오래전부터 매춘제도를 인정하지 않아왔다. 조선사회의 지도이념은 유교(儒敎)였고 사대부를 위시한 사회지도층은 처신의 엄정함을 생활신조로 정했다. 사회지도층은 남자였고 신분에 따라 처(妻) 외에 첩(妾)을 1~2명 둘 수 있게 제도를 정했다. 그러면서 기생에게도 절개와 지조를 요구했다. 조선은 유교의 본산인 중국보다 유교이념에 더 투철했다. 중국에서 성리학(性理學)은 유교의 숱한 분파 중 하나에 불과했으나 조선에서 성리학은 곧 유교이념 그 자체였다. 조선시대에 기생은 술자리에서 시중드는 것이 본업이었지만 그 명분의 한편에 매춘은 부수적인 행위로서 암묵적으로 용인되었다. 암묵적 현실이 주로 조선의 현실이었다.

    카페 여급은 술을 팔고, 분위기를 팔고, 경우에 따라서는 연애도 팔았다. 연애를 파는 것이 아니라 진짜 연애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춘향전의 이몽룡처럼 카페 이용객의 절반 이상이 학생이었다. 그중에는 대학생이 되기 이전에 혼인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들은 조선시대의 유물인 조혼(早婚)의 끝자락과 근대문명의 선물인 자유연애의 첫머리에 걸쳐 있었다. 그것이 1920년대에 20대를 보내는 청춘들의 운명적 고뇌 중 하나였다. 어떤 학생들은 직장 경력 10년인 한림보다 돈을 더 잘 쓴다. 신문사 광고부에서 접수하는 광고의 상당부분이 약 광고인데, 가장 많은 것이 위장약과 성병약이다. 신마치(新町) 유곽의 창기 277명을 대상으로 검사를 해보았더니 34%가 성병에 걸려 있었는데, 경기도 위생과장이 예방 신약을 개발해 투약한 결과 26%대로 떨어져서 모든 유곽에 이 화류병 예방약을 보급하기로 한 것이 올 2월이었다. 전국에 20곳 전후의 공창 유곽이 성업 중이다. 6월에는 종로경찰서가 공창과 관계없는 관내 기생 309명을 건강검진했는데 7%가 성병 의심자로 분류되었다. 2%는 임신 중이었다.

    경성의 신도심, 남촌

    카페를 지나 광교 앞 네거리 제과점 앞에 섰다. 왼편으로 광통교를 건너 조금 올라가면 종로 2정목(鍾路二町目) 네거리다.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남대문1정목(南大門一町目)의 시작이다. 북촌과 남촌을 경계지어온 도성의 정중앙이다.

    전차가 종각 쪽으로 올라간다. 남대문 방면에서 오는 노선이다. 보신각(普信閣)이 금세라도 주저앉을 듯, 마치 폐가(廢家)의 형상을 하고 기울어 있다. 그 옹색한 단층 기와 목조 옆으로 우람한 3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서 있다. 한일은행(韓一銀行) 빌딩이다.

    종각과 은행 옆으로 광교(廣橋)에 이르기까지 대로변에는 약품회사, 양복점, 포목점, 금은방이 줄지어 있다. 광교 남쪽에서 남대문1정목이 시작된다. 모퉁이의 한성은행(漢城銀行)을 시작으로 광통관(廣通館)을 비롯한 유럽풍의 최신 건물들이 도열해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 다시 네거리. 남대문통(南大門通)과 황금정(黃金町)이 마주치는 지점이다. 황금정1정목 네거리를 건너서 남쪽 코너에 일본생명(日本生命)빌딩이 보인다. 그 뒤로는 작년에 완공된 5층짜리 경성전기주식회사가 본격적인 사무용 빌딩의 몸채를 과시하고 있다. 그 아래 남쪽으로 명치정(明治町)이 열린다. 황금정1정목 십자로(十字路)에 마주 보고 선 일본생명과 식산은행(殖産銀行) 건물은 마치 남촌의 관문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버티고 섰다. 남촌은 그렇게 변했다. 새로운 도시 경성의 새로운 도심으로 탈바꿈했다. 일본적이고 서구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모던 경성의 다운타운으로 변모한 것이다.

    한성 제1의 다리였던 광교는 최근 20년 동안에 일어난 이 모든 변화를 지켜보며 납작 엎드려 있다. 조선 오백년간 종각과 함께 서울의 중심점이자 생활의 중심이었던 광통교는 높게 사방을 에워싸는 양식 건물들 사이에서 점차 낮게 쪼그라들었다. 다리 한 켠으로 깔린 전차선을 따라 전차가 왕복한다. 종각에서 남대문을 연결하는 이 전차노선은 1899년 단선(單線)으로 운행을 시작해 1910년 복선(複線)이 깔렸다. 이 최초의 복선 궤도 구간이 개통된 8월26일은 한일병합조약이 조인된 뒤 공포를 사흘 앞두고 있던 날이었다.

    새로운 사상, 새로운 세대

    왕조는 수명을 다했지만 전차 통행은 활기를 띠었다. 복선화로 상하행선이 분리 운행됨으로써 운행 횟수와 승객은 크게 늘었다. 한성 시대에 개통된 전차는 경성 시대에 대중교통의 근간이 되었다. 가마가 없는 신분이라고 해서 걸어가는 시대가 아니다. 돈이 없어 인력거를 못 탄다고 밸이 꼴릴 것도 없다. 5전짜리 전차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 신문 한 장 값이다. 오백년의 신분제가 깨어진 민중의 시대를 맞아 광통교는 수십 명이 터질 듯이 올라타는 전차, 그것도 가장 통행량이 많은 노선의 전차를 짊어지는 전국 유일의 다리가 되었다. 그래서 철근과 콘크리트로 덧대 다리의 너비를 확장했다.

    한림은 광교를 왼쪽으로 바라보며 길을 건넜다. 광통교의 남쪽 거리는 오랫동안 그림을 사고파는 곳이었다. 이 일대는 또한 개인이 판매를 목적으로 펴낸 책자, 즉 방각본(坊刻本)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중심지이기도 했다. 한성은행 앞을 지나 삼각정(三角町)으로 접어든다. 남산에서 흘러내리는 세 갈래 물길이 비스듬히 합수하는 각도 때문에 서쪽은 넓고 동쪽 하류로 갈수록 좁아지는 삼각형 지형이다. 그 꼭지점 언저리에 푸른색이 도는 기와의 2층 집 한 채가 우뚝 서 있다. 최남선(崔南善)이 운영하는 동명사(東明社)와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가 들어 있는 건물이다.

    동명사는 최남선이 3·1운동으로 투옥됐다 출감한 1922년에 침체에 빠진 신문관(新文館)을 해산하면서 그 후신으로 발족한 출판사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여기서 최초의 주간 잡지 ‘동명(東明)’을 창간했다. 최남선은 17세 때인 1907년 이 부근 상리동(上犁洞) 집에 처음 신문관을 창립했다.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중퇴하고서 인쇄시설과 기술자를 구해 귀국하여 벌인 일이다. 최초의 잡지 ‘소년(少年)’을 창간한 것이 그 다음해다. 그 창간호 머리에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를 발표했다. 조선 전래의 창가의 형식을 버리고 서구와 일본의 근대 시(詩)의 모습을 갖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소년은 새로운 사상을 가진 새로운 세대를 의미했다.

    신대한(新大韓)의 소년(少年)으로 깨달은 사람이 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서 혼자 어깨에 진 무거운 짐을 감당하도록 교도(敎導)하자.

    소년 창간사는 이러한 구절을 담고 있다. 신문관은 1910년 조선광문회가 설립되면서 부친 소유의 이 집으로 옮겨와 함께 둥지를 틀었다.

    1층의 신문관은 이후 15년 동안 ‘붉은 저고리’‘아이들보이’‘청춘(靑春)’으로 이어지는 숱한 잡지와 단행본을 발행했다. 2층의 조선광문회는 우국지사 50여 명이 결성한 고전 간행소이자 그들이 모이는 사랑방이기도 했다. 3·1운동이 계획된 거점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최남선은 여기서 기미독립선언서를 구상하고 선언서를 써서 문선하고 조판했다.

    최남선은 주간지에 이어 일간지를 창간했다. 신문은 독자반응이 좋았으나 경영난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최남선은 신문에서 손을 뗀 뒤 조선역사연구에 전념했고 작년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들어갔다. 이를 두고 말이 많았다. 최남선은 ‘조선역사’를 막 탈고한 참이었다. 일본인의 신사(神社)가 이미 전국 여기저기에 들어섰다. 그 총 본산이라 할 조선신궁(朝鮮神宮)이 1925년 가을 남산 중턱에 자리 잡고 한강에서 북악까지 경성 전역을 굽어본 지 벌써 만 4년이 더 지났다. 최남선은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죽임을 당한 고려의 명장이자 재상인 최영(崔瑩)의 20대손이다.

    한림이 찾는 사람

    장통교(長通橋)에 이르렀다. 10m 남짓하던 개울 폭은 남산에서 내려오는 지천이 합류함으로써 20m 이상으로 넓어진다. 한림은 다리를 지나 장교정(長橋町)으로 접어들었다. 목적지에 다가왔다. 개울 건너 관철동과 함께 이곳은 장통방이라 하여 조선 내내 도성 안 상업의 중심지였다. 또 중인과 시전상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중앙과 지방 관청의 연락사무를 맡아보던 경주인(京主人)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장통교 북쪽 관철동은 두 개화사상가 유홍기(劉鴻基)와 오경석(吳慶錫)이 살던 곳이다. 오경석은 박지원(朴趾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를 설득해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해 개항하도록 유도했고 개화파를 양성했다. 유홍기는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한 갑신정변의 주역들을 지도했다. 오경석의 아들 오세창(吳世昌)은 유홍기의 지도를 받고 1919년 3·1운동에 최남선과 함께 나섰다.

    장교다리는 올여름 큰비로 물이 불어나 가운데가 유실되었다. 광화문통 부근 청계천을 복개하느라 공사장에 널려 있던 널빤지들이 7월11일 강수량 126㎜에 달하는 비에 휩쓸려 내려가며 장통교 다리를 막았다. 다음 날 다리 가운데 교각이 수압을 못 이기고 무너졌다. 그 다리 기둥엔 ‘辛未改造’(신미개조)와 ‘己亥改造’(기해개조)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왕조 어느 연간에 두 차례 수리가 있었다는 뜻이다. 범람한 개천 변에서 두 명이 익사했다. 청계천 복개공사장 부근에서 물길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자 상류인 통의(通義) 창성(昌成) 체부(體府)동 일대 200여 호가 침수됐다. 무너진 집 두 채가 떠내려가면서 금교(禁橋) 다리에 걸려 침수피해는 더욱 커졌다. 금교는 체부, 통의, 적선(積善), 내자(內資)동을 끼고 있는 네거리, 백운동천 위에 걸친 돌다리다. 국왕 호위와 수도 방위를 맡는 금위영(禁衛營) 앞에 있다 해서 금천(禁川)교 혹은 금청(禁淸)교라 불렸다. 무지개형 교각과 독특한 도깨비 문양이 인상적인, 도성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한림은 장교정 큰길에서 남쪽 구리개(銅峴) 방향으로 잠시 내려가다 오른편 동네 길로 접어들었다. 구리개는 이제 황금정(黃金町) 2정목으로 더 잘 불린다. 몇 걸음 못미처 커다란 솟을대문 하나가 마주 선다. 대문 좌우로 펼쳐진 담장은 그 길이와 높이가 여느 한옥 집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길고 높다. 담 너머로 보이는 지붕들과 굴뚝들의 품새가 대가(大家)임을 짐작게 한다. 장교정 63번지라는 말만 듣고 왔지만 이처럼 동네의 한 블록을 다 차지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한림은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가 오늘 낮 그의 짧은 산책의 최종 목적지다. 그는 이 집의 주인을 만나러 왔다. 두 길 높이의 대문 위 잿빛 기와가 암회색 하늘의 어스름 빛을 받아 빗물에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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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윤석

    동양 삼국의 근대를 탐구하는 연구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20년 일했다. 건국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에서 한국근대와 근대신문에 대해 강의했다. 서울에서 식구들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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