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호

“한국 소녀들이 인도 민요 부르는데 내 두 조국이 합쳐지는 느낌이야”

중립국 택한 마지막 인민군 포로 현동화

  • 뉴델리=김유림 기자│rim@donga.com

    입력2011-12-22 10: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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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소녀들이 인도 민요 부르는데 내 두 조국이 합쳐지는 느낌이야”
    “내나이 스무 살에 고국을 떠나왔지. 그땐 인도보다 우리나라가 훨씬 못살았는데…. 60년 지나서 이렇게 예쁜 손녀들이 와서 공연하고 고맙다고 하는데 얼마나 자랑스러워요. 그 감격은 말로 다 못하지.”

    2011년 11월22일 오후 7시(현지시각) 인도 뉴델리 시리포트 공연장에서 열린 리틀엔젤스 예술단 공연을 보러 온 현동화(79)씨는 인도에 남은 마지막 반공포로다. 최인훈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처럼, 그는 6·25전쟁 이후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국을 선택했다. 고향을 떠난 지 60년이지만 여전히 진한 북한 말씨가 남아 있다.

    현씨는 1932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1950년 사동군관학교를 졸업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인민군 중위로 참전했다 10월 포로로 잡혔다. 약 2년간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수감되면서 국군에 귀순했지만 그는 전쟁 이후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3국을 택했다.

    “살아선 못 돌아갈 거라는 비장함”

    “인민군으로 참전할 때부터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컸어요. 당시 이북에서 머리가 좀 있는 사람은 모두 공산주의를 싫어했고 이남에서 똑똑한 사람들은 이북을 동경했지. 전쟁 이후 남한에 남느니 미국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는데 미국은 바로 갈 수가 없거든. 그래서 제3국 멕시코로 가겠다고 한 거죠. 밀입국을 해서라도 꼭 미국에 가고 싶었으니까.”



    1954년 1월 중립국을 택한 인민군포로 76명과 중공군 포로 12명은 인도 군인들과 함께 인도로 가는 아스토리아호에 몸을 실었다.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비장한 생각에 빠져 있는데 선착장에서 반공 청년단 150명이 ‘한국의 품으로 돌아오라’고 외쳤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그가 최인훈 소설 ‘광장’ 이야기를 꺼냈다.

    “1960년대 남과 북의 현실과 이념, 고뇌에 대해 글을 썼다는 건 아주 놀라운 일이지만, 사실 그 사건을 겪은 사람으로서 최인훈씨 소설에는 오류가 많습니다.”

    일단 소설 속 이명준은 남과 북에 대한 환멸 때문에 제3국을 택했지만, 포로 76명의 생각은 제각각이었다. 현씨는 “나처럼 유학하기 위해 가는 사람도 있었고 자유롭게 사업을 하고 싶어 제3국을 선택한 사람도 있었다”며 “우리가 모두 이념적 선택을 한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 소녀들이 인도 민요 부르는데 내 두 조국이 합쳐지는 느낌이야”

    11월 21일 리틀엔젤스 예술단이 인도 집권당 국민회의의 소냐 간디 당수 앞에서 공연을 선보였다.

    현씨는 또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들이 배의 선장실을 자유롭게 드나들고 우정을 나누지만, 사실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당시 배에는 인도 군인 수백 명도 함께 타고 있었고, 포로들이 도망갈까 홍콩에 정박도 못할 정도로 규율이 엄격했다는 것. 그는 또 소설 속 타고르호는 3000t으로 묘사돼 있지만 실제 그들이 탄 아스토리아호는 2만4500t 선박이었다는 점, 소설에서는 배가 홍콩과 마카오를 거쳐 인도 캘커타로 갔지만, 실제로는 홍콩과 싱가포르를 통해 인도 남부의 첸나이에 정박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러한 ‘사소한 오류’ 말고도 현씨가 “광장은 100% 픽션”이라 주장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소설 속 이명준이 월북 후 노동신문사 편집국에 근무하는데, 북한 사정상 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

    “이건 북한의 사고방식을 몰라서 하는 소리야. 이북은 아무리 아버지가 고관이라도 이남 출신이면 절대 큰일을 안 줘요. 남로당 박헌영을 숙청하는 게 북한이라고. 똑똑하거나 무조건 찬양하거나 비판하는 사람은 다 위험요인으로 보거든. 그런데 이남에서 온 대학생을 바로 노동신문 기자 시킨다? 말도 안 돼. 특히 당시 노동신문은 신민당 기관지랑 공산당 기관지가 통합한 신문이었기 때문에 북한의 정치권력 중심에 있었어요. 실제 권력은 장관보다 많았다고. 그리고 소설에는 북한의 억압적인 통치 실상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아 아쉬웠어요. 소설보다 몇 배는 더 처절하고 숨 막히는 일들을 내가 목격했는 걸. 소설 쓰기 전에 최 선생이 나랑 한 번 만났다면 훨씬 좋은 작품이 나왔을지도 모르지(웃음).”

    월남 이명준이 노동신문 기자? 말도 안 된다!

    1954년 인도에 온 인민군포로 76명은 2년간 뉴델리 야전병원에서 생활했다. 상당수 포로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로 떠났다. 현씨는 멕시코를 거쳐 미국에 가겠다는 일념으로 기다렸지만 멕시코는 끝내 포로를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포로 4명만 인도에 남았다.

    당시 인도 정부는 네 사람의 자립을 위해 1만 루피 융자를 줬다. 공부를 포기한 그는 그때부터 사업에 매달렸다. 델리 인근에 큰 양계장을 차려 성공했다. 이후 인도 힌두교사원에서 머리카락을 사 한국 가발공장에 수출했다. 힌두교도는 소원을 빌 때 머리카락을 잘라 사원에 바치는데, 사원은 이 머리카락을 모아 경매에 붙인다. 1970년 현씨는 한국 기업을 도와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섬유공장을 세웠다. 이밖에도 무역회사, 여행사 사업 등을 성공시켰다. 그는 “대한민국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이를 악물고 사업했다”고 고백했다.

    “사실 나는 전쟁 이후 우리나라가 가장 힘들 때 나 혼자 잘되겠다는 생각으로 조국을 등지고 이곳에 왔잖아요. 거기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요. 그만큼 한국이 잘되게 백방으로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죠.”

    그가 1989년 이후 20년 가까이 주(駐)인도 한인회장으로 활동하며 한국과 인도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해온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은퇴 이후 그가 가장 마음을 쓰는 일은 인도 유피주 아요디아에 있는 허황옥 기념비 관리 사업이다. 인도와 한국에는 가야의 시조 김수로 왕의 부인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한국 소녀들이 인도 민요 부르는데 내 두 조국이 합쳐지는 느낌이야”

    11월22일 공연을 마친 리틀엔젤스 예술단 단원들이 한국전 참전 용사 4명에게 ‘영웅 메달’을 수여했다.

    1999년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인도를 방문해 “사실 내 몸속에는 인도의 피가 절반 흐르고 있다”고 말하면서 허황옥 기념비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2000년 아요디아와 경남 김해에 기념비가 설립됐다. 그는 “2006년 압둘 칼람 당시 인도 대통령이 한국에 국빈으로 방문했을 당시 노무현대통령과 청와대 만찬 자리에서 이 기념비와 허황옥 공주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국과 인도의 인연이 얼마나 깊은지 얘기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현씨는 가락종친회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1년에 4~5번 자비로 아유타에 가서 기념비를 돌본다.

    “허황옥 공주는 2000년 전 여자의 몸으로 혼자 한국으로 갔죠. 저는 60년 전 당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인도에 정착했고요. 허황옥 공주나 저나 한국과 인도를 이었다는 점에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불교 용어로 카르마라고 할까요. 허황옥 공주와 김수로왕의 인연을 살린다면 인도와 한국이 더욱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을 텐데 한국 정부가 이에 소홀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는 1962년 대한민국 국적을 획득했다. 지금도 1년에 4차례 이상 한국을 방문한다. 두 자녀 모두 한국에서 대학을 마쳤다. 늘 한국이 마음에 남아 있다. 하지만 아직도 고향, 함경북도 청진에는 못 가봤다. 그는 “북한 입장에서 나는 민족의 반역자인데, 죽기 전에 고향에 갈 수 있겠어?”라며 웃었다. 그는 2011년 초 강원도 양구를 찾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6·25전쟁이 1951년에 끝나지 않은 이유는 반공포로 때문이거든. 북에 안 가겠다는 반공포로 때문에 유엔군과 중공군이 이념적으로 옥신각신하다보니 휴전하는 데 2년이나 걸린 거지. 그때 양구에 가서 제4 땅굴을 봤는데 ‘아, 여기서 많은 육군, 유엔군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사실 그게 나 때문이잖아. 가슴이 너무 벅차오르더라고.”

    공연 내내 그는 어린 소녀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덤덤하게 털어놓았지만 그의 79년 인생은 굴곡진 한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의 희생 덕분에 한국의 아이들은 즐겁게 노래할 수 있었다. 공연 막바지, 단원들이 인도 전통 민요를 합창할 때 그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한국은 나를 낳아준 나라고, 인도는 나를 살려준 나라예요. 고운 한국 소녀들이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인도 민요를 부르는데, 꼭 내 두 조국이 합쳐지는 느낌이야.”

    6·25 참전 60주년 기념 리틀엔젤스 공연

    “한국 국민은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한국 소녀들이 인도 민요 부르는데 내 두 조국이 합쳐지는 느낌이야”

    리틀엔젤스 예술단 공연 모습.

    대한민국 대표 어린이 예술단 리틀엔젤스는 2010년 6월부터 6·25전쟁에 참전한 16개국과 의료지원대를 보낸 6개국 등 총 22개국을 돌며 공연을 했다.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참전국과 참전 용사의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서다. 이선민 예비역 중장은 “6·25전쟁에서 사망한 참전용사만 200만명이다. 평화와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이들에게 ‘대한민국은 여러분의 고귀한 희생을 잊지 않았다’고 전하는 아주 뜻 깊은 행사”라고 의의를 설명했다.

    그 대미는 인도에서 장식했다. 인도는 1950년 11월 초 의료지원단 627명을 파견했다. 인도군 의료지원단은 전쟁 동안 시민을 포함해 환자 약 22만4000명을 돌봤다. 유엔군 한국전 참전 60주년 기념사업회 박보희 추진위원장은 “인도는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당시 신생국가였고 비동맹 중립노선을 표방하긴 했지만 상대적으로 소련과 가까웠다”며 “그럼에도 의료지원단을 파견한 것은 인도주의적인 결정이었으며, 인도야말로 이념을 뛰어넘은 평화의 사절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날 공연에는 당시 6·25전에 참전했던 인도 군인 4명도 초대됐다. 당시 의사로서 한국에 파병됐던 라진다르 찬타스(88)씨는 38선 인근에서 여러 캠프를 돌아다니며 한국인들을 치료했다. 그는 지금도 6·25전쟁 당시를 생생히 기억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먹을 게 없어서 뱀만 보면 잡아먹었어요. 아이들 영양상태도 정말 안 좋았습니다. 길거리에서 꼬질꼬질한 흰옷을 입은 아이들에게 말을 걸면, 아이들은 수줍은 듯 대답은 안 하고 그냥 이를 드러내고 빙그레 웃었죠.”

    22개 참전국 순회 공연

    함께 참전했던 브리가디에 말호트라(86)씨는 “당시 죽는 사람을 참 많이 봤다”고 회상했다. 전쟁, 빈곤, 질병뿐 아니었다. 인민군 포로들이 도망가다 잡히면 여지없이 사형을 당했다. 그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북을 초월해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이 의료지원부대였다.

    “전쟁은 치열했지만 의사는 모두에게 평등했습니다. 의사가 필요한 곳이라면 38선 이남, 이북을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다녔죠.”

    공연은 리틀엔젤스 단원의 애국가와 인도 국가 합창으로 시작됐다. 1800석을 가득 메운 관객은 소녀들의 화음에 매료됐다. 북춤, 탈춤, 농악, 가야금 병창이 이어졌다. 관객들은 끊임없이 환호했고 연신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특히 부채춤을 출 때 무대에 커다란 ‘부채꽃’이 피어나고 동그란 원 안에 한 명이 들어가 10회 이상 회전을 하자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꼬마신랑 이야기를 재치 있게 꾸민 ‘시집가는 날’이나, 봄나물 뜯는 처녀와 총각의 ‘밀고 당기기’를 그린 ‘처녀총각’이 공연될 때는 객석에서 깔깔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조성숙 리틀엔젤스 단장은 “리틀엔젤스는 공연을 통해 고마움을 표현할 뿐 아니라 한국의 아름다운 문화예술을 알린다”며 “리틀엔젤스야말로 1세대 한류의 주역”이라고 말했다.

    공연이 끝난 뒤 참전 군인 4명은 무대 위로 올라가 ‘영웅 메달’을 받았다. 리틀엔젤스 단원들은 직접 메달을 걸어주며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 말호트라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가 한 일이 값진 일이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셔서 너무나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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