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난은 신중국의 아버지 마오쩌둥의 고향이다. 마오의 불같은 성미는 ‘적과 싸울 때도 칼을 쓰고, 친구를 사귈 때도 칼을 쓴다’는 후난의 후예답다. 이런 저항정신은 오늘날 후난에도 살아 있다. ‘마오의 박물관’ 창사 박물관은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작품을 버젓이 전시한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또렷한 이목구비,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에 날씬한 몸매, 섹시한 건강미를 물씬 풍기는 후난 아가씨가 경쾌하게 노래한다. “후난 아가씨는 매워, 후난 아가씨는 맵지, 후난 아가씨는 맵고 화끈하고 열정적이라네.”
마오쩌둥이 “고추를 안 먹으면 혁명을 할 수 없다(不吃辣椒不革命)”고 했을 정도로 후난인은 매운 것을 즐겨 먹는다. 네 줄기 강물이 교차하는 쓰촨(四川)의 아가씨가 촨메이즈(川妹子)라 불리듯이, 후난 아가씨는 라메이즈(辣妹子)라고 불린다. 공교롭게도 ‘매울 랄(辣)’은 경쾌한 유성음이라 노래의 맛을 한껏 살린다. 랄랄라!
중원의 밖
후난(湖南)성의 약칭은 ‘강 이름 상(湘)’자다. 후난성은 중국 최대의 호수이던 동정호(洞庭湖)의 남쪽에 있고, 장강 최대의 지류인 상강(湘江)이 흐르는 땅이다. 중국 남부답게 산지가 많아 서북쪽은 무릉산맥, 서쪽은 설봉산맥, 동·남쪽은 남령산맥으로 둘러싸였다. 평야지대는 총면적의 20%에 불과하지만, 동정호와 상강의 풍부한 물이 비옥한 토지를 만들었다.“후난에 벼꽃이 피면 천하의 기근이 끝난다”고 할 만큼 후난의 농업생산력은 높았다. 북방인이 아침에 꽈배기튀김이나 죽으로 끼니를 때울 때, 후난인은 아침부터 쌀밥을 든든하게 먹었다. 현대사회의 번잡함이 후난을 지배하기 전까지 후난에서 아침에 죽을 먹는다는 건 삼시세끼 먹을 쌀이 없을 만큼 가난하다는 뜻이었다. 중국에서 쌀농사가 가장 먼저 시작된 지역답게 쌀이 넘쳐난다.
그러나 이런 풍족함은 훗날 개발된 후에야 진가를 발휘한다. 애초에 초나라의 중심이던 후베이(湖北)성부터가 중원과는 판이한 독자성을 갖고 있었다. 그나마 후베이는 중원과 맞붙고 교통이 편리해 중원과 교류하며 상당 부분 닮아갔으나, 후난은 멀고먼 변방이요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미개척지였다. 후난성에 중국 오악(五岳) 중 남악(南岳)인 형산(衡山)이 있다. 오악은 중원의 세력권 범위를 상징한다. 즉 후난성의 중간인 형산 지역까지는 중원의 세력이 가까스로 미치지만, 그 아래로는 세상의 바깥(世外)이었다.
오지(奧地) 후난은 유배와 피난으로 이곳까지 흘러든 이들에게 비탄과 수심을 더했다. 초나라 충신 굴원은 후난에 유배되자 “세상은 취해 있는데 혼자서만 깨어 있다”고 노래하며 멱라강(汨羅江)에 몸을 던졌고, 당나라 시성(詩聖) 두보는 악양루에 올라 외롭고 고단한 신세를 한탄했다. “가족과 벗에게서도 소식 한 글자 없고, 늙고 병든 몸이 의지할 것은 외로운 배 한 척뿐이네(親朋無一字, 老病有孤舟).”
미개척지 후난에 대한 두려움은 남송시대 시인 엄우(嚴羽)의 노래 ‘답우인(答友人)’에서도 드러난다. “상강의 남쪽으로 가면 다니는 사람 없으니, 장우만연으로 흰 풀이 난다네(湘江南去少人行, 瘴雨蠻烟白草生).” 장우만연(瘴雨蠻烟)이란 남방 오랑캐 땅의 독기 서린 연기와 비를 일컫는 말이다. 멀쩡하던 장정들이 후난에만 가면 별다른 이유 없이 픽픽 쓰러지니 중원인들은 남방 땅에 독기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미개척지인지라 정글의 모기와 벌레가 말라리아와 풍토병을 옮겼기 때문이리라. 중국 전역에서 개발이 상당히 진척된 남송시대까지도 후난은 중원인에게 경외의 땅이었다.
人傑의 요람
이 거친 땅에 일찍이 정착한 이들은 먀오족(苗族)이다. 중원의 황제(黃帝) 세력에 밀려난 동이(東夷)의 치우 세력은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중원인에게는 세상의 밖이었지만, 먀오족에겐 포근한 보금자리였다. 산은 외적의 침입을 막고, 산 속의 풍부한 물은 곡창지대를 가져다줬다.먀오족이 정착한 후난에 남방의 맹주 초나라가 나타났다. 그러나 초나라의 중심은 후베이였고, 후난은 아직 유배지로 활용됐다. 여기 사람들은 상강의 지류 멱라강에 몸을 던진 굴원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겨 물고기가 그의 시신을 먹지 않도록 강에 밥을 퍼부었다. 이 활동은 오늘날 단오제(端午節)가 됐다고 전한다.
한나라는 후베이와 후난을 형주(荊州)로 묶었다. 당시 형주의 중심은 양양과 강릉 등 후베이 지역이었고, 미개척지 후난은 남형주로 따로 불리기도 했다. 미개척 상태에서도 후난의 생산력은 이미 돋보였다.
사마상여는 ‘자허부’에서 “운몽(雲夢, 초나라의 큰 연못 7개 중 하나)은 사방 900리에 이르고, 들짐승과 물고기, 온갖 산물이 말할 수 없이 풍부하다” 했고, 사마천은 ‘사기’에서 “장사(長沙)는 초의 곡창”이라 했다. 장사는 오늘날 후난의 성도(省都)인 창사다.
후한 말 동오의 손견은 도적을 토벌한 공로로 장사 태수로 임명돼 관록을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탁 타도 등 중원의 일에 신경 쓰느라 장사에서 충분한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다. 난세에 형주를 평화롭게 지킨 유표가 죽은 뒤, 삼국지 3대 주인공인 유비·조조·손권이 형주를 둘러싸고 각축전을 벌인다. 후베이에서 적벽대전이 벌어지고 주유와 조인이 강릉 공방전을 벌이는 등, 후난의 지배력에 공백이 생긴 틈을 타 유비가 형남(荊南) 4군에 손을 뻗쳤다. 조운은 영릉·계양,장비는 무릉을 차지한다. 관우는 황충과 불꽃 튀는 접전 끝에 장사를 장악하고 맹장 황충과 위연을 얻는다. 위와 오가 강릉에 신경을 집중하는 동안 유비는 재빨리 형남 4군을 석권한 것이다.
손권은 이릉대전으로 유비를 물리치고 형주를 차지한 후 동정호에 수군 조련을 감독하기 위한 누각 악양루(岳陽樓)를 세운다. 그러나 이후 남형주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4대 거점인 형남 4군 이외에는 먀오족 등 원주민의 세력이 강해 실질적인 지배력이 곳곳에 미치지는 못한 듯하다.
중국 전역이 개발되고 교통·무역로가 발달하면서 후난도 점차 중요해진다. 후난은 영남(광둥·광시성) 지역과 중원을 이어주기 때문이다. 후난은 개발되면서 더욱 풍요로워져 호상(湖湘) 문화가 피어난다. 창사의 악록서원은 송나라 주자와 명나라 왕양명이 가르침을 편 곳이다. 송·명을 주름잡은 유학자들이 성리학과 양명학을 강론했다. “초나라의 인재들, 이때부터 성하였다(惟楚有材,於斯爲盛)”라는 악록서원의 자부심이 부끄럽지 않다. 명나라 최고의 명재상 장거정,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해 청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증국번, 신중국의 아버지 마오쩌둥 등 명·청·현대를 주름잡은 인물이 후난에서 나왔다.
‘張氏의 세계’
북방 유목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워진 만리장성과 달리, 유목민이 없는 남쪽에 이토록 거대한 장성이 있다는 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북방 유목민 못지않게 한족을 두렵게 한 이들은 누구일까. 바로 후난의 먀오족 등 소수민족들이다.
오늘날의 펑황은 먀오족, 투자족(土家族), 한족이 함께 어울려 사는 관광마을이지만, 원래는 한족이 먀오족, 투자족 등을 제압하려던 군사기지였다. 한족 주둔군과 친한파(親漢派) 먀오족은 장성 안에 살고, 반한파(反漢派) 먀오족은 장성 밖에 살았다. 친한파 먀오족은 ‘잘 익은 먀오족(熟苗)’, 반한파 먀오족은 ‘날것 그대로의 먀오족(生苗)’이라 불렸다. 산줄기를 따라 축성된 남방장성에 오르니 저 멀리 평지마을과 산간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숙묘의 수상한 동태를 감시하기 좋은 위치다.
먀오족과 한족의 혼혈 작가 선충원(沈從文)은 고향 펑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거칠면서도 큰 돌들을 쌓아 만든 원형의 성곽을 가운데로 해서 사방으로 펼쳐진다. 그 변방 벽지의 외로운 도시를 둘러싸고 7000여 개의 보루와 200군데가 넘는 진영이 있다.” ‘산이 아름답고 물이 아름답고 노래가 아름답고 사람이 아름다운 곳’ 이면에는 치열한 투쟁의 역사가 있다.
후난 최고의 명승지는 단연 장가계(張家界)다. 카르스트 바위가 하늘을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처럼 줄지어 늘어선 풍경은 제임스 캐머런의 영화 ‘아바타’에도 큰 영감을 줬다. 그런데 왜 이곳의 이름이 ‘장씨의 세계’일까.
전설에 따르면, 유방은 한 건국 후 황제의 절대권력을 강화하려고 명장 한신, 영포 등 수많은 공신을 토사구팽했다. 장량은 대숙청을 피해 도를 닦겠다며 후난에 은거한다. 그는 현지의 투자족에게 수차를 만들어주며 신임을 얻었다. 유방이 죽은 후 여태후가 장량을 제거하려 군대를 보내지만 장량은 투자족을 규합해 49일간 막아낸 끝에 저항에 성공한다. 이때부터 이 지역은 ‘장량 가문의 세계’, 즉 장가계(張家界)로 불리게 된다. 후난의 전설과 일화는 도망자, 유배자, 피난민, 산적의 이야기이며, 중원과 현지의 투쟁 이야기다.
중원에서 멀찍이 떨어진 후난의 첩첩산중은 훌륭한 은신처였다. 먀오족이 피난 온 이래 후난은 도망자들의 온상이었다. 후난에는 “산적들이 머리털만큼 많다(衆盜如毛)”고 악명이 높았다.
중국 관광객들은 현지 소수민족이나 역사적 특색을 살린 옷을 입고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 펑황고성에서 여자는 화려한 먀오족 옷을 입고, 남자는 토비(土匪), 즉 산적의 호랑이 가죽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다. 중원의 눈엣가시이던 먀오족과 산적이 이젠 추억거리가 됐다.
싸울 때도 칼, 사귈 때도 칼
강인한 정신력과 불굴의 투혼, 호전성은 군인으로는 적격이다. 그래서 “후난인이 없으면 군대를 만들 수 없다(天下無湘不成軍)”는 말이 생겼다. 장쑤·저장인들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학문을 닦아 관료의 길로 나섰을 때, 후베이·후난인들은 군사요충지 출신답게 군인의 길로 나섰다. 그래서 “문인들 중에 오(吳) 방언을 쓰는 사람이 많고, 무장들 중에 초(楚) 방언을 쓰는 사람이 많다(文多吳音, 武多楚腔).” “후난에는 장군이 많고 저장에는 책략가가 많”아서 “후난 사람들이 전쟁하면 저장 사람들이 관리한다.”
광시성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의 군대가 남방의 주요 대도시를 함락하며 남중국 일대를 뒤흔들 때, 후난의 창사는 태평천국의 맹공을 꿋꿋이 버텨냈다. 초기에 태평군은 창사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궤멸 직전의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태평군은 후베이의 우창, 장쑤의 난징을 함락시키며 기사회생하지만, 다시 한 번 후난과 악연을 맺는다. 무능하고 부패한 관군 대신 태평군을 위협하는 강력한 군대가 후난에서 등장한 것이다. 증국번의 상군(湘軍)이다.
원래 청나라는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는 나라였기에 사적 모임과 회합을 극도로 꺼렸다. 그러나 무능하고 의지박약한 관군이 태평천국군에게 연패하는 상황에서 지방의 의용군이 의외로 잘 싸우자 생각을 고쳤다. 일개 무명인사가 조직한 촌구석의 의용군이 저토록 잘 싸운다면, 현지 유명 인사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직한 의용군은 더욱 잘 싸울 것 아닌가.
청 조정은 후난의 증국번에게 군대를 조직하도록 했다. 증국번은 타락한 관군과 전혀 다른 군대를 만들기 위해 원점에서 출발했다. 정부와는 관련 없는 근면성실한 사람을 우선 채용했다. “흙냄새 나고, 순박하고 착실한 젊은이, 즉 시골 사람일수록 좋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이 매끈한 남자나, 한량 같은 사내나, 관공서에 뜻이 있는 자는 채용 하지 않겠다.”
또한 증국번은 자기 문하생들을 대거 간부로 등용했다. 탁월한 유학자이며 명망 높은 관리였던 증국번을 따르는 인재가 많았다. 학연과 지연으로 똘똘 뭉친 상군은 뛰어난 단결력과 투지를 보여줬다. 전투 경험은 없었으나 “계속 패배하면서도 계속 싸웠다(屢敗屢戰).” 결국 이들은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운다.
다만 상군은 청나라를 구하기 위해 조직되기는 했지만, 사조직은 사조직이었다. 사조직은 지역의 권력을 장악하고 중앙에 반기를 들기 쉬웠다. 증국번이 태평군을 격파하고 우창을 수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함풍제가 기뻐하자 군기대신 기준조가 진언한다. “필부가 여염에 머물며 한번 외쳐 궐기하자 만여 명이 따랐으니, 이는 필시 나라의 복이 아닙니다.” 그토록 신망이 높고 유능한 증국번이 황제를 자처한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황제가 될 야심이 없던 증국번은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게 처신했다. 상군을 해산하고 공로를 과시하지 않았다. 양강 총독으로 강남에 머물 뿐 중앙 정계에 얼굴 내미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어디까지나 청의 충신으로 남길 원했다.
그러나 증국번의 충성심과는 무관하게 상군은 지역 군벌의 모델이 됐다. 지방의 혈연·지연·학연 등 각종 연줄로 묶인 군벌이 등장했고, 청조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결국 청은 우창봉기 후 각지의 독립선언과 함께 붕괴했다.
스파르타, 프로이센
이 혼란을 과연 누가 수습할 수 있을까. 중국이 내우외환에 싸여 있던 근대에 위안스카이의 참모 양두(楊度)는 ‘호남소년가(湖南少年歌)’에서 말했다. “중국이 지금 그리스라면, 후난은 스파르타다. 중국이 독일이라면, 후난은 프로이센이다. 여러분은 진실로 이와 같다. 말과 일을 급히 해 쓸데없이 눈물 흘리지 말라. 후난 사람이 모두 죽지 않고서는 중화국가가 진실로 망했다고 말할 수 없다.”그의 말대로 후난에서 신중국을 탄생시킬 걸출한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마오쩌둥이다. 그의 이름(毛澤東)에 이미 후난의 색이 짙게 배어 있다. ‘습지 택(澤)’ 자는 단위면적당 가장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쌀의 산지다. 할아버지가 돼서도 장강에서 수영하며 건강을 과시한 마오는 물에 능한 강남인의 면모를 보여준다.
소년 마오는 ‘수호지’를 탐독하며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는 의적을 꿈꿨고, 훗날 장시의 징강산에서 양산박을 재현했다. 훗날 펑더화이가 대약진 운동을 비판했을 때, 마오는 “여러분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면 다시 산으로 들어가 농민으로 홍군을 만들어 여러분과 싸우겠다”고 했다. 산적 기질을 못 버린 것이다.
“후난인은 성격이 너무 급해 뜨거운 두부를 먹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만, “후난인은 성격이 너무 급해 뜨거운 두부도 단숨에 삼킨다”고 해야 좀 더 적확하다. 마오쩌둥도 불같은 성미의 후난인답게 말했다. “아주 급하니 만년은 너무 길고 하루 만에 당장 해치워야 한다.”
마오쩌둥은 학생 시절 스승 양창지(陽昌濟)를 찾아가 상담했다. “세상에는 해결해야 할 일이 쌓여 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퇴학을 하고 싶습니다.” 양창지는 마오의 의견에 반대하며 말했다. “먼저 기초를 잘 닦게. 문제를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고 친구들을 만들어야 하네. 공동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 그러자 마오는 당장 동지를 모으겠다며 신민학회를 창립했다.
마오쩌둥, 시작이자 기준
훤칠하게 큰 키에 언변이 뛰어난 데다 열정적인 미남 청년 마오는 탁월한 정치가였다. 학창 시절 마오의 친구였지만 훗날 다른 길을 걷게 된 샤오위는 마오를 이렇게 평가했다.“첫째, 무슨 일을 하든지 아주 신중하게 계획을 세웁니다. 대단한 책략가이자 조직가죠. 둘째, 적의 힘을 정확하게 평가할 줄 압니다. 셋째, 관중을 매료시킵니다. 대단한 설득력을 지녀 그의 말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의 말에 동조하면 친구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적이 됩니다.”
국민당에 비해 절대적 열세이던 공산당 군대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마오는 게릴라 전법의 요체를 명쾌하게 제시했다.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퇴각하고, 적이 멈추면 교란시키며, 적이 피로하면 공격하고, 적이 퇴각하면 추격한다(敵進我退, 敵駐我擾, 敵疲我打, 敵退我追).” 또한 군기를 엄격하게 단속해 민심을 사고 명분을 쌓았다. 마오는 결국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고 신중국을 건설해 인민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
차마고도(車馬古道)는 윈난과 티벳이 차와 말을 교역하던 길이다. 교환무역에 종사하던 마방의 삶은 매우 낭만적으로 보이지만, 실상 극도로 힘들고 위험한 삶이었다. 집을 몇 달이나 떠나야 했고, 천길만길 낭떠러지 위험천만한 길을 가야 했다. 그들은 농사를 짓는 게 싫어서 마방의 삶에 종사한 것이 아니다. 땅이 몇몇 지주에게 집중돼 있어 농사지을 땅이 없었다.
1949년 마오가 신중국 탄생을 선포하고 지주의 땅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해주자 마방들은 위험한 교역을 하지 않아도 됐다. 마방이던 루오 노인은 토지를 분배받던 날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오.”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며 힘든 날은 모두 끝났다고 술회했다.
전란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사회의 밑바닥에 있던 사람들에게 평등을 가져다준 마오의 위업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마오의 권력을 정당화한다. 중국 공산당 당헌은 말한다.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의 사상을 모든 활동의 지침으로 삼고, 교조주의적이거나 경험주의적인 어떠한 일탈에도 반대한다.”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의 시작이며 기준이다. 어떠한 일탈도 허용되지 않는 절대적 가치다.
정부 비판적인 사람들은 어떨까. 중국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날카롭게 포착한 자장커 감독의 영화는 중국 내에서 종종 상영이 금지되지만 해외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2006년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스틸 라이프’의 원제는 ‘삼협의 착한 사람(三峽好人)’인데, 지장커는 영화 제목에 마오쩌둥의 서체를 활용했다. 지장커는 말한다.
존재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정치에 별 관심 없는 민초들에게 마오는 어떤 의미일까. 중국 위안화는 모두 마오의 초상화로 도배돼 있다. 마오는 곧 돈이고, 돈은 좋은 것이다. 마오는 21세기 중국의 재물신(財富神)이다.
중국인이 돈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은 맛난 음식이다. 창사의 취두부(臭豆腐)는 마오의 평을 홍보 문구로 쓴다. “냄새는 고약하지만, 맛은 향기롭다(聞起來臭,吃起來香).” 창사의 대표 맛집 ‘불의 궁전(火宮殿)’ 앞에 세워진 마오 동상 앞에서 관광객들은 줄지어 사진을 찍고, 마오의 이웃집에 살던 탕루이런(湯瑞仁) 여사는 전 세계에 300개의 가맹점을 거느린 ‘마오네 밥집(毛家飯店)’의 주인이 됐다. 마오는 그만큼 친근하고 소탈한 서민의 벗이자 수호신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사람의 마음도 변한다. 광둥성 친구가 느닷없이 내게 까다로운 질문을 던졌다. “한국인은 중국 정부를 어떻게 생각해?” 중국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대화 소재인 정치, 그중에서도 정부에 대해 물어보다니 난감했다. 역으로 친구에게 물어봤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친구는 의외로 진솔하게 말했다. “별로야. 그저 ‘존재하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다(存在就合理)’라고 말할 수밖에.”
헤겔의 말 아닌가. “존재하는 것은 이성적이요, 이성적인 것은 존재한다.” 헤겔의 미묘한 명언을 두고 그의 제자들은 두 부류로 갈라졌다. 보수파인 헤겔 우파는 전자를 강조하며 현재의 상태를 정당화했고, 급진파인 헤겔 좌파는 후자에 방점을 찍고 이성의 진보가 실현될 것이라 믿었다. 중국 청년들은 아직 현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현실을 더는 용납할 수 없을 때는 “이성적인 것이 존재해야 한다(合理就存在)”라고 외칠 것이다.
산시성 친구는 술을 마시며 생활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정부를 비판했다. “정부는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는 자세야. 그 어떤 것도 도와주지 않아.” 정치 얘기는 경제 얘기로 흘렀다. “문화대혁명 전후의 20년은 잃어버린 세월이었어. 그사이 일본, 한국, 대만은 눈부시게 발전했지. 만약 중국이 그 때 개방했더라면 오늘날 중국은 어땠을까.”
마오 후반기 최대의 실책인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은 망가졌고 많은 기회를 놓쳤다. 또한 현재의 정부는 그나마 마오 시절에 있었던 복지마저 걷어치웠다. 마오로부터 정당성을 찾는 것이 과연 얼마나 타당한가.
창사 박물관을 찾았을 때 마침 예술가들의 특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 중 셰샤오저(謝曉澤)의 ‘밤의 노래(夜曲)’ 연작을 보고 깜짝 놀랐다. 차들이 뒤집혀 있고, 특히 권위의 상징인 공안 경찰차가 두 대나 쓰러져 있었다. 2011년 6월 6일 차오저우(潮州)와 6월 10일 정청(增城) 사건을 그린 것이었다.
마오가 꿈꾸던 사회인가
차오저우 사건은 한 공장주가 노동자 61명의 월급 80만 위안을 주지 않은 데에서 시작됐다. 한 노동자가 2000위안의 월급을 달라고 요구하다 다쳤으며, 그의 아들 역시 폭행당했다. 200명의 이주노동자가 항의하다가 진압됐다.정청 사건은 정부가 고용한 보안요원들이 노점을 단속하다가 쓰촨 출신 20세의 임산부를 거칠게 다루고 그녀의 남편을 폭행하며 벌어졌다. 1000여 명의 이주노동자가 가세하는 등 시위 군중이 수천 명에 달했다. 경찰은 최루가스를 살포했고, 군중은 경찰차를 뒤집고 지방정부 사무실을 불 지르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중국 언론들도 쉬쉬하며 넘어간 사건이 창사 박물관에 전시물로 버젓이 걸려 있다는 게 놀라웠다. 창사 박물관은 마오 박물관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마오의 서예 작품, 마오의 초상, 마오의 동상, 마오와 양카이후이(楊開慧)의 살림집을 자랑스럽게 전시한다. 그런 곳에서 이토록 정부 비판적인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니! 박물관은 묻는 듯했다. ‘노동자의 임금을 떼어먹은 자본가는 멀쩡하고, 체불 임금을 달라고 정당한 요구를 하는 노동자들은 진압되는 사회, 어린 임산부마저 거칠게 다루는 공안, 이들이 마오 주석이 꿈꾸던 사회인가.’
마오를 맹목적으로 숭배하기보다 마오의 저항정신을 되새기는 박물관. 불의에 비타협적인 후난인의 정신, 백절불굴의 의지는 오늘도 강렬하게 살아 있다. “후난인이 모두 죽지 않고서는 중화국가가 진실로 망했다고 말할 수 없다”던 양두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김 용 한
● 1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