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해, 흑색선전 난무하는 정치의 고단함
- 야당·정부부처·인권단체에 둘러싸인 동네북 인권위
- 독립기관 인권위원장의 이유 있는 ‘오만’
- 서울대 법대 72학번의 리더, 6년 후배 곽노현
안경환 전 인권위원장은 2006년 제24대 서울대 총장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했다. 당시 서울대 문화관에서 열린 총장후보 대상자 소견 발표회에 참석한 모습.(왼쪽에서 두 번째)
위원회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인권위원장 제의를 받았다. 법조개혁과 인권을 강조해온 나의 행보를 감안하면 인권위원장 직책은 매우 적격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물론 가족과도 상의했다. 갖가지 일상의 불편함이 따를 터이니 각오해야 한다는 다짐도 했다. 마침내 인사검증동의서에 서명할 것에 동의했다.
내가 경합자 없는 단독 후보라는 언질을 받았지만 청와대 내부의 인사검증과정에서 불편한 일도 있었다. 나의 집안 내력과 사생활에 관해 해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언짢아하면서 후보 사퇴의 뜻을 밝히자 이내 사과하면서 물러섰다. 나를 이미 내정했기에 호의를 갖고 넘겨준 일도 있을 것이다.
아내를 폭행하는 위선자
그런데 나한테 직접 묻지는 않았지만 실로 황당한 일이 있었다. 내가 술을 마시면 상습적으로 아내를 구타한다는 제보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인권위원장으로서는 치명적인 결격사유다. 설령 익명의 제보라고 해도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중대한 사안이었다. 서울대 법대 학장 재직 중에 역사상 최초로 여성교수를 채용해 여성단체연합회의 상까지 받았던 페미니스트 법학자의 위선적인 사생활! 실로 주간지 기삿거리다. 스치듯 지나가는 말이 아니고 여러 차례, 그것도 집요하게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진원지가 어디인지 후일에도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아내는 기막혀 했다. 이런 걸 보면 한동안 공공연한 사실처럼 떠돌던, 모 정치인이 아내를 폭행한다는 풍문도 믿을 수 없겠다고 했다. 정식 청문회 자리에서라면 나올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기야 총장 선거 과정에서도 구구한 네거티브성 소문이 돌았다고 했다. 그해 초 ‘조영래 평전’이 출간되자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반정부, 운동권 인사였던 조영래를 추모하는 책을 낸 것이 곧바로 내가 좌파라는 증거라고 규정하는 이들이 있었다. 나를 잘 모르는 의대, 치대, 공대에서는 내가 노무현의 측근이라는 소문이 횡행했다고 한다. 전교조 교사들이 중·고등학교를 장악했듯 좌파 정부가 나를 앞세워 서울대를 장악하려 한다는 괴담이 돌았다. 내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회원인 것과 직원들 사이에서 비교적 평판이 좋았던 점도 서울대 교수 사회 주류의 분위기에서는 감표 요인이 됐다.
이후 서울대 총장 선거에 떨어지자 즉시 인권위원장에 임명된 것을 보면 소문이 사실이었다며 소급해 확신을 다진 사람도 있었다. 또한 평전 내용에 불만을 가진 유족이 법정소송을 고려한다는 신문기사가 나간 터라 나의 도덕성 내지는 인화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평가도 돌았다. 어떤 이유에서든 사람이 싫거나 자리를 두고 경쟁하면 별별 이야기를 던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속성인지도 모른다.
정부의 모든 자리에는 그 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다. 정권 탄생에 기여했거나, 자신이 그랬다고 믿는 사람은 응분의 대가를 바란다. 또한 세력권 밖에 있던 사람이 자리에 ‘밀고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자리에서 떠나기를 기다리는 내부인이 많다. 정무직은 대체로 그런 것 같다.
내가 참여정부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성향임을 내세워 반대한 청와대 인사도 있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나의 인권위원장 임명은 일종의 타협책이었을 것이다. 당시 참여정부는 고위직 인사를 할 때마다 야당과 언론의 시비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래서 한나라당도 심하게 반대하지 않을 사람을 구했고, 차선으로 나를 택했을 것이다. 부차적으로 학자출신 인사에게 으레 문제되는 논문 표절이나 연구비 부적정 사용 등의 잡음 소지가 없을 사람을 찾았다고 한다.
후일 송철호 전 국민고충처리위원장이 고백했다. 행여 자신에게 그 자리를 맡으라면 어쩌나 하고 몹시 고심했다는 것이다. 우스개로 내게 감사하다는 말까지 전했다. 자기 생각으로는 그 골치 아픈 자리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인데 기막히게 적격자를 뽑았다며 덕담도 건넸다.
변호사인 송 전 위원장은 노 대통령의 측근 그룹에 속했다. 울산에서 시장과 국회의원에 출마해 낙선하면서도 끝내 신의를 버리지 않은 그를 대통령은 챙기고 싶었을 것이다. 당초 법무차관으로 내정했다가 검찰과 장관이 함께 강하게 반대해 무산된 적이 있다고 한다. 내가 취임하기 전 이미 인권위의 일부 업무를 고충처리위원회와 공유하는 조정안이 세워져 있었고, 대통령이 내게 임명장을 주면서 ‘최소한의 정치적인 통제는 불가피하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미 조직의 확대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둔 송 전 위원장은 부하 직원에게 나의 취임을 계기로 더 이상 인권위를 대상으로 하는 업무조정 논의를 거론하지 말라며 지시했고 나에게도 정중하게 그 뜻을 전해왔다.
동네북 인권위
한동안 꿈꿨던 서울대 총장과 달리 과연 인권위원장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구체적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동안 몹시도 문제 많은 기관이라는 이야기는 수없이 들어왔다. 인권위는 사방에 적이 많았다. 내 주변에도 인권위를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인권위원장에 취임한 뒤에도 그런 시시한 기관, 또는 빨갱이 기관에 들어갔느냐며 노골적인 실망을 나타낸 지인이 적지 않았다. 그만큼 인권위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기관이었다.
정확한 실상을 알아보기도 쉽지 않았다. 표면에 드러내지 않고 누구를 통해 어떻게 알아볼지도 신경이 쓰였다. 취임 전 미리 만나자는 사람도 있었다.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린 일도 있지만 나름대로 새 위원장에 대한 조언이 필요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여러 경로를 통해 내가 알아낸 바는 대체로 이런 것들이었다. 우선 인권위는 합의제 기관이다. 독임제 관청과 달라서 위원장이 전권을 행사할 수 없다. 차관급 위원 세 사람과 일상을 함께해야 한다. 또한 직원들의 출신 배경과 능력, 그리고 인권 감수성에 편차가 크다. 이들 사이에 정서적 갈등의 소지가 농후하다. 그래서 인사 균형이 매우 중요하다. 대외관계가 몹시 어렵다. 정부의 모든 기관이 인권위를 싫어한다. 특히 법무부는 언제나 조금의 틈만 보이면 인권위의 위상을 추락시키려 들 것이다. 시민단체도 인권위에 거는 기대가 높고 요구사항도 많다. 시민단체는 자신들이 설립을 주도했기에 인권위의 구성과 운영에 응분의 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민원인도 때때로 떼를 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생경한 주장을 장기로 삼는 시민단체를 어떻게 선별적으로 수용할 것인가. 걸핏하면 점거농성을 일삼는 민원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인권을 벼슬처럼 팔아먹고 다니는 ‘인권 양아치’들은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묘수가 있을 리 없다. 부딪쳐볼밖에 도리가 없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인권위를 바라보는 정치권의 시각에 큰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한나라당은 인권위는 애초에 탄생해서는 안 될 기관이었다고 믿는 듯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건의하는 반면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 등을 이유로 ‘햇볕정책’ 을 지지하는 좌파정권의 앞잡이라고 믿고 있었다. ‘정권만 바뀌어봐라’며 벼르는 듯했다.
이런 판국에 자리에 앉는 기관장의 취임사에 어떤 비전을 제시할 것인가? 고심 끝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가능하면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국내정치의 소용돌이를 비켜가야만 한다. 국제적인 활동을 통해 국내 정치의 직격탄에 대한 방패를 구축하고 국제적인 원군을 확보해야 한다.
인권위에 대한 그해의 국정감사가 10월31일로 결정돼 있었다. 그래서 청와대는 나의 취임일을 10월30일로 정하면 어떻겠느냐고 내 의사를 물었다. 법정일자가 며칠 남아있기는 했다. (모든 인권위원은 결원 후 30일 이내에 후임자를 임명하도록 법이 규정하고 있다.) 가부를 말할 처지도 아니었지만 원칙대로 하자고 했다. 기관장의 공석 중에 국정감사를 진행하면 기관의 입지가 약화될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논란이 된 취임사
10월28일 저녁, 취임사를 직접 썼다. (재임 중에 맞은 세 차례의 신년사와 퇴임사도 내 손으로 썼다.) 거대한 비전의 제시가 있을 리 없다. 다만 속도 조절과 실천의 지혜를 강조했다.
“출범할 당시에 국민이 걸었던 기대가 근래 들어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변함없는 사랑의 언어 못지않게 강한 질책의 목소리도 높습니다. … 그동안 우리가 수행했던 수많은 일들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열정이 앞선 나머지 분별의 지혜가 모자랐던 경우도 없지 않았나, 찬찬히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 우리는 업무를 이행함에 있어 보다 연조가 깊은 국가기관들의 경험에 대한 경의를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국정의 운영 경험은 그 자체가 소중한 자산입니다. 독립된 기관으로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일은 다른 국가기관의 협조와 지원 아래 비로소 국민의 인권을 신장시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 우리는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발전에 인권의 신장이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인식하면서도 때때로는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배양해야 할 것입니다. 가슴속에 식지 않는 열정을 지니되, 분별 있는 열정으로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러고는 국제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았다.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바깥 세상에 눈을 돌리고 세계의 동반자가 되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룬 눈부신 인권의 성과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나아가서는 후발국가에 대한 책임을 분담함으로써 인권 분야에서도 국제사회를 선도하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반석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글을 마감하면서 친분이 있는 오세영의 시 ‘비누’의 구절을 인용했다.
“비누는 스스로 풀어질 줄 안다. 비누는 결코 자신을 고집하지 않는 까닭에 이념보다 큰 사랑을 얻는다.”
며칠 후 인권단체연석회의의 비판성명이 나왔다. 한국의 인권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며 장래를 향한 비전의 제시도 없다는 요지였다. 인신공격도 뒤따랐다. 개의치 않았다.
10월30일 아침, 집으로 찾아온 직원에게 취임사 원고를 건네주고 임명장을 받기 위해 청와대로 향했다. 10시 정각에 대통령 앞에 섰다. 취임식은 11시로 예정돼 있었다. 임명장을 받는 순간 머리를 조아리듯 숙이지 않으려고 의식했다. 그러나 국가원수에게 적절한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다. 혼자 임명장을 받았기에 짧지만 다과시간이 잡혀 있었다. 대통령이 특별히 주문한 사항은 없었다. 많은 사람이 적격자라고 추천하더라는 의례적인 말을 던진 뒤 대통령은 재빨리 이야기를 했다. 상의 안쪽 포켓 속에 수첩을 지니고 있었지만 꺼내 들지 않았다. 가끔 그런 사람도 있고 그게 상식이자 기본 예의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직무상 대통령의 지시를 받는 각료라면 몰라도 인권위는 법이 명시한 독립기관이 아닌가? 청와대를 나와서도 별도의 메모를 해두지 않았다.
대통령은 인권위에 대한 일정한 정치적 통제는 불가피하지만 최소한에 그치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리고 다른 기관과의 업무조정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내가 이야기를 좀 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대통령은 약간 흠칫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그러라고 말했다. 애써 표정을 부드럽게 하려는 듯 비쳤다. 두 가지 요지를 말했다. 첫째, 나는 국내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고 업무를 집행하겠노라고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서 의도적으로 정면을 응시하지 않았기에 대통령의 반응은 알 수 없다. 이어서 미리 취임사에 쓴 내용을 거론했다. 국제적 차원의 활동에 주력하겠다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인권 상황도 많이 개선됐고 인권위의 국제적 위상도 높은 편이니 재직 중에 국제적 리더십을 적극적으로 발휘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통령은 대뜸 그건 좋은 일이라면서 잘 해보시라며 표정을 풀었다. 후일 그 자리에 있었던 참모 한 사람이 전한 말이다. 그는 나의 이례적인 태도에 다소 놀랐다고 했다. 만약 다른 대통령이었더라면 매우 불쾌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취임식은 이내 끝났다. 인터뷰 요청이 많이 들어왔다. 별도의 일정을 잡도록 하고 상임위원, 간부들과 오찬을 나눴다. 빠른 시일 내에 모두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오후에는 국정감사에 대비한 준비 독회에 들어갔다. 현안 업무를 파악하는 데 더없이 유용했다. 이튿날인 10월31일, 인권위에 대한 국정감사가 이루어졌다. 곽노현 사무총장이 주로 대답했다. 새로 취임한 위원장에 대한 배려가 있었던 것 같다는 직원들의 사후 소감이었다. 한나라당 소속의 안상수 법사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해 이주영 의원, 그리고 여당의 이종걸 의원과는 오랜 친분이 있는 편이었다. 국정감사를 거치면서 새삼 인권위를 바라보는 여야의 기본 시각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3년의 임기를 채우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곽노현과의 인연
“사무총장은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위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국가인권위원법 제16조 2항).
인권위 사무총장의 임기는 별도로 정해져 있지 않다. 전적으로 위원장 뜻에 달려 있다는 암시일 것이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결정할 사항이다. 청와대에서는 곽노현 당시 사무총장을 어떻게 할 것인지 내 의중을 물었다. 내게 맡겨달라고 했다. 나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임명한 위원장이지, 노무현 대통령 개인이 임명한 위원장은 아니라고 다짐했다. ‘독립기관’의 장으로서 사무총장 인사는 내가 주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만약 첫 인사에서 청와대의 주문대로 끌려간다면 독립기관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을 것이다. 설립 초기 인권위가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했던 사실을 기억한다. 2002년 11월, 김창국 위원장이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장을 떠나면서 청와대의 사전허가를 받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됐다. 인권위원장의 ‘오만한’ 행동을 청와대 참모들이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국회에서도 비판의 소리가 일었다. 외교통상부와 행정자치부도 합세했다. 김대중 대통령 임기 말이라 레임덕 현상을 우려한 탓이기도 했다. 인권위도 별도의 성명을 발표해 맞섰다. 인권위원회법 규정을 무기로 내세웠다.
“위원회는 그 권한에 속하는 업무를 독립하여 수행한다.” (제3조 2항)
나도 김 위원장의 요청으로 인권위의 독립성을 지지하는 헌법 이론을 담은 칼럼을 동아일보에 기고한 적이 있다. 사건은 김 대통령의 지시로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신생기관인 인권위에 엄청난 자부심을 심어준 쾌거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법원장도 해외출장에 앞서 청와대에 들러 출국인사를 하는 게 관행이었다고 한다. 이런 관행을 노무현 대통령이 폐지했다고 들었다.
청와대 내부절차가 마무리되자 소식을 안 곽노현 사무총장이 전화를 걸어와서 만났다. 자신의 거취에 대한 내 생각을 물어왔다. 내 뜻을 전했다. 연말까지 도와달라고. 그러면서 후임자 물색도 함께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대학 6년 후배인 곽노현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미국 유학 생활 중 일시 귀국했을 때로 기억한다. 그와 나는 같은 대학에서 법학석사과정을 마쳤다. 첫 만남에서 그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는 내 글을 감명 깊게 읽었노라고 고백했다. 1988년 11월 ‘월간조선’에 기고한 ‘사상규제법부터 고치자: 국가와 사상통제’였다.
그는 서울대 법대 72학번의 리더였다고 들었다. 서울대 72학번에는 이해찬, 천정배, 정동영, 황지우, 최권행 등 출중한 인물이 많고 상호 유대관계도 깊다고 들었다. 이들은 1974년 ‘민청학련사건’ 당시 대학 3학년이었는데 한 운동권 선배는 이 학번 후배들에게 부채의식을 지녔었다고 말했다. 이들이 실제로 수행한 역할에 비해 과도한 처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유학에서 돌아온 곽노현은 동급생 강경선과 함께 ‘민주법학’의 리더가 됐다. ‘민주법학’은 먼저 탄생한 ‘법과 사회’와 함께 우리나라 법 현실을 비판하고 대안 제시를 시도한 젊은 법학자들의 모임이었다. 오랫동안 한국 법학을 지배해온 이론법학, 제도법학, 수험법학, 수입법학에 대한 불만을 한국의 현실에 초점을 맞춘 지적 작업으로 수렴하고자 하는 소장파 법학자들의 모임이었다. ‘법과 사회’의 창립회장은 양건 교수(현 감사원장)였고, 그의 뒤를 권오승 교수(전 공정거래위위원장)가 이어받았다. ‘민주법학’은 ‘법과 사회’보다 젊고 진보적인 소장학자와 대학원생까지 포섭하고 있었다. 한때 내게도 ‘법과 사회’의 회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나는 ‘민주법학’과 통합하지 않으면 안 맡겠다면서 두 학회의 통합을 추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변호사 김칠준
곽노현은 인권위 설립과정에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설립과 동시에 초대 비상임위원으로 임명되었으나 중도에 사임했다가 제3대 최영도 위원장이 취임하면서 사무총장으로 복귀했다. 최 위원장이 취임 3개월 만에 사임하고 후임으로 조영황 변호사가 취임한 후에도 사무총장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무총장으로서 그는 많을 일을 했고 국제사회에서 한국 인권의 입지를 높이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언젠가는 인권위 수장이 될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곽노현은 다방면에 지식도 깊지만 무엇보다 도덕적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내부의 적이 많았다. 조직의 화합과 안정을 절체절명의 과제로 여겼던 내게는 그 대신 새 사무총장이 필요했다.
2010년 3월, 서울시 교육감선거에 나선 곽노현의 요청에 따라 나는 그를 지지하는 글을 썼다. “나는 시일을 두고 사람을 사귀는 편이다. ‘프로젝트’ 따라 인간관계를 맺고 끊고 할 일이 드문 삶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천천히 곽노현을 알고 지냈다. 그래서 우리 둘은 너무 가깝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아주 소통이 안 되는 사이도 아니라고들 한다. 사실이 그렇다. 그와 한통속도 아니고, 아주 아닌 것도 아니다. 때때로 그의 남다른 재주, 확신, 열정, 집념, 행동력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명쾌한 글에 비해 다소 어눌한 언변에서 오히려 안온한 균형감을 느낀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나 자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더 그를 부러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학에 몸을 의탁하고 있어, 대학에 이르기 전에 이미 지레 말라버리는 청소년의 삶의 현장에 서툰 나에 비해, 그는 놀랍도록 속속들이 교육현장을 알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물론, 어떻게 그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인지도 알고 있다. 곽노현의 말을 들으면서 그가 문제를 풀 수험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욱 깊어졌다.”
인권위 후임 사무총장으로 여러 사람이 여러 후보를 추천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기존 관념을 통째로 깨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었다. 인권위 사무총장을 시민단체나 민변이 아닌 곳에서 구할 생각이었다. 드물기는 하지만 대형로펌에도 인권과 공직에 관심을 가진 변호사가 있을 것이다. 조영래, 천정배도 원래 로펌출신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난 법률가들이 로펌에 모여 있다. 국제적 감각과 소양을 갖추었을 것이다. 조직 관리에 능한 사람이면 더욱 좋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종의 사회통합을 시도하고 싶었다. 인권 관련자들에게 치명적으로 결여된 것이 경제 감각이다. 경제력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마저 지닌 사람도 많다. 편향된 인권위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로펌의 대표를 만났다. 중요한 멤버 변호사가 동석했다. 취지를 설명하고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인권위에 근무함으로써 줄어들 수입은 회사에서 보전해주고, 인권위에 복무한 후에도 로펌 복귀를 보장해줄 것을 주문했다. 그분들은 나의 거창한 야심(?)에 경의를 표하면서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적극적으로 노력해보겠다고 했다. 일주일 후 답이 왔다. 적임자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나의 발상이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설령 로펌 변호사를 확보했다 해도 청와대가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굽히지 않고 설득할 생각이었다. 최악의 경우 충돌도 각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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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젠 도리가 없었다. 종전처럼 시민단체나 민변 소속 변호사 중에 구할 수밖에 없다. 몇 사람을 접촉해보았으나 저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청와대에서 문의가 왔다. 도움이 된다면 자신들의 인적풀(pool)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고 했다. 두 후보자를 거론했다. 둘 중 김칠준 변호사를 택했다. 몇 년 전 그가 참여연대에서 혼자 열심히 ‘작은 권리 찾기 운동’에 매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좋은 인상이 남아 있었다. 직접 만나 이야기해보니 더욱 확신이 들었다. 온화한 성격에 끈질긴 집념의 소유자, 소통과 화합형 관리자로는 최적의 인물이었다. 김 변호사를 만난 것은 나의 크나큰 행운이다. 함께 보낸 2년 반, 그는 내 인생에서 소중한 경험을 나눈 동료가 됐다. 그는 현재 구속 중인 자신의 전임자, 곽노현의 변호사로 분투하고 있다. 두 사람의 사무총장과 함께 일한 위원장의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