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호

베트남 신부는 세계화의 하녀일까, 첨병일까?

  • 정현주│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지리학 jung0072@gmail.com

    입력2011-12-21 1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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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에서 이주여성은 시부모님을 봉양하고 살림과 육아에 뛰어난 ‘전천후 며느리’가 되어야 한다. 2008년 시행된 ‘다문화가족 지원법’도 다문화가족을 ‘국적을 소유한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 배우자’로 규정한다. 가부장적 혈통주의가 강한 우리 사회에서 전통적인 성 역할을 요구받는 그들에 대해, 이제는 균형 있는 윤리적, 정책적 성찰이 필요할 때다. 그들은 한국 가정의 주변인이 아닌, 한국 가정에 다문화를 전파하는 핵심이다. 결혼이민여성을 아내나 며느리로만 보는 시선을 거두고, 인간으로서, 세계화 시대 경계를 가로지르는 초국가적 행위자로서, 다양한 욕망과 변화하는 정체성을 가진 복잡한 존재로서 이해해야 한다.
    베트남 신부는 세계화의 하녀일까, 첨병일까?

    경제적 어려움으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다문화가정 19쌍의 합동결혼식. 한 복지재단 후원으로 지난 2008년 10월 열렸다.

    한국에 온 지 4년차 되는 필리핀 새댁 J씨는 경상도 가문의 종부(宗婦) 역할을 척척 해낸다. 시부모님 모시기는 기본이요, 살림이면 살림, 육아면 육아, 그야말로 전천후 며느리다. 아내, 엄마의 역할도 잘해 동네에서는 칭찬이 자자하다. 이러한 J씨에게도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으니, 바로 고향에 두고 온 병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다. 한 방송사는 J씨를 비롯해 여러 이주여성이 한국인 남편을 앞세우고 고향을 방문하는 다문화가족 감동 휴먼스토리를 보여주며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러한 프로그램이 국제결혼에 대한 환상을 키우고, 매매혼(賣買婚)에 가까운 최근의 국제결혼을 감동 휴먼드라마로 포장해 결혼이민여성의 열악한 현실을 외면하게 한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실제 국제결혼 부부의 이혼건수는 급격히 증가해, 2010년에는 국제결혼 부부의 약 30%가 이혼을 했다. 이는 전체 이혼율의 9.4%를 차지한다. 문제는 결혼이민여성의 이혼 사유가 주로 가정폭력과 인권침해이며, 그 사례는 이미 언론을 통해 여러 차례 알려졌다.

    “절대 도망가지 않는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국제결혼에 대해 위장결혼이라고 의심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도망간 신부는 불쌍한 한국 노총각들을 정서적으로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결혼에 들어간 거액을 날리게 한 사악한 여성으로 묘사됐다. 특히 한국말과 한국 사정에 능통해 한국 사회에 정착할 수 있는 조선족 여성들이 비판의 중심에 놓였고, 그 대안으로 ‘절대 도망가지 않는다’는 베트남 신부 광고가 등장하기도 했다.

    국제결혼이 많이 알려지고 다문화사회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6년은 베트남이 중국을 대체해 유교적 가부장제를 이어나갈 ‘새로운 신붓감 공급처’로 부상한 시기와 일치한다. 베트남 신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가 등장했고, 베트남은 마치 한국 결혼중개업체들에 의해 ‘발견’된 보석이며, 어리고 순박하고 유교적 가치관까지 지닌 환상적인 신붓감을 보내주는 보물창고인 것처럼 재현되었다. 물론 한국 결혼중개업체들이 베트남 시장을 ‘개척’한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국제결혼의 선호 대상지는 한국이 처음은 아니다. 한국으로의 결혼이주가 유행하기 전 대만으로의 국제결혼은 더 큰 규모로 진행되었고, 일본으로 ‘유흥 비자’를 받아 이주노동을 떠나는 일도 다반사였다. 숱한 논란이 있지만 어쨌든 베트남에서 국제결혼은 유행을 넘어 글로벌 시대의 새로운 가족 만들기 전략으로 정착돼가고 있다. ‘어리고 순박한데다 유교적 가치관까지 지닌’ 그녀들은 어찌 보면 한국의 농촌총각보다 더 세계화된 능동적 주체일지도 모른다.



    전쟁과 개혁·개방이라는 격동의 현대사를 지나온 베트남은 결혼 연령의 남성 인구가 부족하고, 급격한 이촌향도(離村向都)로 농촌사회의 남성노동력 공백을 겪게 되었다. 그 결과 농촌지역에서 신랑감이 부족해졌고, 농촌경제의 빈곤화가 여성에게 전가되는 상황이 나타났다. 배우자 선택의 폭이 좁아지자 여성의 조혼 경향은 더욱 확대된 반면, 개혁·개방 이후 서구적 사랑관과 연애결혼에 대한 열망이 높아져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증폭되었다. 이러한 사회 맥락 속에서 일부 여성들은 국제결혼이라는 대안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 배경에는 이런 선택을 현실화하고 부추기는 국제결혼중개업체가 있다.

    매매혼이 불법인 베트남에서 결혼중개업은 음성적으로 활성화되었는데, 각 지역 구석구석을 다니며 신부를 모집하는 ‘새끼마담’과 이들을 관리하는 ‘대마담’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이들은 중개업체로부터 수수료를 받지만, 신부교육 및 AS비용(이혼 등 결혼 실패 시 대신 변상하는 비용) 명목으로 신부 가족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 돈은 신부 측에 빚으로 남게 돼 결혼 후 신랑 측이 처가에 지원금을 보내야 한다는 중압감을 안겨준다. 양측으로부터 이중 수수료를 취득하는 마담들은 이미 베트남 사회에서 신흥부자 계층으로 등장했고, 뒷돈을 주고 공무원을 매수하며 권력화하고 있다.

    ‘새끼마담’ ‘대마담’에 낸 수수료…결혼 후 중압감

    이러한 불법적인 관행은 성혼 후에도 베트남 여성이 열악한 지위에 놓이거나 결혼이 파경에 이르는 원인이 된다. 이 때문에 베트남 당국은 국제결혼을 허가제로 바꾸어, 여성위원회(여성가족부에 해당)로 하여금 음성적으로 이루어지던 국제결혼을 양성화해 일괄적으로 감독하도록 했다. 하지만 마담에 의한 국제결혼 중개는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다.

    부계(父系)적 가부장제를 고수하는 한국과 달리 베트남을 비롯한 상당수 동남아 국가에서는 양면적(bilateral)인 가족체제가 정착되어 있다. 친정과 시댁이 동일한 효도의 대상이 됨은 물론, 아들뿐만 아니라 딸도 부모 봉양의 의무를 짐을 의미한다. 즉 베트남 여성들의 결혼이민은 다른 저개발국가 여성이 가족부양 의무를 떠안은 채 단순·비숙련 노동자로 이주노동을 떠나는 현상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는 글로벌 시대의 가족의 생존전략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앞서 소개한 J씨와 같은 감동 휴먼스토리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다문화주의이기에 사회적 거부감 없이 미디어의 주목을 받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다문화주의는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거나 아예 다문화주의 담론에서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는 어떤 다문화주의이며, 왜 결혼이민여성 수용담론으로 당연시되는 걸까?

    다문화주의란 캐나다와 호주, 미국 및 유럽의 일부 국가처럼 이민자들을 끊임없이 받아들여 국민으로 삼은 나라에서 이민자를 포함한 국가 구성원들에게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책이자 사회운동이며 정치철학이다. 근대 민족국가의 동질성 가정을 깨뜨리는 초국적 이주자들의 등장으로 인해 새로운 방식으로 국민 구성원을 규정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다문화주의는 인종, 국적, 연령, 성별 등으로 인해 개인의 문화적 권리가 침해받지 않도록 문화적 인정을 고취해 이를 정책을 통해 실현하고자 한다. 기존의 이주민 수용담론이었던 ‘동화주의’가 결국 이주민을 동화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인식 아래, 동화보다는 다양성의 공존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서구 여러 국가에서 이민자 수용과 시민권 부여를 둘러싼 정치문화 담론을 형성했던 다문화주의는 20세기 말 불어닥친 경제위기와 그에 따른 민족주의의 재강화, 신자유주의의 부상으로 그 정치적 동력을 상실했다. 최근 유럽 등지에서 인종갈등이 재현되고, 다문화주의에 대한 공공연한 성토가 불거져 나오는 것을 볼 때, 다문화주의는 ‘미완의 프로젝트’로 서구 정치철학사에 남을 공산이 크다.

    역설적이게도 다문화주의를 공식적으로 채택했던 국가에서 다문화주의 폐지론이 한창일 때, 단일민족 국가임을 표방해온 한국에서는 느닷없이 다문화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다문화’라는 것이 아직 대중에게 생소할 때 정부가 나서서 다문화 의제를 만들어나가고 시민사회는 이를 좇아가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관 주도 ‘다문화주의 대세론’은 인도주의의 탈을 쓴 정치적 수사라는 인상이 짙다. 진정한 다문화주의를 주창하기엔 다문화주의에 대한 시민사회로부터의 자발적인 토의도, 다문화사회에 대한 진지한 합의나 청사진 마련도, 심지어 시행되는 소위 다문화정책에 대한 각계각층의 의사수렴도 미미한 가운데 행정적 차원에서 다문화정책만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관(官) 주도 다문화주의는 정치적 수사

    많은 이가 한국의 ‘수상한’ 다문화주의를 보여주는 사례로 다문화주의 담론이 결혼이민여성들과 그 가족만을 주요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꼽는다. 다문화정책 집행의 핵심적인 근거가 되는 ‘다문화가족지원법’(2008년 9월 시행)은 정책의 대상이 되는 다문화가족을 ‘국적을 소유한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 배우자’로 규정한다. 특히 각종 다문화 지원 프로그램은 이들 한국인-외국인 국제결혼 가정 중 외국인 아내와 한국인 남편으로 구성된 가정을 주요 대상으로 삼는다. 한국인 남편과 결혼한 외국인 아내는 전체 국내 거주 외국인 113만여 명 중 14%(약 18만 명)를 차지한다. 나머지 86%를 주로 구성하는 이주노동자나 유학생, 전문직 외국 노동인력은 물론 우리 사회의 가장 오래된 이민자 집단인 화교(華僑)도 다문화가족지원법의 정책대상에서 제외된다. 즉, 외국인은 한국인과 결혼해 가정을 이룰 때에만 다문화 성원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은 아이를 출산했거나 2년 혼인관계 유지 후 한국인 남편이 보증해야만 국적을 신청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전통적인 여성 역할을 수행하는 조건으로 시민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수많은 외국인 체류자 중 결혼이민여성만을 선별해, 그것도 혼인관계 유지와 출산 등 전통적인 성역할을 유지하는 게 입증되어야 시민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더구나 유교적 가부장제라는 전통을 일방적으로 이주여성에게 강요하고, 그 여성의 국적 취득 권한을 남편에게 위임함으로써 국가 간 경제력 차이를 가족 내의 위계관계로 전이시키는 민족 차별 양상을 띤다.

    다문화주의가 내세우는 가치와도 동떨어진 성·민족 차별적인 시민권에 대해 그동안 여성계를 중심으로 비판 여론이 일었지만, 지금까지 시행되어온 이유는 한국적 다문화주의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온정주의적 가부장제에 기반을 두고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못남’(결혼 못한 남자)을 구해주고, 한국인 아이까지 낳아 저출산 문제도 해결해주고, 노부모까지 공양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다보니 결혼이민여성에게만 쏠려 있는 온정주의적 시선은 다른 이주여성이나 외국인 노동자에게로 옮겨가지 못한다. 또한 그들이 왜, 어떤 이유로 한국에 오게 됐고,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얼마나 한국적 며느리 역할을 잘하는지가 더 큰 관심이다. 한국에서 다문화 담론을 촉발시킨 주역인 그들은 다문화가족이라는 가족 테두리 내에서만 아내와 며느리로 거론될 뿐이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해서 국제결혼이라는 선택을 하게 되었고, 초국가적 이주자로서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으로 이주하는 여성도 크게 보면 ‘이주의 여성화’ 현상의 한 부분이다. 이주의 여성화란 산술적으로 여성 이주자가 남성과 대등하게 많아지는 현상으로, 여성 이주자의 성격 변화를 설명할 때 주로 사용하는 개념이다. 과거 남성 이주노동자의 가족 자격으로 국경을 넘던 여성들은 1980년대 이후에는 생계부양자로서 초국가적 이주자가 되는 경향이 현저히 짙어졌다. 과거 이주 노동의 전통적인 송출지였던 남미와 남유럽을 대신해 아시아가 여성 이주를 주도하게 되었고, 그 목적지도 북미와 유럽에서 점차 아시아 내의 다른 지역(주로 중동과 동아시아)으로 다원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제3세계 여성, 특히 아시아 여성이 ‘성별화된 이주’ 통로를 통해 이주하고 있다.

    ‘이주 여성화’를 바라보는 세 가지 틀

    ‘성별화된 이주’란 여성적 노동이라고 인식되는 ‘돌봄 노동’이나 단순·비숙련 노동 부문으로 여성들이 국경을 넘어 흡수되는 현상을 일컫는데, 오늘날 한국 결혼이민여성처럼 국제적 매매혼을 통해 이주하는 ‘우편주문 신부’(mail order bride), 가사노동자, 간병인, 육아도우미, 일선 생산직 등이 대표적인 성별화된 이주 통로다. 이주의 여성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현상을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관점에서 분석한다.

    첫 번째 관점은 이주의 여성화를 세계화와 글로벌 정치경제 관계의 변화로 설명한다. 여성들을 해외로 내몰고 있다는 얘기다.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경제의 세계화는 국제통화기금(IMF) 및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세계은행)이 주도해 저개발국가의 산업구조를 수출 지향 산업구조로 변화시켰고, 동시에 공공부문 축소를 가져왔다. 초국적기업이 점령한 수출공단은 기존 남성 노동력의 상당부분을 저임금 여성노동력으로 대체했고, 노동의 유연화는 남성 가장의 대량실직을 야기했다. 공공부문 축소로 아내와 딸들은 생계부담을 지고 하층 부문 노동시장으로 편입했다. 가부장제 전통 아래에서 많은 여성은 실질적 생계부양의 의무를 지면서도, 여전히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이중 부담을 떠안게 되었다. 성별 불평등에 대한 탈출 욕구도 증가했다. 따라서 이들 중 상당수는 신분하강을 무릅쓰고 부유한 선진국의 하층 부문으로 편입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들 여성이 향하는 선진국과 글로벌 도시에서는 탈산업화와 서비스 직종 확대로 여성들이 대거 노동시장으로 진입한 반면, 신자유주의로 인한 공공부문 축소는 아이와 노인부양의 책임을 개별 가정에 전가시켰다. 그러자 저개발국 이주여성이 이들 가정에서 가사도우미, 간병인 등의 역할을 하게 됐다. 국제적인 이주를 견인한 것이다.

    또한 낙오된 일부 남성은 자국 여성과의 권력관계 역전현상을 경험하면서 내국인 배우자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1970~80년대에 북미와 유럽의 남성들이 ‘유순할 것 같은’ 제3세계 여성(특히 필리핀,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여성)을 매매혼을 통해 이주시키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우편주문 신부의 유행은 제1세계 여성계 및 세계 인권단체의 반대에 부딪혔고 자국민 보호 의무를 게을리 했다는 국내 여론의 악화로 금지되거나(가령 필리핀의 우편주문 신부 금지령) 급격히 감소하게 된다. 이밖에도 자국 노동력보다 싸고 유순한 제3세계 여성노동력 선호현상과 엔터테인먼트 및 성산업의 세계화는 또 다른 차원에서 여성 이주를 촉진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다문화주의 열풍에 대해 비판적인 성찰을 제기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여성이주노동자와 결혼이민자를 철저하게 분리해 결혼이민자만을 대상으로 정책을 만드는 것은, 이 상황을 만든 원인은 외면한 채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그녀들’에게만 관심을 갖겠다는 의사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이주 여성노동자가 될 수도 있었고, 심지어 결혼 후에도 외국인 여성노동자(주로 비정규직)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결혼이민여성 담론을 노동을 배제하고 가족 담론으로만 진행하는 것은 근시안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다문화 프로그램에서 결혼이민여성들의 취업교육이 증가하는 것도 결혼과 노동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 가계에 보탬이 되는 선에서 보조적인 취업을 알선할 뿐, 노동자로서 이주여성의 권리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은 미미하다. 이주노동자 담론을 배제한 한국식 가부장적 다문화주의가 가진 한계가 여기에 있다.

    가부장적 다문화주의의 한계

    베트남 신부는 세계화의 하녀일까, 첨병일까?

    요리강사의 지도로 한국요리를 배우는 결혼이주여성들(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이주의 여성화를 설명하는 두 번째 관점은 이주 문제를 네트워크에 주목해 해석하는 것이다. 이주민의 정체성은 한 국가에 속하지 않고 양쪽 사회를 연결하는 수많은 연결망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는 초국가주의(transnationalism)가 대표적인 이론적 배경이다. 이들은 여성 이주가 지역 선별적으로, 그리고 세대 간에 대물림되며 유지되는 현상을 ‘돌봄의 연쇄(care chain)’와 ‘초국가적 가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부유한 선진국에서의 ‘돌봄 노동’ 공백은 단순히 제3세계 여성 노동을 수입한 것에 그치지 않고, 이주여성 가정의 위기로 전이된다. 이주여성은 이 위기를 주로 ‘친족 네트워크’를 활용해 해결하려고 하는데, 이는 긴밀한 초국가적 가족연결망을 만든다. 이 가족연결망은 초국가적 가족이 유지될 수 있게 작동하는 세계화 시대의 새로운 가족형태가 된다. 많은 여성은 친족 및 이웃 연결망을 통해 일자리나 결혼 정보를 얻기 때문에, 노동이주 및 결혼이주는 특정 지역에서 특정 지역으로의 연쇄이주 경향을 보인다.

    한국의 결혼이민여성들에서도 이러한 경향성은 뚜렷이 감지된다. 많은 여성이 친척의 소개로 현재의 남편을 만났다. 심지어 언니나 다른 여자 친족이 먼저 국제결혼을 한 뒤 직접 소개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특정 중개업체는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현지업체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한 지역의 여성들이 같은 업체에 의해 집단적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들은 한국에 와서도 친정과 유대를 유지하며 초국가적 연결망을 통해 정보를 교환한다. 심지어 자녀의 미래와 부부의 노후를 초국가적 맥락에서 설계하기도 한다. 한국의 과열된 교육열과 경직된 계층 간 위계질서로 인해 자녀가 불이익을 받을 것을 염려하는 여성들은 자녀를 아예 초국가적 시민으로 키워 본국으로 유학을 보내거나 양국을 오가는 사업가가 되도록 하는 계획을 세운다. 또 남편의 은퇴 후 물가가 비싼 한국을 떠나 출신국에서 보람 있는 사회참여를 하며 노후를 보내겠다는 여성도 있다. 이러한 초국가적 상상은 현재의 불안정한 위치를 보상해주며 이들이 한국 땅에서 엄마와 아내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세 번째 관점은 이주의 여성화를 이주여성 개인의 선택과 전략으로 분석한다. 이는 이주여성은 구조적 인과관계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동하는 존재가 아니며, 초국가적 연결망은 이주의 경험을 모두 다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주여성의 다양한 입장과 복잡 미묘하게 형성되는 이들의 정체성에 주목한 셈이다. 사회학자 라셀 살라자르 파레냐스가 대표적인 학자인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분상승을 위해 한국으로 시집 온 여성들도 다양한 동기와 욕망을 가진 주체다. 그들은 이주로 인해 신분상승을 경험하기도 하며, 또 다른 면에서는 신분하강을 경험할 수도 있는 존재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선택을 한 그녀들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자 국경을 넘은 초국가적 행위자들이다. ‘가난 때문에 팔려온 유순한 희생자’라는 고정관념은 젊고 삶의 의욕으로 충만한 그녀들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방해한다. 과연 한국의 다문화주의 담론은 그녀들의 다양한 열망과 초국가적 실천을 담아내고 있는가?

    아쉽게도 이 세 가지 관점만으로는 다양한 이주여성의 경험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특히 한국으로의 결혼이주 현상은 보편적인 이주의 여성화의 한 흐름이기도 하지만 21세기 한국이라는 시공간적 맥락에 대한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2011년 현재 우리나라의 결혼이민여성의 56.9%(경기 27.7%, 서울 23.2%, 인천 6%)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주여성과 농촌총각을 연결시키는 고정관념과 배치된다. 수도권에서의 결혼이민 증가는 두 가지 차원, 즉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거주하는 과밀 현상의 방증이라는 것과 결혼하기 어려운 도시 남성의 증가라는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혼하기 어려운 도시 남성의 증가는 최근 남성들의 실직 및 빈곤과 관련돼 있다. 일본에서도 내국인 여성과 결혼하기 어려운 도시 남성이 많아져 사회문제가 되었으며, 필리핀 신부 등 결혼이민여성으로 이 문제를 풀려고 했다. 서구의 ‘우편주문 신부’ 현상도 비슷한 맥락에서 생겨났다.

    반면 농촌의 결혼이민 현상은 동아시아 발전국가라는 특수한 정치경제적 맥락을 보다 분명하게 반영한다. 인구유출과 생산인구 감소를 경험하는 대부분의 농촌에서는 국제결혼에 대한 체감온도가 도시보다 훨씬 높다. 국내 전체 결혼시장에서 국제결혼이 차지하는 비중이 11~13%이지만 상당수의 농촌에서는 국제결혼이 40%를 넘는다. 농촌사회의 특성상 외국인 남성과 내국인 여성의 결혼이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 결혼이민여성은 거의 두세 집에 한 가정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이웃이 되고 있다.

    결혼이민여성 과반이 수도권에 사는 아이러니

    농촌총각 문제는 압축 성장을 주도한 발전국가의 성장전략이 지역불균등 발전을 초래한 데서 출발한다.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사업’이 일본에서 최초로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농촌의 낙후로 주로 여성의 인구유출이 많은데, 이는 농촌여성이 도시의 단순·비숙련 직종에 더 많이 유입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산업화 시대 ‘여공(女工)’이라는 이름으로, 최근에는 반도체 공장이나 영세 제조업체의 노동자로, 또는 단순 서비스직 종사자로 도시는 저임금·비숙련 여성노동을 끊임없이 끌어들였다. 값싼 여성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국내 노동시장은 여성 이주노동력의 수입을 상대적으로 덜 필요로 했다. 이는 결혼이민을 가장 용이한 이주의 통로로 만들었다.

    한편 한국이 일본, 대만에 이어 촤근 가장 매력적인 결혼이주 대상지로 부상하게 된 것은 경제성장 외에도 문화적 영향력 확대 때문이다. 소위 ‘한류(韓流)’라고 하는 한국 대중문화(특히 드라마와 영화)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젊은 아시아 여성들에게 한국 사회에 대한 낭만적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아시아식 서구화를 적절히 구현해낸 한국 남성들이야말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며 가난한 자국 남성에 비해 이상적인 신랑감이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실제로 필자가 만난 많은 결혼이민여성이 이구동성으로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친절하고 로맨틱한’ 남성이 한국의 보편적인 남성상인 줄 알았다고 말한다.

    또 하나. 일반적으로 한국인은 세 가지 차원에서 이주여성들이 신분상승을 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지역적(거주지 만족도)으로, 계급적(경제적 지위)으로, 사회적 지위상으로 출신국에서보다 더 나은 지위를 누릴 것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이 중 최소한 한두 가지를 실현한 여성도 많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더 잘사는 나라로의 이주가 개인의 지위향상을 담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대적 빈곤감과 신분하락을 경험하는 경우도 많다. 출신국에서보다 수입이 많다고 한들 한국에서 빈민으로 살아야 한다면 이는 계급상승이라고 보기 힘들다. 결혼이민여성 가구의 52.9%가 최저생계비 이하 소득으로 살고 있고, 나머지도 대부분 차상위 빈곤계층이라는 사실은 결혼이민여성의 절대 다수가 경제적인 고통 속에서 살고 있음을 말해준다. 계급적 신분상승과는 거리가 먼 삶이다.

    경제적 어려움 이외에도 이주여성들은 소통의 어려움과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차별, 무엇보다 한국적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며느리 역할’에서 오는 신분적 하강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이주여성들은 국내의 여느 사회적 약자와는 또 다른 ‘주변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을 지원하는 제도는 이들(다문화가정)의 2세에 대한 인종적 차별과 아내와 어머니로서 이들 여성이 느낄 불편을 해소하는 데에만 주력한다. 그녀들에게 제공되는 시혜적 정책은 대개 한글과 한식요리 강습, 임신과 출산, 아동양육에 집중돼 있다.

    결혼이민여성의 역할은 역설적이고 다중적이다. 그들은 이방인이지만 ‘국민의 배우자’이자 ‘국민의 어머니’로서 가족관계의 재생산을 책임지고 있다. 다문화가정에서의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또한 이주여성들은 주로 하층노동자이지만 초국가적인 경험과 정체성을 지닌 다문화의 주체다. 당장은 한국말이 어눌하고 비숙련 노동밖에 못할 것 같아 보이지만, 다양한 경계를 가로지르는 경험으로 인해 높은 다문화적 감수성을 키우게 된다. 가령 민족, 국적, 연령, 언어를 초월해 형성되는 이주여성의 사교모임은 그 자체로 다문화교육의 현장이며, 그들은 이미 다문화적 관계를 지역사회에서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다문화 교육을 이주여성 당사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다문화주의를 정작 배워야 할 사람들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맞이하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문명의 교차로에 선 이주여성들

    이주는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문명의 충돌과 교류를 견인해온 핵심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이주는 여성들에 의해 주도되는, 이른바 이주의 여성화 현상으로 특징지어진다는 점에서 이전의 이주와 사뭇 다르다. 육아와 가사 등 ‘돌봄 노동’을 주로 담당하는 여성들은 이제 집을 벗어나 국경을 넘어 지구 반대편에서 아내로서, 노동자로서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21세기 문명의 새로운 단면을 구성하고 있다. 그들은 가부장적 권력관계의 희생양인 동시에, 그것을 조롱하고 비판할 수 있는 위치를 점하기도 하며, 한국 사회에 새로운 국민 만들기 방식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식 다문화주의의 진정성과 적절성 여부를 차치하고서라도, 지구화 시대에도 여전히 외국인에게 배타적이고 자민족 중심적인 대한민국이 이미 다민족국가에서 미완의 프로젝트로 끝난 다문화주의를 제창하고 일사불란하게 추진해나가는 현실은 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필자는 다문화주의를 폐기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현재의 물결은 역사적 전환의 시초가 될 수도 있다.

    여러 이유로 국경을 횡단해온 여성들이 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문화주체가 되어버린 것처럼, 온정주의적 가부장제에 기반을 둔 한국의 ‘소심한 다문화주의’가 새로운 다문화주의를 만들어가는 시발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식 다문화주의에 쏟아지는 각종 의심과 혐의를 벗기 위해서는 우선 결혼이민여성을 아내나 며느리로만 보는 시선을 거두고, 아내이자 며느리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세계화 시대 경계를 가로지르는 초국가적 행위자로서, 다양한 욕망과 변화하는 정체성을 가진 복잡한 존재로서 그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국제 정치경제 질서의 주변부에서 온 이민자이자 가부장적 혈통주의가 강한 사회에서 전통적인 성 역할을 요구받는 여성이라는 그녀들이 처한 이중, 삼중의 억압에 대해서도 균형 있는 윤리적, 정책적 성찰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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