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롬본 불고부터 답답하던 마음 뻥 뚫렸어요”
- 스트레스 지수 하락, 스트레스 저항도 상승
- 정심학교에서 음악 배워 국립대 음대 진학한 ‘슈퍼스타K’
- 재소자 예술적 재능 발굴·육성하는 교정 선진국
정심학교 관악대가 박인수 안양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지휘로 합주를 연습하고 있다.
김하나(19·가명)양은 발랄했다. 말이 빨랐고, 잘 웃었다. 갸름한 얼굴과 동그란 눈이 예쁜 그는 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이하 정심학교) 관악대에서 큰북을 친다. 정심학교는 비행 청소년 교정기관. 예전에는 안양소년원이라고 불렸다. 김양과 마주 앉은 교실 풍경은 ‘학교’라는 이름에 제법 잘 어울렸다. 책상과 칠판이 있고, 운동장이 내다보이는 창틀 위에 진흙으로 구운 화분이 네 개, 벽 쪽에는 또 다른 화분 일곱 개가 놓여 있었다. 벽에 걸린 블라인드에는 야자수가 우거진 남국의 바닷가 풍경이 그려져 있다. 복도에서는 체육복을 입고 슬리퍼를 신은 소녀들이 까르르 웃으며 수다를 떤다. 일반 고등학교 못지않게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러나 이 공간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다. 복도 창문의 쇠창살에서 알 수 있듯, 교육기관이면서 동시에 교정시설이기 때문이다. 곳곳에 설치된 CCTV가 학생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규칙을 어기면 벌점을 부과한다. 교실, 실습실, 운동장, 숙소 등 학교 내 모든 공간에는 지문인식시스템을 장착한 출입문이 달려 있다. 시스템에 지문을 등록한 인솔 직원과 동행하지 않으면, 학생들은 학교 안에서조차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다.
김양은 1년여 전 보호처분 10호를 받고 이리로 왔다. 10호는 최장 2년간 소년원학교에 다녀야 하는 것으로, 보호처분 중 가장 무겁다. 폭력, 강·절도, 성매매 등을 저지른 청소년이 주로 이 처분을 받는다. 구체적인 비행 내용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대신 “이 안에서 생활하면 불편한 점이 많겠다”고 말을 건넸다. “밖에 있을 때는 밤낮없이 돌아다녔다. 꼼짝 못하고 아침 6시30분 점호 때부터 잠들 때까지 내내 단체 생활을 해야 하는 게 힘들다”는 답이 돌아왔다. “통 움직이지 않아 체중이 24㎏이나 늘었다”는 푸념도 이어졌다. “큰북 연습과 연주가 요즘 생활의 낙”이란다.
과학으로 입증된 음악의 힘
정심학교 관악대 트롬본 주자 유지영(18·가명)양도 “트롬본을 불면 답답한 마음이 뻥 뚫린다”고 했다. 역시 10호 보호처분을 받은 그는 바깥 세상에 나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담장 밖 첫 계획은 고졸검정고시에 합격하는 것. 이후 마케팅 슈퍼바이저가 되고 싶다고 했다.
“가끔씩은 트롬본 생각이 날 것 같아요. 당장 악기를 살 수 없으니 한동안은 못 불겠지만, 여력이 되면 취미로라도 계속 할 거예요.”
유양의 말이다.
정심학교는 법무부 산하 전국 10개 소년원학교 중 유일하게 관악대를 운영 중이다. 재소자 150명 가운데 40명 안팎이 연주자로 활동한다. 수시로 모여 연습하고, 교내외 무대에서 공연도 하는 준(準) 프로페셔널이다. 박인수 안양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등 지역 음악인들이 무상으로 악기를 가르쳐준다. 김태섭 정심학교 교감은 “단원 대부분이 가정환경이 어렵고, 학교도 제대로 다닌 적이 없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악기를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러니 신기하게 여기고 재밌어 한다. 합동 연주를 하며 마음의 상처를 털어내고, 자신감을 얻는다. 그런 모습을 보며 음악의 힘을 실감한다”고 했다.
그동안 ‘음악의 힘’은 이렇게 당사자의 자기 고백이나 행동 변화를 통해 확인돼왔다. 그런데 2011년 7월부터 정심학교에서는 ‘음악의 힘’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중앙대 산학협력단 임영식 교수팀이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원장 박재은)의 의뢰를 받아 시작한 ‘문화예술교육 효과성 연구’다. 연구진은 정심학교 내에 HRV(심박동수 변이) 측정기를 설치하고 매달 한 번씩 재소자의 심전도 등 생리적 변화를 체크했다. 관악대원 21명과 비교집단인 일반 재소자 10명을 피험자로 삼았다. 공동연구자인 정경은 초당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에 따르면 사람의 평균 심박수(HR)와 정상심박 간격 표준편차(SDNN), 심장의 부교감신경 조절 능력을 보여주는 RMSSD 등을 측정하면 체내 스트레스 지수와 스트레스 저항도를 파악할 수 있다. 스트레스 지수는 낮을수록, 스트레스 저항도는 높을수록 심리적으로 건강한 상태라는 의미가 된다.
연구진이 정심학교에서 HRV 측정기를 통해 심박수와 SDNN 등을 측정하는 모습.
인체가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정도를 뜻하는 ‘스트레스 저항도 수치’도 같은 양상으로 변화했다. 관악대 활동 참여자의 스트레스 저항도 평균치는 최초 측정 당시 99.50점에서 최종 109.89점으로 10.39점 높아졌다. 반면 비교집단의 스트레스 저항도는 같은 기간 99.80점에서 100.60점으로 0.80점 상승하는 데 그쳤다. 스트레스 저항도의 분석 참고치는 89 이하 ‘나쁨’, 90~109 ‘정상’, 110 이상 ‘좋음’이다.
SDNN, RMSSD 큰 폭 상승
국내 연구진이 교정시설에 첨단 기기를 설치하고 재소자의 신체 변화를 측정해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의 효과성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심층면접이나 행동반응관찰 등을 통한 연구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조사 과정에 연구자의 편견이 개입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정경은 교수는 “이 연구를 통해 교정시설 내 문화예술교육프로그램의 필요성과 가치가 과학적으로 증명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했다.
관악대 활동이 청소년 재소자의 스트레스 개선에 도움을 주고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는 더 있다. 연구진은 그동안 ‘며느리의 명절 스트레스 측정’ 등에 대한 연구에서 피험자의 스트레스 정도를 파악하는 지표로 널리 사용돼온 SDNN 측정치도 공개했다. SDNN은 심박동수의 변이성 활동을 추정하게 하는 수치. 자율신경계가 신체에 대한 제어능력을 갖고 있는지 보여준다. 건강한 사람의 경우 외부자극과 혈압, 체온, 혈중 산소농도 같은 내부 환경에 종합적으로 반응하며 생리적인 균형을 이뤄가는데, 심장은 인체의 이런 움직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기다. 건강한 사람일수록 숱한 내·외부의 자극에 대응하느라 심박동 리듬이 불규칙하고 다이내믹하다. 반면 질병이나 스트레스가 있는 사람은 자극에 둔감하다.
일반적으로 청소년의 경우 SDNN이 60 이상일 경우 심리적으로 건강한 상태로 여겨진다. 40~60은 정상, 30~40은 관리 필요, 30 이하는 전문의 상담이 필요한 상태로 평가된다. ‘문화예술교육 효과성 연구’ 중간보고서에 따르면 정심 관악대 단원들의 SDNN은 연구 기간에 최초 측정치 50.59에서 61.34로 10.75 상승했다. ‘정상’ 범위에서 ‘건강’ 수준으로 개선된 것이다. 반면 일반 재소자의 SDNN은 같은 기간 49.94에서 52.53으로 2.59 오르는 데 그쳤다.
이번 연구에서는 심장의 부교감신경 조절능력을 평가하는 RMSSD에 대한 측정도 진행됐다. 정서적인 안정은 교감신경계와 부교감신경계의 균형을 통해 이뤄지는데, 부교감신경계가 지나치게 활성화되면 우울증 증세가 나타나고,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면 조증 성향이 발현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RMSSD가 50 이상일 경우 심리적으로 건강한 상태, 30~50은 정상 범위로 평가한다. 20~30은 관리 필요, 20 이하는 전문의 상담이 요구되는 수준이다. 정심학교 관악대 단원과 일반 재소자를 대상으로 한 생리 측정 결과, 관악대 활동을 하는 청소년의 RMSSD 평균치는 7월부터 11월 사이에 44.42에서 58.09로 큰 폭의 증가세를 보였다. 역시 정상 범위에서 건강 수준으로 개선된 수치다. 반면 음악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은 청소년의 RMSSD 평균치는 같은 기간 44.15에서 41.99로 오히려 하락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서적인 안정감
연구진은 현재 정심학교뿐 아니라 다른 소년원학교와 성인 대상 교정시설에서도 스트레스 지수 분석을 위한 생리적 측정을 진행 중이다. 연구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재소자를 대상으로 한 개별 심층인터뷰 등 심리적 지표 측정도 병행하고 있다. 이에 대한 최종 보고서는 2012년 2월 중 발표할 예정이다.
정심학교 등 교정시설들은 이번 실험 결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김태섭 정심학교 교감은 “그동안에도 관악대 아이들은 일반 재소자에 비해 학과 수업이나 직업 교육에 열심히 참여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관악대 클라리넷 주자 소은이(가명)는 1년 사이에 제과제빵 등 각종 자격증을 9개나 따면서 중졸검정고시에도 합격했다. 아이들의 이런 성과와 음악 교육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내용이 과학적으로 확인된다면 교육 프로그램을 짜는 데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 같다”고 했다.
김 교감에 따르면 정심 관악대 단원 중에는 이 활동을 바탕으로 국립대 음대에 진학한 학생도 있다. 강릉원주대 11학번인 고은혜(19·가명)양이다. 어린 시절 잠시 피아노를 치다가 가정 형편 때문에 그만둔 이후 악기를 배운 적이 없던 그는 2009년 10호 보호처분을 받고 정심학교에 들어왔다. 관악대 활동을 통해 마림바와 드럼, 팀파니 등 타악기를 배운 경험은 고양에게 ‘음악을 더 공부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했다. 박인수 안양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 등도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입시 지도에 발 벗고 나섰다. 서울대 재학생 자원봉사자들은 수시로 찾아와 학과 공부를 도왔다. 김 교감은 “학교에서도 입시 막바지에 따로 연습공간을 마련해주는 등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은혜 본인이 무척 열심히 했다. 어린 시절 비행을 저지르다 소년원 생활까지 한 자신이 음악을 배우며 처음 꿈을 갖게 됐다고 했다. 음악 교사가 돼 지금 받고 있는 도움을 다른 어려운 학생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라고 하더라. 그러더니 짧은 준비기간에도 불구하고 음대에 합격했고, 벌써부터 방학 때면 학교에 찾아와 후배들에게 악기를 가르친다. 누구든 꿈을 갖고 열심히 하면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점에서 은혜는 우리 아이들에게 ‘슈퍼스타 K’ 같은 존재”라고 했다.
2008년에도 정심 관악대 출신 중 한 명이 이곳에서 익힌 악기 실력을 바탕으로 음대에 합격했다. 이에 대해 서민정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대외협력팀장은 “어린 시절 비행을 저지른 아이 중 상당수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보니 직업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고, 꿈도 없다. 정심 관악대 같은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은 이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구실을 한다. 합주를 통해 주위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는 능력, 자기 표현력, 자신감을 자연스럽게 길러주는 것도 의미가 크다. ‘한국형 엘 시스테마’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엘 시스테마’는 2008년 ‘기적의 오케스트라-엘 시스테마’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널리 알려진 베네수엘라의 음악 교육 프로그램. 1975년 베네수엘라의 경제학자이자 오르가니스트인 호세 아브레우 박사가 처음 시작했다. 그는 마약과 폭력이 난무하는 빈민가에서 자라는 아이 11명을 모아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고 음악을 가르쳤다. 전과 5범의 소년 등이 포함된 이 악단이 2년 뒤 스코틀랜드의 국제경연대회에서 입상하면서 소외 계층을 대상으로 한 오케스트라 교육은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오늘날 베네수엘라에서는 180곳의 교육장소(누클레오)에서 1만5000명의 교사가 35만명의 어린이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 빈민가에서 자란 에딕손 루이즈와 구스타보 두다멜이 각각 베를린 필하모닉의 더블베이스 연주자, LA필하모닉 지휘자가 된 것은 ‘엘 시스테마’덕분이다.
한국문화교육예술진흥원에 따르면 예술 교육을 통해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이외에도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Art Behind Bars’프로젝트는 재소자가 감옥에서 만든 작품을 비영리단체에 기증하고 단체들이 이 작품을 판매해 수익을 얻도록 하는 프로그램이다. 1994년 시작된 이후 수용자가 창의력과 노력을 바탕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프로젝트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형 엘 시스테마
정심학교에서 진행 중인 ‘문화예술교육 효과성 연구’의 공동연구자 정경은 교수가 학생들에게 연구 취지 등을 설명하고 있다.
정심 관악대가 다른 교정시설이나 지자체 주최 행사 등에서 공연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클라리넷 연주자 이소은(17·가명)양은 “공연을 위해 학교 밖으로 나가는 게 좋고 우리 연주를 보며 사람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다. 왜 진작 이렇게 좋은 취미를 갖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문화부와 법무부는 2005년 8월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문화적 지원 추진’을 비롯한 업무협력합의서(MOU)를 체결하고, 문화적인 소년원 조성과 소년원생의 문화생활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보급에 나서고 있다. 서민정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대외협력팀장은 “재소자에게 더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소년원학교 등 교정시설의 문화예술교육 효과성을 평가할 수 있는 측정도구를 개발하고, 그걸 토대로 현재의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검증해야 한다. 정심 관악대 등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조사 연구를 통해 좀 더 과학적이고 효과적인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확대·개발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