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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서일기

‘가벼운 책 읽기’를 위한 변명

  • 글: 황정민 KBS아나운서 energy71@dreamwiz.com

‘가벼운 책 읽기’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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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책 읽기’를 위한 변명
하루키가 조금 물러난 틈은 아웃사이더를 다룬 소설들이 차지했다. 최윤의 ‘속삭임, 속삭임.’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고 세상을 향해 목청껏 소리지르고 있는 이 마당에 속삭임이라니. 무심한 사람이라면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지나칠 것이고 조금 예민한 사람이나 겨우 눈길을 줄 텐데.

호수, 과수원, 시골집으로 이어지는 주인공의 회상은 어린 시절 자신의 시골집에서 과수원지기로 일하던 아재비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진다. 남로당 열성 간부였던 아재비가 작은 시골에 정착하면서 겪게 되는 일들. 그는 반공 포로가 아니라 도망자였다. 신원이 불분명한 그의 바람막이가 되어준 아버지와 아재비의 속삭임. 어린 송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속삭임까지도 송이는 함께 받아들였다.

유년시절 한결같은 사랑을 보여준 아재비의 모습에서 일종의 의리를 느낄 수 있어 가슴이 묵직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늘고 연약한 속삭임이기에 더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김형경의 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엔 어떠한 기준도 제시돼 있지 않다. 빈틈없는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는 주인공 세진은 성공한 커리어우먼으로 능력을 인정받지만 타인과 소통이 불가능한 고립된 섬이다.

내가 세진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자매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도 나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힘들어서 쓰러질 상황에 처해도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도움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부족한 것 없는,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임에도 콤플렉스 덩어리다.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에, 높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 때문에, 현실과 타협하고 싶지 않아서….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그녀가 스쳐가듯 느끼는 외로움도 그렇다. 외로운 건 두렵지 않다. 사실 바쁘게 살다보면 외로움을 느낄 시간도 없다. 하지만 가끔 아주 우연히 칼날처럼 스치는 외로움에 대한 무서움은 그녀도 나도 견디기 힘든 부분이다. 결핍에 대한 이해가 돋보이는 글이었다. 이렇게 글을 통해 아웃사이더들의 내밀한 부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위로나 따뜻한 격려가 되기도 한다.



강박적인 책 수집벽에 대한 自省

직장인이 되고 나서도 강박적인 책 수집과 가벼운 책 읽기는 계속됐다. 뉴스를 진행하고 라디오DJ를 하면서 이야기 꾸러미를 많이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여러 분야의 책에 손을 댔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생방송이 있고 제한된 시간 속에서 이것저것 해야 하는 지금은 책 읽는 시간이 예전보다 많이 줄었다. ‘황정민의 FM대행진’에서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이권우의 책 좀 읽자’ 코너에 소개되는 책을 허덕허덕 읽을 뿐이다. 최근 책에 관해 두 가지 결단을 내렸다.

우선 강박적인 책 수집은 ‘도서관 기증’으로 치료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학교에 책을 보내기로 하고 서가에 꽂힌 책을 하나하나 박스에 넣으면서 살펴보니 반은 내가 좋아하는 책이고 반은 내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 책이었다.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책의 종류도 경제원론에서 정치입문서까지 다양했다. 그런 책일수록 앞부분만 새카맣게 손때가 묻어 있다. 내용이 머리 속에 남아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책을 보관하고 있었지만 소유하지는 못했다’는 아픈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가벼운 책 읽기에 대한 부담감, 또는 자책감은 ‘무시하는 방식’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간혹 “조금 깊이 있는 책을 읽어야 하지 않겠어?”라고 부드럽게 충고하는 이웃이 있지만 어려운 책들은 여전히 내게 독서의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동경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다. 잠자리에 누운 뒤 저자의 서문이나 누군가의 추천 글을 읽을 때의 설렘은 여전하다. 무작정 책을 사고 보는 습벽도 다 버리지 못했다. 새로 산 책은 머리맡에 두고 종이 냄새를 맡는다. 다 읽지는 못하더라도 그 책의 기운들을 느끼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쓰다듬고 더듬기만 해도 마음은 벌써 배부르다.

신동아 2002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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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정민 KBS아나운서 energy71@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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