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호

熱砂에 바친 젊은, ‘熱情 경영’ 싹 틔웠다

문우행 SK건설 대표이사

  • 글: 문우행 SK건설 대표이사

    입력2003-02-17 11:1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중동의 사막은 그저 ‘열사(熱砂)’인 것만이 아니다. 더위 못지 않게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바람이다. 사막에 바람이 몰아치면 드럼통이 날아다니고 모든 게 모래더미에 묻힌다.
    • 하지만 젊은 날 그런 극한상황에서 고통을 이겨낸 것은 소중한 자산이 됐다. 외환위기를 이겨낸 힘도 거기에서 나왔으리라.
    熱砂에 바친 젊은, ‘熱情 경영’ 싹 틔웠다

    2002년 11월 가나 잔사유 분해공장 준공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문우행 사장.

    사장으로 일한지도 벌써 2년반이 지났다.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의 여파로 회사 경영이 어렵던 시기에 수장을 맡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은 또 언제 그렇게 흘러갔는지….

    나는 그 시간을, 하나를 위한 ‘최고(Best)’가 아닌 모두를 위한 ‘최적(Optimum)’을 실현하는 데 쓰려고 노력했다. 뭔가 하나를 아주 잘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은 아니다. 경영자는 모두를 아우르는 자세가 필요하고, 그들 모두를 꼼꼼히 살펴야 하며, 그들 모두를 고려하여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장이 되기 전부터 늘 모두를 위한 최적을 찾고자 노력해 왔다.

    나는 스포츠라면 종목을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는데, 특히 럭비에 대해서는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럭비부에서 활동했다. 작은 키의 내가, 지금도 좀 생소하지만 당시에는 더 낯설었던 운동인 럭비를 한다고 하자 주위 사람들이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럭비는 일견 단순하고 과격한 운동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철저한 훈련을 통해 다져진 팀워크와 끈질긴 승부근성을 요하는 운동이다. 어릴 때부터 승부욕이 남다르다는 얘기를 듣고 자란 나는 그래서 럭비를 통해 남다른 즐거움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운동에 너무 몰입했던 탓일까. 나는 서울대에 원서를 넣었다가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나름대로 아쉬움이 컸기에 재수를 했고, 1년 후 다시 원서를 쓰는 기간이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서울대 입시에 재도전하는 내 의지보다 집안의 장남이라는 위치를 고려하는 게 더 중요한 상황이 되어 있었다. 고민 끝에 결국 목표를 낮춰 연세대 토목공학과를 지원했는데, 이로써 건설과 운명적인 인연을 맺게 됐다.



    ‘극한체험’이 자양분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71년, 당시 국내 최대의 강괴 생산업체인 흥화공업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4년 후인 1975년에는 철골 전문가로 인정받아 한국해외건설주식회사(KOCC)에 들어갔다. 중동 건설 붐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이듬해엔 내게도 중동으로 나갈 기회가 왔다. 아내는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만류했지만, 그것도 운명 때문이었는지 왠지 모르게 ‘한번 해보자’ 하는 오기가 솟아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다. 목적지는 사우디아라비아. 61-B 도로공사 현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동의 사막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사막이라고 하면 그저 ‘열사(熱砂)’만을 생각했는데, 견디기 어려운 것은 더위뿐만이 아니었다. 바람 또한 무시무시했다. 사막에 바람이 한번 불면 차곡차곡 쌓아둔 드럼통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식량이 순식간에 모래더미에 묻히곤 했다. 그나마 바람이 잦아든 후 모래를 헤치고 다니며 캔 음식 몇개라도 찾아낼 수 있으면 다행이었다.

    아침에 현장으로 작업하러 나간 인력들은 모래가 길을 덮고 이곳저곳에 모래산들이 생겨 딴판으로 변해버린 지형 때문에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경우가 허다했다. 운동으로 몸과 마음을 다져 웬만한 고통은 비교적 잘 참아내던 나로서도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젊은 날 그런 극한상황에서 맨주먹으로 역경을 이겨내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 목표를 성취해낸 경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됐다고 확신한다. 훗날 외환위기라는 초유의 비상사태를 기어이 극복할 수 있게 한 힘도 여기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언어장벽 또한 해외 근무를 힘들게 했다. 나는 대학 시절에도 영어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하지 않았고, 사회에 나와서도 영어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영어 공부에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다 KOCC에 입사하자마자 해외 공사현장에서 근무하게 되다보니 당장 현지 인력과의 의사소통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말이 안 통하는 것처럼 답답한 일도 없다.

    궁리 끝에 택한 수단이 ‘페이퍼 커뮤니케이션(paper communication)’. 말이 통하지 않으면 펜을 꺼내들고 필담이라도 해서 적극적으로 뜻을 주고 받았다. 그러다보면 내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나 창피할 때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뭐든지 제대로 배우려면 부끄러워 해선 안된다. 건설분야의 어려운 전문용어 등 현장에서 이해하지 못한 것은 그날밤 숙소로 돌아와 영어사전을 뒤적거리며 익혔다.

    지금도 나는 어려운 상황과 맞닥뜨리거나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솔직하게 인정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취한다. 그러려면 우선 상대방을 편하게 해줘야 한다. 외국인에게 나를 소개할 때 곧잘 내 성(姓)을 빌려 농담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를 ‘문(Moon)’이라고 소개한 다음 ‘in the sky’라고 덧붙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딱딱한 자리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도 예외없이 웃음을 지으며 마음을 연다. 물론 나 또한 상대에게 부담없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

    SK건설과 인연을 맺은 것도 중동에서였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5년 넘게 근무하며 지역전문가로 자리잡아가던 어느날, 당시 선경건설(現 SK건설)의 조종태 사장이 중동시장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았다가 내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조사장에게 자동차를 내주고 길 안내를 해주며 중동 현지 사정과 정보를 들려줬다. 그때 조사장이 나를 스카우트할 속셈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얼마 후 휴가를 얻어 잠시 귀국했을 때 조사장이 나를 불러서는 선경건설로 오라고 제의했다. 그 무렵 선경건설 배정화 부장은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지사로 세 차례나 나를 찾아와 선경 입사를 권했다. 그때만 해도 선경건설은 신생 회사(1977년 설립)였기 때문에 막상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보니 여간 고민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러나 내 30대 시절이 다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기회라는 판단이 섰다. 결국 다시 한번 새롭게 도전한다는 자세로 1981년, 과감하게 선경건설로 자리를 옮겼다.

    ‘구원투수’, 다시 사우디로

    중동이라면 지긋지긋했기에 선경에 입사할 때는 해외 근무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그 조건의 ‘유효기간’은 6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입사한지 반 년 만에 다시 사우디아라비아로 발령이 난 것이다.

    그런데 당시는 그 요란하던 중동 건설 붐도 서서히 끝물이 되어 가던 시점이었다. 내게 맡겨진 것은 일종의 ‘구원투수’ 역할이었다. 그 무렵 선경건설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벌이던 병원공사가 갖가지 소송에 휘말리면서 자금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현지에 부임해 상황을 파악해보니 다른 것은 제쳐놓고 당장 직원들의 의식주 해결을 위한 자금을 융통하기도 막막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해결방안을 모색한 끝에 어렵사리 실마리를 찾아냈다. 소송과 관련해 압류된 30만달러 상당의 자산과 80만달러의 이행보증금만 돌려받으면 발등의 불을 끌 수 있을 듯했다. 압류 건(件)은 해결이 쉽지 않을 것 같아 내가 직접 맡기로 했고, 이행보증금 건은 부하 직원에게 맡겼다.

    나는 현지 스폰서를 찾아다니며 압류를 풀어달라고 끈덕지게 요구했고, 마침내 ‘선(先) 압류 해제, 후(後) 공사 발주’라는 협상 카드를 내밀어 합의를 이끌어냈다. 부하 직원도 꼬박 1주일을 매달린 끝에 이행보증금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추가로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야적장에 쌓아둔 자재들을 미련없이 처분했다. 직원들 먹이고 재우는 데 쓸 돈도 없는 마당에 당장 쓰지도 못할 자재를 꽁꽁 틀어쥐고 행여 도둑이라도 맞을까봐 사람까지 써가며 지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돈이 돌고 복잡하게 얽혀 있던 상황도 점차 가닥이 잡혔다. 기업 경영에서 책임자의 정확한 상황 판단과 신속한 의사결정, 그에 따른 과감한 실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한 기회였다.

    CEO와 체력

    그 후로도 나는 해외영업부와 해외사업부에서 근무하며 플랜트 등의 공사를 주도했다. 중동과 동남아, 남미 근무를 거쳐 1997년 국내 영업본부장(전무)으로 옮겨 해외 사업과의 질긴 인연을 잠시 접었다. 나는 토목공학을 전공했지만, 국내 토목공사 현장에서 소장으로 일해본 적은 없다. 때문에 30년 가까이 건설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나는 이 시기에 건축·토목공사를 수주하는 등 국내 영업분야에 새로 도전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 건설업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고, 국내 인맥을 형성하는 기회도 얻었다.

    2000년 1월 부사장이 되면서 해외플랜트사업부문장을 맡아 다시 해외 사업과 연을 잇는가 싶었는데, 그해 4월 초 갑작스레 회사로부터 사장으로 내정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주위에서는 축하를 건넸지만, 정작 나로서는 적잖이 고민스러웠다. 물론 그때까지도 임원으로서 웬만한 의사결정은 책임졌지만, 막상 의사결정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오른다고 생각하니 부담감이 컸다. 그러나 30대 중반 선경건설에 입사하던 때의 마음 자세를 떠올리며 몸과 마음을 추스렸다.

    최근 SK건설은 독일의 지멘스, 멕시코 건설업체 등과 함께 멕시코에서 대형 플랜트 공사를 수주해 공사를 수행했다. 12억달러 규모의 공사인데, 그 전까지 10억달러 이상의 대형 공사를 수행한 적이 없는 SK건설은 공사 중반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컨소시엄에 함께 참여한 지멘스사는 워낙 크고 경험이 많은 회사라 별 문제 없이 공사를 수행했지만, 우리 회사는 경험 부족에다 멕시코 건설업체의 부도까지 겹쳐 곤경에 처했다.

    나는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무엇보다도 발주처인 페멕스(멕시코 국영 석유회사) 최고 책임자와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 창구를 트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페멕스측에 CEO간 정례회의를 제안했다. 페멕스 CEO는 처음엔 난색을 표했지만, 내 특유의 끈질긴 요청을 이기지 못해 지난해부터 정례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지금도 나는 매월 비행기로 17시간 거리인 멕시코 현지까지 날아가 회의에 참석한다.

    CEO들이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다보니 공사를 원만하게 이끌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결코 만만한 일정이 아닌 만큼 CEO에게 체력이 얼마나 중요한 자질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SK그룹 최종현 선대 회장이 즐겨 하던 기(氣) 체조를 꾸준히 하고 있다.

    넓게 보되 빨리 판단하라

    산업자원부가 기획한 공학교육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지난해 2학기에 모교인 연세대 토목공학과 후배들을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 대학생이 “CEO에 오르기 위한 특별한 비결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했다. 나는 주저없이 이렇게 답했다.

    “도전하고자 하는 의지와 성실성은 여러분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자산입니다.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그것을 계속 키워나가십시오. 그와 더불어 사안을 크고 넓게 보는 훈련을 통해 모두를 위한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나는 중동에 근무할 때부터 늘 내가 속한 조직 전체를 위한 이익과 기회비용을 생각해 왔다. 그러다보니 항상 한 발 앞선 판단이 요구됐고, 그런 판단이 선 뒤에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따라야 했다. 또한 매사에 두려움보다는 자신감이 앞서야 했다.

    벼랑끝 같은 위기상황에서 내리는 결단은 거시적으로 앞을 내다보되 사업 전반에 대한 이해와 애착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판단은 경영자의 몫임을 늘 잊지 않으려 한다. 더구나 그것이 빠르고 정확해야 함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