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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배우 최은희

“창의, 열정, 낭만 넘치던 명동시대를 부활시키고 싶다”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배우 최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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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최은희

‘명동시대’를 이끌었던 1970년대 명동국립극장 전경. 명동예술극장은 이 형태를 그대로 복원해 개관했다.

“연극은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공연이잖아요. 객석이 이렇게 무대 가까이, 둘러싸듯 되어 있으니 참 좋아요. 6·25 전쟁 때 진해극장에서 오셀로를 공연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무대 바로 앞까지 사람들이 앉아서 숨소리가 다 들릴 지경이었지요. 오셀로와 데스데모나가 왈츠를 추는 장면을 연기할 때는, 걸음 뗄 여유조차 없어서 제자리 스텝만 밟았어요. 그래도 관객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작품을 감상했는지 몰라요. 그게 연극의 힘이고 매력이지요.”

‘다방시대’

극장을 벗어나 최씨가 오래도록 그리워한 명동 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정문을 나서자 바로 앞에 전통찻집이 보인다. ‘명동국립극장’ 시절 ‘1번지 다방’이 있던 자리란다.

“건물은 바뀌었는데, 거리 모양은 그대로예요. 아, 그 자리에 이렇게 다시 찻집이 생겼네. 예전에 배우들과 같이 참 자주 왔지요. 그때도 이렇게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였어요. 그 시절엔 다방을 많이 다녔습니다. 저기 아래, 조선호텔 방향으로 쭉 나가다가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있던 ‘모나리자 다방’도 좋아했어요. 영화음악을 주로 틀어줬는데, 거기서 듣던 영화 ‘역마차’ 주제가는 지금도 뚜렷이 생각나요.”

‘1번지 다방’ 얘기가 나오자, 최씨의 기억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옷가게와 음식점의 쇼윈도로 휘황찬란한 명동 거리가 아직 흙길이던 시절, 이 길의 주인은 ‘다방’이었다. 작가 고은은 ‘이중섭 평전’에서 “지구 위의 어디에 술 마시는 것으로만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곳이 있을 것인가. … 1950년대의 서울 명동뿐이었다”고 썼다. 그 시절 다방은 그렇게 예술인의 요람이자 창조의 공간이었다.



열두어 평 남짓한 다방 안은 언제나 걸죽하게 내뿜는 담배연기와 술냄새가 범벅이 돼 있었다 … 이 바닥에서의 주인은 따로 있다. 다방주인 마담은 터줏대감 노릇을 자임해 오는 몇몇 문객(文客)들 눈치보기가 노상 바빴다 … 시인, 소설가, 평론가, 연극인, 영화인, 음악인, 잡지·신문기자, 출판인, 만화가, 문학청년 등등 문학과 예술장르에 사돈의 팔촌쯤 얽혀도 죄 모여들어 들볶아치는 동방싸롱은 그야말로 방귀깨나 뀌는 장안의 유명 예술인은 모두가 모여들었다.

작가 김시철이 ‘격랑과 낭만’에 묘사해놓은 명동 ‘동방싸롱’의 모습이다. 최씨도 이곳을 기억한다. 연극인 이해랑 선생이 운영하던 곳. 당시 명동 다방은 어디를 가든 으레 문인이 주축을 차지하게 마련이었는데 여기는 좀 달랐다. 문인들 사이로 연극인도 제법 있었다.

“차 한잔 시켜놓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사람이 많았지요. 그런 사람들을 놀리는 말로 ‘벽화’라고 불렀어요. 그래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는 않았던 게, 그 시절엔 그게 다방 문화였거든요. 우리한테 다방은 차 마시는 곳이 아니라, 사람 만나고, 글 쓰고, 음악도 듣는, 그런 곳이었어요. 사무실 있는 극단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연극하는 사람도 다들 다방에 모여 작품 얘기하고 회의도 했지요.”

‘세월은 가도 … 내 가슴에 있네’

각종 문화행사도 다방에서 열렸다. 최씨가 즐겨 가던 돌체다방은 하루 종일 클래식 음악만 트는 곳으로 유명했는데, 특별한 날이면 기꺼이 예술인들에게 공간을 빌려줬다. 서울대 법대 졸업생 음악회, ‘새로운 언어’ 출판기념회, 양주동 문학강연회 등이 이곳에서 열렸다. 다른 다방에서도 시 낭송의 밤, 전시회, 음악회, 문학토론회 등이 흔히 열렸다. 해외로 떠나는 예술인을 위한 환송회나 귀국 보고회도 다방에서 열렸고, 가난한 예술가들은 지인들로 북적이는 다방 안에서 소박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가수 박인희가 부른 노래 ‘세월이 가면’은 그 시절 명동이 만들어낸 걸작이기도 하다. 강계순이 쓴 박인환 평전 ‘아! 박인환’에 따르면, 시인 박인환은 1956년 봄 명동의 한 대폿집에서 가수 나애심, 작곡가 이진섭, 언론인 송지영 등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다 갑자기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것을 넘겨다보던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붙였고, 나애심은 흥얼흥얼 콧노래로 가락을 따라 했다. 나중에 합석한 테너 임만섭이 우렁찬 목소리로 이 곡을 노래하자, 지나던 행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이날 이후 ‘세월이 가면’은 순식간에 명동에 퍼졌다. 마치 거짓말처럼.

“가끔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 시절이 돌아올 수 있을까. 명동에서 다시 연극을 하고 예술을 얘기할 수 있을까. 명동예술극장이 문을 여니 그 꿈이 이뤄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해도, 명동에 다시 예술과 낭만이 돌아오게 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이지요.”

최근 명동에 문화예술공연장이 속속 들어서는 것도 최씨가 희망을 품게 되는 이유다. 지난 4월 M-플라자 5층 서울문화교류관광정보센터 안에 200석 규모의 다목적 공연장 ‘명동해치홀’이 문을 열었다. 지난해 5월에는 명동유네스코 회관 안에 410석 규모의 명동아트센터가 자리 잡았다.

연습부터 공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연극이 명동에서 만들어지면, 연극인을 비롯한 예술인들이 명동에 머물며 창의와 열정의 또 다른 역사를 쓰기 시작할 것이다. 최씨는 그 안에서 자신도 한몫을 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이 무대에 다시 오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만, 다음에는 내게 맞는 작품에서 주인공도 하고 싶어요. 명동을 기억하는 이들이 다시 이 극장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6월5일, 마침내 개관한 명동예술극장에서 최씨는 노인 분장을 하고 지팡이를 짚은 채 무대에 섰다. 일평생 주연만 하던 그가 맡은 생애 가장 작은 역이었지만, 무대 위에서 그는 그저 행복해 보였다. 작품이 끝난 뒤 커튼콜 자리에 최씨가 나타났을 때, 객석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명동예술극장에도, 최씨에게도 또 다른 ‘명동시대’의 시작이었다.

신동아 2009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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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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