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호

| 역사 기행 |

시마네현에서 본 ‘다케시마’의 허상

양심적 일본인들 ‘독도는 한국 땅’ 인식

  • 원도길 |수필가, 규슈치과대학 객원교수

    입력2017-05-04 12:4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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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정부는 올해 새학기부터 초·중·고교 사회과목을 통해 독도가 자국 영토라는 교육을 대폭 강화했다. 일본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 필자가 2월 22일 일본 시마네현에서 열린 제12회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참관한 소회와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일본 정부의 주장이 허구임을 증명하는 여행기를 보내왔다.
    지금 일본은 옛날 제국의 재건을 꿈꾸고 있다. 아베 총리가 추진하고 있는 헌법 제9조 개정은 결국 전쟁하는 국가로 만들기 위한 그들의 거대한 책략이라 하겠다. 또한 일본 문부성은 올해 신학기부터 초중학교 사회과 교과서 학습지도요령을 개정해 노골적으로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가르치도록 강제했다. 이처럼 배덕(背德)의 역사를 쓰려는 일본의 행동에 분개해 나는 호랑이굴을 찾아가는 비장한 각오로 집을 나섰다.

    2월 21일 아침, 나는 일본의 북규슈에서 신칸센을 타고 70여 분 만에 오카야마 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시마네현의 마쓰에행 특급열차로 갈아탔다. 산인(山陰)지방은 초행이라 좀 긴장이 됐다. 차 안에는 승객이 그리 많지 않았다.열차는 특급이라고 하지만 단선철도라 그런지 속도가 느리고 차체가 자주 흔들렸다. 날씨가 흐린 탓인지 바깥 공기는 싸늘했다. 일본 열도 중 제일 큰 섬인 혼슈는 1000m가 넘는 높은 산과 고원지대(中國山脈)로 인해 터널도 많고, 철교도 많았다. 열차는 곡예하듯 산 밑을 요리저리 돌면서 달렸다.

    산 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다보니 눈에 비치는 산촌의 풍경이 정겹기만 하다. 그런데 열차가 긴 고개 터널을 벗어나자 생각지도 않은, 눈이 시리도록 하얀 은세계가 펼쳐졌다. 가와바타의 소설 ‘설국’의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가자 설국이었다’가 떠오르며 내 가슴은 설레기 시작했다.



    시마네현 ‘다케시마의 날’

    오래간만에 보는 설경은 주름진 내 눈가를 촉촉이 적셨고, 가슴속 깊이 쌓여 있던 앙금이 순간에 훅 사라지는 듯했다. 그런데 특급열차는 아무렇지 않은 듯 온통 하얀 구름과 흰 눈으로 뒤덮인 지평선을 향해 거침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열차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오른쪽 창문 밖을 보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누군가가 ‘다이센’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흰 눈을 산머리에 이고 있는 다이센(大山, 해발 1729m)이 제법 가까이 다가와 보였다. 눈을 부릅뜨고 산 정상을 살펴봐도 다이센의 전체 모습은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어디쯤이 정상이고 어디까지가 운애에 싸여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오랜만에 이국땅에서 산정무한(山情無限)의 정취를 알 것만 같았다.

    일본지도를 펴들고 다이센과 백두산을 선으로 이어보았다. 기묘하게도 동해에 떠 있는 독도가 그 일직선상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4세기 초 백두산이 대폭발을 했다면 같은 화산대를 이루는 다이센도 대충 그 시기에 첫 용암을 분출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나는 독도가 이 두 화산 활동으로 인해 마그마가 동해 위로 솟구쳐 형성된 분출암(rock)이 라는 것을 상상하다가 그만 내일이 무슨 날인지 깜박 잊고 있었다.


    강치 사냥

    2월 22일은 시마네현이 ‘다케시마(竹島)의 날’을 제정한 지 12주년이 되는 날이다. 내가 지금 마쓰에행 특급열차를 탄 이유는 소위 일본의 양심적인 역사학자나 지식인들이 ‘다케시마(竹島, 독도)는 한국 땅’임을 학술적으로 지적한 자료를 일본인들에게 그대로 전하기 위해서다.

    일본이 독도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1905년 2월 22일에 다케시마를 시마네현 오키(隱岐)섬 관할 아래 둔다고 고시한 옛날 사료에 있다. 또 하나 일본은 6·25전쟁을 틈타 미국과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1951년 9월 8일)을 체결하고 다음 해 4월 28일 발효하려 했다(그 낌새를 챈 이승만 대통령이 조문 발효 100일 전인 1952년 1월 18일 이승만라인(평화선)을 먼저 선포했다. 일본은 즉시 이승만 라인을 부정했다).

    미·일 평화조문 제2장은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며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조선에 대한 모든 권리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고 돼 있다. 여기서 다케시마(독도)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실제로 다케시마가 일본 영토라면 미국에 빌붙어 다케시마를 조약 문구에 넣어달라고 할 이유도 없었거니와, 1904년 러일전쟁 전후 발틱함대의 움직임을 감시한다는 구실로 다케시마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려 했다면 다케시마가 이전엔 일본 영토가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닌가.

    현재 일본 정부는 리앙쿠르(서양 명칭)섬이 다케시마로 탈바꿈하게 된 과정을 철저히 연구하고 또 적극 선전하고 있다. 이번에 시마네 현청 안 ‘다케시마 자료실’에서 살펴본 자료에 따르면 도쿠가와 시대(15세기)에 일본 사람들은 막부의 허가를 얻어 211km나 떨어진 다케시마에 배를 타고 가서 고기잡이를 했다고 돼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막부는 다케시마가 자국 영토가 아니라고 봤기 때문에 일부러 허가서까지 발급해 비상시를 대비했다고 봐야 한다.

    독도엔 어종이 풍부했으며, 오키섬 어부들은 강치를 잡아 큰 돈벌이를 했다. 강치가 점점 줄어들어 멸종 위기를 맞자 자체적으로 어렵(漁獵) 시기를 제한했다는 설도 있으나 불분명하다. 1904년 일본이 러일전쟁을 틈타 한국을 제3국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일본군대가 한국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강요한 제1차 한일의정서가 체결됐다. 당시 일본 어부들은 한일의정서와 관계없이 수년 전부터 허가도 없이 독도에 들어와 강치를 포획했다.



    다케시마 프로파간다

    강치가 울릉도, 독도에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일본인들에게 알려진 것은 1900년경이라고 하나, 실제 고기사냥을 시작한 것은 그보다 5~6년 앞선 1895년쯤으로 알려져 있다. 강치는 고기 맛도 좋거니와 피하지방은 기름으로 쓰이고, 가죽털은 비단같이 부드러워서 가방이나 벨트를 만들면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비춰보면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던 1904년 9월 오키섬에서 독도의 강치잡이에 재미를 본 나카이는 일본 정부에 보물섬 다케시마를 하루속히 일본 영토로 편입해줄 것을 간청했다. 나카이의 청원 서류를 받아든 일본 정부는 시마네현의 의견을 청취한 후, 독도를 오키도청 소관 아래 두어도 지장이 없다고 판단하고 1905년 각의결정을 통해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라 명명하며 그 취지를 내무대신으로 하여금 시마네현 지사에게 전달케 했다.

    이 각의결정에 따라 일본은 다케시마가 자국의 영토가 되었다고 지금까지 주장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독도는 한일협약에 의해 한국이 일제의 보호국이 되자마자 그들에게 빼앗긴 한국 영토 제1호라고 한국 국민은 이해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 정부가 다케시마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논리는 극히 단순하다. 오키섬의 어부들이 1900년부터 다케시마에서 강치를 포획해왔으니 다케시마는 말할 것도 없이 일본 영토라는, 이해할 수 없는 선전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울릉도 사람들은 그 당시 굶고 살았단 말인가. 그들도 동해에 배를 띄워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독도 바다에서 수많은 고기를 낚으며 생을 유지해온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이 같은 일본 정부의 ‘다케시마 프로파간다’는 마치, 밤나무를 심은 주인은 따로 있는데 수년간 그 밤나무 밑에 떨어진 밤을 주워 먹던 사람이 어느 날 뜬금없이 자기가 진짜 밤나무 주인 행세를 하려고 억지 부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독도의 영물인 우리의 강치를 40여 년 동안 수천 마리나 포획한 자들이 이제 와서 독도를 내놓으라니….

    일본의 유명한 역사가와 지리학자도 독도는 한국 영토라 증언하지 않았던가. 1905년 도쿄의 박문사가 발행한 ‘한국신지리’에서 지리학자 다부치(田淵友彦) 씨는 현 다케시마를 ‘리앙쿠르섬’이란 이름으로 강원도 울릉도 강역(疆域) 안에 포함시켰다.


    한·일 데모대의 충돌

    또한 일본의 역사가 중에서 한일근대사 연구에 조예가 깊은 나이토(內藤雋輔) 교수는 “1667년에 사이토(斎藤豊仙)가 펴낸 고문헌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에 ‘일본의 서북쪽 한계를 오키섬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사이토 씨는 마쓰에 한(松江籓)의 무사로 일본의 ‘사무라이’ 기질이 그의 저서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나이토 교수는 그의 고결하고 양심적인 인품에 감동해 울릉도와 독도는 자국(일본)의 영토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는지 모른다.

    특급열차는 오후 5시가 넘어 마쓰에 역에 도착했다. 나는 역에 내리자마자 택시를 타고 현청으로 갔다. 시마네 현청 앞에는 커다란 광고탑이 서 있었다. ‘다케시마를 돌려다오!’라는 슬로건을 보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나는 바로 현청에 들러 접수안내원에게 내일 행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오전 11시부터 현민회관에서 ‘다케시마의 날’ 기념행사가 있다고 했다. 나는 한국인 신원을 밝히고 식장에 참석할 수 있는지 물었다. 안내원은 예약 없는 외부 인사의 입장을 허가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나는 방도가 없다고 생각하고 현청에서 나와 바로 옆으로 보이는 마쓰에 성(城)을 잠시 둘러보았다.

    다음 날인 2월 22일 오전, 현청 입구에 있는 다케시마 자료전시관에 들러 자료를 살펴보기도 하고 여러 종류의 다케시마 선전 팸플릿도 챙겨 보았다. 오후 1시가 되자 현청 앞에는 일장기가 새겨진 우익단체의 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플래카드를 든 데모대가 도로를 따라 행렬을 지어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이때 어디선가 태극기를 흔들면서 한국인 데모대가 나타나더니 같은 쪽으로 돌진했다. 순간 60여 명의 한국인과 일본인 데모대가 맞부딪치면서 한동안 몸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경찰의 진압으로 큰 사고 없이 ‘제12주년 다케시마의 날’ 행사는 막을 내렸다.

    나는 마쓰에역으로 돌아와 오카야마행 특급열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가 떠날 무렵 해는 서산에 지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피로가 몰려와 눈을 감고 한참 묵상에 잠겨 있었다. 두 나라 젊은이들이 광적으로 ‘다케시마’와 ‘독도’를 외치는 것을 보며 한일 양국이 언제까지 이런 관계로 지내야 하는지에 대해 자문해보았다.


    일본 기자의 은밀한 상륙

    시마네 현청을 다녀온 후 나는 시립도서관에서 우연히 66년 전(1951년 11월) 일본의 한 신문기자들이 은밀히 독도에 상륙해 취재한 기사를 발견했다. 패전 후 독도를 찾은 적이 없는 일본 신문기자들이 돗토리현 수산고교의 연습선(111t)을 대절해 1951년 11월 14일 아침 사카이항에서 배를 띄운 것이다.

    ‘0대 선장과 기관장, 신문기자와 카메라맨 등 모두 6명이 탄 연습선은 설렘과 두려움으로 4시간 동안 거센 파도를 헤치며 독도를 향했다. 망원경으로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던 선장이 “배가 나타났다”고 소리쳤다. 수평선 저쪽에 조그맣게 돛단배 같은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것은 조금도 움직이질 않았다.

    얼마 후 선장이 다시 큰소리로 “리앙쿠르섬이다”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부터 배는 속도를 내어 동해 바다 가르기를 20여 분, 눈앞에 두 개의 우뚝 선 바위섬이 나타났다. 동해의 코발트색 바다와 섬에 내린 설상(雪霜)이 어울려 멋진 콘트라스트를 이루는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동섬과 서섬은 100여 m쯤 떨어져 있는데 그 사이에는 작은 암초가 가득했다. 동섬을 돌아가자 직경 10m쯤 되는 동굴 안으로 바닷물이 흘러들었다 나왔다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곳은 화구(火口)의 요면(凹面) 같은 안전지대였다. 초여름이면 이 주변에 강치가 모여들어 새끼를 낳아 세계적으로 이름난 장소다.

    서도로 배를 돌리자 길이가 2m나 되는 흑갈색 강치가 몸을 활처럼 크게 젖히더니 다시 바닷물 속으로 텀벙 뛰어들었다. 서도의 바닷물을 가르며 북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강치의 숫자가 점점 늘어갔다. ‘웟- 웟-’ 묘한 소리로 우는 강치가 이 섬의 괴기한 분위기를 자아내자 머리끝이 쭈뼛 서는 느낌마저 들었다. 대충 강치의 마리 수는 60마리는 되어 보였다.

    배가 다시 동도를 돌다가 움막 같은 집을 발견했다. 기자들은 신기한 듯 모두 배에서 육지로 뛰어내렸다. 가까이 가보니 움막집으로 착시한 것은 갈대를 엮은 이엉들이었다. 그런데 그 옆에 비석이 서 있었다. 높이 2m 너비 40cm의 화강암 비석이었다. 거기에는 ‘獨島遭難漁民慰靈碑(독도조난어민위령비)’라는 글자가 새겨 있었고 비석의 왼쪽에는 ‘大韓民國慶尙北道知事 曺在千 題(대한민국경상북도지사 조재천 제)’라 적혀 있었다.



    탁란(托卵)의 심리

    뒤에는 ‘3년 전 6월 8일, 59명의 어부가 열여덟 척의 배에 분승해 출어 조업 중에 돌발적인 해상사고로 인해 어부 모두가 사망하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에 우리 용사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합장’이란 내용이 있었다. 오후 5시 반에 선장은 뱃머리를 돌렸다. 서쪽 하늘 가득히 저녁놀이 검푸르게 물들기 시작하자 수평선 위로 뜻밖의 산봉우리 6개가 눈에 크게 들어왔다. 저곳은 아마 한국의 산들이겠지….’

    신문기사를 꼼꼼히 읽으면서 나는 특이한 뉘앙스를 감지했다. 일본 정부는 1905년에 다케시마를 자국 영토로 편입했다. 그런데 젊은 선장은 자연스럽게 리앙쿠르섬이라 외쳤다. 46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선장의 뇌리에 독도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바위(岩礁)로 보였을 뿐 일본 영토로 인식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한편 위령비에 새긴 ‘大韓民國’이란 국명을 그대로 기사화했는데 이는 그들의 의식 속에 독도는 일본과 너무나 거리가 떨어져있다는 것에 대한 어떤 박탈감을 표출한 문구였으리라. 또한 ‘웟-웟-’ 강치들의 울음소리에 괴기한 분위기를 느꼈다는 것은 독도의 자연환경이 일본 사람에게 위화감을 자아냈다고 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독도 탐방을 마치고 배의 선수를 돌렸을 때 수평선 위로 나타난 6개의 봉우리는 울릉도의 산봉우리임에 틀림없다. 독도에서 울릉도가 이처럼 지리적으로 코앞에 있는 것에 대한 경이감이 오늘날 일본 사람으로 하여금 혹여 탁란(托卵, 뻐꾸기처럼 다른 새로 하여금 자기 알을 품고 기르게 함)의 심리를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어쨌든 한국과 일본은 서로 좋은 이웃으로 긍정적인 사고로 새 역사를 엮어가야 할 사이다.  





    원도길

    ● 1942년 평양 출생.
    ● 한국외국어대 졸업, 규슈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수사 수료
    ● 규슈국제대학 국제관계학부 교수 현 규슈치과대학 객원교수
    ● 저서 ‘원 교수가 일본에서 만난 사람들’, ‘현해탄’ 한일 대역 시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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