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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 명사의 버킷 리스트

김동연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아버지와의 대화

김동연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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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김동연
●1957년 충북 음성 출생
●덕수상고, 국제대, 미시간대 정책학 박사
●기획예산처 산업재정단장 재정정책국장
●대통령실 경제금융비서관 국정과제비서관

항상 꿈을 꾸었다. 그 많던 꿈 중에서 실현이 불가능한, 그래서 더욱 절실한 꿈이 하나 있었다.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버킷 리스트 중에서 늘 앞자리를 차지하는 꿈이었다.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대화’였다.

아버지는 서른셋 젊은 나이에, 당신보다 한 살 어린 젊은 아내와 네 자식을 두고 돌아가셨다. 나는 장남이었고 열한 살이었다. 사업을 제법 크게 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살던 큰 집에서 쫓기듯 청계천 무허가 판잣집으로 이사했다. 그 판잣집은 몇 년 뒤 강제 철거돼 우리 가족은 구 성남 지역으로 강제이주하게 됐고 한동안 천막에서 살아야만 했다. 망해도 그렇게 망할 수가 없었다. 학업은 물론 때로는 끼니도 걱정이었다. 나는 인문계 고교에 입학하기를 원했으나 가정 형편상 상업고교에 진학했고 졸업하기 몇 달 전부터는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은행에 취직해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할머니와 어머니, 세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 된 것이다.

어렵게 공부하고 일찍 직장생활 하면서 나는 비교적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철이 들면서 내 마음속에 늘 자리하고 있었던, 가슴에 사무친 꿈 하나는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대화였다. 단 하루, 아버지와 철든 남자 대 남자로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내 수명을 일 년쯤 단축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무의식중에 이 꿈에 대한 기도를 수십 년 했다.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그 소망이 너무도 간절해서 이 생각을 할 때마다 항상 코끝이 찡했다.

만약 아버지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처음에는 아버지를 원망하리라 생각했다. 뭐가 그리 급해서 젊디젊은 아내와 자식 넷을 두고 그리 빨리 가셨냐고, 장남인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냐고, 제 좁은 어깨에 너무 무거운 짐을 얹어서 힘에 겹다고, 왜 이렇게 우리 가족을 고생시키느냐고….

한참 뒤에는 아버지가 도대체 어떤 분이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학력이 짧지만 젊어서 사업을 크게 일으켰던 분. 어려운 사람 도와주길 좋아하셨던 분. 수해가 나면 늘 어린 나를 앞세워 모 신문사에 가서 수재의연금을 내곤 하시던 분. 고모 말씀에 따르면 혼자되신 할아버지를 어린 나이 때부터 극진히 모신 더없는 효자라는 분. 내가 학교에서 일등을 하지 못하면 어김없이 회초리를 들 정도로 엄했던 분….

그런 그분이 어느 몹시 추운 날 등굣길에 내가 너무 추워하자 “춥지? 춥지 않게 해줄게” 하며 불러줬던 ‘꽃집의 아가씨는 예뻐요/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라는 노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내가 발견한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본 젊은 아버지의 고민들. 그 분을 만나면 나는 묻고 싶었다. 도대체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냐고. 어떤 꿈을 가지고 계셨냐고.

또 한참 뒤에는 아버지에게 자랑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해드리고 싶었다. 어린 나이에 직장생활 하면서 가족들을 돌보고 있다고. 은행 다니며 야간대학에도 진학했다고. 죽도록 공부해서 행정고시와 입법고시에 합격했다고. 경제기획원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어려운 과정을 거쳐 국비와 풀브라이트(Fulbright) 장학금을 받아 미국에서 박사까지 공부했다고. 자리나 승진보다는 ‘사회 변화에 대한 기여’를 신조로 공직생활을 하고 있다고. 아버지가 그렇게 바꾸고 싶었던, 본관(本貫)이 잘못 기재된 호적도 정정했다고. 동생 셋 모두 가정을 이루게 했다고. 늙어가는 어머니 잘 모시려고 애쓰고 있다고….

그리고 그보다 한참 뒤에는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인생을 이야기하고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담담하게, 사는 이야기와 죽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제는 그 어떤 사진 속에서도 아버지는 나보다 20년도 더 젊다. 그 준수한 젊은 청년과 지난 이야기뿐 아니라 인생을 관조(觀照)하며 할 수 있는 이야기, 앞으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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