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호

“준비 안 된 안철수, 얼마나 궁했으면 새치기를…”

다시 광야에 선 노회찬

  • 강지남 기자 | layra@donga.com

    입력2013-03-19 11: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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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철수와 전화로 양해 구할 사이 아니다
    • 대법원, 기득권 비리 감쌀 의도 없고서야…
    • 진보정당 최악의 상황…마스터플랜 다시 짜야
    • 경제민주화, 불공정 경제 개선 계속 노력할 것
    “준비 안 된 안철수, 얼마나 궁했으면 새치기를…”
    노회찬(57)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는 ‘중앙정치’ 무대에 선 이래 ‘신동아’와 세 차례 인터뷰를 했다. 첫 인터뷰는 2004년 17대 총선 직후였다. 당시 그는 10석을 확보해 당당히 원내 진입한 민노당의 일등공신이었고, 비례의원으로 처음 금배지를 단 새내기 국회의원이었다. 두 번째는 2007년 대선 출마를 선언, 권영길 심상정과의 당내 경선을 앞둔 때였다.

    얼마 전 그는 호시절을 뒤로한 채 다시 광야에 섰다. ‘안기부 X파일’에 등장하는 소위 ‘떡값 검사’ 실명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2월 14일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4월, 집행유예 1년의 확정판결을 받고 국회의원직을 잃었다. ‘신동아’는 3월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진보정의당 당사에서 그를 세 번째로 만났다.

    “못된 것부터 배운다더니…”

    그와의 만남을 기다리는 사이, ‘안철수 양해 사건’이 터졌다. 3월 4일 송호창 의원(무소속)이 기자회견을 열고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가 서울 노원병(丙)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할 것”이라고 밝혔다. 안 전 교수가 노 대표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노 대표는 “전화통화는 했지만 노원병 출마나 양해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며 “기자회견 직전에 마치 양해를 구한 것처럼 각본 짜 맞추듯 하는 것은 구태 정치”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 양해 구했다, 아니다…. 어찌 된 겁니까.



    “3월 4일 안 전 교수와 통화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왜 전화했나?’ 궁금했어요. 신문에 안철수 노원병 출마설이 보도되고 있어서 X파일 사건 위로차 전화했다고만 볼 순 없었어요. 정말 노원병 출마 생각이 있는 건지, 그저 정치인으로서 폭넓게 교유하는 차원에서 한 건지 궁금했어요. 그런데 1시간 뒤 어느 기자가 전화해서, 안 전 교수가 (노원병 출마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는데 사실이냐고 묻더군요. 곧 기자회견이 열린다고도 했습니다. 그때 제가 화가 난 거예요. 그래서 바로 송호창 의원에게 전화해서 격렬하게 항의했습니다. 정치하면 못된 것부터 먼저 배운다더니, 이런 거부터 배워가지고는….”

    ▼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출마선언을 대리인이 하다니 참…. 더 군색해지는 걸 피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송 의원이 제 X파일 사건 1심 변호인이었습니다. 제가 2월 27일 송 의원을 만나, 우리가 후보를 낼 예정이니 그쪽은 다른 데 가달라고 했습니다. ‘부산 영도는 힘들다’고 하길래, ‘안 교수 정도면 충분히 될 수 있다’고 했죠. 우리가 후보를 낸 다음이면 자신들이 더 군색해지니까, 준비 안 된 채 발표한 게 아닌가 해요. 마치 새치기하듯이.”

    ▼ 안 전 교수가 노원병에 출마하면 안 됩니까.

    “저와 조직을 달리하는 사람이니 어디 출마하든 간섭할 일은 아니죠. 하지만 그가 노원병에 오는 순간 ‘대법원 판결에 대한 유권자의 심판’이라는, 애초에 우리가 설정한 선거 구도가 무색해졌습니다. 그 분이 여기에 특정한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진보정당이 어렵게 의석을 얻은 곳입니다. 양해 같은 거 구할 필요 없는 곳에서 출마했으면 좋겠다는 거죠.”

    “아내는 민주화 유공자”

    ▼ 두 분은 자주 통화하는 사이인가요.

    “난생처음이죠. 그러니까 그 사람하고 저하고의 관계가 전화해서 양해 구할 관계가 아니거니와, 사안 자체가 초면인 사람들끼리 전화로 양해 구할 수 있는 건도 아니었다는 거죠.”

    ▼ 이런 해프닝이 벌어진 후에 다시 연락이 오던가요.

    “그 이후로는 뭐…. 없습니다.”

    진보정의당의 노원병 후보는 노 대표의 부인 김지선(58) 씨로 확정됐다. 그간 ‘부인 출마설’이 나올 때마다 그는 “가장 많은 득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후보가 돼야 한다”고 원칙을 거론해왔다.

    ▼ 부인의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판단한 건가요.

    “우선 여러 단체에서 나오라는 요청이 있었고, 당에서도 많은 검토를 했고, 여론조사도 했습니다. 노회찬 지역구라서, 제 처에게 권리가 있다는 건 절대 아니에요. 다 밝히긴 어렵지만, 후보 적합도 조사에서 46% 정도로 안 전 교수와 비슷한 수치가 나왔습니다.”

    ▼ 부인이 국회의원으로서 자질이 있다고 평가하나요.

    “허허. 우리 둘 다 아는 사람들은 저보다 낫다고 해요. 노동운동도 저보다 먼저 더 격렬하게, 열심히 했고, 우리 사회에서 불모지였던 여성운동을 일으켜왔고…. 그동안 저 때문에 정치를 안 한 거지, 저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봅니다.”

    “준비 안 된 안철수, 얼마나 궁했으면 새치기를…”

    3월 12일 노회찬 진보정의당 대표와 4월 재보궐선거 출마 의사를 밝힌 그의 부인 김지선 씨가 서울 노원구 상계동 마들역 인근에서 주민들과 인사하고 있다.

    김지선 씨는 ‘여공’ 출신이다. 중학교를 마치고 16세에 언니의 주민등록증을 갖고 공장에 취직했다. 노조활동에 투신하다 옥살이도 했다. 1978년 여의도 부활절 예배 단상에 올라 50만 인파 앞에서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내가 얘기하면 주관적인 것일 텐데…”라면서도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가만 듣다보니 ‘동지’에 대한 존경이랄까, 믿음이랄까 하는 감정이 전해졌다. 좀 줄여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자기도 먹고살기 바쁜 처지에 노동운동을 했어요. 해고자 권익을 위해 감옥도 두 번 갔다 왔고요.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돼 보상도 받았지요. 1990년대 들어서는 여성운동에 뛰어들었어요. 강서·양천에서 여성의전화 만들 때 일이 생각나요. 개량한복을 커다란 이민가방에 넣어 끌고 다니면서 팔아 사무실 보증금을 마련했죠. 나이 들어서는 공부를 하고 싶어 했어요. 중학교는 졸업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미인가 학교였던 거예요. 마흔일곱인가에 중졸 검정고시 하고, 그다음 고졸 검정고시 하고, 나이 오십 넘어 방송통신대학 졸업하고,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 따고, 55세 넘어서 1급 자격증까지 땄어요. 여성운동 열심히 해서 국무총리상도 받았지요.

    이런 경력 자체가 하버드대 나온 사람과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다고 봐요.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기여도로 보더라도 다른 후보들에 뒤지지 않고요. 국회의원 하려는 사람이라면, 실제 삶 속에서 얼마나 공적인 희생을 감수하고, 어떤 기여를 해 왔는지가 중요합니다. 이런 얘기하면 제가 팔불출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 김 후보는 흔쾌히 응했나요.

    “곡절이 많았습니다. 일단은 저를 대리해 출마하는 것으로 비치니까. 제일 싫어하는 게 ‘노회찬 부인’으로 소개되는 거랑 ‘사모님’이란 호칭이에요.”

    ▼ 그럼 어떻게 부릅니까.

    “그냥 김지선 당원. 그래서 후보로 거론되는 것에 대해 굉장히 거부감이 컸어요. 본인은 안철수든 누구든 견줘도 제대로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강해요. ‘(안철수와) 살아온 길이 다르고, 앞으로 갈 길도 다르다’고 말해요. 제 아내라서 아마 억울할 거예요. ‘노회찬 마누라’에 갇혀서 자신이 이뤄온 게 모두 사장될 수 있으니. 내가 그래서 미안하고요.”

    ▼ 승리할 수 있을까요.

    “허허. 붙어봐야 알죠. 그쪽이 워낙에 센 사람이니까. 근데, 이 사람 당선되면 나는 아마 그쪽에서 뭘 못할 거야. 나보다 잘할 테니까요. 나는 뭐, 부산 영도로 가야죠. 하하.”

    ▼ 야권 후보 단일화 가능성은 없나요.

    “없죠. 일단 안철수 쪽에서 ‘정치 노선이 다른 사람의 출마를 반대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정치노선이 다른데 연대를 왜 합니까. 야권 전체의 승리를 위해 단일화가 필요했다면 애초에 뒤통수치듯 출마하지 말았어야죠. 지금은 ‘힘이 정의다’라고 얘기하는 셈인데, 이런 마당에 무슨 단일화입니까.”

    ▼ 정치 선배로서 안 전 교수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이번 일로 여러모로 실망스럽지만, 그렇다고 이 일로 이 사람에 대해 전면적으로 평가해선 안 된다고 봐요. 아직 본격적으로 자기 정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평가할 것도 없고요. 다만 ‘안철수 현상’과 ‘안철수 현실’은 다르다는 겁니다. 이제는 현실이 돼야 하는데, 성공할 지는 더 두고 봐야죠. 정치개혁에 대한 답이라고 내놓은 게 ‘국회의원 숫자 줄이기’밖에 없어요. 아마추어라도 이렇게 얘기해선 안 됩니다. 그때 굉장히 실망했어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아직 검증이 안 됐습니다. 이 점이 가장 불안한 대목이에요.”

    ‘국민의원’ 노회찬

    노 대표는 2008년 18대 총선 때 노원병에 출마했다가 홍정욱 새누리당 후보에게 1500여 표차로 패했다. 지난해 19대 총선에서 같은 지역구에 재출마해 57%의 높은 득표율로 두 번째 금배지를 달았다. 하지만 1년도 안 돼 다시 ‘백수’가 됐다. 그는 KBS 노조 행사에서 “의원직을 분실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보통 한국 정당에선 국회의원이 아니면 휴지기로 들어갑니다. 근데 우리는 국회의원이든 아니든 늘 대중활동을 해오던 사람들이라 계속 바쁘죠. 근데 대법원 판결 이후 만나자는 사람이 많아져서 더 바빠진 것 같아요. 동국대 불교 쪽 동문회에서도 보자고 하고, 심지어 유수의 기업에서도 만나자고 해요.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한 활동 중에 가장 공감대가 넓은 사건이 아닌가 합니다.”

    ▼ 의원직 상실은 노회찬과 진보정의당에 어떤 의미일까요.

    “후회하지 않습니다. 물론 당장은 어렵죠. 개인적으로는 수입이 없어졌고, 보좌관들을 두고 활동할 수 있는 물적 토대도 잃어버렸습니다. 당으로서도 소중한 의석 하나를 놓쳤죠. 하지만 우리 당은 그 어느 당도 하지 못한, 거대한 사회악과 맞서 싸우는 당이란 이미지를 갖게 됐습니다. 그게 당원들에게 자부심이 되고, 당의 노선을 넓혀나가는 계기도 되는 거고요. 앞으로 하기에 달렸지, 손익계산이 끝난 건 아니라고 봐요.”

    ▼ 당 대표인데, 월급은 안 나오나요.

    “월급체제가 아니라서…. 당 대표 활동에 따른 경비 지원은 있지만, 집으로 가져가는 건 없어요. 제가 벌어야죠(웃음). 근데 우리는 뭐, ‘분리수거’하느라 모아놓은 거에서 다 가져다 쓰니까.”

    ▼ 국회의원 월급이….

    “800만~900만 원이에요. 매달 집에 300만 원 가져가고, 특별당비를 500만원 냈어요. 작년 국정감사 때 새누리당, 민주당 의원들과 밥 먹으면서 당에 얼마씩 내나 얘기했는데 그 사람들은 20만 원, 30만 원 이렇더군요.”

    ▼ 진보 쪽에서 ‘국민의원’이라 부르던데, 마음에 듭니까.

    “저한테는 좀 무거운 호칭이지만, 그만큼 용기 잃지 말라는 격려의 뜻으로 생각합니다. 상실이란 한편으론 뭔가 채울 수 있는 가능성이잖아요. 그동안 하고 싶어도 못 했던 것들이 있어요. 책 쓰고 청소년 리더십 길러주는 거, 진보진영의 총괄적인 마스터플랜을 연구하는 작업…. 이런 상황을 고맙게도 생각해요.”

    ▼ 19대 국회 정무위 소속 의원으로서 무슨 일을 하고 싶었습니까.

    “그간 경제민주화 관련한 재벌 개혁, 하도급이나 프랜차이즈 가맹 등 불공정한 경제 관행 개선 등에 노력해왔어요. 근데 한국 정치의 문제가, 정치를 국회의원만 하는 걸로 알고 있는 겁니다. 17대 때 가장 열심히 한 게, 거대 권력과의 싸움도 있었지만 터무니없이 높은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를 낮추는 일이었어요. 그게 결실을 본 건 18대 국회에서였습니다. 앞으로 경제민주화와 부당한 경제 관행을 바로잡는 일을 해야죠. 캠페인도 하고, 우리 당 의원들을 통해 법안도 내고.”

    노 대표는 안기부 X파일이 정국을 뒤흔들던 2005년 8월 18일, 국회에서 떡값을 받은 것으로 거론된 전·현직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했다. 그는 실명이 적힌 보도자료를 기자들에게 배포했고, 같은 보도자료를 인터넷에 올렸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보도자료를 기자들에게 배포한 것은 국회의원 면책특권에 해당하나, 인터넷에 게재한 것은 ‘전파 가능성이 매우 크면서도 일반인에게 여과 없이 전달되므로’ 두 행위를 같이 평가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 대법원 판결에 대해 “‘도둑이야’ 소리를 치니까 도둑인지는 조사하지 않고 소리친 사람만 처벌하는 꼴”이라고 일갈했습니다.

    “사법부 역사상 아주 중대한 오점으로 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장 큰 그룹의 회장 지시에 따라 그 그룹 2인자가 유수의 언론사 회장과 주요 대선후보, 고위 검사 간부들에게 돈 준 것이 생생하게 다 나오잖아요. 이 일로 현직 법무부 차관이 그만뒀고, 주미대사가 사퇴했고, 삼성그룹은 대국민사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뇌물 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은 사법처리가 안 되고, ‘도둑이야’라고 소리 지른 사람들만 처벌됐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대법원은 ‘보도자료에 실명을 써도 언론에서 걸러 보도하기 때문에 실명이 보호되지만, 인터넷은 걸러지지 않으니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그럼 보도자료를 기자용, 인터넷용 따로 만들어야 합니까. 대법원도 보도자료를 그대로 인터넷에 올리는데요? 그리고 그날 언론들은 실명으로 기사를 썼습니다. 또 이날 회의는 생방송됐고요. (대법원 판결은)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지고 논리적으로도 말이 안 돼요. 기득권층 비리를 감싸려는 의도가 있지 않은 다음에야 어떻게 이런 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까.”

    노 대표는 “검찰도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7~8년간 진하게 매달린 문제인데도 물리지 않은 듯했다.

    “불법 도청된 결과물이 증거가 될 수 없다 해도 수사의 단서가 될 수 없는 건 아닙니다. 새로운 증거 찾아내는 게 그들의 임무고, 그거 하라고 검찰이 있는 건데 아예 덮었어요. ‘공소시효 지나서 수사해 봤자…’라고 하는데, 녹취록엔 작년에도 줬고 올해도 준다는 말이 있어요. 해마다 반복돼 지금도 진행되는 일일 수 있는 겁니다. 그 다음 해인 2006년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도 있었지요. 그래도 안 했어요. 수사 부실이 아니라 범죄를 은폐하는 것 아닌가요?”

    “삼성, 반체제 세력 되지 말라”

    대법원 유죄확정 후 노 대표는 “검찰이 보관 중인 도청테이프 280여 개에 대한 공개 운동을 벌이겠다”고 했다. 17대 국회에서 여야가 사실상 합의해 도청테이프 공개에 관한 두 개의 법안을 제출했으나 국회 임기가 끝나면서 자동 폐기됐다. 최근 심상정 등 43명의 의원이 19대 국회에 다시 ‘국가안전기획부 불법도청 테이프 등 처리에 관한 특별법안’을 제출했다. 노 대표는 “더 시간이 흐르기 전에 불필요한 것, 공소시효가 지난 것은 빼고 문제가 되는 부분을 짚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삼성에 바라는 게 있다면.

    “헌법과 법률을 준수해라, 반체제 세력이 되지 말라는 요구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노동조합 자체를 부정해선 안 됩니다. 모범이 돼야 할 큰 기업에서 부정과 비리가 일어난다면 더 엄하게 처벌돼야 합니다. 재벌 체제가 우리 국민경제에 도움이 안 된다고도 봅니다. 재벌이 영어로 ‘Chaebol’이에요. 우리나라에만 있으니 번역할 수가 없어요. 잘못된 기업집단의 유착을 끊어내는 시스템 변화를 삼성도 수용해야 합니다. 나는 반(反)삼성이 아니에요. 아이폰이 나오기 전까지는 휴대전화도 삼성 것만 썼습니다. 삼성이 국민기업으로 발전하기 바라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진보정당이 제도권 정치에 입문한 첫 시점은 민노당이 정당득표율 13%를 올린 2004년 총선이라고 볼 수 있다. 9년이 지난 지금, 진보 세력은 도약을 뒤로한 채 안개 속에 갇혔다. 지난해엔 일명 ‘통진당 사태’가 벌어졌고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등으로 세력이 분열됐다.

    ▼ 진보정당의 오늘을 어떻게 봅니까.

    “민노당을 만든 2000년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지금이 지난 15년의 진보정당 역사상 최악의 상황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직적으로도 분산돼 있고, 진보정당에 우호적인 분들로부터도 외면받고 있어요. 지리멸렬한 상태죠. 그런데 외부 환경이 변했거나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잘못과 무능, 시행착오로 이렇게 됐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몰락을 자초했다고 할 수 있죠.”

    ▼ 자초했다는 점에서 반성이 필요하겠습니다.

    “첫째, 국민이 원하는 걸 중시하지 않고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에 치중했습니다.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우리 사회가 그 어느 때보다 진보정당을 수용할 수 있는 폭이 넓어졌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이념적 지향에 치중해 그런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어요. 둘째, 패권주의라고 하죠, 사익을 탐했고. 셋째,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성숙하지 못했어요. 우리가 냉전주의나 호전적 정치 노선에 동의할 순 없지만, 북한을 편드는 듯한 인상을 줘 정치적 신뢰를 무너뜨렸습니다. 이제 옳은 말을 해도 들어주지 않게 됐어요.”

    ▼ 비례대표 부정 경선을 둘러싼 통진당 사태로 탈당했는데.

    “작년에는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참담했어요. 개인적으로는 4년 만에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있어야지…. 제 인생에서 제일 힘들었던 때였어요.”

    ▼ 지금보다 더?

    “지금은 정당한 싸움을 한 거잖아요. 그때는 어딜 나가질 않았어요. 강연도, 인터뷰도 안 했어요. 부끄러워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으니까. 국민에게 희망이 되고자 나섰는데, 짐이 되고 있었죠, 존재 자체가.

    진보 세력이 면모를 일신하고 건강한 진보로 다시 태어나야 해요. 선진 사회, 복지 사회는 건강한 보수와 진보의 생산적인 경쟁 속에서 가능하다고 믿어요. 진보가 실패한다면 우리 정치는 강경 보수와 온건 보수 양대 시스템으로 갈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미국과 비슷하게.”

    ▼ 진보 세력은 다시 통합될 수 없는 건가요.

    “한용운 시 구절에 만날 때 헤어짐을 염려하고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지만, 저는 이래요. 낡은 관행을 타파하고 변하지 않는다면 만나서도 안 되고, 만남도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 사실 지난 대선 때는 보수든 진보든 정책 차이를 발견하기 힘들었어요.

    “그렇습니다. 2000년 민주노동당을 만들 때와 많이 달라졌어요. 사회적으로는 더욱 풍성해졌지만 내부적인 편차가 커지면서 단편적 복지가 아닌, 복지국가로의 발전이 요구되고 있어요. 따라서 어찌 보면 진보정당 역할이 커졌는데, 한편으로는 위기감이 느껴집니다. 우리 메뉴로는 더 이상 손님을 끌 수 없으니까. 이제 새로운 요리를 준비해야 해요. 그간 몇 가지 달콤한 약속 중심으로 정책을 펼쳐온 측면도 있습니다. 이제 밤낮으로 종북이냐 아니냐로 시달리지 말고, 이 당이 집권하면 사회와 교육이 이렇게 달라진다, 하는 비전을 가져야죠.”

    사민주의 논의할 때

    “준비 안 된 안철수, 얼마나 궁했으면 새치기를…”

    2005년 8월 국회에서 ‘안기부 X파일’사건 수사를 촉구하고 있는 노회찬 당시 17대 의원.

    ▼ 진보정의당이 7월 중에 재창당한다고요.

    “대선을 앞두고 급하게 창당한 측면이 있어 2단계 창당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당의 노선이나 포괄적인 정책 방향에 대한 혁신 작업을 할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과거에 이념 논쟁에 빠질까봐 애써 기피했던 사민주의 문제를 꺼낼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특정 이데올로기로서의 사민주의가 아니라, 복지국가 프로그램으로서의 사민주의. 스웨덴, 핀란드, 독일 모델이 있다는데, 그렇다면 한국적 사민주의는 뭐냐. 뭐가 가능하고 필요한가. 이걸 제대로 만들어내자는 겁니다.”

    국회에 제출된 노 대표의 재산 공개내역에 따르면 2004년 270만 원에서 2012년 7억7500만 원으로 수치상으로는 280배쯤 뛰었다.

    “허허, 예리하시네요. 그 사이에 변화가 있었죠. 17대 때는 저와 처, 두 사람의 재산이었고 지금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면서 부모 재산과 합산한 겁니다. 사실 저와 제 처 재산만 따로 떼면 오히려 줄었어요. 그 사이 선거 나가느라 우리 집 전세보증금을 다 썼거든요. 어머니 모시러 간 게 아니라 의탁하러 간 셈이죠(웃음).”

    ▼ 본인 차는 2007년식 쏘나타, 부인 차는 1992년식 엘란트라네요.

    “아내 차는 20년도 더 됐죠. 작년에 현대차 문제 해결하느라 거기 사장을 만났어요. 제 쏘나타가 30만 km 뛰었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면서 ‘그러면 우리 굶어죽는다’고 하대요. 앞으로 두 배는 더 타야죠.”

    노 대표 부부에겐 자녀가 없다. 오랜 기간 수배로 도망 다니고 감옥 다녀오느라 ‘때를 놓쳤다’고 했다. 그는 “동서양의 의술을 빌려 갖은 노력을 했지만 잘 안 되더라”고 했다. 입양도 시도해봤지만, ‘공식적인 세금 내는 수입이 없어서’ 자격이 안 됐다고 한다.

    ▼ 자녀 없이 둘만 지내는 건 어떻습니까.

    “어머니 모시고 살기 전까지는 자취하는 사람 둘이 사는 것과 비슷했어요. 가사노동도 먼저 보는 사람이 하는 식이었죠. 국회의원 시절에도 양복 입은 채로 장보러 가곤 했어요. 자취를 많이 해봐서 저도 음식 잘해요. 제가 담근 배추김치랑 총각무김치, 주변에서 꽤 알아줬어요.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가 거의 없었죠. 제가 기여했다기보다는 아내에게 고맙죠.”

    지난해엔 요리와 관련한 재미난 일화가 있었다. 바다낚시로 잡은 우럭을 샘표간장으로 중국식 생선찜 ‘칭쩡위’로 만들었고, 사진을 찍어 트위터에 올렸다. 이게 화제가 되자 샘표식품 측에서 고맙다며 자기네 조미료를 한 상자 보내줬다고 한다.

    “제가 선물을 잘 안 받는데, 이건 주변 사람들과 하나씩 나눠 가졌어요. 그랬더니 누가 다음에 청정원 갖고 해보라고 하더군요(웃음). 내일 토요일이잖아요. ‘짜빠구리(‘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섞어 끓이는 요리)’를 해보려고 해요. 레시피도 외워놨어요. 짜장 소스는 다 넣고, 너구리 소스는 반만 넣어야 한대요. 냉동실에 설에 쓰고 남은 튀김용 오징어가 있는데 그거 썰어 넣으면 더 맛있을 거 같아요.”

    평화는 ‘단체석’

    요즘 세간에는 ‘노회찬도 가고, 유시민도 가고…’란 말이 떠돈다.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과 정계 은퇴를 선언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을 아쉬워하는 표현이다. 노무현 정부 때 노 대표는 유 전 장관에 대해 ‘논평할 필요가 없는 품질’이라고 했다. 시절이 바뀌어 통합진보당에서 만난 둘은 함께 탈당해 진보정의당을 세웠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는 팟캐스트 ‘유시민, 노회찬의 저공비행’을 함께 진행했다. 유 전 장관은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도 지냈다.

    ▼ 지금은 유 전 장관을 어떻게 ‘논평’합니까.

    “하하. 제가 유 전 대표에 대해 쓴소리를 많이 했죠.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이란 표현도 제가 처음 쓴 거예요.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가깝습니다. 17대 때 공중목욕탕 같이 가던 사이예요.”

    ▼ 그의 은퇴는 어떻게 보나요.

    “깊은 성찰에서 나온 결단이기에 존중할 수밖에 없다고 봐요. 다른 한편으로는 좀 얄밉죠. 왜 혼자만 자유롭느냐고. 그분의 능력이 좀 더 좋게 발휘돼 현재의 정치적 어려움이 극복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쉬움이 크죠. 근데 뭐, 그래봤자 예비군 아니냐 이겁니다. 전쟁 나면 현역이나 예비군이나 똑같죠.”

    유 전 장관은 정계 은퇴 선언과 동시에 낸 책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나는 열정이 있는 삶을 원한다. 마음이 설레는 일을 하고 싶다. 자유롭게, 그리고 떳떳하게 살고 싶다’고 썼다. ‘어떻게 살 것인가’란 물음을 그대로 노 대표에게 던졌다. 대중강연을 위해 부산행 비행기를 타러 떠날 시간이 이미 지났는데도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진로를 결정하던 시기에 독재정권과 싸우는 걸 택했고, 노동운동에 몸 바쳤고, 그다음 진보정치를 시작했습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가 아니라, 진보정당이 힘 있게 서는 게 제 목표였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저는 부모 잘 만나 어려서 첼로도 배운 사람입니다. 많은 행복을 누렸지만, 나 하나 행복한 게 정말 행복한 걸까요.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자유롭고 평화로운, 그래서 국민 모두가 악기 하나씩 할 수 있는 사회. 내가 만들려는 사회가 그런 거예요. 평화에 1인분이라는 게 있습니까. 평화는 기본적으로 단체석이지요. 자유도 그렇다고 봐요. 제게 자유와 평화는 만인(萬人)의 것이지요. 이게 노회찬의 가치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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