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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 취재

잠자던 통장 사본, 마약 조직 붕괴시키다

사상최대 히로뽕 거래조직 검거 비화

  • 글: 황일도 shamora@donga.com

잠자던 통장 사본, 마약 조직 붕괴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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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DIA(Korea Drug Investigation Administration). 검찰 마약수사부의 영문 이름이다. 대검찰청 마약부장부터 지방검찰청의 행정주임에 이르기까지 마약수사부 식구들은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모두 이 약자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는다.
  • 9월27일 서울지검 마약수사부가 발표한 ‘사상최대규모 히로뽕 밀수·밀매조직 검거’는 소리 없는 마약전쟁의 일선에 서 있는 KDIA 요원들이 치른 최대 격전이었다.
잠자던 통장 사본, 마약 조직 붕괴시키다
지난 7월 어느날 밤 11시 대구 금호강변 동촌유원지. 늦은 시간이지만 더위를 피해 강바람을 쐬러 나온 시민들로 술집 노변 테이블은 빈 자리가 많지 않다. 머뭇머뭇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얼굴을 확인하던 서울지검 마약수사부(부장 정선태·이하 마약수사부) 신장혁 계장(43·가명·이하 수사요원들의 성명은 신변안전을 위해 가명으로 처리). 테이블에 앉아 맥주잔을 기울이던 한 중년사내에게 시선이 꽂히자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번진다.

“설일남씨, 오래간만이네. 나 기억나요?”

“사람 잘못 봤습니다. 주민등록증 보여줘요? 그런 사람 모른다니까.”

주민등록증을 받아 든 신계장의 얼굴에 순간 핏기가 가셨다. 겨우 설일남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10여 년 전 부산지검에서 만났던 기억만으로 확신한 것이 실수였을까.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 오른쪽 이마 위 반점은 주위가 어두워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파출소에 가서 조회해 봅시다. 잠깐이면 되니까.”

사내는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순히 따라오려나보다 생각한 순간 의자를 탁 차고 달리기 시작하는 사내. 그러나 긴장하고 있던 신계장의 발이 더 빨랐다. 채 몇 발짝도 가지 않아 신계장은 사내를 붙들어 자빠뜨렸다. 불빛이 환한 가게 앞에 서자 사내의 이마 위에 하얀 반점이 흐릿하게 드러났다. ‘검거박사 신박사’라는 별명을 가진 마약전쟁 13년차 신계장의 실력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설일남. 55세. ‘대한민국 마약쟁이 중에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대구지역 ‘가루 세계’의 전설적 존재다. 1994년 부산지검 강력부에 검거된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그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된 것은 2000년 가을이었다. 그러나 마약계가 신진세력 중심으로 재편된 이후 직접 거래보다는 숨은 중개자 역할만 한 설일남이기에 그를 겨냥한 수사는 빗나가기 일쑤였다. 히로뽕 밀수의 대부 설일남을 검거했다는 신계장의 보고는 수사 착수 5개월을 넘긴 서울지검 마약수사부가 올린 결정적인 승전보였다.

현장거래가 사라졌다

큰 건은 항상 작은 단서에서 출발한다. 지난 2월 서울지검 마약수사부의 김기동 수석검사(39)는 전임 김진모 검사실 책상서랍에서 잠자고 있던 11개의 통장사본을 넘겨받았다. 연말에 검거된 히로뽕 소매책을 조사하는 과정에 나온 계좌에는 50만~100만원의 소규모 마약대금이 오간 흔적이 있었다. “잘 뒤져보면 성과가 있을 것”이라는 게 전보발령을 받고 떠나는 선배검사의 조언이었다.

오래전부터 마약은 갱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처럼 ‘눈으로 확인하는’방식으로 거래됐다. 서로 연락을 주고받은 거래조직끼리 으슥한 장소에서 만난다. 이쪽에서 한 사람이 건너가면 저쪽에서 그 사람을 데리고 가 은밀한 곳에 숨겨둔 ‘상품’을 확인시킨다. 장소를 알지 못하게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거나 일부러 도는 코스를 선택하는 수법도 영화장면 그대로다.

이쪽에서 물건을 확인하면 저쪽에서 다시 한 사람이 건너온다. 역시 은밀한 곳에 숨겨둔 돈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양쪽 모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면 “다시 연락하자”며 흩어진다. 새로 결정된 장소와 시간에 물건과 돈이 동시에 교환된다. 한 손으로는 물건을 받고 다른 손으로는 돈을 건넨다 해서 ‘왼손 오른손’ 방식이라 불리지만, 일이 잘못될 경우 쉽게 도망치기 위해 ‘차 치기’로 교환하는 일이 더 많다.

검찰의 마약범죄 수사기법 역시 이러한 방식에 맞춰 왔다. 언제 거래가 이뤄지는지 정보를 파악해 현장을 덮치는 ‘작전’이나 거래자에게 마약을 사겠다고 접근한 뒤 물건을 확인하면 바로 검거하는 ‘위장매수제의’ 방식이 주무기다. 간혹 작전중에 수사요원이 부상하거나 매수자금만 빼앗기는 경우가 발생하는 단점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유일무이한 방법이나 다름없었다.

이상한 징후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가을이었다. 현장을 누비는 수사 요원들의 레이더망에 소매거래 이상의 큰 건이 포착되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한 것이다. ‘소비처’인 서울에서 유통되는 양에는 거의 변화가 없는데 ‘공급처’인 대구·부산·창원 일대의 도매거래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답은 하나, 새로운 루트가 뚫리고 있다는 얘기였다. 빠른 시일 안에 새 루트를 끊어내지 못하면 1980년대 겨우 진화한 마약열풍이 다시 확산될 가능성도 있었다. 다급해진 마약수사부 요원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한층 촘촘해진 마약수사부의 그물에 걸려든 ‘잔챙이’들에게서 “물건은 퀵(오토바이 택배)으로 받고 돈은 온라인으로 부쳐줬다”는 진술이 하나둘 확보됐지만 큰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수십 만원짜리 작은 거래라면 원격거래가 가능하겠지만, 수천 만원대의 대형거래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마약세계의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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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일도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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