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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도자와 술 ④

와인과 코냑에 살아 있는 ‘영원한 황제’ 나폴레옹

“샴페인은 승리의 순간 마실 가치가 있다”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와인과 코냑에 살아 있는 ‘영원한 황제’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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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때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불세출의 영웅 나폴레옹. 그가 죽으면서 남긴 말은 “프랑스, 군대, 군통수자, 조제핀” 이었다. 누구보다도 프랑스를 사랑했던 나폴레옹은 매력적인 풍운아로 지금까지 프랑스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런 그가 프랑스의 자랑이자 또 다른 상징물인 와인과 코냑에 그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나폴레옹은 50여 차례 전쟁에 나설 때면 반드시 샹베르탱 와인을 챙겼고,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서도 샹베르탱 와인으로 축배를 들었다. 하지만 대주가이거나 술이 아주 센 편은 아니었다. 기록에 의하면 나폴레옹은 와인을 즐기면서 종종 물에 타서 마셨다. 코냑에서 나폴레옹급 역시 일반인의 생각과 달리 최소 6년 숙성된 오드비를 사용하는 중상위급 코냑을 일컫는다.
와인과 코냑에 살아 있는 ‘영원한 황제’ 나폴레옹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실제 나폴레옹은 군대가 험준한 지역을 돌파한 뒤 안내인이 이끄는 노새를 타고 알프스를 넘었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전설적인 명언과 함께 한때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불세출의 영웅 나폴레옹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코르시카 섬 출신 ‘비주류’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능력만으로 프랑스 지도층에 진입해 마침내 황제로서 일세를 풍미한 뒤, 결국은 머나먼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다. 이런 그를 상징적으로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바로 앞의 명언과 함께 그의 영웅적 기상을 생생히 보여주는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라는 회화 작품일 것이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이 유명한 그림이 비록 사실에 근거를 두고는 있으나 상당한 허구가 가미돼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림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정치적 의도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Napoleon Crossing the Alps)’을 그린 사람은 신고전주의 작가로 나폴레옹 당시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던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1748∼1825)다. 그는 프랑스혁명의 지지자였을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본격적인 대두 이후에는 곧 그의 열렬한 숭배자가 된다. 나폴레옹은 1799년 11월 제1통령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이탈리아로 기습 진격해 당시 그곳을 점령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과의 일전을 계획한다. 1800년 5월 마침내 알프스의 생베르나르 협곡(the Saint-Bernard Pass)을 넘은 나폴레옹군은 마렝고 전투에서 결정적인 대승을 거둔다. 이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이 위업을 기념하는 초상화를 의뢰받는다.

그런데 이 그림은 시작부터 철저히 나폴레옹의 정치적 계획하에 진행됐다. 다비드는 말을 탄 모습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 나폴레옹에게 앉은 자세에서 장시간 모델이 돼 줄 것을 요청했으나, 나폴레옹은 ‘이런 영웅적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의 모습이 아니라 개성의 표현’이라며 요청을 일축한다. 실제 알프스를 넘을 당시 나폴레옹은 그림처럼 악천후를 배경으로 군대를 이끌고 생베르나르 협곡을 넘은 것이 아니라 먼저 군대가 험준한 지역을 돌파한 뒤 맑은 날씨에 안전하게 안내인이 이끄는 노새를 타고 넘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나폴레옹은 노새가 아니라 준마를 타고 있는 모습을 원했기 때문에,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애마 두 마리를 모델로 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그림 전면의 바위 돌에 그의 이름과 함께 새겨놓은 한니발(Hannibal·BC 247~183), 그리고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742~814)의 이름은 과거 알프스를 넘었던 역사적인 영웅들과 그를 동격화하려는 시도였다. 이 그림은 당시 나폴레옹의 요청으로 추가로 만든 세 작품을 포함해 모두 5개의 작품이 존재한다. 그림들은 1801년에서 1805년에 걸쳐 완성됐는데, 1804년에 다비드는 나폴레옹에 의해 공식적인 궁중화가로 임명됐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There is no such word as impossible in my dictionary)’라는 나폴레옹의 명언도 후세에 약간 변형된 것이다. 이 말은 나폴레옹이 1813년 7월9일자로 그의 부하 장군인 르마루아(Lemarrois·1777~1836)에게 쓴 편지에 나오는 ‘Ce n′est pas possible, m′ecrivez-vous; cela n′est pas francais’ 구절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 말의 뜻은 ‘장군이 나에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썼는데 그런 말은 프랑스어가 아닐세’로 직역할 수 있다. 이 표현이 후세에 와서 앞서 말한, 보다 간결한 대중적인 표현으로 바뀐 것이다. ‘불가능이란 말은 바보들의 사전에서나 발견되는 말이다(Impossible is a word found only in the dictionary of fools)’도 같은 맥락의 표현이다.

어쨌든 이렇게 우리 주위에서 여전히 그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는 영웅 나폴레옹의 일생에 대해 먼저 간단히 알아보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1769~1821)는 프랑스령인 지중해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 마을에서 변호사로서 지역 명망가였던 부친과 절제를 강조한 모친 사이에서 8명의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나폴레옹의 옛 조상은 이탈리아 귀족 출신이었다. 이런 배경과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집안 형편은 그에게 당시 일반적인 코르시카 소년들에 비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나폴레옹은 1779년 1월 만 10세가 채 되지 않았을 때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프랑스의 한 종교학교에 등록했고, 곧이어 5월에는 브리엔 유년 군사학교에 입학해 5년간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는 학업 기간 내내 진한 코르시카 억양 때문에 친구들의 놀림감이 됐지만 수학을 비롯한 지리, 역사 과목 등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784년 브리엔을 졸업한 나폴레옹은 당시 권위를 자랑하는 육군사관학교(Ecole Militaire)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사망에 따른 재정 문제 때문에 2년 과정을 1년으로 단축해 1785년 9월 이 학교를 졸업한다. 코르시카 출신으로는 첫 졸업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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