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침공 실패로 무너진 수 양제
수나라 양제(煬帝, 569∼618년)는 고구려 영양왕 23년(612) 2월, 24년 3월, 그리고 25년 7월 세 차례에 걸쳐 고구려 침공을 감행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일백수십만 명의 대군을 잃고 헤아릴 수 없는 전쟁 물자를 허비했다. 이에 예부상서 양현감(楊玄 感)의 반란을 시작으로 전국 각처에서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등 천하는 다시 대란(大亂)에 접어든다.
그러자 양제는 영양왕 26년(615) 8월에 돌궐의 힘을 빌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북순(北巡)을 핑계하여 돌궐을 찾아간다. 양제는 종실의 딸 의성(義成)공주를 동돌궐의 왕 계민(啓民, ?∼609년) 칸에게 시집 보내고 그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궐은 원래 고구려와는 문화적인 동질성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해온 나라였다. 수나라가 남·북조를 통일해 최대강국으로 떠오르자 할 수 없이 수나라에 귀순했으나 수의 고구려 침공에 진정으로 협력할 뜻은 없었다. 오히려 고구려의 승리를 내심 바라고 있던 형편이었다.
게다가 양제가 113만 대군을 동원하고서도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고 그 이후에 연거푸 두 번이나 통일중국의 온 힘을 쏟아붓고서도 고구려의 성곽 하나 빼앗지 못하고 회군했으니, 돌궐은 태도를 일백팔십 도로 바꾸었다. 또 양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동맹을 맺은 계민 칸이 이미 죽고 시필(始畢) 칸이 새로 등극했음에랴!
실제로 시필 칸은 수 양제가 북순한다는 사실을 알고 오히려 그를 포로로 잡으려고 기병 수십만을 대기시켰다. 이 사실을 탐지한 전(前)왕비 의성공주가 양제에게 신속하게 통보하여 겨우 화를 모면 하게 할 수 있었다.
양제는 여기서 돌궐에게 포위되어 한달 남짓 공포에 떨어야 했는데, 이때 그의 기가 아주 꺾인 듯하다. 세 차례에 걸친 고구려 침공이 실패로 끝나 이미 넋이 다 나간 마당에 믿고 있던 맹방인 돌궐의 표 변은 권세의 무상함을 통감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수도 장안으로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순수를 핑계대며 남도인 강도(江都, 지금 남경)로 피하고 만다. 북쪽에 대해서는 아주 환멸을 느꼈던 모 양이다.
본래 양제는 후량(後梁) 세조 효명제(孝明帝) 소귀(542∼585년)의 공주에게 장가들었다. 후량은 남조 양(梁)나라 무제(武帝, 464∼549년)의 장자인 소명(昭明)태자 소통(蕭統, 501∼531년)의 아들 소찰 (蕭察, 519∼562년)이 세운 나라로 강도가 그 근거지였다.
그래서 양제는 강도를 처가의 고향으로 생각하여 남조 정벌에도 앞장섰고 등극 후에는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그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고구려 정벌을 단행하기 직전인 대업(大業) 6년(610) 3월에 강도 태수의 지위를 본도인 장안의 경조윤(京兆尹)과 같은 급으로 승 격시켜 놓은 것도 강도에 대한 그의 남다른 관심 때문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양제는 고구려 정벌의 총책을 맡은 좌익위 대장군 허국공(許國公) 우문술(于文述)의 진언을 받아들여 강도로 내려온 뒤 이곳을 세력 기반으로 삼아 대란을 수습해 보려고 한다.
원래 우문술은 고구려 정벌 참패에 대해 책임을 지고 마땅히 극형을 받아야 했으나, 양제의 장녀 남양(南陽)공주가 그의 막내아들 우문사급(于文士及, ?∼642년)에게 출가했으므로 죽음을 모면하고 다시 기용된 것이다.
그러나 양제의 최측근인 우문술이 이해(615년) 10월 병으로 강도에서 죽자, 가족을 서도 장안에 두고 온 시위무사 사이에 동요가 일기 시작하였다. 양제가 장안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강도에 머물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반란군에게 점령당한 장안의 가족 걱정으로 군심(軍心)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이런 틈에 우문술의 불초자들인 우문화급(于文化及)과 우문지급(于文智及)이 마음이 들뜬 병사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니, 양제는 영류왕 원년(618) 3월에 이들의 손에 잡혀 죽고 만다. 이때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불과 6년 전 200만 대군을 칭하며 고구려를 침공하던 그 위세는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그가 믿던 맏사위(우문사급) 형들의 선동에 의해 역적으로 돌변한 시위무사들 손에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당(唐) 태종의 천하통일
이에 이미 장안을 장악한 당(唐) 고조(高祖) 이연(李淵, 566∼635년)은 바로 제위에 올라 당나라를 건국한 뒤 차츰 각처의 반란을 진압하여 수의 통일을 계승한다. 백성들은 근 300년에 걸친 대륙의 분열에 싫증을 내고 있었고, 나아가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절대권자의 출현을 갈망했다.
이런 민심을 잘 간파한 이가 당 고조의 제2자인 태종 이세민(李世民, 597∼649년, 도판 1)이다. 국가 건설과 반란 진압에 큰 공로를 세운 이세민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그 형인 태자 건성(建成)과 아우 원길(元吉)을 살해하고 부왕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고조 무덕(武德) 9년(626) 8월에 즉위한 당 태종은 곧바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여 문치(文治)의 기틀을 마련한 다음 전국을 10도(道)로 나누어 강력한 중앙 집권력을 행사해 나가니 백성들은 비로소 안도하고 따르게 되었다. 마지막 반란세력인 양사도(梁師道)가 정관(貞觀) 2년(628) 4월에 살해당하면서 천하가 통일되었다.
이렇게 중국 대륙을 통일한 당 태종은 장성 밖의 가장 큰 위협 세력인 돌궐을 그냥둘 수 없었다. 정관 3년(629) 11월에 장군 이정(李靖, 571∼649년)을 보내 동돌궐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이에 앞서 이 해 8월에 현장(玄, 602∼664년)법사가 고창(高昌) 구자(龜玆) 등을 거치는 서역 북도(北道)를 따라 인도로 구법(求法) 여행을 떠나는데, 이것은 당 태종의 돌궐 정벌과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니었을 듯하다.
동돌궐 정복에 나선 이정은 정관 4년(630) 2월에 동돌궐왕 힐리(利) 칸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에게 의탁하던 수 양제 황후 소씨와 양제의 손자 양정도(楊正道)를 찾아내 장안으로 호송한다. 이정은 계속 동돌궐의 힐리 칸을 추격하여 돌궐군 1만여 명의 목을 베고 10만여 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세운다. 이어 계민 칸의 왕비이자 힐리 칸의 모후인 수나라 종실 출신 의성공주를 잡아죽이고 힐리 칸마저 사로잡아 돌아온다. 이렇게 이정은 돌궐과 연결된 수나라의 잔존 세력을 쓸어버림으로써 당 태종의 정통성에 한 점 의혹도 남기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사실 당 고조는 처음 나라를 일으킬 때 시필 칸의 도움을 받기 위해 그에게 칭신(稱臣)하는 굴욕을 감내했던 모양이다. 힐리 칸을 격파했다는 소식을 접한 고조의 아들 태종은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과거 국가 초창기에 태상황(고조)이 일찍이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돌궐에게 신하를 일컬었다. 짐은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터질 듯 하여 흉노를 멸망시키는 데 뜻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앉아도 자리가 편안치 않고 먹어도 맛이 달지 않더니 이제 잠깐 한쪽 군대를 움직였는데도 가서 이기지 않음이 없고 선우가 요새 문을 열어달라 사정한다니 그 부끄러움을 씻었다 하겠다.”
재편되는 삼국의 은원 관계
한편 우리나라는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는 동안 삼국간 은원 관계가 재정립되고 있었다. 본래 고구려와 백제는 고국원왕(재위 331∼371년)과 개로왕(재위 455∼475년)이 전쟁에서 살해됨으로써 불구 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또 이후 신라가 백제 성왕(523∼554년)을 배신하고 전쟁에서 그를 살해함으로써 신라 역시 백제와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가 되었다. 즉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를 모두 용납할 수 없는 적으로 삼고 생존을 위해 투쟁해 왔다.
고구려와 신라의 경우 신라 진흥왕의 영토 확장 정책으로 비록 영토 분쟁은 있었으나 서로 국왕을 죽인 원한 관계는 없으므로 그리 심각한 적대감은 없었다. 오히려 고구려와 신라는 왜와 동맹해 제해권을 장악한 백제를 공동 견제하는 등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나라가 남조를 멸망시켜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 남조와 왜를 연결해 제해권을 장악하던 백제는 국제적인 세력 균형이 파괴될 것을 재빨리 간파하고서 수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 적대 관계를 청산한다. 그래서 백제 무왕은 겉으로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적극 협조할 것처럼 수 양제의 비위를 맞추면서 실제로는 수나라의 군사기밀을 탐지하여 고구려에 은밀히 통보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자 군대를 접경지대에 파견하여 말로만 침공하는 체 크게 떠들었을 뿐 오히려 고구려의 남쪽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이에 반해 신라의 진평왕은 진흥왕이 확장해 놓았다가 자신의 재위 기간에 빼앗긴 북쪽 영토를 되찾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고구려가 국운을 걸고 수의 113만 대군과 사생 결단을 벌이는 동안 배후를 침공하여 500여 리나 되는 고구려 영토를 잠식했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의 싸움판에 개가 끼여들어 호랑이 꼬리를 물고늘어진 꼴이 되었으니 고구려의 분노가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이다. 이 판에 백제 무왕은 오히려 신라의 서북쪽 국경지대인 상주를 침공하여 신라가 고구려를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고구려가 수나라의 3차 침략을 물리치고 났을 때 삼국간 친소 관계는 재편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신라가 고립무원에 빠지게 되었다. 고구려는 전후 복구를 대강 마무리지은 뒤 백제와 함께 신라를 응징하는 일에 적극 나서 실지를 회복해 나가니, 신라로 서는 양국의 침략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거기에다 믿었던 수나라가 고구려 침략에 국력을 모두 소모하고 허무하게 무너지자 신라는 이제 의지할 구석이 하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한다.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믿고 거들먹거리다가 호랑이가 사라지자 초라하게 된 격이었다.
한편 중국 대륙에서는 민심 속에 천하통일의 염원이 살아 있었으므로 당나라가 차츰 각처의 반란을 진압하고 곧바로 재통일을 이룩하고 있었다. 이런 대세를 읽은 고구려는 당 고조 이연이 무덕(武德) 원년(618) 5월에 수나라 공제(恭帝)로부터 선위(禪位)받아 장안에서 즉위하자, 그 다음해인 영류왕 2년(619) 2월에 사신을 보내 당의 존재를 인정하고 국교를 정상화한다. 고구려에서도 대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양왕이 재위 29년인 618년 9월에 돌아간 뒤, 그의 이복아우로서 대수전쟁 중 수나라 수군(水軍)대장 내호아군을 격파한 적이 있는 전쟁 영웅 고건무(高建武), 즉 영류왕이 왕위에 올라 있었다.
당 고조도 아직 사방에 반란군이 널려 있고 돌궐이 장성 밖에서 수양제의 황후 소씨와 손자를 보호하면서 수나라 재건을 다짐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접근을 무척 반겼다. 그래서 영류왕 5년(622)에는 당 고조가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시 포로로 잡힌 중국 사람과 고구려 사람들의 교환을 제의하고, 고구려인 포로를 찾아내 먼저 돌려보내니 고구려도 이에 응해 1만여 명의 중국인 포로를 돌려보냈다.
신라 역시 당이 수나라를 계승하여 중국 천하를 장악해 가는 사실을 파악하고 진평왕 43년(621)에 사신을 보내 맹방이 될 것을 다짐하며 고구려와 백제의 견제를 호소한다. 이에 감격한 당 고조는 산기상시(散騎常侍) 유문소(庾文素)를 통해 칙서와 함께 그림 병풍 및 채색 비단 300여 필을 보낸다.
그러나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한 나라는 해양왕국인 백제인 듯하다. 백제는 무왕 24년(624) 정월에 대신을 당에 사신으로 보내 책봉을 요청한다. 당 고조는 기분이 좋아서 사신을 보내 무왕을 대방군왕백 제왕(帶方郡王百濟王)으로 책봉하고, 내친 김에 2월에는 형부상서 심숙안(沈叔安)을 고구려로 보내 영류왕을 상주국요동군공고구려왕(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王)으로 책봉하며, 3월에는 신라에도 사신을 보내 진평왕을 상주국낙랑군공신라왕으로 책봉하는 등 3국에 균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물론 국세에 따라서 그 대접이 달랐다. 고구려에는 형부상서와 같은 대신급 인물을 사신으로 특파했다. 이때 고조는 도사(道士)로 하여금 천존상(天尊像, 도판 2)과 도교 경전을 가지고 가서 고구려에 도교를 전했는데, 도사가 고구려에 와서 ‘노자(老子)’를 강하니 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와서 들었다 한다.
그러나 당의 대삼국 등거리 외교는 천하제패의 야망을 가진 당 태종의 등극과 함께 막을 내린다. 당 태종은 수 양제가 이루지 못한 고구려 정벌을 반드시 성공하여 중국 황제의 위엄을 만방에 떨치고 싶었던 것이다.
당 태종은 무덕 9년(626) 6월 정변을 일으켜 대권을 잡자마자 7월에 대학자인 국자조교 주자사(朱子奢, ?∼641년)를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으로 삼아 삼국 순회 대사에 임명하고 삼국을 달래 서로 화친하도록 종용한다. 명목은 신라와 백제가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아 당과의 교통을 방해한다고 호소해 왔기 때문에 이를 들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고구려를 고립시키려는 외교 전략의 발동이었다. ‘구당서(舊唐書)’ 권189 주자사전(朱子奢傳)에서 그 대강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일부를 옮겨보자.
주자사(朱子奢)의 삼국 순회 유세(遊說)
“주자사는 소주(蘇州) 오(吳) 지방 사람이다. 어려서 고향 사람인 고표에게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익히고 뒤에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역사책을 널리 보았으며 문장을 잘 지었다. 수나라 대업 중에 비서학사(秘書學士)에 이르렀는데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어서 두복위(杜伏威)에게 의탁했다가 무덕 4년(621) 두복위를 따라 입조하니 국자조교(國子助敎)의 벼슬을 받았다.
정관 초에 고려(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같이 치는데 군대를 연결하여 여러 해 동안 그치지 않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위급을 알려 왔다. 이에 주자사를 임시로 원외산기시랑으로 삼아 사신에 충당하고 삼국의 감정을 달래보라고 했다. 학식이 있고 점잖게 생겨 동이(東夷)들이 크게 받들어 공경하므로 3국 왕이 모두 표문을 지어 올려 사죄하고 선물을 넉넉하게 주었다. 처음 주자사가 사신으로 나갈 때 태종이 이렇게 말했다.
‘해이(海夷; 바다 밖에 사는 오랑캐, 즉 3국)가 자못 학문을 중시하나 경이 대국의 사신이 되었으니 반드시 그 선물에 의지하여 그들에게 강설(講說)하지 말도록 하라. 내 뜻에 맞도록 하고 사신에서 돌아온다면 마땅히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경을 대하리라.’
그러나 주자사가 그 나라에 이르러 오랑캐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춘추좌씨전’을 제목으로 삼아 강의하고 미녀를 선물로 받았다. 사신에서 돌아오자 태종이 그 뜻을 어긴 것을 질책했으나 그 재주를 아껴서 심히 꾸짖지는 않았다.”
당 태종이 우리나라가 학문을 숭상하는 것을 알고 대학자를 순회대사로 삼아 삼국을 돌면서 화친을 도모하도록 유세했다는 내용이다.
주자사의 삼국 순회 후 그 다음해인 정관(貞觀) 1년(627)에 신라는 6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당에 사신을 보내 정성을 표시하는데, 이때 백제 무왕은 7월에 신라 서쪽의 두 성을 쳐서 빼앗은 뒤 다시 대군을 일으켜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고 웅진(熊津, 공주)에 진출한다.
이에 신라 진평왕이 위급을 고하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자 무왕도 조카인 복신(福信)을 사신으로 보내 당의 동정을 살피게 한다. 이때 당 태종은 복신을 통해 무왕에게 친서를 전달하고 신라와 화친할 것을 간곡하게 권유한다.
그러는 중에 당 태종은 대장군 이정(李靖)으로 하여금 동돌궐을 정벌하게 하여 정관 4년(630) 힐리 칸을 사로잡고 동돌궐을 멸망시켰다. 고구려는 당 태종의 야망을 눈치채고 사신을 보내 힐리 칸의 생포를 축하하며 고구려의 지도를 전해주는 등 외교적인 역공세를 취하여 당에 침공의 명분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부여성으로부터 서남 해변에 이르는 긴 국경 지역에 장성을 쌓아나간다. 조용한 듯하면서 긴박하게 전쟁 준비에 돌입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신라에서는 진평왕(565년경∼632년)이 54년의 긴 통치 기간을 끝내고 근 70세가 되자 장녀인 선덕여왕(580년경∼647년)이 등극한다. 선덕여왕 원년(632) 정월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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