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다가 공무원들은 은연중에 “당신들은 우선협상 대상자일 뿐이다. 다른 협상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측 요구대로 하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최과장에게 해주었다. 물론 강압적인 제스처는 아니었지만, 영업을 책임지고 있는 최과장으로서는 무시하기 힘든 말이었다.
협상기간 중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직원을 몇 명 상주시켜 시스템이 정상 가동되는지 체크해달라’는 요구였다. 애프터서비스를 해주는 것이 관례지만 직원까지 파견해 이를 봐달라는 요구는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렇다고 회사에 일없는 직원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시간이 돈인 이들이 회사일을 제쳐두고 그 부서에 상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 부서 실무자들은 막무가내였다. 이번에도 최과장이 졌다. 최과장이 3개월 동안 파견해 도와주기로 하고 1주일 동안 계속된 실무협상은 막을 내렸다. 그래도 계약은 성사된 것이다.
“솔직히 공무원의 실상을 보고 실망했습니다. 오전은 회의로 끝내기 일쑤고, 저녁 6시면 어김없이 퇴근합니다. 회의는 또 왜 그렇게 많은지. 결재서류를 보면 결재 칸이 대 여섯 개는 되더군요. 저도 이곳에 파견돼 결재서류를 만들어 봤는데, 지적을 받아 수차례 다시 작성하곤 했습니다. 주로 내용보다는 형식을 문제삼더군요. 어느 공무원은 ‘결재라인이 많아야 책임이 작게 돌아온다’고 귀띔해주기도 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이겁니다. 나와 함께 일했던 공무원이 휴대폰도 없고, 비상연락망도 가르쳐 주지 않아 답답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남들 다 갖고 있는 휴대폰을 구입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슬쩍 물었더니,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정부 부처는 사람이 일하는 곳이 아니다. 조직이 일하는 곳이다. 나에게 연락이 안 되면 다른 사람이 그 일을 대신할 것이다’고 하더군요.”
최과장이 가장 불만스럽게 여긴 것은 공무원들이 아주 세세한 자료를 원한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내용까지 모두 적어야 했다. 그가 그 부서에서 한 달 동안 일하면서 만든 서류는 자그마치 백과사전 두께의 분량이었다. 진을 뺄 정도로 두껍게 서류를 작성하면, 이를 훑어본 공무원은 다시 요약본을 요구했다. 일을 위해 일을 하는 식이었다. 효율이나 일의 목표 등은 뒷전이었다.
최과장은 이번 일을 계기로 공무원사회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공무원들과 함께 일하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고 한다. 그는 올초 정부 부처 파견근무를 마치고 해외영업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공무원들의 행동이 자신에게 전염될까봐 두려웠다”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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