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J의 동교동계가 분열되고 있다. YS의 상도동계와 함께 3공 이후 한국 정치계보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잡은 응집력이 예전 같지 않다. 권노갑·한광옥 연대의 구파와 한화갑을 중심으로 한 신파의 갈등은 특히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더욱 첨예해지는 양상이다. 사실상 갈라선 것으로 여겨지는 동교동 신·구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러나 서울 마포사무실에 출근하던 권 전위원은 이날 출근하지 않았다. 사무실 앞에서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이 “오늘은 틀렸구나” 하고 생각한 것도 잠시. 권 전위원의 한 측근이 갑자기 승용차를 몰고 움직이자 기자들은 무작정 택시를 잡아타고 뒤를 쫓았다. 얼마쯤 달렸을까. 그 측근은 신라호텔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권 전위원을 만날 수 있었다.
재야 민주화세력의 대부인 김근태 최고위원으로부터 일격을 당한 권 전위원은 섭섭한 감정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당당했다. 오히려 소신을 조목조목 피력해 나갔다.
“(동교동계 해체) 주장은 개인 자유지만 해체하라 말라고 말할 처지가 아니다. 동교동은 민주당의 뿌리이고, 동교동의 해체란 민주당을 해체하라는 것과 같다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 김위원이 이번 당정개편을 ‘동교동계 잔치’라고 했는데 지나친 주장이다. 이번 인사는 민주당의 잔치다. 정치인의 기반은 당이다. 당을 위해 일해야 정치인의 소임을 다한다는 게 평생의 소신이다. (당원이란) 당의 방침이 정해지면 따르는 것이다. 자기가 잘 되려고 당에 흠집내면 공멸한다….”
권 전위원은 “동교동계는 수십년 정치역정 속에서 확대 발전해온 것”이라면서 “뭘 해체하라는 것이냐”고 거듭 강조했다.
권 전위원은 과거 정동영(鄭東泳) 최고위원에게 했듯이 인간성을 들먹이는 원색적인 비난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감정이 절제된 표현을 사용했고 담담한 모습이었다.
김근태 최고위원은 다음날 동교동계 해체주장을 정면 반박한 이 발언을 전해듣고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 하나회가 있었듯이 (동교동계가) 민주당의 하나회가 돼서는 안 된다”면서 동교동계를 하나회에 비유했다. 김위원은 동교동계 존립의 명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독하게 마음먹고 동교동계를 거듭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이와 같은 동교동계 해체 논란은 악화일로에 접어든 느낌이었고, 충돌 직전의 열차처럼 마주보고 달리는 듯했다. 정말 동교동계가 해체되든지가, 김위원이 엄청난 타격을 입든지, 둘 중 한 가지 결과가 예상됐다. 소장파 초선모임인 ‘새벽21’ 소속 의원까지 김위원에 가세, 본격적으로 동교동계와 비동교동 개혁·소장파의 싸움이 벌어질 판이었다.
역사의 우연인지 필연인지, 싸움은 그 정도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9월11일 미국 심장부에 대규모 테러가 발생하면서 양측은 일단 확전을 피하고 휴전에 들어갔다. 권 전위원은 동교동계로 쏟아지는 추가 비난을 면할 수 있었고, 김근태 위원은 당내 개혁투쟁의 리더로서 입지를 살리는 선에서 동교동계 해체논란은 ‘잠복이슈’로 녹아 들어갔다.
민주당에서 동교동계 의원이라고 자천타천으로 분류되는 의원은 20여 명선. 범동교동계라고 하면 한광옥(韓光玉) 대표를 포함, 40∼50명에 이른다.
동교동계의 핵심은 권 전위원과 한화갑(韓和甲) 최고위원, 김옥두(金玉斗) 전사무총장 등 이른바 1세대 3인방이다. 이들은 정치노선과 대선전략 등을 두고 신·구파로 갈라져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현재 구파 쪽에는 권 전위원, 김옥두, 이훈평(李訓平), 윤철상(尹鐵相), 조재환(趙在煥) 의원 등이 포진해 있고 신파에는 한화갑, 문희상(文喜相), 설훈(薛勳), 조성준(趙誠俊), 배기운(裵奇雲), 배기선(裵基善), 정철기(鄭哲基) 의원 등이 함께하고 있다. 물론 신·구파란 언론에서 붙인 이름이다.
동교동이 신·구파로 갈라진 것은 표면적으로 지난해 8월 최고위원 경선을 거치면서다. 당시 권노갑 전위원은 독자출마가 좌절되자 이인제(李仁濟) 최고위원 등 친동교동계 후보자 몇 명을 집중 지원했다. 반면 한화갑 최고위원은 이를 비판하며 동교동의 새로운 리더로서 입지 다지기를 시도, 이른바 ‘양갑 갈등’을 배태했다. 이들은 최근 당정개편 과정에 다시 한 번 ‘한화갑 위원의 대권행보’를 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펼쳤고 완전히 갈라서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원래 동교동계는 김대통령과 권노갑 전위원을 중심으로 한 단일체계였다.
권 전위원은 평소 동교동계의 유래에 대해 “동교동계란 유신 이후 군사정권 시절 김대중 선생을 직접 거론하지 못한 신문용어에서 비롯됐다”면서 “동교동이란 선생의 자택을 가리키는 말인 동시에 선생 자신을 가리키는 상징어로 통용됐다”고 밝혔다. DJ를 가리킨 말로 시작된 동교동은 점차 ‘동교동 사람들’의 줄임말로 사용됐으며, 배타적인 자신들만의 동질성을 갖게 된다.
현재 동교동 구파와 한광옥 계열은 구분조차 힘들 정도로 끈끈한 협력관계에 놓여 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한대표의 직계인 박양수(朴洋洙) 의원이 권 전위원의 마포사무실 관리책임을 맡은 것도 두 사람의 결속을 증명한다. 이로 인해 한광옥 대표가 여론의 지탄을 받는 권 전위원을 대신해 동교동계의 새로운 리더가 될 것으로 전망하는 사람도 많다.
물론 동교동 구파의 힘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김옥두 의원이 9월7일 청와대 관저로 불려가 해양수산부장관을 권유받았으나 고사했다는 얘기는 오늘날 동교동 구파의 위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들은 고립되고 있고 신파마저 떨어져간 마당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럴 경우 동교동의 정의도 조금 달라진다. 과거 권 전위원이 정의한 동교동은 군사독재 시절 탄압을 함께 견뎌냈던 ‘비서’ 출신의 그룹이라는 개념이 강한 반면, 한광옥 대표를 포함한 새로운 동교동은 독재정권 시절 재야세력과는 별도로 대통령과 함께 일했던 야당 동지들이라는 개념에 더 가깝다.
반면 한화갑 최고위원의 신파 세력은 한광옥 세력의 구파 가세로 점차 여권 내 비주류로 전락해가는 느낌이다. 한위원은 실제 완전히 비주류를 자인하는 듯한 발언을 전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 적이 많다. 한위원은 지난 5월 정풍운동 당시 “청와대 비서진이 잘못하고 있다”면서 소장파에 가세하는 모습을 보였다. 당시 한위원은 “당에 너무 정보가 없다”고 한탄했으며 “나에게도 정보가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신·구파의 분리와 관련, 문희상 의원은 “대통령은 신파든 구파든 필요에 따라 사람을 중용한다”면서 “동교동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쓰임새가 있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신파의 위상은 점점 위축되고 있다. 한화갑 위원이 독하게 마음먹고 상황을 정면돌파해야 한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치권에선 김대통령이 아예 신파를 배제하고 구파 중심의 정면돌파전략을 세운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한광옥 대표가 당직개편과정에 한화갑 최고위원의 신파를 중용하지 않은 것도 이와 관련 있다. 이는 당내 각 세력에 골고루 힘을 분산시키기보다 하나의 세력에게 힘을 집중시켜 레임덕을 막겠다는 김대통령의 의중과 닿아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권 전위원이 김근태 최고위원의 동교동계 해체 요구에 대해 “동교동은 민주당의 뿌리”라고 태연히 받아친 것도 정면돌파의지와 무관치 않을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권 전위원은 “김위원이야말로 그 기반 위에 수혈된 것”이라고 오히려 역공을 취했다. 동교동 핵심세력들이 갖는 편협한 ‘주인의식’은 끊임없이 당내 분란을 조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근태 위원은 “동교동이 과거 고생을 많이 했고 정권 창출에 기여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면서 “그렇지만 이제는 민주당을 동교동의 정당이 아니라 국민의 정당으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권 전위원은 “내년 대선 경선에서 지지후보를 밝히겠다”고 천명해 놓은 상태다. 그렇지만 구파가 대선 경선과정에서 이인제 위원 지지의사를 다시 한 번 천명한다면 민주당의 내분은 걷잡을 수 없이 격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결국 김대통령은 레임덕을 우려, 구파와 한광옥 대표체제를 신임했지만 거꾸로 당내 분란을 자극해 레임덕을 부추기는 결과를 맞을 수도 있다.
당권파들에겐 10·25재선거가 중요한 시험대로 다가오고 있다. 국민 여론과 거리가 있는 당정개편을 해놓고 재선거의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느냐는 분석이 벌써 나온다. 민주당의 위기가 의외로 빨리 다가올 수 있다는 얘기다.
동교동 구파가 몰락하더라도 신파에게 곧바로 기회가 올지는 불투명하다. 구파가 몰락하면 유력 대권주자들에게 뿔뿔이 줄서게 돼 민주당의 분열과 레임덕을 가속화할 것이란 분석이다.
어쨌든 여권은 ‘혁명적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한 대선후보를 뽑는 내년 당내경선 때까지 동교동 구파를 중심으로 움직일 것으로 전망된다. 신파는 이제 전통적 동교동에서 떨어져 나와 험난한 세상에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김대통령이 신·구파의 재결속을 다시 한 번 강력히 요구할 것인지, 아니면 신·구파의 독자행보를 계속 용인할 것인지는 연말쯤 결판날 것으로 보인다.
권 전위원은 ‘누군가에게 버팀목이 되는 삶이 아름답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동교동계의 일체감을 여러 차례 강조하면서 이렇게 평가했다.
“동교동 캠프는 강한 유대감과 결속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는 오랜 세월 김대중 총재를 모시고 동고동락하는 동안 생겨난 끈끈한 인간적 신뢰가 그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서양 속담이 있지만 동교동 캠프에 이만큼 어울리는 말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우리 동교동 동지들은 말 그대로 눈물로 맺어진 집단이기 때문입니다…세간에서 이를 맹목적인 충성이라고 비판하는 모양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화갑 동지는 이 같은 충성을 ‘옳은 것에 대한 복종’이며 ‘실증적 진실에 대한 복종’이라고 표현한 일이 있습니다…우리도 현대적인 고등교육을 받았고 누구 못지않게 냉철한 이성을 갖고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우리의 충성심은 짧게는 10여 년, 길게는 40여 년씩 동고동락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입니다.”
김옥두 의원이 “우리 당에는 계보가 없다”고 동교동계의 실체를 부인했지만 권 전위원의 생각은 다르다. 권 전위원은 실체를 인정하고 있고 오히려 ‘동교동=민주당’이라는 등식을 세우며 정통성을 역설한다. 이들은 실제 최근까지도 매월 한 번씩 서교동의 한 음식점에서 정기회합을 가지며 단결을 도모하고 있다.
DJ에 의해 형성된 동교동계에서 현재 권노갑 전위원이 최고 ‘어른’이다. 동교동계에서 권노갑 전위원의 위치는 사실상 DJ대리인이다. 이와 같은 위상이 표면적으로 가시화한 때는 1992년 대선 패배 뒤 김대중 대통령이 영국 유학을 떠난 다음으로 볼 수 있다. 물론 1985년 민추협 결성 때도 권 전위원은 DJ를 대신해 동교동을 끌고 갔지만 1992년 대선 패배 뒤에는 DJ의 재기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깃발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기택(李基澤)씨가 주도하는 민주당에서 권 전위원은 ‘내외문제연구소’를 설립, 동교동계 의원들을 추스르면서 본격적으로 DJ대리인이란 호칭을 얻었다. 이는 사분오열 위기에 처한 동교동계 의원들에게 DJ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믿음을 불어넣어 주었고, 내외연은 DJ철학의 계승발전을 모토로 권 전위원에 의해 잘 유지됐다. 동교동은 DJ에 의해 생겨났지만 유지·발전의 공로는 권 전위원에게 있는 셈이다.
동교동계의 맏형과 좌장으로서 권 전위원의 지위는 오래 전에 형성됐다. 김대통령의 목포상고 4년 후배인 권 전위원은 지난 1963년 평소 흠모하던 DJ캠프에 들어와 일을 시작했다. 권 전위원은 당시 목포여고 영어교사로 일하던 중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김대중 후보를 위해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권 전위원은 목포지역에 워낙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어 김대중 후보가 “노갑이처럼 사람 많이 아는 이는 처음 보겠네”라고 감탄했다는 일화도 있다.
동교동 3인방 중 김옥두 의원과 한화갑 최고위원은 이보다 늦은 1967년경 합류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 후 두 사람은 비서로 본격 등록했고, 당시 권 전위원은 8명의 비서 중 조직담당 엄창록씨와 함께 선임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권 전위원에겐 ‘노갑이 형’이란 칭호가 따라다녔다.
고난이 닥치면 내부 결속력은 강해지는 법. 동교동계에 시련이 닥친 것은 1971년 대통령선거 직후였다. 김대통령이 지팡이를 짚게 만든 의문의 교통사고가 일어났고, 1973년엔 도쿄에서 납치사건이 터졌다. 권 전위원과 김옥두 의원 등은 유신 직후 정보기관에 연행돼 물고문, 통닭구이 고문 등을 당했다. 동교동을 상징하는 핍박과 고통의 이미지는 이때 집중적으로 형성됐다.
권 전위원은 당시 고문을 경험한 이래 수첩을 갖고 다니지 않고 집에서 중요한 전화를 걸지 않으며, 고문을 당해 만일 정치자금의 출처를 대야 할 정도가 되면 어떤 고통도 달게 받는다 등 세 가지 행동수칙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권 전위원의 머릿속에는 50∼100개의 전화번호가 늘 입력돼 있다고 한다.
지금은 서먹서먹한 관계에 놓인 김옥두 의원과 한화갑 최고위원도 1970년대에는 감방동지로서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는데 1978년 1월1일 이른바 ‘세배죄 사건’이 그것이다. 1976년 3·1민주구국사건으로 투옥됐다가 1977년 말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돼 있던 김대중 대통령에게 1978년 새해 첫날 세배를 하려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30여 명의 인파가 교정당국에 세배를 요청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다음 김옥두, 한화갑 의원이 경찰의 출두명령을 받았고 ‘다중의 힘으로 병실 문을 부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되고 말았다. 더구나 당시 현장에는 한화갑 위원은 없었다. 하지만 한위원은 현장에 있었다고 진술했다.
검찰조사를 끝내고 호송버스를 타고 오면서 김옥두 의원이 한위원에게 “왜 현장에 없었는데 그렇게 진술했냐”고 물었더니 한위원은 “혼자 징역 살면 외로울까 봐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정치적 이유로 구속시키려고 작정한 이상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 김의원은 당시 짜릿한 감동을 느꼈다고 회고하고 있다.
어쨌든 동교동계 핵심들의 잦은 감옥행은 동교동을 더욱 뭉치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금도 당내 의원들이 동교동계를 비난하면 동교동 식구들은 “우리가 감옥 가고 고문받고 모진 고초를 당하면서 당을 지켜왔는데 당신들은 당시에 무엇을 했느냐”고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기 일쑤다. 이는 권 전위원이나 김옥두 의원, 이훈평 의원 등이 즐겨 쓰는 어투다.
특히 동교동계 의원들은 상도동계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할 때마다 항상 탄압받던 시절을 떠올리며 “우리는 분열되지 않는다”고 장담하곤 했다.
이러한 동교동계의 생각은 정권을 잡기 전까지는 들어맞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정권쟁취 후 동교동계는 엄연히 신·구파로 갈라져 가고 있다.
혈연적 동지를 외치던 동교동계가 왜 분열돼가는 걸까. 동교동 신·구파는 분열의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고 있다. 구파는 “한화갑 최고위원이 대권병에 걸려 이렇게 됐다”고 비난하고, 신파는 “더 이상 구심 역할을 할 수 없는데도 권 전위원이 오기를 부리고 있다”고 반박한다.
구파는 “동교동은 다음 대선에 킹메이커로서 사명을 끝내야 한다”는 주장인 반면, 신파는 “미래의 동교동계 중심으로 한화갑 최고위원을 인정해야 모두가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권 전위원과 한위원의 갈등은 생각보다 뿌리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위원은 1967년 DJ캠프에 뛰어든 뒤 변변한 직책을 맡아본 적이 없다. 국민의 정부 들어 원내총무와 사무총장, 최고위원 등으로 일약 실세 중 한 명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그 전까지 한직만 맴돌았다.
한위원은 1971년 대통령선거 때에는 경남지역 조직담당으로 김대통령과 떨어져 있었고, 이후에도 주로 정책위원 등을 맡아 정책 분야에서 DJ를 보필했다. 1970년대 말에는 공보업무를 맡았지만 주로 외신기자를 만나는 일이 많았다.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으로 동교동에서 학벌상 단연 눈에 띄지만 DJ 바로 곁에 서지는 못했다. DJ의 가신이라고 하지만 비서실장 한번 맡은 적이 없다. 김옥두 의원은 경호실장을 맡았고, 1985년 민추협으로 뒤늦게 합류한 한광옥 대표까지 1988년 비서실장을 맡기도 했지만 한위원은 비서실 차장이 가장 높은 직위였다.
한위원은 측근들에게 “나는 야당 시절 김대중 선생님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었다”면서 “내가 좋아 지근거리에서 선생님을 모실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한위원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1980년 계엄고등군법회의 최후진술을 통해 “나는 김대중 선생과 인연을 맺은 이래 지금까지 그분 곁에서 말석을 지키고 있지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단 한 번도 실망해본 적이 없다. 나는 결코 김대중 총재 밑에서 가장 충성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오랫동안 김총재 곁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은 갖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위원은 이러한 자신의 위치를 묵묵히 받아들였지만, 다만 권 전위원에게 일종의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권 전위원이 자신을 좀더 중용하지 않은 데 대한 섭섭함이라는 게 한위원 측근들의 설명이다.
한위원은 과거 동교동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다 보면 시 외곽에 있던 집까지 갈 차비가 없어 몇 시간을 걸어갔다는 얘기를 넋두리 삼아 측근에게 말한 적이 있다는 것. 물론 김대중 대통령이 감옥살이를 하던 때다. 이는 결국 동교동의 자금을 관리한 권 전위원에 대한 섭섭한 마음의 일단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교동은 오랫동안 권 전위원과 김옥두 의원 등 동교동 구파가 조직과 자금관리를 전적으로 맡아왔다. 권 전위원이 “내가 죽으면 다른 것은 다 놔두고 비석에 ‘김대중 선생 비서실장’이라고 새겨주면 영광이여”라고 말하는 것도 어찌 보면 김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권 전위원은 실제 김대통령을 위해 ‘살신성인’하는 모습을 몇 차례나 보여주었다. 모진 고문 속에서도 정치자금 후원자를 실토하지 않은 의리 외에도 야당 돌풍이 일었던 1985년 2·12총선 때는 출마준비를 끝내놨다가 김대통령의 만류로 뜻을 접었고, 1993년 2월 김대통령이 영국으로 떠나고 없는 동안 목포지구당위원장을 김홍일(金弘一) 의원에게 넘겨준 일, 지난해 총선에 출마를 포기한 것 등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이 때문에 권 전위원에게는 자신보다 대통령을 위해 몸을 던지는 사람이란 평가가 내려졌다.
한위원은 1992년 제14대 총선에 출마, 원내에 처음 진출했다. 1995년 전남도지사 선거 출마시도가 실패하면서 정치적 좌절의 역사가 시작됐다. 한위원은 당시 “호남사람이 바깥에 나가서도 ‘내가 호남사람이오’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다”며 출마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현했다.
처음 실시된 지방자치선거에 대한 DJ의 의지도 대단했다. 지방자치선거가 1997년 대선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DJ는 서울시장과 경기지사, 전남지사, 전북지사 네 곳을 승리할 수 있다고 보고 후보자 물색에 나섰다.
DJ는 서울시장후보로 조순(趙淳), 고건(高建)씨, 경기지사후보에는 이종찬(李鍾贊)씨를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DJ는 권 전위원을 불러 조순씨를 만나보라고 지시했다. 권 전위원이 몇 차례 설득한 끝에 조순 서울시장이 탄생했다.
같은 과정을 거쳐 전남지사후보도 중앙대 김성훈(金成勳) 교수로 결정됐다. 한위원은 민주당에서 출마하면 당선인 전남지사후보에 한솥밥을 먹은 자신을 천거하지 않은 권 전위원에게 은근히 섭섭해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달 가량 대의원을 상대로 선거운동을 펼친 한위원은 당내 경선 일주일을 앞두고 사퇴의사를 발표했다. 한위원의 측근은 “당시 대의원을 접촉한 결과 한위원이 의원으로부터 70% 가량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며 “일부에서는 DJ의 출마포기 요구를 수용하지 말고 독자 출마를 강행하라고 한위원을 설득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어쨌든 한위원은 이때 처음으로 정치적 홀로서기를 시도했는데 좌절되어 상심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DJ가 추천한 김성훈 교수는 결국 당내 경선에서 독자 출마한 허경만(許京萬)씨에게 19표차로 지고 말았다. 한위원 측근들에 따르면 이때까지만 해도 한위원은 여전히 동교동계 내에서 뚜렷한 입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소외돼 있었으며 ‘맏형’으로부터 사랑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 들어 한위원과 권 전위원의 처지는 한때 뒤바뀌었다. 권 전위원은 1997년 한보비리사건으로 구속돼 대선운동에 전혀 관여하지 못했다. DJ는 대선과정에 김중권(金重權)씨 등 새로운 인물을 많이 영입했다. 또 정동영, 김한길씨 등 40대가 DJ 주변에 집중 포진해 이미지 선거를 주도했다.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하자 DJ는 김중권씨 등을 중용했고 이는 신주류의 득세로 불렸다. 권 전위원은 여전히 풀려나지 못했고 동교동계의 빈자리를 한화갑 위원이 메울 수밖에 없었다.
한위원은 집권 후 원내총무, 총재특보단장, 사무총장 등을 거치면서 화려하게 새 정권의 핵심인물로 급부상했다.
권 전위원이 대선과정에 소외되고 1998년 석방된 뒤 도피성 일본유학을 떠나면서 DJ 곁에서 멀어진 것과 비교해 볼 때 한위원의 승승장구는 ‘상전벽해’와 같은 동교동계 내부의 변화였다.
1998년 12월 권 전위원이 귀국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을 때 김중권 당시 청와대비서실장 등 신주류는 “국민감정이 좋지 않다”며 귀국을 반대했다. 전반적인 여론도 귀국 반대 쪽이었다. 고민하던 한위원은 DJ에게 “권고문의 귀국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를 들은 DJ가 “자네(한위원)는 정치를 너무 몰라”라고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권 전위원은 양갑 갈등이 불거진 뒤 “그때는 한위원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나를 도와줬지”라며 고마움을 표시한 적이 있다.
그런데 누가 알았을까. 권 전위원의 귀국은 권력내 역학관계를 또다시 바꾸어버렸다. 힘은 급속히 권 전위원 쪽으로 옮겨갔다.
이러한 힘의 반전은 전적으로 DJ의 의중과 관련이 있다. 당시 청와대에 있던 고위관계자는 사석에서 “김대통령이 권 전위원을 생각하는 마음이 70%라면 한위원에게는 30% 정도 배려한다”고 전했다.
권 전위원의 영향력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지난해 4월 총선이었다. 한위원이 초반에는 호남지역 공천에 관여했으나 나중에는 권 전위원의 수중으로 완전 넘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한위원계로 분류된 장성민(張誠珉) 의원의 공천 여부를 둘러싸고도 심각하게 대립했다. 권 전위원과 김옥두 의원은 강경하게 반대했다. 장의원이 끝내 공천받긴 했지만 동교동 구파는 공천과 총선과정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별다른 직책이 없던 권 전위원은 선거대책위 고문으로 임명돼 당사에 출근하면서 실권을 장악해갔다.
수도권의 한 원외지구당 위원장은 “민주당 공천이 막판에 이상해진 것은 권 전위원이 개입한 이후부터였다”고 말했다. 386학생운동권의 과다한 공천, 전문가 집단의 소외, 한영애 김봉호씨 등 일부 구정치인의 재공천 등이 동교동 구파의 영향력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권 전위원은 조금씩 영향력을 확대했고 독자 생존을 모색하던 한위원은 ‘권위원 밑으로 다시 갈 것인가, 아니면 독자적인 리더가 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내몰렸다.
지난해 최고위원 경선은 이러한 한위원의 고민이 집중적으로 터져 나온 계기가 됐다. 권 전위원과 김옥두 의원은 초반에 한위원의 최고위원 출마 자체를 반대했다. 이들은 전당대회 연기를 주장했고, 나중에는 권 전위원이 직접 출마를 시도하다 좌절되기도 했다. 마침내 권 전위원이 경선 과정에서 이인제 최고위원 등을 지원하고 한위원의 과다한 득표를 막으려 하자 한위원은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인다”며 권 전위원을 정면으로 몰아붙였다.
권 전위원과 한위원 캠프에서는 서로 “이젠 두 사람 관계가 끝”이라는 말이 터져 나왔고, 이를 그 동안 쌓인 감정적 앙금의 필연적인 결과로 해석했다. 한위원 측은 “이번 경선을 계기로 동교동계에 새로운 별이 뜨게 될 것”이라고 말한 데 대해, 권 전위원측은 “터무니없는 욕심을 내고 있다”고 못마땅해했다.
양갑의 갈등이 불거지자 가장 난감한 것은 청와대였다. 김대통령은 여러 차례 동교동계가 단합할 것을 주문했다. 때론 화를 내기도 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최고위원 경선을 앞두고 지난해 6월29일 동교동 1세대 3인방이 만나 “영원한 형제애로 단결된 모습을 보이겠다”고 천명했지만 경선과정에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최근 당내 분란을 낳은 당정개편과정에서도 청와대는 여러 차례 단합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진다. 권 전위원이 한 달여 동안 해외여행을 끝내고 지난 9월4일 돌아오자 한위원은 공항으로 직접 영접을 나가면서 단합을 과시했다.
권 전위원과 한위원, 김옥두 의원은 이날 밤 다시 심야 회동을 가졌다. 권 전위원은 이미 청와대와 교감을 끝낸 상태였다. 권 전위원은 한위원에게 “대권포기를 전제로 한다면 대표로 밀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언론은 이것을 확대해석해 동교동 구파가 새 당대표에 한화갑 위원을 추천키로 했다고 보도했다. 동교동 신·구파의 결속이 당정개편의 새로운 변수로 등장했다는 분석까지 곁들여졌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위장화해’에 불과했던 것으로 판명났다. 동교동 구파는 대권행보냐, 대표냐를 두고 한위원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일찍부터 대권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던 한위원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카드였다.
한위원은 “조건이 붙은 대표라면 생각도 미련도 없다”고 치고 나왔다. 또 “공민권을 제약해선 안 된다”고 말하며 불편한 심기를 표출했다.
9월6일 한위원과 문희상 의원 등 신파 측 의원들이 긴급히 모여 대책을 숙의했다. 이 자리에서 몇 명은 “기회가 왔을 때 대표를 받으라”고 설득했으나 한위원은 대권행보에 나서겠다는 뜻을 확실히 밝혔다.
한위원이 이처럼 강하게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 것은 끝까지 구파의 지원을 장담할 수도 없는데다 ‘소탐대실’을 우려한 때문으로 분석된다. 지금 국면에서 대표를 맡으면 대권행보에도 지장을 주고 당내 견제에 걸려 생명이 길지도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위원측 관계자는 “날개를 접고 대표를 맡으면 그 순간 허세대표가 될 뿐이고, 대권행보를 지속하려면 대표를 주지 않겠다니, 한위원이 선택할 길은 애초에 한 가지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위원측은 비록 대표로 발탁되지 않았지만 대권행보를 공개적으로 천명한 계기로 작용한 만큼 한위원에게 불리한 게 없다고 분석했다.
그렇지만 당이 어려운 시기에 한위원이 당과 대통령보다 자신의 ‘사심’을 우선시했다는 비판도 터져 나왔다. 한위원이 나서 당을 추스를 수 있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대표를 맡는 게 순리였다는 것이다.
물론 구파가 한화갑 위원에게 대표를 줄 생각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민주당 당직자들은 대체로 권 전위원이 처음부터 한위원의 대표 발탁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한위원의 대권의지를 꺾으려는 생각에서 선택을 강요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광옥 대표는 9월11일 취임 뒤 기자간담회에서 “대통령이 이미 이런 것(당정개편)을 다 구상하고 계셨다. 이것(임동원 장관 해임안 파동)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할 생각을 하고 있다가 이번에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한광옥 대표체제가 오는 12월쯤 현실화될 것으로 예상했는데, 예기치 않은 DJP공조 파괴로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다는 의미로 요약된다.
결국 한광옥 대표 구도가 짜여 있었음에도 동교동 구파가 굳이 한화갑 위원에게 양자택일을 요구한 것은 한광옥 대표체제에 대한 모양 갖추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권 전위원이 9월11일 기자들과 만나 나눈 얘기도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기자들) 한화갑 최고의 대표 기용을 가로막았다는 관측이 있다.
“(권 전위원) 그런 것이 아니다. 한위원은 같은 식구이자 정치동지다. 한위원의 발전을 바라므로 선택을 잘 하라고 권유한 것뿐이다.”
-귀국 후 한위원을 몇 번 만났나.
“공항 이외에 두 번 만났다. 두 번 다 경선 출마를 포기해야 대표가 될 수 있다는 뜻을 전했다. 이것이 대통령의 뜻이라는 점도 확인해줬다.”
-대통령의 뜻을 확인한 것인가.
“그렇다. 확인했다.”
청와대는 일찌감치 이번 대표인선에 대권주자를 배제한다는 원칙을 세워두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한광옥 대표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동교동 신·구파는 결속을 다진다는 명분으로 몇 차례 회동을 가졌지만 애초부터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던 셈이다.
동교동 신·구파는 현상태에서는 재결속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들은 대선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확연히 다르다. 구파는 지난해 최고위원 경선 이후 이인제 최고위원 지지의사를 여러 차례 밝혔다. 9월7일 이인제 초청 만찬에는 26명의 의원이 모였는데 동교동계의 이훈평, 조재환 의원 등도 참석했다. 이들은 사실상 이인제 계보 활동을 시작한 셈이다.
반면 신파는 한화갑 위원의 직접 출마로 동교동계의 단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위원은 대선 경선에서 최소한 2∼3등을 차지, 향후 정국에서 호남세력의 구심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이들은 김대통령의 내락까지 받았다며 적극적인 자세다.
한위원의 한 측근은 “지난 봄부터 사실상 대통령의 OK사인을 받았다”면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한위원은 여의도에 35평짜리 사무실을 냈고 가까운 의원들에게 지지협조를 구하고 있다. 더구나 한위원은 이인제 위원에 대한 거부감을 수차례 표시, 구파와 메울 수 없는 골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김대통령이 특정후보에 대한 지지의사를 표현한다면 신·구파 모두 김대통령의 뜻을 따를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김영삼(金泳三) 전대통령이 그랬듯 김대통령도 끝내 특정후보에 대한 노골적인 편들기를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공정경선을 해치기 때문이다.
현재의 판도대로라면 동교동 구파의 지원을 받는 이인제 위원과 이에 맞서는 노무현(盧武鉉) 상임고문, 김중권, 한화갑, 김근태 최고위원 등이 연대하거나 각개약진하는 1강 4중의 경선구도를 예상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신·구파가 각자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내년 경선 때까지 별도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동교동계는 공언과 달리 이미 상도동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대선 경선에서 단결하지 못하고 사분오열되면 이후에도 하나의 대오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게 상도동이 주는 교훈이다. 상도동계는 이회창지지파, 이인제지지파, 김덕룡계열 등 다양하게 나뉘어 제 갈 길을 갔다. 권 전위원은 자서전에서 동교동과 상도동을 이렇게 비교했다.
“역대 군사정권의 탄압 강도에서나 탄압에 반발하는 투쟁 강도에서나 동교동은 상도동과 비교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 생존의 문제를 두고 고심했다면, 상도동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방법의 문제를 두고 고민했던 것입니다. 이런 차이점을 무시하고 그저 동교동과 상도동을 단순 비교하여 거기서 도출되는 결론만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얘기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권 전위원의 분석대로만 움직이지 않고 있다.
동교동계 역학관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구파가 한화갑 위원의 공백을 한광옥 대표의 세력으로 메우려 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신·구파의 대립 속에서 한광옥 대표와 박지원(朴智元) 청와대정책기획수석의 행보가 더욱 주목받고있다.
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동교동계는 아니다. 한광옥 대표와 박수석은 모두 1980년대 중반에 DJ캠프에 합류했다. 그렇지만 이들은 현재 동교동 구파보다 대통령과 더욱 가까운 지근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들은 신·구파와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나름의 입지를 구축해왔다. 정권출범 초 신파가 득세할 때는 신파와 가까웠고 최근 구파가 힘을 얻으면서는 구파에 가까워진 것으로 해석된다. 지난해 말 이후 이번 당정개편과정에서는 완전히 구파의 입장에 섰던 것으로 분석된다. 심지어 이 두 사람이 구파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광옥 대표는 동교동 구파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 하지만 끊임없이 독자적으로 세력을 확장해왔다. 일부에서는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재직하면서 가까운 의원들을 공관으로 초청하는 등 당내 정치만 해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한광옥 대표는 알려진 대로 정균환(鄭均桓) 의원이 주도하는 중도개혁포럼의 실질적 후견자로 평가받고 있다. 9월1일 발족한 중도개혁포럼에는 모두 58명의 의원이 가입해 있다. 포럼은 대권주자에게 줄서지 말고 당의 중심역할을 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당의 미래에 불안감을 갖고 있던 의원들이 ‘중도개혁’이라는 말과 정균환 특보단장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대거 가입한 것으로 해석된다. 주축세력은 박광태, 박양수 의원 등 야당시절 당료 출신이 많다. 이는 동교동 핵심이 가신그룹인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대표의 영향력 확대와 함께 중도개혁포럼은 더욱 탄력을 받고 있다. 한대표 체제에서 새로운 사무총장을 맡은 김명섭(金明燮) 의원과 정책위의장에 발탁된 강현욱(姜賢旭) 의원이 모두 중도개혁포럼 소속이다. 유임된 이상수(李相洙) 총무와 당4역 중 한 명인 지방자치위원장에 발탁된 김성순(金聖順) 의원도 역시 포럼에 가입했다. 민주당의 한 재선의원은 “중도개혁포럼이 당내 최대계보가 된 것 같다”면서 “여기에 가입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