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관은 부처행정을 책임지는 중요한 자리다. 부처의 소관업무에 대해 정책을 입안하며 필요한 경우 법령을 개정한다. 소속 공무원의 인사권도 갖고 있다. 나아가 조직의 재편이나 개편 등 조직의 운영·관리에도 많은 권한을 지닌다. 이러한 이유로 부처의 정책이나 인사, 예산에 끼치는 장관의 잠재적 영향력은 매우 크다. 따라서 장관을 어떠한 기준에 따라 얼마나 잘 뽑느냐가 행정의 효율성을 좌우하는 주요 요인이다. 우리의 경우 대통령 중심제이긴 하나 장관의 역량이나 리더십에 따라 부처의 정책이나 조직이 크게 변화하고 대외적으로 부처의 위상도 다르다.
‘실패장관‘
한완상 (통일), 배순훈 (정통), 김숙희 (교육), 김영호 (산자)
부하 공무원들은 소속부처의 수장인 역대 장관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답하는 것이 이 글의 일차적 의도다. 부처행정의 최고책임자인 장관이 제대로 업적(행정의 생산성)을 내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과 요소(임명권자의 입장과 장관 본인의 입장 등)가 고려돼야 하는지를 살피는 일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가분석을 위해 중앙부처의 국·과장급 고위 공무원(전직 포함)을 상대로 필자가 올 상반기에 실시한 설문조사 응답결과를 이용했다.
조사대상 장관은 노태우 정부부터 김영삼 정부를 거쳐 김대중 정부 초기(2000년 8월7일 현재)까지 16개 부처에 재임했던 장관 187명 모두다. 노태우 정부 출범 초기에 재임했던 장관 가운데 전두환 정부에서 임명된 장관은 노태우 정부 시절에 재임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즉 임명권자가 누구인지를 기준으로 분류한 것이다.
장관을 평가하기 위한 설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했다.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장관’과 ‘보통 수준의 업무수행 장관’ 그리고 ‘부처적응에 어려움을 겪은 장관’ 세 가지다. 여기서 ‘성공장관’은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장관으로, ‘실패장관’은 부처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던 장관으로, ‘보통장관’은 보통 수준의 업무를 수행한 장관으로 각각 규정했다. 이러한 평가기준에 따라 설문에서는 부처별로 역대 재임장관을 재임순서대로 모두 적시하고 해당장관이 제시한 세 가지 분류기준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지적하라고 했으며 그렇게 지적한 이유나 사유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기입하게 했다.
설문에 모두 89명의 고위공무원(대부분 국장급 이상)이 응답했다. 설문응답결과를 토대로 설문대상부처 중 외교통상부, 통일부, 건설교통부, 산업자원부, 농림부, 정보통신부, 과학기술부, 교육부, 문화관광부, 노동부, 보건복지부 11개 부처의 역대 재임장관을 구체적으로 평가해 보았다.
[ 외교 · 통일부처 ]
외교부는 노태우 정부부터 김대중 정부 초기까지 모두 7명의 장관이 재임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처의 명칭도 정부별로 달랐다. 노태우 정부,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외무부로 불렸고,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는 외교통상부로 명칭이 바뀌었다. 구체적으로 재임장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최호중→이상옥 장관(이상 노태우 정부), 한승주→공노명→유종하 장관(이상 김영삼 정부), 박정수→홍순영 장관(이상 김대중 정부) 등이다. 이들 장관 가운데 ‘성공장관’으로 응답된 횟수가 제일 많은 장관은 홍순영 장관으로 집계됐다. 다음은 최호중 장관이다.
홍순영의 카리스마적 리더십
왜 외교부 공무원들은 이들 장관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을까.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홍순영 장관에 대해 부하공무원들은 직업공무원 출신으로서 전문성을 갖고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또 인사에 대한 외부압력을 과감히 물리치는 등 인사의 자율성 확보에 역점을 두었고 확고한 소신을 갖고 업무를 수행했다는 점을 꼽았다.
특히 대중국, 대러시아 관계에 외교역량을 집중시킨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홍장관은 ‘고교 후배’를 고위직에 기용했다는 것과 ‘햇볕-포용정책’에 소극적인 인사를 고위간부에 발탁하는 등 일련의 인사문제로 장관직에서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홍장관의 재임기간은 외교·통일부의 평균재임기간(21개월)에 크게 못 미치는 17개월로 비교적 짧았다.
최호중 장관에 대해 공무원들은 정통 외교관료 출신으로 전문적 식견을 갖추었고 업무추진력과 조직장악력이 뛰어났다는 점을 꼽았다. 이 밖에 부하공무원의 업무자율성을 존중하는 등 포용력을 갖추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한 이유다.
공무원들은 최호중 장관의 경우 특히 동구권 개방과 관련하여 소련 및 동구권과 수교를 맺는 등 북방외교 개척으로 대 공산권국가와의 관계 개선에 획기적으로 공헌하는 등 외교의 지평을 크게 넓혔다는 점을 높이 샀다. 최장관의 재임기간은 24개월로 외교부 평균치를 넘고 있으며 외교부 장관을 마친 뒤 곧바로 통일부총리로 영전했다.
반면, 공무원들이 실패장관으로 가장 많이 지적한 장관은 박정수 장관과 한승주 장관이다. 박장관은 김대중 정부에서, 한장관은 김영삼 정부에서 각각 외교부 수장을 지냈다. 박장관과 한장관은 집권여당 정치인과 학자 출신으로 정통 외교관료의 길을 걸은 인사가 아니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왜 이들 장관에 대해 공무원들은 낮은 점수를 주었을까. 공무원들은 외부영입 인사인 이들이 행정 경험이 부족해 외교부의 조직문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꼽는다. 때문에 이들 장관은 조직을 장악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박장관은 러시아와의 외교관계에서 일을 매끄럽게 처리하지 못해 재임 5개월 만에 중도하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승주 장관의 재임기간은 22개월로 외교부 평균에 속하나 외교안보팀과 정책갈등을 빚어 물러난 것으로 전해진다. 한장관의 경우 실패장관으로 거론된 횟수는 많다고 할 수 있으나, 북한의 NPT 탈퇴 등으로 조성된 한반도의 핵 긴장 및 위기문제를 뚜렷한 소신으로 풀어나간 점을 높이 사는 공무원도 있었다.
외교부의 경우 성공장관이 갖고 있는 공통된 특성으로 정통 외교관 출신이라는 점(전문성)과 조직에 대한 장악능력 및 탁월한 업무추진력을 꼽을 수 있다. 이에 대해 실패장관으로 거론된 인사들의 공통된 속성은 관료 출신이 아닌 외부전문가 출신이며 관료조직문화에 제대로 적응을 못 해 조직장악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점에서 공무원들은 조직을 제대로 추슬러서 업무를 밀도 있게 추진할 수 있는 장관이 외교부의 조직문화에 적합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통일부는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 김대중 정부 초기까지 모두 12명의 장관이 재임했다. 정부별로 보면 노태우 정부의 경우 4명의 장관(이홍구→홍성철→최호중→최영철)이,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한완상 장관을 비롯하여 이영덕→이홍구→김덕→나웅배→권오기 장관 등 6명이 이 부처의 최고책임자로 일했다. 김대중 정부 초기에는 강인덕 장관과 임동원 장관이 이 부처의 행정책임자로서 업무를 수행했다.
부처 명칭도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노태우 정부 시절 이홍구 장관과 홍성철 장관이 재임할 때는 국토통일원이었고, 최호중 장관 시절부터는 정부조직개편으로 통일원장관이 부총리로 승격했다.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서는 부처 명칭이 통일부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부처의 최고수장으로 일한 장관 12명에 대해 통일부 공무원들이 내린 평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설문에 응답한 국·과장급 공무원 모두가 만장일치로 이홍구 장관(노태우 정부 재임)을 성공장관으로 거론했다. 이장관의 최대 업적으로 공무원들은 남북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정책의 기초가 되는 남북교류협력법의 제정·시행과 대북화해협력 정책의 골격인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수립을 꼽고 있다. 이장관의 재임기간은 25개월로 부처의 평균(13.6개월)을 크게 앞지른다. 이장관은 정치학자 출신으로 온화한 인품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반면 실패장관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장관은 한완상 장관이다. 한장관은 주변 여건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자신의 철학을 담은 진보적 정책(당시 대북 햇볕정책)을 펼치다가 부처 내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정책에 대한 이념논쟁까지 촉발돼 결국 장관자리에서 물러났다. 특히 한장관은 외부에서 영입된 개혁성향의 인사로 관료조직에 대한 불신이 컸고 조직을 융화하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공무원들은 평하고 있다. 즉 자신이 구상하고 있던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조직 내부의 관리와 외부여건의 성숙이 필요한 데 이를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정책을 추진하다 낙마했다는 이야기다.
한장관의 재임기간은 10개월로 부처 평균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통일부장관의 경우 전문성을 지닌 학자 출신이더라도 성공장관과 실패장관으로 나뉠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통일정책의 결정 및 추진은 장관 개인의 이니셔티브와 함께 조직 내외의 여건이 무르익어야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 경제관련 부처 ]
건설교통부의 경우 노태우 정부부터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초기까지 모두 13명의 장관이 거쳐갔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노태우 정부에서는 박승→권영각→이상희→이진설→서영택 장관 등이 건설행정의 수장을 맡았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허재영 장관을 필두로 고병우→김우석→오명(직제개편으로 초대 건설교통부 장관이 됨)→추경석→이환균 장관이 부처행정을 진두지휘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이정무 장관에 이어 이건춘→김윤기 장관 등의 순으로 부처의 수장직을 수행했다. 부처 명칭도 몇 차례 바뀌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 김우석 장관이 재임할 때까지는 건설부였고 오명 장관부터 건설교통부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들 13명의 장관들에 대해 건교부 공무원들은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먼저 성공장관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인사는 오명 장관(전 동아일보 회장)이다. 공무원들이 오장관을 성공장관으로 꼽은 이유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행정경험이 있는데다(체신부 차관·장관) 전문적인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부하공무원에게 책임과 함께 권한도 주는 등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 조직관리능력이 뛰어났다. 또한 업무에 대한 추진능력과 대외교섭능력이 탁월했다는 점을 꼽고 있다.
오장관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업무추진력, 조직장악력, 대외교섭능력 등 장관이 갖추어야 할 속성을 모두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오장관의 재임기간은 12개월로 부처의 평균재임기간(12.9개월)에 근접하고 있다. 오장관은 이에 앞서 체신부장관으로 재임시에도 업적을 남겨 조직 내외로부터 성공한 장관이라는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오장관에 뒤이어 성공한 장관으로 거론된 인사로는 정치인 출신인 이정무 장관과 정통 세무관료 출신인 이건춘 장관을 들 수 있다. 김대중 정부에서 자민련 몫으로 입각한 것으로 알려진 이들 장관에 대해 부하공무원들은 추진력이 강하고 조직관리능력에서 남다른 강점을 지녔으며 대외관계 조정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공무원들은 실패한 장관으로 김영삼 정부의 김우석 장관을 가장 많이 거론했다. 김장관을 실패장관으로 거론한 이유는 “정치적인 배경만 있을 뿐 부처업무에 대한 전문성이 모자라 정치적 외압에 크게 흔들리는 행정을 폈다. 업무 추진력이 부족하고 조직을 관리하는 능력이 크게 떨어졌다”는 점 때문이다.
김우석 장관은 김영삼 전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으로 14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토지개발공사 사장을 지내다 건설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YS의 핵심측근으로 분류되는 정치인 출신이다. 김우석 장관의 재임기간은 12개월로 해당부처 장관의 평균재임기간(12.9개월)과 거의 비슷하다. 최근에도 건설교통부 장관의 경우 부처행정에 대한 전문성과는 별 관계없이 주로 정치인 출신이나 일반행정관료 출신이 정당간 연합에 따른 지분 안배 차원이나 집권세력에 대한 충성의 대가로 임명되는 경향이 있다.
산업자원부의 경우는 노태우 정부부터 김대중 정부 초기까지 모두 13명의 장관이 재임했다. 정부별로 보면 노태우 정부에서는 안병화 장관을 시작으로 한승수 장관, 박필수 장관, 이봉서 장관, 한봉수 장관 등 5명이 부처의 행정을 책임졌으며 부처 명칭은 상공부였다. 김영삼 정부시절에는 김철수 장관을 필두로 박재윤→안광구→임창렬→정해주 장관이 부처의 살림살이를 맡았다. 김대중 정부 초기에는 박태영→정덕구→김영호 장관 순으로 배턴이 이어졌다. 부처 명칭도 몇 차례 바뀌었는데 김영삼 정부에서 동력자원부가 상공부에 흡수돼 상공자원부로 바뀌었으며 그 후 정부조직 개편 때 통상산업부로 명칭이 변경돼 김영삼 정부 말까지 유지됐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산업자원부로 명칭이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상에서 제시된 13명의 장관에 대해 해당부처 공무원들은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먼저 성공장관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장관은 노태우 정부 시절의 한승수 장관과 김영삼 정부 말기의 정해주 장관이다.
한승수 장관의 경우 당시 집권당 정치인 출신으로 입각한 경우인데, 다양한 분야(학계 포함)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조직을 부드럽게 관리하는 능력(조직 인화능력)과 탁월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다 정치적인 감각까지 지녀 대외적인 업무처리에도 능숙한 기량을 보인 점을 공무원들은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한승수 장관의 재임기간은 15개월로 부처평균(14.1개월)을 약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정해주 장관은 오랜 기간 상공부에 근무했으며 중소기업청장을 역임한 직후 관료 출신의 경제전문가로서 입각했다. 조직 내부의 업무를 훤히 꿰뚫고 있었고 부하공무원의 의견을 존중(하의상달 활성화)하는 등 조직 내부의 인화 및 융화에 관심을 쏟았으며 전문적인 식견을 토대로 부처의 정책을 합리적으로 추진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만 김영삼 정부 말기에 장관에 재임한 관계로 김대중 정부로 집권세력이 바뀌면서 물러나 재임기간은 4개월로 짧은 편이다.
한편 실패장관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장관은 누구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학자 출신으로 입각한 김영호 장관이 실패장관으로 가장 많이 거론됐다. 다음으로 경제학자 출신이자 YS의 신경제이론 주창자로 알려진 박재윤 장관이 실패장관으로 거론됐다.
김영호 장관의 경우 학계에 오랫동안 몸담아서인지 조직을 운영하는 데 있어 부하공무원과 마찰이 자주 일어났으며 경제적 이론과 현실의 괴리를 좁히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또한 대외관계 문제를 처리하는 행정능력도 부족했다고 평가한다. 즉 전문성을 현실 행정에 접목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부처 내부조직의 융화와 대외교섭 능력에 문제점을 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김장관의 재임기간은 부처 평균재임기간에 크게 못 미치는 7개월로 나타났다.
박재윤 장관은 재무부 장관을 지내다 정부조직개편으로 재무부가 재정경제원으로 통합되면서 자리가 없어지자 초대 통상산업부 장관으로 입각한 사례다. 박장관은 무리한 정책결정과 추진으로 부하공무원과 자주 마찰을 빚는 등 조직을 관리하는 능력에서 적지 않은 물의를 빚은 것으로 공무원들은 평가한다. 특히 공무원들과의 의사소통 과정에 합리성이 결여돼 조직 내부 에너지를 결집시키지 못한 것으로 분석됐다. 박장관의 재임기간은 24개월로 부처평균을 크게 웃돌았다. 공무원들의 평가와 관계없이 임명권자인 대통령의 신임도만 높으면 장수할 수 있다는 하나의 사례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 정덕구 장관은 부처 현안 문제에 대한 탁월한 해법 등 전문적 식견을 갖추고 있었으나 조직구성원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장관의 재임기간은 8개월로 부처 평균에 크게 못 미쳤다.
산업자원부의 경우는 장관의 전문성이 업무를 추진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긴 하나 조직구성원들의 의사를 수렴해서 합리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조직관리방식이 부처의 시너지 효과를 높이는 결정적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관료출신 최인기, 학자출신 김성훈
농림부의 경우는 노태우 정부부터 김대중 정부 초기까지 모두 12명의 장관이 거쳐갔다. 정부별로 재임장관을 보면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윤근환 장관을 시작으로 김식→강보성→조경식→강현욱 장관 등 5명이 부처 수장으로 재직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허신행→김양배→최인기→강운태→정시채→이효계 장관 등 6명이 농림 행정의 최고책임자로 일했고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서는 김성훈 장관이 초대 장관으로 재임했다.
이 부처의 최고행정책임자 12명에 대한 공무원들의 평가를 구체적으로 보기로 한다. 설문에 응답한 국·과장급 부하공무원은 모두 최인기 장관을 성공장관으로 지명했다. 또한 공무원 5명 중 4명은 김성훈 장관을 성공장관으로 거명했다. 이들은 어떠한 특성과 장점을 가지고 있기에 공무원들로부터 후한 점수를 받았을까.
우선 정통 행정관료 출신인 최인기 장관은 재임중 광복 후 첫 농지기본법이라고 할 만한 농지법을 제정했는데 공무원들은 이를 최장관의 최대 업적으로 꼽고 있다. 또한 일하는 스타일이 합리적인데다 업무 추진력도 탁월하며 대외관계도 원만하다고 평가했다. 농업분야에 대한 최장관의 전문적 식견은 내무부의 지방행정 책임자(도지사)로 재직하면서 습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농업경제학을 전공한 학자 출신 김성훈 장관의 업적 중 대표적인 것으로 ‘농업·농촌기본법’ 제정과 친환경농업 육성시책을 꼽았다. 농업·농촌기본법에는 농가소득 안정을 위한 직접지불제의 점진적 확대와 국민식량의 안정적 공급, 그리고 농촌개발 및 농촌문화계승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친환경농업육성 정책이란 화학비료와 농약을 가능한 한 적게 써서 농사짓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정책의 주된 취지는 안전성이 높고 품질이 좋은 농산물을 공급함으로써 국제경쟁력을 갖추는 데 있다.
공무원들은 김장관이 농업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업무 추진력도 뛰어나고 업무와 관련한 대외관계 활동이 왕성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최인기 장관의 재임기간은 20개월, 김성훈 장관의 재임기간은 29개월로 역대 농림부 장관의 평균재임기간(14.6개월)을 크게 웃돈다.
반면 실패장관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장관은 강보성·김양배 장관으로 나타났다. 강보성 장관은 정치인 출신으로 전문성과 정책비전 제시능력이 크게 떨어지는데다 돌출행동이 잦았던 것으로 공무원들은 보고 있다.
김양배 장관은 정통 내무관료 출신으로 장관이 되기 직전 대통령 행정수석비서관을 지냈으며 호남 출신이다. 농업 분야에 대한 전문적 식견 부족으로 무모하게 업무를 추진하는 등 조직의 내부 분위기를 위축(경직)시켰다고 평가한다. 또한 김장관은 전임자의 정책을 계승하지도, 새로운 정책방향을 제시하지도 못했다고 공무원들은 술회한다. 강보성 장관의 재임기간은 6개월, 김양배 장관의 재임기간은 3개월로 모두 단기간에 그쳤다.
이와 같이 농림부의 경우 공무원들이 성공장관으로 거론한 인사들의 특성을 보면 기본적으로 전문식견을 갖추고 업무추진력이 뛰어난데다 대외(국회, 다른 부처, 청와대, 이익단체 등)관계 활동이 탁월했으며 재임기간이 대체로 긴 점이 공통점으로 꼽혔다.
정보통신부는 노태우 정부부터 김대중 정부 초기까지 모두 9명의 장관이 거쳐간 부처다. 정부별로 보면 노태우 정부가 3명(최영철→ 이우재→ 송언종 장관), 김영삼 정부가 4명(윤동윤→경상현→이석채→강봉균 장관), 김대중 정부가 2명(배순훈→남궁석 장관) 등이다. 부처의 이름은 김영삼 정부의 윤동윤 장관이 재임할 때까지는 체신부였으나 그 후 정부조직이 개편됨에 따라 정보통신부로 바뀌었다.
이 부처의 수장을 지낸 9명의 장관에 대해 소속 공무원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보면, 먼저 성공장관으로 가장 많이 지명된 인사는 강봉균 장관과 남궁석 장관으로 나타났다. 응답한 국·과장급 공무원 모두가 이들을 성공장관이라고 거론했다. 왜 두 장관에게 좋은 평가를 내렸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살펴보자.
정통 경제관료로 잔뼈가 굵은 강봉균 장관은 행정경험이 풍부한데다 정책기획능력 및 비전제시능력이 탁월했다. 업무를 합리적으로 추진했으며 조직을 확실하게 장악했다. 부처의 대외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 등을 그 논거로 제시했다. 전문경영인 출신인 남궁석 장관에 대해서도 비슷한 평가를 내린다. 정보화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정책으로 입안하여 성공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조직에 대한 비전과 구체적인 실행방안을 제시했다. 조직구성원들이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강봉균 남궁석 장관 다음으로 성공장관으로 거론된 이는 정통 체신관료 출신인 윤동윤 장관이다. 구체적인 이유를 보면, 정보통신부를 발족시킬 만큼 통신사업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조직내부 사정을 훤히 알고 있어 조직의 갈등요소를 원만히 해결하는 등 조직관리(인사 문제 포함)능력이 출중했다. 무리수를 두지 않고 합리적으로 업무를 추진해 나갔다는 점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됐다. 재임기간을 보면 강봉균 장관이 19개월로 부처평균(14.6개월)을 넘어섰고, 남궁석 장관(12개월)과 윤동윤 장관(10개월)은 부처평균에 미치지 못했다.
한편 실패장관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장관은 김대중 정부 초대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입각한 배순훈 장관이다. 구체적인 이유를 보면, 유수기업의 CEO 출신으로 오랜 기간 사기업에 종사한 관계로 관료조직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는 것이다. 사기업 부문의 의사결정체계와 공공 부문의 의사결정체계가 다른 점을 이해하지 못해 부처조직을 장악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다는 평가다. 배순훈 장관은 정부의 빅딜정책을 비판하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어 취임 9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나는 아픔을 겪었다.
‘처’를 ‘부’로 격상시킨 강창희
과학기술부의 경우 노태우 정부부터 김대중 정부까지 모두 10명의 장관이 재임했다. 정부별로는 노태우 정부 4명(이관→이상희→정근모→김진현 장관), 김영삼 정부 5명(김시중→정근모→구본영→김용진→권숙일 장관), 김대중 정부 1명(강창희 장관)으로 나타났다. 부처 명칭도 김영삼 정부까지는 과학기술처였고 김대중 정부 들어와서 과학기술부로 격상됐다.
과학기술 부처의 최고행정을 담당한 10명의 장관에 대해 소속 공무원들은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먼저 성공장관으로 상대적으로 많이 지명된 장관은 노태우 정부의 이상희 장관과 김대중 정부의 강창희 장관으로 분석됐다.
약학박사 출신 과학자인 이상희 장관은 풍부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고 이를 정책수립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각종 정책의 수립과 집행을 위한 법제화에 많은 공을 들인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몇 가지 대표적인 업적사례로 부하공무원들은 기초과학육성법의 제정 및 테크노 벨트화 정책 추진을 꼽고 있다. 다만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도록 동기화하는 데는 아쉬움을 남긴 것으로 평가됐다.
자민련 몫으로 입각한 정치인 출신의 강창희 장관은 조직의 업무추진을 위해 대외관계(국회, 언론, 다른 부처 등)활동을 왕성하게 한 점과 중요한 국가시책을 결정할 때 부하공무원들의 의견을 과감히 수렴하는 등 격의 없는 토론문화를 조직 내에 조성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과학기술처였던 부처를 과학기술부로 끌어올려 부처의 대외위상을 크게 높인 점에 대해 공무원들은 후한 점수를 주었다. 다만 과학기술 행정에 대한 경험 부족을 아쉬운 점으로 지적했다. 재임기간은 이상희 장관 15개월, 강창희 장관 12개월로 부처의 평균재임기간(13.2개월)보다 약간 높거나 낮은 수준을 기록하였다.
공무원들이 실패장관으로 가장 많이 거명한 장관은 김영삼 정부의 정근모 장관과 김용진 장관이었다. 공학박사 출신의 정근모 장관에 대해 공무원들은 전문적 식견은 뛰어나나 업무추진 방식에서 부하의 의견수렴절차를 거의 거치지 않은 점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경제관료 출신의 김용진 장관에 대해서는 한보사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취임 3개월 만에 물러나(단기재임)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점을 그 이유로 제시하고 있다. 다만, 정근모 장관은 20개월 동안 재임해 비교적 장수한 장관으로 남게 됐다.
교육부의 경우 노태우 정부부터 김대중 정부까지 모두 14명의 장관이 재임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4명(김영식→정원식→윤형섭→조완규 장관), 김영삼 정부에서 5명(오병문→김숙희→박영식→안병영→이명현 장관), 김대중 정부에서 3명(이해찬→김덕중→문용린 장관)이 각각 교육행정의 최고책임자로 일해왔다.
상사로 모신 14명의 장관에 대해 부하공무원들은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성공장관으로 가장 많이 거명된 인사는 정치인 출신의 이해찬 장관이었으며 다음이 행정학자 출신의 안병영 장관이었다. 이해찬 장관의 경우 응답자 모두가, 안병영 장관은 5명 중 4명이 성공장관이라고 지명했다. 부하공무원들은 어떠한 근거로 이들을 성공장관으로 보았을까.
이해찬 장관의 경우, 외부기관(다른 부처, 국회, 언론 등)의 불필요한 간섭에 대해 과감하게 조직을 방어했다. 부처업무에 대한 파악능력이 탁월했고 대외교섭 능력이 뛰어났다. 어떠한 정책문제가 발생했을 때 부하공무원들과의 활발한 토론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했다. 안병영 장관의 경우,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을 엄격히 구분했으며, 업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파악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열정을 갖고 업무를 추진해 구체적인 실행방안까지 강구했다는 점에 부하공무원들은 높은 점수를 주었다.
재임기간을 보면 이해찬 장관은 14개월로 부처의 평균재임기간(13.5개월)과 비슷하였고 안병영 장관은 20개월을 기록해 비교적 장수한 편이다.
직무도 파악 못한 김숙희
한편 실패장관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인사로는 김영삼 정부 시절 재임한 학자 출신의 오병문 장관과 김숙희 장관으로 분석됐다. 구체적으로 그 근거를 보면, 이들 장관은 장관의 직무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조직을 장악하지 못했고 업무를 제대로 추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오병문 장관의 재임기간은 10개월로 비교적 짧았고 김숙희 장관은 베트남전 용병 발언 파문으로 물러났으나 재임기간은 17개월로 부처의 평균수준을 넘어섰다.
요컨대 교육부처의 경우 조직관리능력과 업무추진력이 뛰어난 장관에게 후한 평가(점수)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화부의 경우 노태우 정부부터 김대중 정부까지 모두 9명의 장관이 재임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별로 보면, 노태우 정부 4명(정한모→최병렬→이어령→이수정 장관), 김영삼 정부 4명(이민섭→주돈식→김영수→송태호 장관), 김대중 정부 1명(신낙균 장관)이다. 부처 명칭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노태우 정부의 정한모, 최병렬 장관 시절의 명칭은 문화공보부, 노태우 정부의 이어령 장관 시절에는 정부조직개편으로 문화부가 됐다. 다시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문화체육부로 바뀌었고, 김대중 정부에서는 문화관광부로 조직의 명칭이 다시 바뀐다.
문화부를 거쳐간 9명의 재임장관에 대해 부처의 공무원들은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성공장관으로 가장 많이 거명된 장관은 이어령 장관이다. 학자 출신인 이어령 장관은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냈는데, 그를 성공장관으로 상대적으로 많이 거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문화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전문적 식견을 들고 있다. 둘째, 아이디어가 많고 이를 적극적으로 정책화함으로써 일반국민 대중의 문화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어령 장관은 건강을 이유로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재임기간은 24개월로 문화부장관의 평균재임기간(17개월)보다 훨씬 길었다. 비교적 장수한 장관인 셈이다.
한편 실패장관으로 많이 거론된 장관으로는 학자 출신의 정한모 장관, 언론인 출신의 주돈식 장관, 정치인 출신의 신낙균 장관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장관의 공통점으로 문화행정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부족하고 업무 추진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점을 공무원들은 지적한다. 재임기간을 보면, 정한모 장관은 10개월, 주돈식 장관은 12개월, 신낙균 장관은 14개월로 부처의 평균 재임기간에 못 미친다.
문화의 개념도 점점 다양해지고 문화부가 맡고 있는 업무도 갈수록 전문화하는 추세임을 고려할 때, 전문성과 무관하게 임명권자의 측근 인사를 주로 문화부장관에 등용한 지금까지의 관례는 문화행정의 발전을 위해 바뀌어야 한다.
노동부의 경우 노태우 정부부터 김대중 정부까지 모두 12명의 장관이 재임했다. 노태우 정부에서 5명(최명헌→장영철→최영철→최병렬→이연택 장관), 김영삼 정부에서 5명(이인제→남재희→이형구→진념→이기호 장관), 김대중 정부에서 2명(이상룡→최선정 장관)이다.
부하공무원들은 이들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이들 가운데 성공장관으로 가장 많이 거명된 인사는 진념 장관이다. 정통 경제관료 출신인 진장관은 경제 전체를 보는 안목과 판단능력이 뛰어나고 조직을 장악하는 능력과 업무추진력에서 빼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친화력을 바탕으로 부처업무 추진을 위해 대외적 활동을 활발히 했다. 공무원들은 진장관의 이런 점을 높이 평가했다.
진념 장관 다음으로 성공장관으로 많이 거론된 인사는 최병렬 장관이다. 최장관에 대해 부하공무원들은 강력한 리더십과 저돌적인 업무추진력 그리고 탁월한 부처장악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또한 다른 부처나 정치권 등 대외관계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한 것으로 설명한다. 최장관은 언론인 출신이자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핵심 측근(정무수석, 문화공보부장관, 공보처장관 역임)으로 활동했다. 재임기간을 보면 진념 장관은 27개월, 최병렬 장관은 18개월로 노동부 장관의 평균재임기간(14.5개월)보다 긴 것으로 나타났다.
실패장관으로 거론된 이인제
한편 실패장관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인사로는 남재희 장관을 들 수 있다. 부하공무원들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사유를 보면, 정치인 출신의 남장관은 노동행정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이 부족했다. 업무추진과 관련해 부하공무원과 갈등을 빚는 등 조직관리 측면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남장관은 입각하기 전, 민자당 후보 경선 때 YS순리론을 제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남장관 다음으로 실패장관으로 거론된 인사로는 이연택 장관과 이인제 장관이 꼽혔다.
노태우 정부에서 청와대 행정수석과 총무처장관을 지낸 이연택 장관은 행정일반에 대한 능력이 뛰어나고 대외관계의 활동폭이 넓었으나 노동행정 경험이 없어 업무추진에 애로를 겪은 것으로 부하공무원들은 보고 있다.
이인제 장관은 정치인 출신으로 정치감각은 탁월했으나 지나친 이상주의 정책(무노동 부분임금제) 추진으로 정책혼선을 일으켰다는 점이 낮은 평가를 받은 요인이다. 남재희 장관의 재임기간은 12개월, 이연택 장관과 이인제 장관의 재임기간은 각각 8개월과 10개월로 노동부장관의 평균재임기간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분석된다.
노동부의 경우, 전두환 정부부터 김대중 정부초기까지 입각한 장관의 임명 기준을 보면, 10명 중 8명꼴로 노동행정에 문외한인 인사가 등용되었다.
보건복지부의 경우, 노태우 정부부터 김대중 정부초기까지 모두 16명의 장관이 거쳐가 장관의 교체가 비교적 심했다. 정부별로는 노태우 정부가 5명(권이혁→문태준→김종인→김정수→안필준 장관), 김영삼 정부가 8명(박양실→송정숙→서상목→이성호→김양배→이성호→손학규→최광 장관), 김대중 정부가 3명(주양자→김모임→차흥봉 장관)으로 집계됐다. 부처 명칭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노태우 정부 때는 보건사회부였고 김영삼 정부 때 정부조직개편(1993년 12월)으로 보건복지부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공무원들은 부처의 최고책임자로 재임한 16명의 장관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 살펴보자. 성공장관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인사는 김대중 정부의 차흥봉 장관이다. 다음으로 많이 거론된 장관은 김영삼 정부의 서상목 장관과 손학규 장관으로 분석됐다.
차흥봉 장관에 대해 응답한 부하공무원 모두 그를 성공장관으로 거론하는 데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 구체적인 근거로, 보건행정 실무에 밝아 일반행정능력과 정책개발능력이 뛰어난 전문가형 장관이었다. 원만한 인품으로 조직구성원들을 포용하면서 업무, 특히 사회보장정책을 열정적으로 수행하는 등 업무추진력이 뛰어나다는 점 등을 들었다. 다만 차장관이 의약분업제도를 이상형으로 발전시키는 데 따르는 복잡한 문제를 치밀하게 준비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부하공무원도 있었다.
정치적 판단에 따른 임명 많아
경제학 박사로 정치인 출신(입각 직전 민자당 정책조정실장)인 서상목 장관은 정치적 감각과 전문적 식견을 함께 갖춘 실무형으로 조직장악력과 업무추진력이 돋보였다는 점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정치인 출신인 손학규 장관은 조직 내부적으로는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일할 수 있는 업무분위기를 조성해 주었고 대외적으로는 여러 이익집단간의 알력과 갈등을 원활히 조정하는 데 수완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공무원들은 높게 평가한다.
차흥봉 장관의 재임기간은 15개월, 서상목 장관은 17개월로 부처의 평균(12.6개월)을 넘어섰으나, 손학규 장관은 7개월 만에 물러나 부처 평균재임기간에 못 미쳤다.
한편 실패장관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장관은 육사 12기로 하나회 회원이며 보안사령관 출신인 안필준 장관이다. 응답한 부하공무원 모두가 실패장관으로 거론했다. 정책방향과 비전제시 능력이 부족했고 조직을 운영하는 데 있어 구성원들의 힘을 결집시키지 못한 점 등이 낮은 점수를 받은 요인이다. 안장관의 재임기간은 21개월로 부처평균을 크게 뛰어넘는다. 임명권자와의 친소관계가 업무성적과 관계없이 재임기간에 크게 영향을 끼친 사례다.
전두환 정부부터 김대중 정부까지 등용된 복지부장관의 경우 10명당 5명꼴로 정치적인 기준에 따라 임명됐다. 부하공무원들이 실패장관의 기준으로 전문성 부족을 가장 많이 꼽고 있다는 사실은 임명권자의 장관 임명방향에 하나의 지침을 제공해준다고 판단된다.
지금까지 국 · 과장급 고위공무원들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부처별 역대 재임장관을 평가해 보았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누가 업무를 성공적으로 추진했느냐 여부보다는 장관이 부처행정을 효과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장관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이 한층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