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보선은 끝내 쿠데타군에 굴복, 정치활동정화법을 인준한 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앞세워 청와대에 몰려든 '혁명주체'들과 그 경호원들. 누군가 청와대 비서들을 향해 외쳤다. ”이봐, 위스키 있어?”
청와대는 이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비롯한 정치군인들의 용납할 수 없는 폭거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은 그들로부터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것조차 혐오하는 듯했다. 대통령은 하야를 굳게 결심했다.
그런데 최고회의는 ‘정정법’을 의결 공포한 후 박일경 법제처 차장을 청와대로 보내 대통령에게 정정법 인준을 요구했다. 박차장은 법의 개요를 설명한 다음 “정정법이 시행되더라도 대통령께서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고 말했다. ‘본법 시행 당시의 대통령은 본법의 적용을 받지 아니한다’는 정정법 부칙 조항을 지적하는 말인 듯했다.
박차장은 자타가 인정하는 권위 있는 공법학자다. 그의 입에서 “대통령은 해당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떨어지자 대통령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말았다. 평생을 정치활동으로 보낸 대통령만 유일하게 정정법에서 제외한다면, 4000여 명의 정정법 해당자들은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것은 분명 대통령과 국민을 이간하려는 고도의 술책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나는 당시 대통령은 정정법을 인준하는 서류에 형식일지라도 절대 사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건의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대통령은 박차장에게 자신이 정정법 제정에 반대해온 사실을 일러주고 “만일 대통령이 인준 결재를 안 했을 때 법의 효력은 어떻게 되는가”고 하문했다. 박차장은 최고회의에 관한 법률에 따라 최고회의가 결의하고 공포하면 그 순간부터 법의 효력이 발생하며 대통령의 인준절차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박차장은 대통령의 인준행위는 헌법에 규정돼 있기 때문에 ‘인준의 거부행위’는 헌법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대통령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진퇴유곡에 빠졌다. 대통령은 그날 정정법 서류에 결재하지 않고 박차장을 돌려보냈다. 박차장이 청와대를 떠난 이후 청와대 전화에는 불이 붙었다. “대통령은 결재를 했는가?” “대통령은 이 판국에 무엇 때문에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가?” “오늘 즉각 그만두고 청와대를 떠나라.”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들이 줄줄이 청와대에 찾아왔다. “혁명군인들이 그 정체를 드러낸 마당에 대통령은 하루빨리 하야하라”고 건의했다. 대통령은 이미 하야를 결심한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1962년 3월21일 오전 대통령은 박정희 의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하야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박의장은 혼자 청와대로 왔다.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되는 날이다. 박의장은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깍듯이 거수경례를 하고 대통령의 말을 기다렸다. 대통령은 “더 이상 대통령자리에 머물러 있기가 싫어, 자연인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박의장은 “지금 그만두실 때가 아니다. 내년 여름 민정 이양 때까지 유임하시기를 바란다”고 의례적인 하야 만류의사를 전했다.
“박의장, 앉으세요”
인사말이 끝난 후 두 사람은 정정법을 사이에 놓고 마지막 담판을 벌였다. 대통령은 “정정법은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정치에 참여했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제재를 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정정법이 결과적으로 국민총화를 해치고 국가 이익에도 배치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대통령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하야하려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박의장은 지지 않았다. 그는 “구정치인들이 잘못을 반성하는 기미가 없을 뿐 아니라 벌써부터 선거운동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고, 국민들은 건망증이 심하기 때문에 앞으로 선거를 하게 되면 구정치인이 당선될 것이 틀림없으므로 정정법은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박의장의 말을 요약하자면, 구정치인들이 정계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예 구정치인이 출마하지 못하게 하는 것말고는 별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정치인은 국민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는 대통령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침내 언쟁으로 발전했다. 윤대통령은 “폭력과 권력을 이용한 정치가 인류 역사상 길게 유지된 일이 없다”며 “군사 정부가 자유당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고 박의장을 면박했다.
박의장은 대통령 말에 격분한 듯싶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하면서 “나는 목숨을 걸고라도 이 일을 하겠다”고 막가는 말을 했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하자 대통령이 말렸다. “박의장, 앉으세요. 박의장, 앉으세요” 하고 박의장을 달래는 대통령의 모습은 비서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박의장은 대통령의 권유에 못 이긴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대통령은 차분한 목소리로 얘기를 꺼냈다. 무엇인가 작심한 듯했다.
“조선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져 당파 싸움으로 날을 새우고 노론 소론으로 갈라져 사색당파 싸움을 하다가 결딴나 마침내 일본에게 치욕을 당하지 않았느냐? 군사정부는 구정치인 신정치인으로 파당을 만들지 말고 국민이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달라.”
박의장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작별 인사를 했다. 대통령은 의례적으로 현관까지 박의장을 배웅하면서 “박의장! 다시 한 번 생각하기 바란다”고 사정하듯이 말했다. 대통령과 나란히 복도를 걸어 나온 박의장은 마지막으로 거수경례를 하면서 “나는 목숨을 걸고 하겠습니다”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고 청와대를 떠났다. 박의장은 이날 두 번이나 ‘목숨을 걸고’라는 말을 했다. 나는 대통령으로부터 하야성명을 기초하라는 명을 세 번째 받았다.
박의장에게 하야의 뜻을 밝힌 다음날 아침, 대통령은 나를 불렀다. “정정법에 대해 인준 결재를 할 것인가, 안 하고 하야할 것인가?”라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기 때문에 분명하게 내 생각을 건의했다.
“정정법은 최고회의가 이미 공포를 했기 때문에 법률적 효력이 발생했을 뿐 아니라 대통령이 인준결재를 했을 경우 권력을 상실한 수천 명의 정치인과 지도급 인사들이 대통령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 한 사람만 유일하게 정정법 대상에서 제외시킨 혁명정권의 처사는 책략적인 색채가 농후할 뿐 아니라 그 일로 해서 대통령은 본의 아닌 오해까지 사게 되고 정치적 동지들로부터 엄청난 원성을 듣게 될 것이다.”
대통령은 “그래, 당신 말이 옳아. 결재를 안 하기로 하세”라고 말했다. 나는 대통령의 말을 듣고 안도하면서 한편 기쁘기도 했다. 대통령을 만난 후 비서실장 방에 들렀더니 실장과 대통령 법률고문인 윤세창 고려대 교수가 역시 정정법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서실장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장의 말에 따르면 “최고회의측에서 만일 대통령이 정정법을 인준하지 않고 하야를 하려 든다면 하야 자체가 불가능하게 될 것이고 모종의 어려운 사태까지 발생할는지 모른다”는 경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윤교수의 말을 듣고 나는 두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대통령이 최고회의에서 이송된 법률안에 대해 인준 결재를 하는 것은 법률의 효력 발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정당한 이유 없이 인준 날인을 거부할 경우 위헌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머리가 혼돈스러웠다. 나의 건의가 정치 면에 치중한 것이었다면, 비서실장이나 윤교수의 생각은 현실적이고 법률적인 면을 신중히 고려한 것이었다.
마침내 대통령은 비서실장과 윤교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기자회견 전에 문제의 ‘정정법’을 인준하는 서류에 사인했다. 그뿐 아니라 윤교수의 건의에 따라 최고회의 앞으로 ‘대통령 사임서’까지 제출했다. 대통령은 하야를 결행하면서 어떤 장애물도 제거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직 가시방석과도 같은 대통령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은 일념뿐이었던 것 같다.
정정법은 곧 위력을 발휘해 4369명을 심사대상자로 발표했고, 나중에 그중 1336명에 대해서는 ‘정치를 해도 좋다’고 적격 판정을 내렸다. 나도 정정법에 묶여 버렸다. 신문기자를 하다가 7·29선거에 출마했고 신민당 지구당위원장을 했으며 청와대에서 일한 것이 ‘죄’라는 것이다. 그 후 1, 2차 해금에서도 풀려나지 않았다. 다시는 이 나라에 정정법 같은 악법이 생겨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3월22일 오후 3시. 윤보선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행사였던 하야 기자회견을 청와대 대회견실에서 가졌다. 나는 회견에 앞서 하야성명서를 기자들에게 배포했다. 대통령이 하고 싶었던 얘기가 성명서에 포함돼 있었으므로 기자회견은 간단히 끝날 수 있었다. 대통령은 “이 자리를 그만두게 되니까 시원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어깨가 가뿐하다”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야성명에 다 들어 있다”는 말로 기자들의 질문을 피했다.
대통령의 심중을 충분히 이해한 기자들은 특별히 질문을 하지 않아 기자회견은 간단히 끝났다. 최고회의측에서는 단 한 사람도 배석하지 않았다. 비운의 대통령이라고나 할까, 윤보선씨의 대통령 생활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는 하야성명에서 “덕이 없는 사람이 국가 원수직에 있었던 19개월 동안 이 나라에서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나는 책임을 느낀다”고 말함으로써 5·16 쿠데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1960년 4월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1961년 5월 군사혁명이 발생해 두 차례 혁명을 연거푸 겪지 않으면 안 된 이 나라의 불행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나의 재임중 그런 사태가 생긴 것을 더욱 유감스럽게 여긴다”고 말해 5·16에 대한 유감 표명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물러날 결심을 앞당긴 동기는 “구정치인에 대한 정정법이었다”고 분명히 밝힌 다음 “이러한 입법에 반대해온 것은 일부 인사를 두둔하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이러한 취지의 입법으로 국민의 인화와 단결에 금이 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앞날의 불행을 예고하기도 했다. 끝으로 “대통령을 사임하면서 이 나라의 번영과 국민생활의 평화를 기원한다”고 말을 맺었다. 회견을 마친 대통령은 곧바로 가족들과 함께 청와대를 떠나 안국동 자택으로 향했다. 다사다난했으며 한 많았던 윤대통령의 ‘청와대 생활’은 이렇게 끝이 났다.
술시중 드는 청와대 비서관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자 초상집 같은 공허감과 적막이 청와대에 흘렀다. 나는 책상을 정리하고 사표를 썼다. 한시도 이 근처에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난 지 세 시간이 지났을까. 바깥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느닷없이 지프 행렬이 청와대 정문으로 밀어닥쳤다. 나는 비서실장과 몇몇 비서와 함께 나란히 현관에 서서 그들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의장을 선두로 해서 ‘혁명 주체’들이 경호원들과 함께 현관으로 몰려들어왔다. 5·16 아침이 연상됐다. 현관에 들어서자 그중 한 사람이 “이봐. 위스키 있어?” 하고 우리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청와대 입성 제 일성이었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는 외제 위스키가 흔하지 않았지만 빈번이 외국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청와대에는 귀한 위스키가 항상 준비돼 있었다. 위스키를 찾은 그 장교는 청와대 사정에 밝은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5·16 아침 박의장이 대통령과 처음으로 면담했던 소회의실로 우르르 들어갔다. 빈 방에서 잡담을 하다가 그중 한 사람이 총무비서를 불렀다.
“이봐 비서관. 돗자리를 몇 장 구해 오라구.” “바깥 잔디 위에 돗자리를 깔고 술상을 준비하라구.” 명령조로 말하는 장교를 바라보면서 나는 기가 찼다. 적지를 점령한 승전장교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돗자리를 구하려고 수선을 떤 끝에 외제 위스키가 곁들인 돗자리 술상이 준비됐다. 술상이 차려진 그 자리는 오늘 아침까지 윤대통령이 산책을 하고 건강 관리를 하기 위해 줄넘기를 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술 마시고 희희낙락하는 꼴을 보고 있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어 청와대 안에 있던 관사로 귀가해 버렸다.
다음날 아침 술자리 시중을 든 비서들에게 물어보니 박정희 의장을 비롯한 혁명 주체들이 자정 가까이 술잔을 기울이며 청와대 점령을 자축했다는 것이다. 바로 전날 대통령이 하야의 뜻을 밝히자 “지금은 그만둘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년 여름 민정이양 때까지만이라도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하던 박정희 의장의 모습이 새삼 머리에 떠올랐다. 박의장이 최고회의에서 정식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추대되어 국민에게 선서를 하고 나서 당당하게 청와대에 입성했더라면 얼마나 보기가 좋았을까? 국가원수로서 체통도 서지 않았을까?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돗자리 파티가 격에 맞는 일이었을까? 차라리 하루를 기다렸다가 외국 사신들도 불러놓고 ‘대통령 권한대행 축하파티를 벌였더라면…’ 하는 생각도 해봤다.
박의장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결정되자 청와대 비서들은 모두 사표를 냈다. 그러나 추상 같은 최고회의의 지시가 떨어졌다. “비서실 직원 전원은 조사가 끝날 때까지 정시 출퇴근해야 하며 만일 이를 어겼을 때에는 공무원법에 따라 엄벌할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윤대통령의 대변인이었던 만큼 박의장의 대변인 노릇은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신문사들은 청와대 사정을 알고 싶어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난처한 처지가 됐다.
청와대 비서실은 무려 6개 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게 됐다. 검찰, 경찰, 정보부는 물론 군 수사기관까지 합세해 19개월에 걸친 윤보선씨의 ‘대통령 생활’을 쥐 잡듯이 들추기 시작했다. 나에게 내려진 첫 지시는 “청와대에 대한 조사는 절대로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된다. 만일 기관조사가 언론기관에 알려질 경우 엄한 문책이 있을 것”이라는 경고였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19개월 동안 윤대통령의 정치적 발언, 헌법에 저촉되는 정치적 행동, 법에 어긋나는 대외적인 발표, 기자회견의 진의 등을 구체적으로 보고하라”는 것이다.
나에게 대통령의 행동이나 말을 조사해 보고하라니. 인간으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런 지시를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며칠을 두고 고민한 끝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썼다. “대한민국 헌법 66조 규정에 따르면, 대통령의 국무에 대한 행위는 문서로 해야 하며… 로 돼 있기 때문에 국무에 대한 대통령의 행위는 총무처에 보관돼 있고 대외적인 발표나 기자회견 내용은 신문 스크랩에 보관돼 있음”이라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보고서를 받아본 관계책임자는 나를 매우 못된 사람으로 비난했다는 것이다.
비서실에 대한 조사는 장기간 치밀하게 진행됐으나 한 건의 비리도 발견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경찰이 털어낸 먼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비서관 한 사람이 ‘공적 기물을 불법 취득했다’는 혐의였다. 사연을 설명하자면 이승만 전대통령은 재임중 경무대(청와대 전신) 비서실에 미국 여성 한 명을 타이피스트로 채용한 적이 있다.
이대통령이 국문보다는 영문으로 된 책이나 신문을 애독했고 외국의 많은 지인들과 서신 교류가 잦았던 관계로 미국인 타이피스트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이대통령은 특별히 배려해 청와대 안에 있던 집 한 채를 그 타이피스트에게 대여했다. 그 여성은 부임할 때 피아노를 들여왔는데, 4·19혁명 후 피아노를 남겨 두고 귀국했다. 그 피아노를 윤대통령 취임 후 청와대에 들어온 한 비서가 사용했다는 것이다.
결국 검찰이 나서서 피아노가 개인 소유일 뿐 아니라 개인이 버리고 간 물건이기 때문에 문제 삼을 수 없다고 판단해 무혐의로 끝났다. 무엇인가 먼지를 털려는 군사정부의 기도가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 잡듯이 조사했으나 별 소득을 얻지 못한 군사정부는 먼저 비서실장을 비롯한 비서관 네 명의 사표를 수리했다.
나에게는 사흘 안에 관사를 비우라는 특별명령이 떨어졌다. 명령을 전달하러 온 경호실장에게 “사흘 안에는 힘들지만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비우겠다”는 뜻을 새로 부임해온 현역 군인 총무비서관에게 전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내 말을 전해들은 총무비서관은 “대통령 대변인까지 지낸 사람이 집 한 채도 없단 말야. 그러니 쫓겨나지…”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의 총무비서관은 후일 구 황실 관리 책임자로 임명됐으나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돼 형무소 신세를 졌다.
“경찰 야식비 배상하라”
하야는 했으나 윤대통령에 대한 조사는 계속됐다. 장기간에 걸친 비서실 조사가 무위에 그치자 직접 대통령을 걸고 넘어갔다. 5·16 이후 청와대는 100여 명의 경찰이 경비했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그들의 일부는 이승만 정권 당시 악명 높은 ‘경무대 경찰서’에 근무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근무태도는 성실하고 충실했다. 경비 경찰에게는 1일3식 기준의 식비가 지급됐지만 야간근무를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그들에게는 ‘야식’ 지급이 불가피했다. 윤대통령은 이러한 사정을 보고받고 야식을 관급으로 지급할 것을 지시한 일이 있었다.
대통령이 하야한 후 청와대 경리장부를 조사하던 군사정부 관계자들은 예산에 포함되지 않은 야식비를 대통령이 관급으로 지급할 것을 명령했으므로 ‘야식대’를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나라에 배상해야 한다고 통고했다. 전직 대통령이 경찰의 야식비를 개인 재산으로 변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정희 의장이 시킨 일이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런 발상 자체가 얼마나 유치하고 졸렬한가?
식대가 당시 화폐로 500만환이었으므로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억대에 가까운 금액이다. 나는 공무를 집행하는 경비원 식대를 은퇴한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부담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최고회의에 항의하려 하자 윤대통령은 나를 극구 만류했다. 결국 하야한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책임져야 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군사정부에 대해 일절 대항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윤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대통령의 하야 계획이 극비에 부쳐진 탓에 청와대 일반 직원들은 큰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도 갑작스레 하야하느라 사유물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윤보선씨는 미처 챙기지 못했던 물건들을 집에 가져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침구, 식기, 액자, 화원에 있는 꽃나무 등이었다. 군사정부 관리들은 냉담했다. 청와대에 일단 들어온 물건은 개인 것이건 아니건 간에 반환할 수 없다는 회답이었다. 외국의 예와 같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기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군사정부의 처사는 후일을 위해서도 용서받기 힘든 처사임에 틀림없었다.
군사정부의 끈질긴 조사는 끝나지 않았다. 대통령이 하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김남(金楠) 비서관을 연행해 갔다. 4·19 혁명 직후 이승만 전대통령이 이화장(梨花莊)으로 운반해 갔던 관용물 가운데 정부대장에 기록된 물건은 다시 청와대로 환수한 일이 있었는데 그 업무를 맡았던 사람이 바로 김남 비서관이었다.
혐의 내용은 윤대통령이 관용물 가운데 고가품을 사유화했을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김비서관도 일부 관용물을 사유화했으리라는 것이다. 김비서관은 인촌 김성수 전부통령의 7남으로 명문 출신일 뿐 아니라 정직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었다. 박정희 장군이 사단장 시절 김비서관은 헌병 장교로서 박장군 밑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었다. 그는 고려대학교 뒷산에서 좋은 나무를 골라 박의장의 신당동 집에 정원수로 심어주기도 했다. 언젠가 박의장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현관에서 자신을 맞이하는 김비서관을 보고 ‘남의 장군’이라고 불렀던 일이 기억에 남아 있다.
대통령이 하야한 후 공화당측에서 김남의 영입을 집요하게 추진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윤보선씨와의 의리를 끝까지 지켜 10여 년 동안 윤보선씨를 모시고 고난의 야인생활을 택했던 사람이다. 윤보선씨가, 그리고 김남 비서관이 무엇이 아쉬워서 이승만 대통령의 사유물이나 그가 사용하던 공유물에 욕심을 낸단 말인가.
결국 군사정부측의 끈질긴 조사는 아무런 사실도 발견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애당초 그들의 목적은 청와대측에 도덕적인 흠집을 내서 정정법을 비롯해 그들이 노리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부수적인 성과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그들의 행동은 분명히 졸렬하고 용서받기 어려운 것이었다.
군사정부는 보통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기막힌 일을 계속 저질렀다. 내가 안국동 윤보선씨 댁을 자주 출입한 것을 트집잡아 정정법을 이용해 체포령을 내리기도 했다. 얼마 후에는 협박과 회유를 해가며 공화당 비밀조직에 참가하도록 회유도 했다. 윤보선씨를 반대하는 일만 맡아주면 무조건 국회의원을 시켜주겠다고도 했다.
정치장교들의 쿠데타 계획
40년이 지난 2001년에 “박정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야당 당수에게 질문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만일 그 사람이 내게도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분명히 대답할 수 있다.
“박정희와 같은 사람 수백 명이 다시 이 땅에 태어나도 나는 개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는 박정희와 같은 사람이 또다시 5·16과 같은 쿠데타를 꿈꾸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절대로 이 땅에 다시 태어나서는 안 된다.”
19개월 동안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장면 정권의 탄생과 몰락 과정을 지켜본 내게는 5·16은 어떠한 연기자도 쉽게 연기해낼 수 있는 한 편의 ‘쿠데타 드라마’로 생각된다. 각본대로 쿠데타 계획은 진행됐으며 허약한 장면 정권과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사회상은 쿠데타 드라마의 조연 역을 훌륭하게 해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장면 정권의 불행은 출발점에서부터 싹트고 있었다. 내각책임제 헌법에 따른 총선거를 통해 구성된 민의원이 장면씨를 국무총리로 인준한 것은 1960년 8월18일이다. 한편 정치 장교들이 충무장(忠武莊)에 모여서 정군 계획을 쿠데타로 방향을 돌린 것은 1960년 9월10일이었다. 정확히 말해 장면 정권이 출범한 지 한 달도 못 돼 새 정권을 타도하려는 쿠데타 계획이 진행됐다는 이야기다.
장면 정권과 쿠데타 드라마는 잘 짜인 각본과 같은 운명의 산물이었다고나 할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비극이기도 했다. 5·16 쿠데타로 빚어진 윤보선 대통령과 박정희 장군의 숙명적 대결도, 따지고 보면 5·16이 직접적인 기점(起點)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전 원인은 4·19를 기점으로 탄생한 민주당 정권 초창기부터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장면 내각의 허약한 체질, 집권당인 민주당의 신·구파 분열, 자유당 독재정권 하에서 굳어진 공직사회의 복지부동과 극도의 사회혼란, 허약한 경제 체질 등 쿠데타를 유혹하고 쿠데타를 정당화(?)할 만한 소지를 민주당 정권은 처음부터 드러내고 있었던 셈이다. 따지고 보면 집권 9개월은 장면 정권으로서는 이미 지적한 산적한 난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비운의 민주당 정권이 정치군인들에 의해서는 몰락하는 과정을 내각책임제하에서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던 청와대 대변인의 처지에서 바라보면서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돌이켜보면 3·15 부정선거는 4·19 혁명의 직접 동기가 됐고, 4·19 혁명은 8·12 장면 내각의 출범을 가능케 했다. 모두가 1960년 한 해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사건 상호간에는 깊은 연관성이 있다. 3·15 정·부통령 선거는 지금 생각하면 대담하고 무모한 부정선거였다. 내가 겪은 부정선거 경험만 보더라도 부정의 실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서 3·15 선거를 겪었다. 투표를 며칠 앞두고 중요한 정보가 입수됐다. 민주당 공천으로 부통령에 출마한 장면 후보(당시 이승만 정권 밑에서 부통령직에 있었다)가 내무부가 비밀리에 지시한 ‘부정선거 지령문’을 입수해 보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밤늦게 부통령 공관 근처에 살고 있던 조재천 의원(당시 민주당 대변인)댁을 불시에 찾아갔다.
“정부의 부정선거 지령문을 야당에서 입수했다는데 사실입니까?”
“나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거짓말 마세요. 장면 부통령이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신문사는 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조재천 의원님, 만일 조의원이 협조해주지 않으면 우리도 민주당에 절대로 협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마지막 협박이 먹혀들었다. 조의원은 그 길로 장부통령 공관에 가서 문제의 부정선거 지령문을 가지고 왔다. 하룻 밤만 빌려 달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에 반환하기로 약속하고 집에서 처와 함께 밤새도록 지령문을 복사했다. 2할 사전투표를 포함한 부정선거 계획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선거를 며칠 앞두고 3·15 부정선거 지령문을 전문 보도했다.
정부는 공보처를 통해서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지령문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지령문을 보도한 나에게 체포령이 떨어졌다. 나는 몸을 피하라는 신문사의 지시에 따라 밤기차로 전북 이리로 숨어들었다. 그 탓에 선거에 참가하지 못했다. 선거 후 지령문 사건은 사실로 밝혀졌고 곧이어 4·19가 폭발함으로써 나는 무사히 귀가할 수 있게 됐다. 문제의 지령문은 최인규 내무부장관이 각 시·도 경찰국장에게 발송한 것으로 당시 전남 경찰국장이 김의택(金義澤) 민주당 원내총무에게 전달했고 김총무는 장면 부통령에게 지령문을 맡겼던 것이다.
3·15 부정선거가 정부 차원에서 공공연히 감행된 사실이 지령문을 통해 입증된 것이다. 그러면 군대 내의 선거는 어떠했던가? 이미 밝혀진 대로 상급 장교가 하급 장교에게, 하급 장교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심지어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기붕’으로 기표하는 것을 지휘관이 확인한 다음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게 했다는 것이다. 해군에서는 한 사람이 몇 번씩 투표하는 방법으로 거의 완벽한 부정선거가 이뤄졌다.
3·15 부정선거를 잠시 회고한 이유는, 정치장교들이 장면 정권이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정선거를 지시한 합참의장이나 참모총장들에게 사퇴를 강요했던 정군(整軍)운동이나 하극상의 명분을 3·15 부정선거에 두었던 만큼 새로 출범한 장면 내각으로서는 정치장교들을 처리하는 것이 간단치 않았기 때문이다.
3·15 부정선거는 4·19를 촉발하고 4·19는 장면 내각을 출현시켰기 때문에 장면 내각은 더욱 난처한 입장에 처했고 그 틈을 타 쿠데타의 싹은 소리 없이 자라났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명분이 정당했다 하더라도 헌법을 유린하는 반역행위는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만큼, 결과적으로 쿠데타를 허용한 장면 정권의 모체인 민주당의 정체가 새로운 관심사로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