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 소련지역에서는 현재 옛날이 그립다는 향수가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말 러시아의 여론조사기관인 ROMIR가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61.1%가 “소련 시절이 그립다”고 대답했다. 반면 현재가 더 낫다는 대답은 27.7%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옐친은 자신을 잡으러 온 쿠데타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 세계와 국민을 상대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자”며 사자후를 토했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은 국내외 여론과 역사의 물결을 반(反)쿠데타로 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같은 시간 모스크바 시내 중심가 푸슈킨 광장. 또 다른 집회가 열렸다. 바로 10년 전의 쿠데타 실패를 아쉬워하는 시민들이 모인 것이다. 시위대는 누추한 옷차림의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낫과 망치가 그려진 옛 소련 국기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서 “쓰러져가는 조국(소연방)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는데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조국의 붕괴를 가져왔다”며 안타까워했다. “서방에 매수된 옐친이 ‘위대한 조국’을 하루아침에 해체시켰다”는 원색적인 욕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1991년 8월 쿠데타가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소련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됐다. 발트 3국을 시작으로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 소연방을 이루던 15개 공화국이 앞다퉈 독립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연방을 지키려고 분투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노력도 그해 12월 옐친 러시아 대통령 등의 일방적인 소련해체 선언으로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결국 12월27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사임발표로 소련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해 8월부터 12월까지 ‘숨가빴던 시간’에 대한 지난 10년 동안의 평가는 일방적이었다. 서방 언론은 보수파의 쿠데타를 “도도한 역사의 물결을 되돌려보려는 수구세력의 어리석은 마지막 몸부림”으로 묘사한 반면. 옐친 등 ‘민주파’는 “악의 제국 소련을 무너뜨리고 3억의 구소련 국민에게 독립과 민주주의를 가져다준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 현재 러시아 국민들의 평가는 어떨까? 보수파 쿠데타와 소련 해체 10년을 맞아 지난 8월 한 여론조사기관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7%가 “쿠데타가 성공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또 25%가 넘는 응답자가 “오늘날 러시아의 참담한 현실은 옐친 전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8월19일 쿠데타 저지 기념 집회의 열기는 10년 전 같은 장소에 모여 민주화와 자유를 외친 수만 인파의 함성과 열기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주변을 지나가던 행인 중에는 이 집회가 왜 열렸는지도 모르는 이도 있어 질문을 던진 외신기자들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옛 소련國歌 부활
1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소련 해체’라는 대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12월31일 밤, 새해를 앞두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신년사가 끝나자 옛 소련 국가(國歌)가 방송을 통해 전국에 울려 퍼졌다. 푸틴의 지시로 새해부터 옛 소련 국가가 부활했다. 또 올해 5월9일에는 소련 붕괴와 함께 사라진 모스크바 붉은광장의 군사퍼레이드가 역시 10년 만에 부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 나치독일을 상대로 승리한 것을 축하하는 승전 55주년 기념일인 이날 러시아 권력의 상징인 크렘린궁 바로 앞 붉은광장에서 대규모 군사퍼레이드가 벌어진 것이다. 이 퍼레이드에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다른 구소련 국가에서 온 5000여 명의 참전용사도 참가했다.
소련체제를 상징하는 군사퍼레이드와 국가를 없애버린 것은 소련 해체의 주역인 옐친 전대통령이었다. 그런데 옐친의 지명을 받아 후계자가 된 푸틴 대통령은 소련의 전통을 다시 세우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푸틴은 “러시아를 다시 소련과 같은 초강대국으로 만들겠다”며 ‘위대한 러시아 재건’을 내세우고 있다. 푸틴은 소련 체제 유지를 위한 핵심 권력기관이었던 KGB 출신이다.
러시아의 오랜 지배를 받아오다가 소련 해체를 계기로 독립의 꿈을 이룬 대부분의 구소련 국가들은 지난 10년 동안 협력보다는 탈(脫)러시아를 외치면서 각자의 길을 가기에 바빴다. 그런데 최근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9월30일, 독립국가연합(CIS) 정상들이 모스크바에 모여 CIS 창설 10주년에 즈음한 공동성명을 냈다. CIS는 옛 소련의 15개 공화국 중 발트해 연안 3개국을 제외한 12개국이 참여한 주권국가공동체. 8월에도 비공식 모임을 가진 CIS 정상들은 이날 역내의 공동안보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결의했다. 지난 9월5일에는 CIS 12개국 외무장관들이 모스크바에서 만나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릴 국제연합(UN) 총회에 대비한 공동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특히 서방측이 인권 문제 등을 구실로 내정에 간섭하는 것에 공동 대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지난 5월 러시아와 벨로루시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키르기스, 타지키스탄 등 5개국 정상이 벨로루시의 수도 민스크에서 만나 유라시아경제공동체(EurasES)를 창설했다. 이들은 또 “이 기구의 목적과 원칙에 공감하는 다른 CIS 국가에도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들 5개국은 이미 1999년 2월 ‘관세동맹 및 단일 경제권 조약’을, 지난해 10월에는 ‘유라시아 경제공동체 설립 조약’에 서명하는 등 단일 경제권 구성을 주도해왔다.
물론 CIS 내부에는 ‘통합’보다 ‘독자노선’을 가려는 움직임도 여전하다. 러시아권에서 이탈해 미국 등 서방의 영향권에 편입되려고 노력하는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가 대표적이다. 이들 국가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중이다. 그루지야의 대통령은 소련 말기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이미 ‘친(親)서방주의자’로 불려온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전 소련 외무장관이다. 게다가 그루지야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 과거 제정(帝政) 러시아의 통치를 받을 때나 소련체제에서도 독립에 대한 열망과 반(反)러시아 성향이 가장 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같은 슬라브 국가면서도 소련 해체 후 가장 적극적인 탈러시아 노선을 가고 있다. 대(大)슬라브주의라는 명분 아래 오랫동안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온 데 대한 반작용으로 독립에 대한 열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8월 사태’ 직후 가장 먼저 독립을 선언했고 소련 해체와 CIS 결성을 주도했다. CIS 국가 중 독자군(軍)과 독자 통화(通貨)를 가장 먼저 만든 나라도 우크라이나다. CIS는 서방의 승인과 지지를 얻는 대가로 구소련 지역의 핵무기를 모두 러시아로 보내는데 합의했다. 이는 구소련 핵무기의 안전한 통제를 위해서 서방이 요구한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독립 직후 전술핵은 합의대로 러시아에 넘겼으나 전략핵은 한동안 자국 내에 두기를 고집해 서방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구소련 국가들의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91년 소련 해체와 CIS 창설 당시의 상황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991년 8월 보수파의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고 각 공화국이 차례로 독립을 선언하자 소련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됐다. 크림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쿠데타 세력에게 연금됐던 고르바초프는 4일 만에 모스크바로 돌아왔으나 이미 통치할 국가도 국민도 없었다.
소련 해체는 당시 소련 국민 전체의 뜻은 아니었다. 1991년 3월 국민투표에서 연방존속에 대한 지지는 77.3%로 나타났다. 그러나 각 공화국의 지도자 등 정치 엘리트들은 독립을 원했다. 독립국가의 권력을 누릴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특히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옐친에게 소련 해체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오랜 정치적 라이벌인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밀어내고 권력의 상징인 크렘린궁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였다. 다시 말해 옐친 진영은 소련 해체 문제를 권력 투쟁의 일환으로 보았다. 이 점 때문에 옐친의 비판자들은 옐친이 단지 ‘권력욕’ 때문에 소련을 해체로 몰아갔다고 보고 있다. 필립 보브코프 전 KGB 제1부의장은 “소련 해체의 원인은 옐친 등 각 공화국 정치지도자들의 권력욕과 이를 부추긴 미국 등 서방의 음모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운명의 1991년 12월8일, 옐친과 레오니드 크라프추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스타니슬라브 슈스케비치 벨로루시 최고회의 의장 등 3국 지도자들은 벨로루시 수도 민스크 교외의 벨로비예스카야 푸샤의 별장에서 만나 소련 해체와 소련을 대체할 주권국가공동체를 구성한다고 선언했다. 물론 고르바초프는 “이 선언은 불법이며 소련 헌법에 어긋나는 위헌”이라며 저항했으나 나머지 공화국들이 차례로 이 선언을 지지하고 나서자 결국 사임했고 소련은 붕괴됐다.
즉흥적으로 나온 CIS구상
이런 과정을 보면 CIS 구상은 다분히 즉흥적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시 옐친의 최측근으로 ‘꾀주머니’로 불리던 겐나디 부르불리스 러시아 국무장관이 ‘CIS구성을 통한 소련 해체’ 아이디어를 냈다는 것이 지배적인 증언이다. 심지어 12월8일 CIS 결성을 선언한 3국의 지도자와 참모들조차 CIS의 명확한 개념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소련 국민들은 그저 CIS를 형식을 바꾼 소련체제 정도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주의 이념이 퇴조한 후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완벽한 독립을 누리려는 열망이 각국을 휩쓸기 시작했다.
당초 CIS국가들은 CIS군(軍) 합동사령부를 창설하고 러시아의 루블화를 단일통화로 하는 등 국방과 핵통제권, 통화 등을 공동 관장키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미 1992년 초부터 각국이 앞다퉈 독자적인 군대를 창설하고 독자 화폐를 발행하면서 분열은 가속화했다.
독립 직후부터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나고르노 카라바흐 자치주를 둘러싸고 영토분쟁을 벌여 지금까지 2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CIS국가끼리 무력충돌까지 일어났다. 또 모르도바의 드네스트르 지역에 살고 있는 러시아계 주민들이 독립을 요구하고 나섰고 그루지야에 속한 압하스 자치공화국과 러시아 내 체첸공화국이 독립 투쟁을 벌이는 등 곳곳에서 독립에 대한 소수민족의 열망과 민족분규가 내전과 무력분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CIS는 역내의 이러한 분쟁에 전혀 손을 쓰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보였다. 오히려 일부 국가 사이에는 역내 왕래에도 비자가 필요할 만큼 멀어졌다.
기자는 1996년 9월 발트 3국 중 하나인 에스토니아에 다녀왔다.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만난 교통경찰 제냐 브이스트로프는 부모 대부터 에스토니아로 옮겨와서 살기 시작한 러시아계. 그는 1991년 당시 에스토니아의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졌다. 태어나서 30년 가까이 살아온 에스토니아를 조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독립 후 겪을 고통을 상상하지 못했다. 소련 시절에는 공용어가 러시아어였기 때문에 굳이 에스토니아어를 배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독립 후 에스토니아어가 국어가 되면서 졸지에 ‘벙어리 신세’가 됐다. 더구나 에스토니아 정부는 러시아계에는 국적을 주지 않기로 결정해서 에스토니아 출신인 부인과 국적도 달라졌다. 그는 당시 이미 없어진 소련국적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루아침에 외국인이 됐기 때문에 공무원인 경찰직도 곧 그만둬야 할 처지. 그렇다고 아무런 연고 없는 러시아가 돌아갈 수 있는 조국도 아니다.
소련 해체 후에도 한동안 각국은 소련 여권을 유지했다. 구소련의 여권은 해외 여행을 갈 때 필요한 것이 아니라 14세가 되면 모든 국민에게 주는 한국의 주민등록증 같은 신분증이다. 따라서 소련이 없어지고도 한동안은 모두 ‘소련 국민’이었다. 그러나 각국이 차례로 독자적인 국적을 부여했고 러시아도 1997년 10월부터 새로운 여권을 발급하기 시작했다.
소련이 없어진 지 5년이 넘도록 러시아 국민들이 낫과 망치가 그려진 붉은 표지의 소련여권을 계속 사용해온 것은 공산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공산당은 소련 해체 후에도 소련 부활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고 독자적인 러시아 여권 발급을 반대해왔다. 때문에 당시 옐친 대통령은 의회 동의가 필요없는 대통령 포고령으로 독자여권 발급을 강행해야 했다.
기자는 지난 6월 우즈베키스탄 입국 비자를 받기 위해 러시아 주재 우즈베키스탄 영사관에 갔다가 지금까지 소련국민으로 남아 있는 사실상의 무국적자들을 만났다. 이들이 구소련 영내를 자유롭게 여행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어머니를 8년째 만나지 못하고 있다며 영사를 찾아온 한 여인의 사연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뚜렷하다. 소련 해체 후 이러한 고통을 겪은 개인은 셀 수도 없이 많다.
소련이 나뉘며 자산분할이나 영유권을 둘러싼 국가간의 갈등도 여전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크림반도를 놓고 벌이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 소련 시절 최고 지도자들의 휴양지가 모두 모여 있던 이곳은 역사적으로 러시아 땅이다. 그런데 1954년 당시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넘겨주었다. 소련이 해체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당시로서는 단순한 행정구역의 변경이었으나 오늘날 분쟁의 원인이 된 것이다.
대다수가 러시아계인 크림 주민들은 러시아로 환원되기를 원하지만 우크라이나가 순순히 넘겨주지 않고 있다. 더구나 우크라이나는 슬라브계이면서도 가장 적극적인 탈러시아 정책을 펴는 CIS국가중 하나다.
크림반도의 군항 세바스토폴을 기지로 삼고 있는 흑해함대의 분할도 양국 갈등의 원인이 됐다. 구소련의 주력함대였던 흑해함대는 당초 CIS군 합동사령부가 관할하기로 했으나 우크라이나는 함대를 나눠 갖자고 요구했다. 흑해함대 사령관이 분할에 반대해 사임하는 등 진통 끝에 1997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4 대 1로 함대를 나누기로 합의했다. 결국 제정 러시아 시절 예카테리나 여제(女帝)가 창설한 214년 전통의 이 함대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러시아는 여전히 우주강국이지만 알고보면(?) 변변한 로켓 발사기지 하나 없는 나라다. 소련 시절 건설한 바이코누르 우주기지가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소련 해체 후 장기임대 형식으로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를 빌려서 사용하고 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카자흐스탄이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 러시아는 인공위성 발사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구소련 국가들이 독립 후 가장 먼저 겪은 것은 경제의 후퇴와 국민생활 수준의 저하다. 러시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독립 첫해인 1992년부터 약속이나 한 듯이 국내총생산(GDP)의 마이너스 성장 행진을 시작했다.
가장 큰 원인은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과정에 생긴 혼란 때문이다. 러시아는 독립 직후인 1992년 초부터 가격자유화와 사유화 등 급진적인 경제개혁을 추진했다. 30, 40대의 소장 개혁파들이 전면에 나서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병폐를 이른바 ‘충격요법(Shock Theraphy)’으로 치유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살인적인 물가 폭등과 루블화 폭락, 실업, 사유화 과정에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빈부격차 등 많은 부작용이 뒤따랐다.
급진 개혁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높아지자 옐친은 다시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총리 등 옛 소련의 산업 테크노크라트 출신들을 기용해 개혁의 속도를 늦추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옐친 정부는 개혁에 일관성이 없다는 서방의 의심을 받으며 경제를 수렁에 빠뜨렸다. 임기 말년 옐친 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한자릿수에도 못 미친 가장 큰 원인은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했다는 비난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해 푸틴 대통령의 집권을 전후로 러시아 경제는 살아나고 있다. 물론 푸틴 정부 출범 후 러시아의 정치 사회적 혼란이 진정된 것도 경제 회복의 한 요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러시아 전체 수출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국제석유가가 1999년 이후 계속 강세를 보이고 루블 폭락으로 러시아 상품의 가격경쟁력이 올라간 것이 경제 회복의 가장 주요한 요인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시장개혁이 계속되면서 이제 러시아 시장경제는 외형적으로는 자리를 잡았다. 모스크바의 트로이카 디알로그 투자은행의 크레스웨퍼 조사실장은 “러시아 시장을 보는 외국 투자자들의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 3국은 구소련권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경제개혁을 이뤘다. 이들 국가는 역사적으로 러시아권이라기보다 서방에 가까웠고 따라서 시장경제에 빨리 적응할 토양을 갖추고 있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카자흐스탄이 개방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기자가 6월 카자흐스탄 제1의 도시 알마티를 방문했을 때 시내 중심가에는 과감한 노출로 몸매를 드러낸 젊은 여성들과 길을 메운 고급 외제차, 방금 지어진 듯한 현대식 건물이 즐비했다. 카자흐스탄은 1994∼1999년 67억8000만달러의 외자를 유치해 국민 1인당 투자유치액을 따지면 구소련권에서는 최고를, 동구에서는 헝가리 폴란드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 카자흐스탄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 등 서방의 조언을 충실히 이행하고 외자 유치에 노력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서부 카스피해 유전 지역에서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 ‘오일달러’ 덕분에 카자흐스탄의 경제는 지난해에만 9.6% 성장하는 등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반면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 우즈베키스탄 등은 여전히 사회주의 경제의 틀을 지키고 있어 서방측으로부터 ‘개혁 지체국’이라는 혹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개혁방식이 틀렸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이웃 카자흐스탄과 달리 점진적인 개혁정책을 쓰고 있다. 특히 환율과 외환 통제가 엄격해 외국기업이 투자를 망설이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하산 이슬람호드자예프 우즈베키스탄 대외경제부 차관은 “우리는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과 사회보장 유지, 점진적 개혁 등의 원칙을 지키며 시장을 개혁 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우즈베키스탄의 개혁은 더디지만 급진개혁을 추진한 러시아 등이 겪은 물가폭등과 빈부격차 심화, 국민생활수준 폭락 등의 부작용은 피할 수 있었다.
분업체제 붕괴로 각 공화국 고통
한편 부존자원이나 산업기반이 없는 타지키스탄이나 키르기스 등은 1인당 GDP가 5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빈국으로 전락했다. 굳이 독립한 이유를 찾기 힘들 정도로 국민생활수준도 낮다. 소련은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의 통제로 전 연방의 물가나 임금 등 경제수준을 균등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난해 에스토니아의 1인당 GDP는 2564달러로 최빈국인 타지키스탄(176달러)과 10배가 넘는 차이가 났다.
독립 후 구소련 국가들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 중 하나는 소련 시절 구축된 ‘분업체제’의 붕괴다. 구소련의 경제체제는 농업국 우크라이나가 ‘빵바구니’ 구실을 하고 석유 가스 전기 등은 러시아에서 공급받는 식으로 각 공화국이 철저히 분업화한 형태였다.
소련 해체와 함께 공산당의 1당 독재 체제가 무너지고 의회와 선거, 다당제가 도입되는 등 민주화가 진전됐다. 그러나 권위주의적인 통치와 언론탄압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국경 없는 기자회’ 등 여러 언론 관련 국제 비정부기구(NGO)의 보고에 따르면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에는 여전히 광범위한 검열이 있다. 러시아에서는 특히 푸틴 집권과 함께 언론탄압과 권력 집중현상이 두드러졌다.
최근 러시아 정부가 최대 민영방송인 NTV의 경영권을 빼앗은 것이 대표적인 언론탄압 사례다. NTV는 푸틴의 정책에 대해 “권위주의 시대로 돌아가려 한다”며 비판적 시각을 보여왔다. 그러자 정부는 NTV에 대해 집중적인 세무조사를 실시해 사주(社主)인 블라디미르 구신스키 회장을 탈세와 횡령혐의로 구속했다. 구신스키는 보석으로 풀려나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정부는 국영기업인 가스프롬을 동원해 경영난에 빠진 NTV의 지분을 집중 매집했고 결국 이사진을 개편하고 정부에 비판적인 예브게니 키셀료프 사장과 보도국 간부들을 회사에서 쫓아냈다.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에서는 정치적 탄압이 훨씬 노골적이다. 정적이나 비판적인 언론인을 구속하거나 심지어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최근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이 반체제언론인을 살해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인터넷 신문인 ‘우크라이나 프라브다’ 편집인인 그리고리 곤가드제가 살해된 후 그의 살해를 지시하는 쿠치마 대통령의 육성이 담긴 녹음테이프가 공개된 것이 발단이었다. 쿠치마 대통령은 변조된 테이프라고 주장했으나 수천명의 시위대가 수도 키예프 등에서 시위를 벌이고 사임 압력이 커지고 있다.
지난 9월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한 알렉산드르 루카센코 벨로루시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고쳐 대통령의 임기를 연장해 서방으로부터 ‘유럽대륙의 마지막 독재자’로 불리고 있다. 야당은 이번 대선도 조직적인 부정선거로 치러졌다며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의 구소련 국가들은 권위주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아르메니아에서는 1999년 10월 의회에 난입한 테러범들이 총리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팽창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에 위협을 느끼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은 슬라브 정교의 제정 러시아와 사회주의 소련의 오랜 지배를 받으며 숨어 있다가 독립과 함께 떠올랐다.
기자가 지난 6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갔을 때 시내 곳곳에서는 새로운 메체트(이슬람사원)를 짓거나 보수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10년 전 독립 당시 우즈베키스탄의 사원 수는 모두 87개였으나 현재는 1700여 개로 늘어났다. 지난해에는 이슬람 최대의 축제인 하지순례에 무려 4000여 명의 우즈베크인이 참가했다.
그러나 타지키스탄과 키르기스는 이슬람 원리주의 반군의 위협에 국가안보마저 흔들리는 상황이고 주변국들은 이 세력을 차단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시장개혁의 부작용으로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원리주의는 빈민과 농촌을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중앙아시아 국가와 중국, 러시아 등이 참여하는 ‘상하이5’의 가장 주요한 안보 목적도 원리주의 세력의 견제다. 비교적 고립주의적인 우즈베키스탄마저 올 들어 ‘상하이5’ 참여를 고려할 정도로 중앙아시아에서 원리주의의 확산은 위협적이다.
소련 해체 후 구소련 국가들은 내부적으로 개혁의 속도와 방향을 놓고 이념적 갈등을 겪었다. 1991년 ‘8월 사태’의 현장 ‘벨르이 돔’은 2년 후인 1993년 10월 다시 전세계의 눈길을 끄는 역사의 현장이 됐다. 옐친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대해 보수파가 장악한 의회격인 최고회의와 인민대의원회의는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다. 결국 옐친은 1993년 9월 최고회의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보수파들은 최고회의 청사인 ‘벨르이 돔’을 점거하고 무력항쟁에 나섰다.
이슬람세력의 팽창
옐친은 군과 탱크까지 동원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사태를 진압했다. ‘하얀 건물’이란 뜻의 벨르이 돔은 탱크포의 사격으로 ‘초르느이 돔(검은 건물)’으로 변해버렸다.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러시아에서 보혁갈등이 무력투쟁으로까지 격화한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1995년 총선에서 원내 제1당으로 복귀했고 개혁에 다시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소련이 15개로 나뉘고 나서도 각국에서는 소수 민족의 분리독립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89개 지방정부로 구성된 러시아는 유럽과 러시아에 걸쳐 40여 개 민족이 섞여 사는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 비러시아계가 다수인 지역에서 독립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러시아 남부 카프카스지역의 체첸자치공화국이다.
체첸은 소련이 붕괴되자마자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했다. 러시아는 당시의 혼란 때문에 체첸의 독립을 사실상 묵인하다가 1994년에야 뒤늦게 군을 투입, 무력진압을 시도했다. 그러나 준비 없이 체첸으로 진격한 러시아군은 수도 그로즈니 등에서 게릴라전을 펴며 완강히 저항하는 반군에 밀려 1996년 체첸에서 철수하는 망신을 당했다. 이후 체첸은 사실상 독립국의 지위를 누려왔다.
1999년 10월 당시 총리이던 푸틴의 주도로 2차 체첸 침공이 시작됐다. 러시아군은 소극적이던 1차 침공과는 달리 전투기와 로켓을 동원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퍼부어 수개월 만에 그로즈니를 포함한 체첸 영토의 3분의 2를 점령했다. 러시아군의 승리가 계속되자 푸틴의 국내 인기는 폭발적으로 높아졌고 결국 지난해 대선에서 승리하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그러나 체첸반군은 여전히 남부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근거로 게릴라전과 테러로 러시아에 맞서고 있다. 또 러시아군의 대량살상 작전으로 인구 80만의 소국 체첸은 폐허가 됐고 20만명의 난민이 생겼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지는 등 여전히 체첸사태는 큰 정치적 부담으로 남아 있다.
이런 혼란을 겪으면서 1990년대 초 구소련 지역을 열병처럼 휩쓸고 지나간 주권독립과 민족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도 한풀 꺾였다. 최근에는 오히려 “옛날이 그립다”는 향수(鄕愁)의 확산이 두드러진다. 지난해 말 러시아의 여론조사기관인 ROMIR가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61.1%가 “소련 시절이 그립다”고 대답했다. 반면 “현재가 더 낫다”는 대답은 27.7%에 지나지 않아 지난 10년 동안의 시장개혁과 민주화의 성과를 의심하게 했다.
“소련 시절이 그립다”
소련 붕괴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73.5%가 “유감”이라고 대답했고 63.5%는 “막을 수도 있었다”고 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소련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반면 “소련 붕괴는 필연적이었다”는 답은 25.3%였고 “1991년 12월 당시 옐친 전대통령 등이 소련을 해체하기로 한 결정이 정당했다”는 응답자는 겨우 9.5%에 지나지 않았다.
또 다른 조사기관인 여론재단(FOM)이 지난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14%가 ‘20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소련을 세운 초대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14%)과 그의 후계자로 ‘독재자’로 불리는 이오시프 스탈린(9%)을 나란히 1,2위로 꼽았다. 반면 소련의 반체제운동가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핵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는 3위(8%)였으며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을 시작해 결과적으로 소련 해체를 앞당긴 고르바초프는 5위에 그쳤다.
초강대국의 위상이 추락하고 사회 혼란과 국민의 생활수준이 크게 낮아진 현실에 대한 불만이 소련 시절의 향수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