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문서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1948년 11월 당시 김구가 반이승만 군부쿠데타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같이 연루되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염동진을 통해서, 미군 정보장교가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이 문서는 김구 암살자인 안두희의 배후나 지령자를 밝혀낼 목적에서 작성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1949년 이후 백범 암살이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 문서는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김구가 암살된 이유를 여순사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 쿠데타를 중심으로 찾으려고 하는 미국의 시각이 깊이 깔려 있다. 이것이 문서의 이름이 ‘김구 암살의 배경’이 되는 이유이며, 별도로 1948년 11월 초의 쿠데타 관련 를 첨부한 이유다.
여기서 염동진은 김구-우익의 A급 정보를 미군 CIC에 전달하는 주요 정보원으로 등장한다. 그의 의도는 우익 쿠데타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미군은 그것을 반대로 활용하였다. 쿠데타에 대한 진전된 정보를 캐내다가 CIC 요원이 난처해지거나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는 우려는 에서 정보제공자 염동진과 정보활용자 CIC의 묘한 대립관계를 보여준다.
1948년 말 군부쿠데타 문제는 별도의 사실적 연구를 요하는 중요한 주제이지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안두희, 나아가 이승만 정부와 미국도 당시 김구가 군부쿠데타와 관련있다고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문서에서 본 바와 같이 암살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은 당시 “여순 반란사건에 관련된 일부 극우분자”라는 표현으로 김구를 지목하였고, 국무총리 이범석은 “여순사건은 공산주의자가 극우정객과 연락한 극좌와 극우의 공모”라고 밝혔다.
또한 CIC를 비롯한 미국 정보기관은 위의 문서 외에도 “G-2 Periodic Report” no. 164(1948. 11. 5), “G-2 Highlight” no. 332(1948. 11. 3), “Joint Weeka” (1948. 11. 6) 등에서 김구의 쿠데타와 공산주의자의 공격이 결합되는 것을 지극히 우려하였다(자세한 것은 도진순, 1997, 293쪽, 321-326쪽). 그간 이러한 보고서의 정보원(情報源)이 밝혀지지 않았는데, 이번 문서로 볼 때 염동진 등이 중요한 정보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여순사건과 이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대처는 백범 암살사건에서도 분수령의 위치에 있다. 백범 진영과 이승만 진영의 대립은 대체로 다음의 세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1948년 4월 백범의 남북연석회의 참석으로 서로 돌이킬 수 없는 적대화의 길을 걸었고, 1948년 말 여순사건 직후부터 1949년 초에 걸쳐 그 대립은 “죽고 죽이는 관계”로 비화되었다. 이 시기 정부조직은 신성모 국방장관 등 이승만대통령의 친위조직이 강화되었으며, 안두희를 포함한 서북청년단의 일부가 조직적으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다. 즉 이 시기는 한편으로는 이승만 친정체제가 강화되고, 다른 한편으로 백범 암살을 위한 구조가 정비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마지막 단계가 1949년 5월 이후 국회프락치사건과 조국전선 결성 문제가 부상하면서 시기를 못박아가면서 백범 암살이 촉구·집행되던 시기다.
이렇게 보면 “안두희가 백의사의 제1소조의 구성원이며, CIC 정보원(informer) 또는 요원(agent)이었다는 것”은 김구의 쿠데타에 대해 정보를 제공한 염동진-백의사를 설명하는 과정에 짧게 언급한 부수적인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문서 작성자인 실리(George E. Cilley)의 의도와는 별개로, 우리는 여기에서 진실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문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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