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19일 모스크바 강변에 있는 내각청사인 벨르이 돔(White House) 주변에 수백 명의 시민이 모였다. 10년 전 군부와 국가보안위원회(KGB)가 주도한 보수파 쿠데타를 맨몸으로 막아낸 ‘시민혁명’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시위대는 이 ‘8월 사태’ 당시 쿠데타군(軍)과 충돌해 생명을 잃은 희생자의 사진을 들고 나와 추모하면서 “10년 전의 시민혁명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자유는 없었을 것”이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1999년 사임해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보리스 옐친 전대통령의 대형 사진도 오랜만에 보였다.
당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옐친은 자신을 잡으러 온 쿠데타군의 탱크 위에 올라가 세계와 국민을 상대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자”며 사자후를 토했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은 국내외 여론과 역사의 물결을 반(反)쿠데타로 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같은 시간 모스크바 시내 중심가 푸슈킨 광장. 또 다른 집회가 열렸다. 바로 10년 전의 쿠데타 실패를 아쉬워하는 시민들이 모인 것이다. 시위대는 누추한 옷차림의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낫과 망치가 그려진 옛 소련 국기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서 “쓰러져가는 조국(소연방)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는데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조국의 붕괴를 가져왔다”며 안타까워했다. “서방에 매수된 옐친이 ‘위대한 조국’을 하루아침에 해체시켰다”는 원색적인 욕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1991년 8월 쿠데타가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소련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됐다. 발트 3국을 시작으로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 소연방을 이루던 15개 공화국이 앞다퉈 독립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연방을 지키려고 분투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노력도 그해 12월 옐친 러시아 대통령 등의 일방적인 소련해체 선언으로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결국 12월27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사임발표로 소련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해 8월부터 12월까지 ‘숨가빴던 시간’에 대한 지난 10년 동안의 평가는 일방적이었다. 서방 언론은 보수파의 쿠데타를 “도도한 역사의 물결을 되돌려보려는 수구세력의 어리석은 마지막 몸부림”으로 묘사한 반면. 옐친 등 ‘민주파’는 “악의 제국 소련을 무너뜨리고 3억의 구소련 국민에게 독립과 민주주의를 가져다준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 현재 러시아 국민들의 평가는 어떨까? 보수파 쿠데타와 소련 해체 10년을 맞아 지난 8월 한 여론조사기관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7%가 “쿠데타가 성공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또 25%가 넘는 응답자가 “오늘날 러시아의 참담한 현실은 옐친 전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8월19일 쿠데타 저지 기념 집회의 열기는 10년 전 같은 장소에 모여 민주화와 자유를 외친 수만 인파의 함성과 열기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주변을 지나가던 행인 중에는 이 집회가 왜 열렸는지도 모르는 이도 있어 질문을 던진 외신기자들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옛 소련國歌 부활
1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소련 해체’라는 대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12월31일 밤, 새해를 앞두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신년사가 끝나자 옛 소련 국가(國歌)가 방송을 통해 전국에 울려 퍼졌다. 푸틴의 지시로 새해부터 옛 소련 국가가 부활했다. 또 올해 5월9일에는 소련 붕괴와 함께 사라진 모스크바 붉은광장의 군사퍼레이드가 역시 10년 만에 부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 나치독일을 상대로 승리한 것을 축하하는 승전 55주년 기념일인 이날 러시아 권력의 상징인 크렘린궁 바로 앞 붉은광장에서 대규모 군사퍼레이드가 벌어진 것이다. 이 퍼레이드에는 러시아뿐만 아니라 다른 구소련 국가에서 온 5000여 명의 참전용사도 참가했다.
소련체제를 상징하는 군사퍼레이드와 국가를 없애버린 것은 소련 해체의 주역인 옐친 전대통령이었다. 그런데 옐친의 지명을 받아 후계자가 된 푸틴 대통령은 소련의 전통을 다시 세우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푸틴은 “러시아를 다시 소련과 같은 초강대국으로 만들겠다”며 ‘위대한 러시아 재건’을 내세우고 있다. 푸틴은 소련 체제 유지를 위한 핵심 권력기관이었던 KGB 출신이다.
러시아의 오랜 지배를 받아오다가 소련 해체를 계기로 독립의 꿈을 이룬 대부분의 구소련 국가들은 지난 10년 동안 협력보다는 탈(脫)러시아를 외치면서 각자의 길을 가기에 바빴다. 그런데 최근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9월30일, 독립국가연합(CIS) 정상들이 모스크바에 모여 CIS 창설 10주년에 즈음한 공동성명을 냈다. CIS는 옛 소련의 15개 공화국 중 발트해 연안 3개국을 제외한 12개국이 참여한 주권국가공동체. 8월에도 비공식 모임을 가진 CIS 정상들은 이날 역내의 공동안보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결의했다. 지난 9월5일에는 CIS 12개국 외무장관들이 모스크바에서 만나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릴 국제연합(UN) 총회에 대비한 공동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특히 서방측이 인권 문제 등을 구실로 내정에 간섭하는 것에 공동 대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지난 5월 러시아와 벨로루시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키르기스, 타지키스탄 등 5개국 정상이 벨로루시의 수도 민스크에서 만나 유라시아경제공동체(EurasES)를 창설했다. 이들은 또 “이 기구의 목적과 원칙에 공감하는 다른 CIS 국가에도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들 5개국은 이미 1999년 2월 ‘관세동맹 및 단일 경제권 조약’을, 지난해 10월에는 ‘유라시아 경제공동체 설립 조약’에 서명하는 등 단일 경제권 구성을 주도해왔다.
물론 CIS 내부에는 ‘통합’보다 ‘독자노선’을 가려는 움직임도 여전하다. 러시아권에서 이탈해 미국 등 서방의 영향권에 편입되려고 노력하는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가 대표적이다. 이들 국가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중이다. 그루지야의 대통령은 소련 말기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이미 ‘친(親)서방주의자’로 불려온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전 소련 외무장관이다. 게다가 그루지야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 과거 제정(帝政) 러시아의 통치를 받을 때나 소련체제에서도 독립에 대한 열망과 반(反)러시아 성향이 가장 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같은 슬라브 국가면서도 소련 해체 후 가장 적극적인 탈러시아 노선을 가고 있다. 대(大)슬라브주의라는 명분 아래 오랫동안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온 데 대한 반작용으로 독립에 대한 열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8월 사태’ 직후 가장 먼저 독립을 선언했고 소련 해체와 CIS 결성을 주도했다. CIS 국가 중 독자군(軍)과 독자 통화(通貨)를 가장 먼저 만든 나라도 우크라이나다. CIS는 서방의 승인과 지지를 얻는 대가로 구소련 지역의 핵무기를 모두 러시아로 보내는데 합의했다. 이는 구소련 핵무기의 안전한 통제를 위해서 서방이 요구한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독립 직후 전술핵은 합의대로 러시아에 넘겼으나 전략핵은 한동안 자국 내에 두기를 고집해 서방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구소련 국가들의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91년 소련 해체와 CIS 창설 당시의 상황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991년 8월 보수파의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고 각 공화국이 차례로 독립을 선언하자 소련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됐다. 크림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쿠데타 세력에게 연금됐던 고르바초프는 4일 만에 모스크바로 돌아왔으나 이미 통치할 국가도 국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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