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프랑스 사람인 빌따알 드 라게리가 1898년 파리에서 출간한 ‘한국. 독립이냐, 러시아 또는 일본의 손에 넘어갈 것이냐’의 제4부 ‘현재 한국의 실정’ 중 제5절 ‘한국 왕비의 암살’ 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저자는 프랑스 제3공화제(1895~1940)를 대변하여 전통적 자유주의를 표방한 유력 일간지 ‘르 땅’의 기자로서 청일전쟁이 터지자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랴오둥(遼東) 반도 작전에 종군했다.
전쟁 직후인 1895년 3월3일 제물포항에 도착하여 아관파천까지, 약 1년 동안 우리나라에 머물렀는데 그 기간 동안 견문한 것을 귀국 후 정리해 책으로 엮어냈다.
‘한국 왕비의 암살’은 당시 그가 서울에서 실제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주 내용으로 서술하고 있어, 드 라게리는 명성황후 암살에 관한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특징은 첫째, 드 라게리가 기술한 내용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통용하는 이른바 ‘민왕비 시해사건’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후자가 명성황후를 암살한 장본인인 일본 문헌들에 근거해서 쓰였기 때문이다.
둘째, 현재까지 명성황후의 시체는 석유를 뿌려서 태워버렸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런 소문을 들었을 법한 드 라게리는 “궁궐 대문으로 통하는 큰길에서 일본인 마부가 ‘거적으로 덮은 큰 뭉치를 대로 된 사립짝에 실어 말로 끌고 가고, 그것을 의장대가 호위하는 것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그는 “이것이 왕비의 시체였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도 분명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셋째, 일반설은 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을 주도한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드 라게리는 “민왕비가 암살된 후 일본 군대에 끌려서 타의로 대원군이 궁내에 나타났다”고 간단하게 묘사했다. 끝으로, 기술방법에 관한 특징으로 다른 부분과 달리 이 ‘한국 왕비의 암살’ 부분은 소제목으로 나눠 간결하고 명료하게 쓰였다.
훈련대가 일으킨 소란
한가위 행사 때, 훈련대와 서울 경찰대 사이에 여러 번 난투극이 벌어졌다. 10월6일 뜻하지 않은 작은 전투는 경찰대가 경무청과 순검소를 버리고 폭도들이 서울의 지배자가 되도록 내버려둘 만큼 경찰대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쓰라린 경험을 한 전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런 사태를 걱정하지 않았다. 일본 장교들이 징집하고 교육한 1000여 명의 군인이 기다릴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사람들이 서로 멸시했기 때문은 아니다.
민왕비와 고종은 이 사건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꾸며보려고 심사숙고했다. 그들은 1882년 혁명기간에 왕비를 죽음에서 구한 홍계훈(洪啓薰)을 신임 경찰시위대 대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과거 수훈이 그의 충성심과 왕궁의 경계를 보장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라를 쇄신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확신한 그의 병졸들은 기대와는 달리 단순히 선량한 동양인일 뿐이었다.
정치적인 면에서 계급과 품위에는 거의 변동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나라를 새롭게 한다는 생각은 너무 높고 이해관계를 벗어난 것이었다. 병사들은 애국심을 품기 어려웠으며 철저히 이익 추구에 골몰했다. 그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내려온 전통에 따라 여러 도당간의 대항과 투쟁에 길든, 규율이 전혀 없는 오합지졸이었으나 무기를 내세워 스스로 소극적인 국민의 지배자라고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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