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호

“소오시(壯士)들이 왕비를 마구 때린 뒤 일본도로 쳐 숨지게 했다”

프랑스 기자가 기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

  • 김준희 < 전 건국대학교 교수 >

    입력2005-04-04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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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프랑스 사람인 빌따알 드 라게리가 1898년 파리에서 출간한 ‘한국. 독립이냐, 러시아 또는 일본의 손에 넘어갈 것이냐’의 제4부 ‘현재 한국의 실정’ 중 제5절 ‘한국 왕비의 암살’ 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저자는 프랑스 제3공화제(1895~1940)를 대변하여 전통적 자유주의를 표방한 유력 일간지 ‘르 땅’의 기자로서 청일전쟁이 터지자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랴오둥(遼東) 반도 작전에 종군했다.

    전쟁 직후인 1895년 3월3일 제물포항에 도착하여 아관파천까지, 약 1년 동안 우리나라에 머물렀는데 그 기간 동안 견문한 것을 귀국 후 정리해 책으로 엮어냈다.

    ‘한국 왕비의 암살’은 당시 그가 서울에서 실제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주 내용으로 서술하고 있어, 드 라게리는 명성황후 암살에 관한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특징은 첫째, 드 라게리가 기술한 내용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통용하는 이른바 ‘민왕비 시해사건’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후자가 명성황후를 암살한 장본인인 일본 문헌들에 근거해서 쓰였기 때문이다.



    둘째, 현재까지 명성황후의 시체는 석유를 뿌려서 태워버렸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런 소문을 들었을 법한 드 라게리는 “궁궐 대문으로 통하는 큰길에서 일본인 마부가 ‘거적으로 덮은 큰 뭉치를 대로 된 사립짝에 실어 말로 끌고 가고, 그것을 의장대가 호위하는 것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그는 “이것이 왕비의 시체였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도 분명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셋째, 일반설은 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을 주도한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드 라게리는 “민왕비가 암살된 후 일본 군대에 끌려서 타의로 대원군이 궁내에 나타났다”고 간단하게 묘사했다. 끝으로, 기술방법에 관한 특징으로 다른 부분과 달리 이 ‘한국 왕비의 암살’ 부분은 소제목으로 나눠 간결하고 명료하게 쓰였다.

    훈련대가 일으킨 소란

    한가위 행사 때, 훈련대와 서울 경찰대 사이에 여러 번 난투극이 벌어졌다. 10월6일 뜻하지 않은 작은 전투는 경찰대가 경무청과 순검소를 버리고 폭도들이 서울의 지배자가 되도록 내버려둘 만큼 경찰대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쓰라린 경험을 한 전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런 사태를 걱정하지 않았다. 일본 장교들이 징집하고 교육한 1000여 명의 군인이 기다릴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사람들이 서로 멸시했기 때문은 아니다.

    민왕비와 고종은 이 사건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꾸며보려고 심사숙고했다. 그들은 1882년 혁명기간에 왕비를 죽음에서 구한 홍계훈(洪啓薰)을 신임 경찰시위대 대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과거 수훈이 그의 충성심과 왕궁의 경계를 보장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나라를 쇄신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확신한 그의 병졸들은 기대와는 달리 단순히 선량한 동양인일 뿐이었다.

    정치적인 면에서 계급과 품위에는 거의 변동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나라를 새롭게 한다는 생각은 너무 높고 이해관계를 벗어난 것이었다. 병사들은 애국심을 품기 어려웠으며 철저히 이익 추구에 골몰했다. 그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내려온 전통에 따라 여러 도당간의 대항과 투쟁에 길든, 규율이 전혀 없는 오합지졸이었으나 무기를 내세워 스스로 소극적인 국민의 지배자라고 느끼고 있었다.

    왕비는 이런 오합지졸을 신궁 시위대에서 쫓아냈다. 왕비는 일본인에게 추천받아 신복들을 모은 시위대장 안경수(安壽)가 1894년 7월 왕궁의 안보를 일본인들에게 일임한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왕비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해 경계를 한층 강화한다.

    일본인들의 음모를 구실로 삼아 해산시킨 집단을 재편성해 신궁의 경비를 그들에게 모두 맡기고, 김옥균(金玉均) 의 음모에서 왕비의 생명을 구한 홍계훈 대령을 우두머리로 임명했다. 이어서 왕비는 자신과 가까운 민씨 일문을 관직으로 돌아오게 하여 왕 곁에 배치했다. 왕비는 동생 민영준(閔泳駿)을 궁내대신으로 임명하게 했으며, 친척과 충성스런 지지자로 비밀 심의기구를 만들었다. 왕비는 이 기구가 일본문제를 전담한 정부 부서를 무력화시키기를 바랐다.

    친일대신들에 대한 반감

    유길준(兪吉濬). 내무협판이며 위험한 음모자인 그는 민씨 일문에 반대하여 미우라 고로 자작을 도왔는데, 그는 압록강변의 의주관찰사로 전출되었다. 안경수· 군부대신인 그도 가면이 벗겨지면서 파면됐다. 그는 승진 후 반역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김가진(金嘉鎭). 농상공무대신이던 그도 같은 이유로 같은 운명에 처했다.

    끝으로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그는 소위 개화당의 우두머리로서, 강제로 문 밖으로 내던져지기 전까지는 물러나지 않겠다고 이노우에 가오루 백작에게 약속한 바 있지만, 사퇴를 원한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왕비는 투쟁에서 승리했다고 믿은 나머지, 그리고 불신에 대한 투쟁 열의를 잃은 순간 그 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시위대의 무장해제

    1895년 10월1일부터 6일까지 시위대의 여러 분견대가 김홍집의 명에 따라 궁 밖으로 이동했다. 나머지 병졸들은 군복을 벗어 무기와 같이 반환해야 했다. 10월7일 반항한 훈련대가 서울의 지배자가 됐을 때, 강녕전과 교태전으로 지나는 큰길을 지키는 초소에는 사람 그림자도 비치지 않고 모든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온종일 사람들은 폭도들이 모든 방향에서 왕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 어둠이 깔리자마자 그들은 왕궁을 에워쌌다. 폭 100m의 큰길 양쪽의 관청에는 일본군 1대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10월8일 새벽 4시 보초병들이 경보를 알렸다.

    “왕궁이 위험하고 공격받을 것 같다.”

    시위대 장교들은 궁의 첫번째 안뜰에 있는 숙사에서 뛰어나왔다. 어떤 이들은 왕에게 이를 전하기 위해 곤녕전으로 달렸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의 부서로 뛰어갔다. 사람들은 여름정자의 울타리와 연못으로 통하는 문 가까이에 있는 서쪽 성벽 밖에서 일본 군대를 발견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홍계훈 대령은 궁내대신에게 보고하기 위해 말 위에 뛰어 올랐다. 그가 돌아왔을 때 훈련대 병졸들이 일본군 병사 양쪽에 밀집해 있었다. 그는 병졸들에게 흩어져 본 위치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총을 맞고 쓰러졌다. 8발의 총알이 몸을 관통했으며 몸은 일본도에 토막났다. 도대체 왜 이런 급변이 일어났는지 알 수는 없었다.

    곧 왕궁의 문들이 부서졌고 시위대는 총도 쏘지 않고 도망쳤으며, 성벽을 에워싼 훈련대가 사방에서 쳐들어왔다. 약 15명의 일본군 무리가 여름 정자로 통하는 골목길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들 앞으로 도망병, 시위병, 시중 등 도합 120여 명이 플라타너스 길가에서 있었다. 질겁한 겁쟁이 오합지졸들은 명령에 따르거나 복종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한 병사가 총에 장전해 방아쇠를 당기자 그의 동료들은 닥치는 대로 발포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8명이 죽거나 부상했다. 잠시 뒤, 일본군의 또 다른 무리가 나타났으며, 가장 먼저 궁중에 들어온 훈련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 뒤로 민간복을 입은 다수의 일인이 도착했다. 바로 이 순간, 궁 안 가장 깊은 곳에 들어앉은 마지막 경내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 ‘소오시’의 민왕비 암살

    왕비의 거처에서 문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두 번의 총소리가 들렸다.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절대적인 진실을 가려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입구 하나를 재빨리 찾아낸 파렴치한 일본 무법자들이 왕비를 찾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왕비의 피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궁녀들의 머리채를 쥐고 질질 끌고 다녔다고 한다.

    왕비는 첫번째 경내의 이중건물 안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일본 무법자들은 궁내대신 이경직을 찾아 학살했다. 위층에는 여러 궁녀가 피신해 있었다. 암살자들은 우선 왕세자 빈을 붙잡아 머리채를 쥐고 끌고 다니다가 사정없이 때려 상처를 입힌 뒤 마루에서 안뜰로 내던졌다. 위층에 있던 네 궁녀 중 누가 왕비인지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왕비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비열한 악한들은 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궁의 한 시녀가 이 네 궁녀 중 한 사람이 민왕비라고 확인해 주었다. 흡사 식인종처럼 잔인한 일본인들은 왕비를 마구 때려 까무러치게 한 뒤 일본도로 여러 번 쳐서 마침내 숨지게 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민왕비가 암살당했다는 소문을 믿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몇 번의 음모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왕비가 러시아 공관에 숨어 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그러나 결국 사람들은 잔인하고 비열한 자객이 노린 희생자는 그 칼을 피할 수 없었고 일본인들은 원하던 것을 차지했다고 믿게 됐다.

    (소오시는 일본말로 장사(壯士). 원래 뜻은 혈기 왕성한 남자인데, 메이지 유신때 신정부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자유민권론’을 내걸고 폭력으로라도 목표를 이루겠다는 태도로 정치운동에 가담한 서생들이나 그런 경향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후에 일확천금을 꿈꾸고 한국에 건너와 청부 폭력을 일삼은 무뢰한·무법자를 지칭하는 말로도 쓰였다 - 드 라게리는 이들을 ‘무정부주의자의 일본 변종’이라고 적고 있다.)

    대원군의 음모 참여

    한강변에 위치한 대원군의 집. 대원군의 문지기들은 방문객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깼다. 그들은 방문객을 마당으로 안내했다. 뒤이어 창문 하나가 부서지고 일본 무뢰한들이 겁에 질린 문지기들을 헤치고 뛰어내렸다. 눈깜짝할 사이에 그들은 문을 부수고 대원군의 방으로 들어갔고 곧 대원군은 수하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일본 무뢰한들은 문지기들의 제복을 벗긴 뒤 다시 그것을 걸치게 하고 도성으로 향했다. 그들이 왕궁에 도착하자 일본군 호위대가, 마치 의장병처럼 그들을 호위했다.

    대원군의 독재

    대원군은 즉각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이런 사실을 전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두 종류의 포고문을 작성해 공공장소에 게시했다. 큰길은 약 1만명의 조선인으로 북적였다. 일본군이 지키는 왕궁의 대문을 통해 내시와 궁녀로 가득 찬 궁궐의 안마당이 엿보였다. 그들 중 부상한 두 사람이 빠져 나왔다. 오전 7시, 시위병을 쫓아낸 훈련대는 궁으로 들어온 일본인들과 교대했다. 오전 9시, 큰길에는 아직도 4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궁궐의 중앙문과 서쪽 문은 닫혀 있었다.

    일본 병사들은, ‘꽂아 칼’을 한 훈련대가 지키고 있는 서쪽 쪽문을 통해서 왕궁 안 팎을 마음대로 오가고 있었다. 한 무리의 한국인들이 검색을 받고 궁궐에서 쏟아져 나왔다. 나는 큰길에서 일본 인부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거적으로 덮인 뭉치 하나를 대로 된 사립짝에 실어 말로 끌고 갔다. 그 앞에는 꽂아칼을 한 네 명의 일본군이 걷고 있었고, 일본 보병분대가 호위했다. ‘이것이 왕비의 시체였을까?’

    ‘고꾸민신문 (國民新聞)’은 10월17일부터 이 사건을 보도했다. 이 신문은 “왕비가 훈련대를 믿지 않았다. 비밀리에 왕궁 시위대가 훈련대를 무장해제하고 해산시키려고 시도했다. 이런 계획이 노출됐고 훈련대와 대원군이 밀접한 동맹을 맺고 있다 하더라도 협상이 갑자기 이뤄졌는지 혹은 오래 전에 이뤄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고꾸민신문은 또 다음과 같이 보도한다. “8일 새벽 2시40분 대원군은 공덕리 별장을 떠났다. 그를 호위하던 훈련대 1대대가 길을 잘못 들어 서대문이 아닌 신궁의 정문 광화문에 도착했다. 대원군 일행은 시위대와 궁내부 앞에 배치된 20명의 무리에게서 소총사격을 받았다. 호위병들은 총을 쏜 뒤 곧 도망쳤지만 궁내부 앞에 있던 무리 중의 한 사람이 대원군에게 덤벼들다가 사살됐다. 그는 왕비가 임명한 훈련대장 홍계훈이었다.”

    이때가 새벽 4시였다. 훈련대가 신궁의 모든 문을 점령하는 동안 대원군은 궁궐에 들어와 쉬고 있다가 국왕을 알현하러 강녕전으로 향했다. 그는 5시 반 왕세자를 동반한 국왕을 알현했다. 궁녀들은 놀라서 한 방에 모였다. 왕비는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고꾸민신문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궁녀들과 왕비의 거처에 다가오는 훈련대 사이에서 소란스러운 싸움이 벌어졌다. 궁궐에 맨 처음 나타난 외교관은 일본 전권위원인 미우라 고로 자작, 러시아 대리공사 M. 웨버, 그리고 합중국 공사관의 알렌 박사였다. 그들은 곧 왕을 알현했는데 그때 대원군과 함께 있던 국왕은 생기가 없었다. 국왕은 그 사태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소극적인 한국사람들이 이 비극에 참여했으며 그것은 귀족들의 반목이며 인민과는 무관하다고 대답했다. 많은 고급관리들이 도망쳐서 살 길을 찾아 나섰고 내각은 모조리 교체되었다.”

    왕비 폐위 칙령

    비록 국왕이 서명을 거부하고 서명 대신 손을 자르겠다고 언명했지만 왕비를 규탄하는 칙령이 10월11일 관보로 발표됐다. 12일에는 왕세자가 아버지인 왕에게 헌신하는 것이 입증되어 고인을 정일품 빈으로 받든다는 또 다른 칙령이 나왔다.

    일본정부의 조치

    이 비극이 일본에 전해지자 천황 정부는 음모에 대한 모든 인지와 그 집행에 관한 어떠한 참여도 부인했다. 일본정부는 외무성 정무국장인 고무라와 다른 고급관리 한 사람을 특별위원으로 임명해 한국에 파견, 미우라 고로 자작과 함께 범죄에 대한 조사를 수행하게 했다. 두 명의 특별위원은 10월15일 밤 서울에 도착했다. 일본 영사 당국은 이미 15명의 일본인 무뢰한을 체포했다. 사건을 의심할 만한 위치에 있는 외국인들은 범죄자들이 한국을 떠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자문하기도 했다.

    10월12일자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극도로 흥분한 민씨 일가를 진정시키기 위해 국왕이 칙령을 공포했으나 민씨 일가가 보복하지는 않을까 몹시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날, 일본신문 ‘니찌니찌’는 외국공사들이 서울에서 빈번히 협의했으나 일본대표는 초대받지 못했다는 부산발 기사를 보도했다. 또 다른 신문은, 내가 서울에서 만난 다이 장군과 러시아 건축가 수바틴느의 증언을 보도했는데, 그들은 일본부대가 궁 안의 질서가 잡히자마자 철수했다고 말했다.

    일본 천왕의 칙령

    10월18일, 일본제국 공보는 다음과 같은 칙령을 공포한다.

    “짐은 긴급한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그리고 우리 추밀원의 충고에 따라서 또한 제국헌법 제8조의 규정에 비추어, 민·군의 관리들과 해당 국장의 훈령을 갖춘 자를 제외하고는 지방장관의 허가 없이 어떤 일본 신민도 한국에 가는 것을 이 칙령에 의해 금지한다.”

    이 칙령은 여러 가지 관측을 가능하게 한다. 우선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에 대한 치밀한 감시가 필요했으나 그렇지 못한 행정의 책임을 책망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또 칙령은 무정부주의자의 일본 변종인 ‘소오시’를 겨냥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불법행위는 조금도 비밀이 아니었다.

    마관조약(1895년 4월17일) 비준 후 모든 대신들은 소오시에 의해 암살될 것이라 예측하고 암살을 모면하기 위해 측근들에게 눈을 떼지 말고 엄중히 감시하게 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일본의 가장 위험한 적인 왕비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준 가증스러운 간계 때문에 자신들의 죄가 조사를 통해 밝혀져 유죄판결이 내려지는 경우를 대비해 미리 모든 책임을 완전히 거부하기 위해 서두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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