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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발굴

“소오시(壯士)들이 왕비를 마구 때린 뒤 일본도로 쳐 숨지게 했다”

프랑스 기자가 기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

  • 김준희 < 전 건국대학교 교수 >

“소오시(壯士)들이 왕비를 마구 때린 뒤 일본도로 쳐 숨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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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는 이런 오합지졸을 신궁 시위대에서 쫓아냈다. 왕비는 일본인에게 추천받아 신복들을 모은 시위대장 안경수(安壽)가 1894년 7월 왕궁의 안보를 일본인들에게 일임한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왕비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해 경계를 한층 강화한다.

일본인들의 음모를 구실로 삼아 해산시킨 집단을 재편성해 신궁의 경비를 그들에게 모두 맡기고, 김옥균(金玉均) 의 음모에서 왕비의 생명을 구한 홍계훈 대령을 우두머리로 임명했다. 이어서 왕비는 자신과 가까운 민씨 일문을 관직으로 돌아오게 하여 왕 곁에 배치했다. 왕비는 동생 민영준(閔泳駿)을 궁내대신으로 임명하게 했으며, 친척과 충성스런 지지자로 비밀 심의기구를 만들었다. 왕비는 이 기구가 일본문제를 전담한 정부 부서를 무력화시키기를 바랐다.

친일대신들에 대한 반감

유길준(兪吉濬). 내무협판이며 위험한 음모자인 그는 민씨 일문에 반대하여 미우라 고로 자작을 도왔는데, 그는 압록강변의 의주관찰사로 전출되었다. 안경수· 군부대신인 그도 가면이 벗겨지면서 파면됐다. 그는 승진 후 반역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김가진(金嘉鎭). 농상공무대신이던 그도 같은 이유로 같은 운명에 처했다.

끝으로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그는 소위 개화당의 우두머리로서, 강제로 문 밖으로 내던져지기 전까지는 물러나지 않겠다고 이노우에 가오루 백작에게 약속한 바 있지만, 사퇴를 원한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왕비는 투쟁에서 승리했다고 믿은 나머지, 그리고 불신에 대한 투쟁 열의를 잃은 순간 그 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시위대의 무장해제

1895년 10월1일부터 6일까지 시위대의 여러 분견대가 김홍집의 명에 따라 궁 밖으로 이동했다. 나머지 병졸들은 군복을 벗어 무기와 같이 반환해야 했다. 10월7일 반항한 훈련대가 서울의 지배자가 됐을 때, 강녕전과 교태전으로 지나는 큰길을 지키는 초소에는 사람 그림자도 비치지 않고 모든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온종일 사람들은 폭도들이 모든 방향에서 왕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 어둠이 깔리자마자 그들은 왕궁을 에워쌌다. 폭 100m의 큰길 양쪽의 관청에는 일본군 1대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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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희 < 전 건국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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