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경제학과 주역을 넘나들다
1980∼90년대 한국 진보주의 학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국내 저자의 책은 무엇일까. 정확한 조사는 없으나 필자가 추론하건대 아마도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일 것이다. 사적인 이야기를 잠시 하자면, 1989년 출간된 이 책을 필자가 처음 접한 것은 독일 유학 시절이었다. 넷째 형님께서 보내준 이 책을 주말 저녁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단숨에 끝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무거워진 기억이 난다. 아니 한없이 시렸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한 인간이 20년 동안 세상과 차단된 감옥 안에서 처절한 고독을 견뎌온 내면의 기록은 분단체제라는 비극적 현실을 인식하기에 앞서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 또 진정한 인간주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1984년 16년 만에 귀휴(歸休)하여 엿새를 보내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간 신교수가 계수씨에게 보낸 편지 ‘엿새간의 귀휴’에서 받은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교도소로 돌아오는 형님의 차 안에서 넥타이 풀고, 와이셔츠, 저고리, 바지 등 세상의 옷들을 하나하나 벗어버리고 다시 수의로 갈아입을 때, 그때의 유별난 아픔은 냉정한 이성의 언어를 거부하는 감정의 독립 같은 것이었습니다.”
신교수는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하여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 1959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1963년 학부를, 1965년 대학원을 마쳤다. 졸업 후 그는 숙명여대 강사를 거쳐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20일을 복역하다 1988년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그는 1989년부터 성공회대에서 ‘정치경제학’, ‘한국사상사’, ‘동양철학’ 등을 강의해 왔으며 1998년 사면복권되어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로 부임했다. 그 동안 신교수가 발표한 책으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 ‘엽서’(1993), ‘나무야 나무야’(1996), ‘더불어 숲’ 1·2(1998)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사람아 아! 사람아’(1991)를 포함해 여러 권이 있다.
정치경제학과 물신숭배 비판
신교수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경제학자라기보다 진보주의 문명비판가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진보주의 경제학은 김수행 교수(서울대)를 필두로 쟁쟁한 학자들이 적지 않지만, 여기서 신교수를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삶과 사상이 갖는 상징성에 있다. 간단히 말해 신교수의 삶과 사상은 권위주의 정치체제에서 금기로 여겨온 진보주의 사회과학, 좁게는 마르크스주의 사회과학의 역사를 웅변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가져온 정치적 개방은 진보주의 사회과학의 시민권을 회복시켰으며, 신교수의 삶과 사상은 바로 이 시민권의 회복을 단적으로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가 바깥세상으로 다시 나와 발표한 일련의 글들이 비록 전문적인 경제학 논문은 아니었더라도 1990년대 진보주의 학계와 사회운동 진영에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쳐 온 것은 이런 저간의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신교수의 사상을 이루는 두 기둥은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과 인간주의 철학이다. 신교수는 지난 10여 년간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논문을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발표한 글들을 보면 정치경제학이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개의 눈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그 동안 신교수가 발표한 글들을 처음으로 통독했는데, 필자에게 가장 인상적인 글은 ‘우리교육’에 실린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1998), ‘진보평론’에 발표한 ‘강물과 시간’(2000), 그리고 올해 월간 ‘신동아’ 7월호에 게재된 ‘따뜻한 가슴과 연대만이 희망이다’였다. 이 글들을 처음 읽을 때는 신교수가 자신의 생각을 쉬운 어조로 담담히 이야기하고 있음을 느끼지만, 다시 한 번 읽어보면 그 속에는 깊은 사색의 씨앗이 담겨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대학사회에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다소 멀어졌지만 1980년대를 풍미한 사회구성체 논쟁에서는 ‘전가의 보도’였다. 당시 대학을 다닌 지금의 30대는 운동권이든 아니든 서가에 아직도 정치경제학과 변증법에 관련된 책을 한두 권쯤은 꽂아놓고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대학시절 NL(민족해방), PD(민중민주),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해방론) 등 마치 암호와도 같은 변혁노선을 외우면서 강의실보다는 시위 현장이나 학교 앞 술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바로 이런 대학생활의 한가운데 놓여 있던 이념으로, 단지 경제이론이라기보다 하나의 새로운 세계관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신교수가 주목하는 정치경제학적 접근의 ‘합리적 핵심’은 자본주의의 중핵을 자본과 노동의 대립,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간의 대립으로 파악하는 데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인간과 인간이 단절되는 물신성이 사회 전체를 지배한다는 데 있다. 그에 따르면 이런 자본의 운동은 현재 우리 사회를 재생산하는 중심원리, 예를 들어 IMF 경제위기도 과잉축적자본의 순환에 따른 생산력의 파괴와 노동비용 통제의 결과라는 것이다. 신교수는 당대 금융자본주의가 낳은 파국적 결과인 ‘20 대 80의 사회구조’가 경제적 지배를 넘어 문화와 정신, 그리고 인종까지 지배하려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신교수의 책에서 저음(低音)을 이루는 또 하나의 사상은 인간주의 철학이다. 그의 인간주의 철학은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일종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청하는 것으로 집약된다. 신교수에게 존재론은 인간을 하나의 고립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데, 경쟁력을 갖춘 개인, 경쟁력 있는 회사, 또는 경쟁력 있는 국가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문제는 근대사회의 등장 이후 이런 존재론은 언제나 승패를 요구하는, 결과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자본주의 철학이라는 점에 있다.
이에 대한 신교수의 사상적 대안은 다름아닌 관계론이다. 관계론이란 ‘나 아닌 다른 것과의 관계성의 총체’가 인간 생명의 본질을 이루고 있음을 뜻하는데, 신교수는 이 관계론적 패러다임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물신성과 소외를 극복하고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사상적 기반임을 강조한다.
나아가 신교수는 이 관계론을 실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을 제시한다. 첫째, 자본주의가 풍요를 가져왔다는 환상을 청산해야 한다. 둘째, 성급한 반성과 대안은 오히려 경계해야 한다. 셋째, 목표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도 중시해야 한다. 넷째, 속도, 성장, 번영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다섯째, 미완성을 주목해야 한다. 신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주역’ 64괘(卦)의 마지막인 화수미제(火水未濟)를 가끔 인용하는데, 그 뜻을 ‘부단한 반성이 진보의 조건’이라고 풀이한다. 여섯째, 자본주의 부문과 무관한 가정, 우정, 봉사 등의 부문이 적극적으로 조직화되어야 한다. 마지막 일곱째, 진정한 사상은 따뜻한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신교수의 대안은 얼핏 보면 소박한 인간주의로 읽히기 쉽다. 하지만 신교수의 글들을 꼼꼼히 읽어보면 그의 인간주의는 인간의 의지를 무조건 특권화하는 대중적 인간주의, 즉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두고 있지만, 사실은 그 무력감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속류 인간주의와는 다르다. 필자가 보기에 신교수의 인간주의는 물신성이 특징인 자본주의의 강압을 냉정하게 직시하면서도, 그 구조적 조건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이념이며, 무엇보다 진정한 사회해방을 염원하는 진보주의의 인간화를 겨냥하고 있다.
신교수의 삶과 사상을 압축하는, 널리 알려진 구절이 있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만약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교수가 정치경제학에 인간주의 철학을 접목시킴으로써 진보주의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점에서 신교수의 사상은 새로운 생태주의와 민주적 공동체주의에 닿아 있으며, 이는 그의 책에 일반 시민들이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또한 사물의 정수(精髓)를 추출하는 간결한 문체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한껏 느끼게 해준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성공회대로 신교수를 찾아갔다. 그 동안 신교수에게 인사를 드린 적이 없지 않지만, 직접 만나보니 신교수는 글과 사람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신교수가 동의할는지 모르지만) 진정한 ‘선비’였다.
그와 이야기를 마치고 나와서 한동안 혼자 걸었다. 그때 두 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먼저 신교수의 모습에서 필자는 매천 황현 선생과 단재 신채호 선생을 떠올렸는데 우리 지식사회에서 아쉬운 것이 바로 이런 지식인을 제대로 아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과연 신교수의 대안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의미 있는가의 문제였다. 그것은 한국 진보주의가 시민권을 회복하고 하나의 독자적인 담론체계를 구축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정치적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정치적 딜레마 문제는 결론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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