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이색인물

고려대 명예교수 박찬기

컴퓨터책 집필하는 74세 괴테연구가

  • 이계홍 < 작가·용인대 겸임교수 >

고려대 명예교수 박찬기

2/4
“12시 반에 온다고 하지 않았소. 안 와서 시장을 보아왔지.”

그의 손에는 봉지가 하나 들려 있는데 과일과 과자를 좀 사왔다는 것이다. 일본 주간지 ‘주간신조’와 신문이 깔려 있는 소파에 털썩 앉자마자 그는 웃옷을 벗고 ‘메리야스’ 차림을 했다. 그리고 바지 벨트를 풀었는데 지퍼도 반쯤 내려와 바지 속의 하얀 팬티가 훤히 드러나 보이기도 했다. 선입견 때문일까, 그런 그의 모습이 추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소파 옆에 ‘청룡회보’라는 제호가 붓글씨로 여섯 장 씌어 있다. 아마도 회보의 제호를 써놓고 그중 좋은 것을 고를 참인 것으로 보였다.

“청룡회보는 1960년대 월남에 파병했던 청룡부대 회보를 말합니까?”

묻기를 잘했다는 듯이 곧바로 대답이 나왔다.



“우리 집안 회보요. 반남 박씨 중 우리 직계 가족 102명의 정보를 담아주는 가족회보인 셈이지요. 형님(박찬웅 전 연세대 교수·법철학)이 연로하셔서 내가 대신 맡아 만들고 있는데 제호를 바꿀 요량으로 쓴 것입니다. 우리 증조부는 강원도 철원 분이시고 과거 급제를 하셨어요. 그리고 조부(박승빈 대한제국 검사·변호사·보성전문 교장)는 일본 중앙대 출신으로 대한제국 국비장학생으로 일본 중앙대에서 공부하고 수석으로 졸업한 분입니다.”

그는 네 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 내내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으며, 손님에게 차 한잔 대접하는 시간도 아끼는 듯했다. 그래서 물 한 모금 서로 마시지 않고, 널려 있는 과자 부스러기 하나 입에 대지 못하고 얘기를 진행했다. 그러나 그의 얘기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그것은 진실성이랄까 진지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건망증 때문에 문 잠그고 다니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여기서 가져갈 것이 무엇이있소. 책 나부랭이야 휴지로도 못 쓸 것이고, 컴퓨터를 가지고 간대야 무거워서 짐만 되지.”

-하루 일과 중 매일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우면산으로 등산을 가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아니지. 우리 집안 내력을 좀더 알아야지. 그것이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요.”

그는 한사코 가문 얘기에서 빠져 나오기를 원하지 않는 듯했다.

“회보의 자료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재미는 정사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집안은 아이들을 학대하지 않는다는 전통이 있어요. 그래서 어른들이 아이들을 부를 때 모두 경칭을 쓰지요. 어머니도 나를 부를 때 ‘찬기씨’ 했지. 이것은 조부가 계명구락부를 창설하면서 내린 지침이에요. 아이들을 학대하지 말라. 애들도 인격이 있나니, 그들을 누르니 노예가 된다는 취지였어요. 우리가 일본의 노예가 되고 말았는데 독립만 해서 뭘 하나, 내적으로 독립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런 뜻에서 아이들에게 희망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 할아버지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몽양 여운형의 조카

그리고 외숙부가 몽양 여운형이라고 소개했다. 모친은 여윤숙.

“해방정국에서 영국과 소련은 한국의 대통령으로 여운형을 꼽았고 미국은 이승만을 꼽았지요. 김구는 없었어요. 김구는 여운형을 제거했고, 이승만은 김구를 쳤지요. 이것이 우리의 비극입니다. 단합과 화해보다 분열과 대립의 추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고, 이것이 우리 정치에 그대로 오염돼버렸어요. 몽양과 그 동생인 여운홍(제헌의원) 외숙부는 내 조부를 스승으로 꿈을 키웠어요. 그리고 몽양은 절대로 공산주의자나 소련의 추종자가 아닙니다.”

우리 현대사는 바로 ‘레드 콤플렉스’가 지배하던 시대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몽양의 딸이 북한에서 대표적 여성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다는 귀띔을 했다. 대답이 큰 목소리로 돌아왔다.

“반공논리 냉전주의가 지금은 상당 부분 완화됐지만 사실 순수 마르크스 공산주의는 휴머니즘이에요. 나는 독일문학을 했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잘 압니다. 그의 일관된 사상은 인도주의예요. 그것이 볼셰비키 혁명 때 왜곡됐을 뿐이죠. 돈 많은 사람을 죄악시하면서, 그중에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번 사람도 있는데 이들을 죄악시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 정신을 변질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스탈린주의로 넘어오면서 동지도 죽이는 비정한 권력수단으로 전락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가 오히려 휴머니즘을 말살했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와 공산독재는 구분되어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해방공간 이후 좌우 대결을 통해 서로 정치적·정략적으로 이용했지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선 감정을 배제해야 하는데, 정치적 폭풍에 휘말려 마르크스주의를 정적을 파괴하는 수단으로 악용해 왔던 것입니다. 학계는 이 점을 크게 반성해야 합니다.”

그는 형 박찬웅 교수가 전두환 정권 시절, 반독재투쟁을 한 일화도 들려주었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이 박찬웅 교수를 총리로 옹립하려고 했을 때 거절한 일화도 소개해주었다.

-교수님의 삶의 자세랄까, 궤적이 특이하다고 들었는데, 그 점에 관해 설명을 해주시죠.

“언제나 나는 새벽 2시에 일어납니다. 예술의 전당 뒤편에 있는 우면산으로 등산을 가서 반드시 정상까지 올라갔다 와요.”

“정상은 몇 미터나 되죠?”

“모르겠어요. 다만 성한 젊은이도 단번에 올라가기에 벅찬 산이에요. 논현동 집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가는데 할증료가 붙기 때문에 3000~4000원 나올 것이 5000원 정도 나와요. 그 시간에도 벌써 산을 오르는 사람이 있어요.”

“아예 산에서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아니지. 일찍 나온 사람들은 나 같은 노인들이야. 잠이 없는 사람들이지. 이 신새벽 모두들 잠자고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두렵게 하고 또 어떤 책임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는 정상 바로 밑에 있는 운동시설을 이용해 여덟 가지 운동을 한다. 역기 철봉 덤블링 평행봉 등등. 그중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기를 10분 정도 한다. 규칙과 절제와 질서를 중요시하는 ‘독일학도’답게 시계를 들여다보며 단 1초도 틀리지 않게 10분을 채우고 철봉에서 내려온다. 처음에는 피가 거꾸로 쏟아지는 것 같은 고통을 겪었지만 지금은 이를 하지 않으면 하루 일과가 버그러질 정도다. 신체의 어딘가가 고장난 것 같고 허전하다.

산에서 두 시간 가량 보내다 사무실로 출근하는 시간은 오전 4시30분. 칸트의 산책처럼 1994년 퇴직 이후 한번도 이를 거른 적은 없다. 그는 최근 휴대폰을 하나 구입했다. 그러나 하루에 단 한 번 전화를 거는 게 전부다. 단 한 차례 거는 전화는 사무실 경비원을 잠에서 깨우기 위해서다.

2/4
이계홍 < 작가·용인대 겸임교수 >
목록 닫기

고려대 명예교수 박찬기

댓글 창 닫기

2023/04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