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권46 최치원전에 붙여 쓴 최승우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 이를 짐작하게 해준다.
“최승우는 당 소종(昭宗) 용기(龍紀) 2년(890)에 당나라에 들어가서 경복(景福) 2년(893)에 시랑(侍郞) 양섭(楊涉) 문하에서 급제하였다. 사륙집(四六集; 사륙변려체로 지은 문장을 모아놓은 문집) 5권이 있는데 스스로 서문에 쓰기를 호본집(本集)이라 하였다. 뒷날 견훤을 위해서 격서(檄書; 꾸짖어 따지는 글)를 지어 우리 태조(고려 태조)에게 보냈다.”
유학한 지 3년 만에 과거에 급제할 정도라면 나이도 상당하고 당나라 사정에도 꽤 밝았으리라 생각되니 혹시 최치원이 귀국할 때 집안의 편지를 가지고 귀국을 재촉하러 갔던 최서원(崔棲遠)이란 인물과 동일인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최서원이 최치원을 영접하러 갔던 사실은 최치원의 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 권20의 ‘아우 서원에게 돈 주신 것을 사례하는 장문(謝賜弟棲遠錢狀)’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아무는 아룁니다. 아무의 사촌아우인 서원이 집안의 편지를 가지고 와서 동쪽으로 돌아가는 일을 영접하려고 드디어 신라국 입회사 녹사(新羅國 入淮使 錄事)의 관직명을 빌려서 큰 땅에 나왔다가 장차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어제 특별히 돈 30관을 내려주시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엎드려 아뢰건대 최서원은 멀리 안개 낀 물결을 건너오다가 풍랑(風浪)을 크게 만나 겨우 보잘것없는 목숨은 살아 남았으나 오직 빈 몸일 뿐이었습니다. 비록 뜻이 할미새처럼 간절하여 가만히 들에 있는 뜻을 사모하여(형제간에 서로 위급을 구해주어) 부끄러움을 기린다 하여도 빨리 달리는 말이 길 얻는 것을 기약하기 어려운 때를 당하면 갈대를 물고 다만 나란히 나는 것을 기뻐하며 나무를 띄워놓고 잃어버릴 걱정을 면하려 할 뿐입니다.
이제 아무는 이미 사행(使行)을 받드는 영광을 누렸으니 곧 드디어 어버이를 편안케 하였는데 재물의 윤택한 이름은 실로 안팎을 꼭 맞게 해준다 하겠습니다. 돌아가는 길의 영광스러운 일은 모두 어르신께서 내려주신 것입니다. 아랫사람의 심정으로 은혜에 감사하여 뛸 듯이 기쁘고 공경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어떻든 최승우는 893년에 과거에 급제한 뒤 당나라에서 상당 기간 머물러 살면서 당나라 벼슬을 살았을 듯하나, 그에 관한 기록은 정사(正史)에서는 더 이상 찾을 길이 없다. 후백제로 가서 견훤을 돕다가 견훤이 망했기 때문이다.
한편 최치원은 최승우가 당나라 과거에 급제한 해에 부성군(富城郡, 충남 서산) 태수로 자리를 옮겨 이해에 봉암사 지증대사비문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이때 이미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 길이 막히고 치안이 어지러워져서 비석을 세울 형편이 못 되었으므로 고려 태조가 등극하여 견훤과 자웅을 겨루던 시기인 신라 경애왕 원년(924) 6월에야 세워진다. 이 얘기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이해에 신라 조정은 병부시랑 김처회(金處會)를 납정절사(納旌節使)로 당나라에 보냈는데 가다가 바다에 빠져죽는 불행을 당한다. 이에 신라 조정에서는 당나라 유학생 출신으로 서해안 군 태수로 있는 인물 중에서 다시 사신을 선발해 보낼 계획을 세우고 혜성군(城郡, 충남 당진군 면천) 태수 김준(金峻)을 고주사(告奏使)로, 이웃 고을인 부성군 태수 최치원을 하정사(賀正使)로 삼아 당에 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 길이 막히고 치안이 어지러워 물화의 유통이 순조롭지 않아 부득이 포기하고 말았다 한다. 최치원과 최승우 사촌형제가 당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최치원은 다음해인 진성여왕 8년(894) 2월에 국왕에게 시무(時務) 10여조(條)를 올려 정치의 기본 틀을 바로잡으려 한다. 진성여왕은 타당한 논리이기 때문에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공으로 최치원에게 진골이 아닌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제6위 아찬(阿) 벼슬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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