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호

DJ 사로잡은 성실·논리·언변의 ‘40대 단발소녀’

박선숙 청와대 공보수석

  • 윤영찬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 yyc11@donga.com

    입력2004-11-04 11: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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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1월29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개편 때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40대의 젊은 여성인 박선숙 공보수석의 임명이었다. 청와대 최초의 여성 대변인으로 발탁된 박선숙 수석은 어떻게 정계에 입문해 김대중 대통령의 신임을 얻게 됐을까.
    지난 1월29일 김대중 정부의 개각과 청와대 수석 개편은 ‘혹시나’ 기대했던 국민들에게 ‘역시나’ 하는 실망감을 안겨줬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청와대 공보수석에 4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임명된 것이다.

    박선숙(朴仙淑·43)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 재야운동권에 몸담고 있던 박선숙씨는 1995년 5월경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 민주당에 입당했다. 박수석의 첫인상은 여중생처럼 바짝 깎아올린 단발머리 밑으로 까까머리가 보이는, 웃는 모습이 해맑아 ‘소녀’로 착각할 정도로 앳되었다.

    고작해야 20대 중반의 ‘새파란’ 연배로 보았는데 박수석이 “저 78학번이에요”라고 자기 소개를 하는 바람에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박수석만큼 나이와 외모간의 괴리로 처음 만나는 사람을 당황케 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지금은 정치권에 몸담은지 어언 7년이 다 돼 옷맵시도 다소 세련됐지만 그때는 단발머리에 펑퍼짐한 치마를 즐겨입고 도톰하게 얼굴살이 올랐던, 그래서 ‘무상녀(무작정 상경 소녀) 같다’고 놀림을 받을 정도로 촌티를 벗지 못한 순박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정치권 입문 7년 만에 한국 최초의 ‘청와대 여성 대변인’ 자리에 올랐다.

    정치권 입문 이후 그에 관한 관련기사를 찾았지만 이번 공보수석 취임 후 나온 기사를 제외하면 고작 3건에 불과했다. 그만큼 언론의 조명을 한사코 피해온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이처럼 일반인들에게는 낯설지 모르지만 정치권, 특히 여권내에서는 “청와대 최초의 여성대변인은 박선숙이 될 것”이라는 얘기가 알게 모르게 퍼져 있었다. 그가 이처럼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권부(權府)의 핵심요직인 청와대 대변인의 자리에까지 오른 데는 그 나름의 특장과 이유가 있다.



    DJ와 겸상을 하기도


    우선 그는 김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다. DJ 없는 박선숙의 오늘이란 생각할 수 없다. 1995년 정치권 입문 직후부터 DJ는 박수석의 성실함과 판단력, 올곧음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박수석에 대한 DJ의 애정은 각별했다.

    아직 정계복귀 전이었던 1995년 6월 DJ는 6·27 지방선거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들을 지원하기 위해 경기도지역을 집중 순회했다. 당시 박수석은 당 부대변인으로 DJ를 수행했다. 유세 때는 하루해가 짧다. 점심은 대충 먹기 쉽고 시간이 덜드는 설렁탕이나 곰탕으로 30여분 만에 해치워야 한다. 설렁탕을 유난히 좋아했던 DJ는 유세기간 내내 설렁탕을 먹었다.

    그러나 그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겐 이것이 곤욕이었다. 선거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설렁탕 냄새도 못맡겠다”는 얘기가 쏟아졌다. 박부대변인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날 DJ의 귀에 “박부대변인이 설렁탕에 물렸다”는 얘기가 들어갔다. 그 직후 식단이 바뀌었다. 불고기였다. 수행원들은 “박부대변인 덕에 불고기를 먹었다”고 즐거워했다. 김대통령과 박부대변인이 겸상하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1997년 대선 때 박부대변인은 DJ의 TV토론 준비와 선거기획을 맡았다. TV토론을 준비할 때마다 DJ는 여러 참모들로부터 아픈 충고를 받았다. “전라도 사투리를 줄여라”부터 손짓, 표정, 답변내용에 이르기까지 장시간의 토론이 이뤄졌다. DJ는 다른 사람의 충고에 대해서는 때로 짜증도 내고 토를 달았지만 박부대변인의 따끔한 충고는 거의 대부분을 수용했다. 그래서 다른 참모들은 꼭 해야 할 얘기는 박부대변인에게 미루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DJ에 대한 박수석의 충성심도 결벽증에 가깝다. 청와대에 5년간 근무하면서 그는 한번도 ‘한눈’을 판 적이 없다. 자신의 앞날을 생각하는 정치인이라면 정권 말년에 민주당 대선 예비주자들과 인간적인 교분 정도라도 가질 법한데 그는 차세대주자들과는 거의 ‘줄’이 없다. 재야시절부터 ‘형’이라 부르며 동지적 관계를 맺어온 민주당 김근태(金槿泰) 상임고문과도 마찬가지다. 2000년 총선때는 전국구 출마 제의도 거절했다. 마지막까지 DJ의 곁을 지키겠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신념이다.

    박수석의 성실함은 DJ가 가장 좋아하는 덕목 중의 하나다. DJ 집권 이후 박수석은 청와대 부대변인으로 수십여개 국가 순방에 수행했다. 그때마다 그는 기자실을 거의 24시간 지키며 뒷바라지를 다했다. 심지어 여직원들은 시내관광을 보내고 본인이 직접 팩스 수발과 복사 등 잡일을 도맡아 했다. 속 모르는 사람들이 “외국구경도 자주 가고 좋겠다”고 말하면 박수석은 “호텔구경은 많이 했다”고 답변한다.

    그는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 4년 동안 제대로 된 휴가 한 번 보내지 못했다. 중학교 2학년인 외아들 찬우(15)는 어머니가 공보수석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DJ 말대로 강한 심지를 가진 여자다. 사리가 분명하고 논리 정연하다. 사리에 어긋나는 행동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서 가감 없이 명쾌하게 찌른다. 그래서 그와 논쟁을 벌이다 낭패를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는 1978년 수도여사대(지금의 세종대) 1학년에 입학해 시작한 학생운동을 1995년 정치권 입문 직전까지 계속했다. 대개 여성들의 경우 대학 졸업이나 결혼을 정점으로 운동을 접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뒤죽박죽 혼돈의 시절을 묵묵히 운동에 헌신했다는 평을 듣는다. 졸업 후 그는 김근태 현 민주당 고문과 운동권 선후배 동료들이 모여 만든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에 가입해 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운동의 극단화를 경계했고, 인간의 숨결이 느껴지는 따뜻한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현실주의자였다.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DJ에 대한 ‘비지(비판적 지지) 그룹’의 대부였던 김근태 상임고문과 같은 길을 걸었던 것도 그의 이 같은 성향 때문이었다.

    논리와 삶에 있어서는 치열하지만 그는 그 이상으로 감성적이다. 한마디로 눈물이 많다. 눈물에 관한 에피소드도 적지 않다. 1997년 대선 때 국민회의 당사에 광주민주화운동 유가족들이 몰려온 적이 있다. 비자금사건으로 구속된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두 전직대통령에 대해 김대중 후보가 사면복권을 촉구한 것이 발단이었다. 유가족들은 국민회의 당사를 점거하고 울부짖었다. “내 아들을 살려내라” “김대중이가 이럴 수 있느냐”고 격렬히 항의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박부대변인이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가 찾은 곳은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에서 박부대변인은 펑펑 눈물을 흘렸다. 그는 화장실에서 조우한 한 여기자가 “왜 우느냐”고 의아해하자 “아줌마들 얘기가 다 맞잖아”라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논리와 언변에 강하지만 남 앞에 서지 못하는 ‘무대공포증’도 있다. 누가 놀리면 얼굴이 벌개지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 때문에 국민회의 부대변인으로서 그의 첫발은 고역(苦役)에 가까웠다.

    그는 완벽주의자에 가깝다. 작은 일 하나에도 성심(誠心)을 다하는 스타일이다. 명절이나 연말 때 그는 친지들에게 종종 넥타이를 선물하곤 했는데 그가 선물하는 넥타이 포장에는 모두 선물할 사람의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자신이 직접 백화점을 찾아가 선물할 사람을 연상하며 그에 맞는 색깔을 고르는 것이다. 대선 때는 귤과 군고구마, 군밤 등을 사들고 신문사 편집국이나 선거사무실 등을 찾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이지만 그는 이것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박선숙표 군고구마’도 그렇게 유래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참모로서는 몰라도 정치인으로서 그의 앞길이 순탄할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제 42세, 갈길이 창창한 나이다. 그러나 그는 ‘독립’을 준비하지 못했다. 남들은 청와대 근무를 ‘신분상승’을 위한 디딤돌로 생각하는 분위기지만 그는 청와대 근무를 자신의 ‘종착지’처럼 여기며 살았다.

    또 DJ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대선 이후에는 ‘성공한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혼신을 다하다보니 ‘DJ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깊게 각인됐다. 정권의 초기라면 몰라도 끝물에서 이같은 꼬리표는 앞길에 대한 제약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는 이것을 달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향후 정치인생을 장담하기 어렵다.

    그의 능력으로 볼 때 어느 쪽으로든 효용가치가 여전하다고 정치인들은 판단하겠지만 그의 결벽증이 쉽게 다른 정치적 선택을 허용할지도 미지수다. ‘공보전문가’와 ‘참모’로서의 이미지도 장기적으로 ‘정치인 박선숙’의 독립적 위상을 찾아가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DJ와의 인간적 관계가 공보수석으로서 그의 역할에 긍정적인 영향도 미치겠지만 거꾸로 부담이 될 소지도 없지 않다. 대통령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연민 때문에 그가 1997년 대선 때처럼 거리낌없이 직언을 할 수 있을지도 관심거리다. 흔히들 청와대 공보수석을 대통령의 ‘입’이라고 알고 있지만 입보다 더 중요한 역할은 세간의 여론을 듣고 있는 그대로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귀’일지도 모른다.

    박수석은 이제 여성으로서 최초의 청와대 대변인이라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에 서있다. 대통령의 입과 귀로서뿐만 아니라 한 조직의 리더로서 ‘선배 비서관’들을 모시고 통솔력과 리더십을 발휘해야만 한다. 말 많고 탈 많은 권부의 중심에서 박수석이 어떤 궤적을 그리며 김대중 정권의 마무리를 깔끔히 해낼 것인지 많은 사람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DJ 퇴임 이후 독립된 정치인으로서 그가 ‘홀로서기’에 나설 것인지 여부는 또다른 관전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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