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호

활력과 인정이 넘쳐나는 이국적인 항구도시

  • 이정훈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hoon@donga.com

    입력2004-11-09 13:4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1995년 갑작스런 지진으로 고베시는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지진 직후 고베시에서는 상점 약탈이 일어나기는커녕 반대로 일본어에 서툰 외국인을 도우려는 NGO의 활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시원한 교통, 깨끗한 환경, 초록의 공원 등을 두루 갖춘데다 사람들 사이에 인정까지 넘치는 고베야말로 진정으로 살기 좋은 도시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국제화를 더욱 촉진해가는 고베시를 탐험했다.
    활력과 인정이 넘쳐나는 이국적인 항구도시

    하늘에서 본 고베항구. 아래쪽의 인공섬이 롯코섬이고, 위에 있는 것이 포트 아일랜드다. (사진제공·고베 시청)

    하늘에서 본 고베항구. 아래쪽의 인공섬이 롯코섬이고, 위에 있는 것이 포트 아일랜드다. (사진제공·고베 시청) ‘신동아’의 장기 연재물 ‘세계의 살기 좋은 도시를 가다’의 취재지로 일본 고베(神戶)시를 선정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은 이렇게 묻기도 했다. “일본은 한국 이상으로 복작거리는 나라인데, 풍광 좋고 넉넉한 곳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고베는 1995년 1월17일 간사이(關西) 대지진으로 초토화한 곳이 아닌가?” 이에 대해 기자는 이렇게 답변했다.

    “인구 적고, 경치 좋고, 문화와 사회간접자본까지 갖춰진 구미(歐美)의 소도시를 인구 과밀 국가인 한국에 재현할 수 있는가? 공자도 의식(衣食)이 족해야 예절을 안다고 했다. 살기 좋은 도시라면 일차적으로 경제력이 있어야 하고 교통과 문화·교육·공원 시설 등이 두루 갖춰진 공해가 적은 도시라야 한다. 한국은 세계 3위의 인구 과밀 국가인데 그마나 국토의 70%가 산지다. 나머지 30%의 땅에 46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복작거리며 살고 있다. 그러니 문화와 사회간접자본만 갖춰서는 안되고, 사람들 사이에 정(情)과 신뢰가 있어야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 수 있다. 우리와 환경이 비슷한 일본의 고베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겠다.”

    염려의 눈길을 뒤로 한 채 기자는 오사카(大阪)의 간사이공항으로 가는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금수강산은 한반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도 한국 못지않은 경승지가 많다. 일본의 본토인 혼슈(本州)와 네번째로 큰 섬인 시코쿠(四國) 사이에는 ‘세토나이가이(瀨戶內海)’라고 하는 아름다운 바다가 있다.

    이 바다에는 혼슈와 시코쿠를 잇는 ‘아카시(明石)해협대교’가 걸려있다. 이 다리는 길이 4㎞의 장대한 현수교. 아카시해협대교의 혼슈 쪽 출발점이 바로 고베시다. 우리의 한려해상국립공원처럼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 바다에서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보는 것이 으뜸 가는 관광상품이다. 그 중에서도 별미가 아카시해협대교의 조명등과 고베항의 불빛이다. 고베시가 연출하는 야경은 세계 3대 야경으로 꼽힌다고 한다.

    활력과 인정이 넘쳐나는 이국적인 항구도시

    고베시와 시코쿠를 잇는 아카시해협대교의 야경

    고베시와 시코쿠를 잇는 아카시해협대교의 야경 세토나이가이에는 혼슈 쪽으로 쑥 들어간 오사카만이 있는데, 1987년부터 1994년 사이 일본인들은 이 만(灣) 한쪽에 엄청난 양의 흙을 쏟아 부어 간사이공항을 만들었다. 한국은 영종도와 용유도를 이용해 인천공항을 만들었으나, 일본인들은 바다 한가운데에 인공섬을 만들어 간사이공항을 건설한 것이다. 간사이공항에서 오사카를 거쳐 왼쪽으로 한 시간 정도 달리면 고베시가 나타난다.



    한국에 16개의 특별시·광역시·도가 있듯이, 일본에는 49개의 도(都)·도(道)·부(府)·현(縣)이 있다. 오사카와 고베는 마산과 진해처럼 바다와 육지로 붙어 있다시피 한 도시지만, 소속 현(縣)은 전혀 다르다.

    오사카시는 오사카부(府)의 부청 소재지고, 고베시는 효고(兵庫)현의 현청 소재지다. 도쿄(東京)를 연고지로 한 요미우리(讀賣) 자이언츠와 더불어 일본을 대표하는 프로야구팀에 ‘한신(阪神)타이거즈’가 있다. 최근 한국 프로야구 리그에서 명문 기아타이거즈(구 해태타이거즈)가 맥을 추지 못했듯이, 한신타이거즈도 연속 4년간 리그 꼴찌를 했다. 그로 인해 유명한 노무라 가쓰야(野村克也) 감독이 물러나는 등 한바탕 인책 소동이 있었다(표면적으로 노무라 감독은 부인이 탈세한 것이 드러나 사임했다). 한신타이거즈의 ‘한신’은 오사카(大阪)의 ‘판(阪)’자와 고베(神戶)의 ‘신(神)’자를 합쳐 일본식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오사카와 고베는 소속된 자치단체는 달라도 프로야구팀을 공유할 정도로 매우 가깝다.

    한신타이거즈의 홈구장이 유명한 ‘고시엔(甲子園)’ 구장이다. 1924년 갑자년에 건설됐다고 해서 고시엔이라 이름지은 이 야구장에서는, 매년 일본 열도를 뒤흔드는 고교 야구대회가 열린다. 고시엔은 고베와 오사카 사이에 있는 효고현 니시노미야(西宮)시에 있으므로, 한신타이거즈는 고베(효고현)팀으로 볼 수도 있다. 한국 프로야구 한화이글스에서 활약했던 구대성 투수가 뛰고 있는 ‘오릭스 블루웨이브’는 순수하게 고베시를 본거지로 한다. 일본 프로축구팀 ‘빗셀 고베’도 고베시를 홈으로 하는데, 이 팀에서 펄펄 날던 선수가 하석주다. 고베시는 또 2002 한일월드컵 경기를 위해 축구장 ‘고베 윙 스타디움’을 만들어놓았다.

    활력과 인정이 넘쳐나는 이국적인 항구도시

    매년 봄 고베시 차이나타운에서 열리는 남경(南京)가 축제

    고베시의 인구가 약 150만이니, 한국으로 치면 울산과 같은 광역시 급에 해당한다. 1995년 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 고베항은 세계에서 서너 번째, 일본에서는 한두 번째로 많은 물동량을 처리했다. 내로라 하는 세계의 해운사 치고 대형 컨테이너선을 고베항에 입항시키지 않은 회사가 없었으니 고베시는 돈이 넘쳐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고베시에서 발생하는 연간 지역총소득(GRP)은 필리핀이나 말레이시아의 국민총소득(GNP)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인구 150만밖에 되지 않는 도시의 소득이 7632만의 인구를 가진 필리핀과 인구 2326만의 말레이시아의 국민총생산에 육박하니, 고베는 얼마나 풍족한 도시였겠는가.

    매년 봄 고베시 차이나타운에서 열리는 남경(南京)가 축제 그러나 고베는 생길 때부터 풍족한 도시는 아니었다. 1853년 미 해군 동인도함대의 사령관 페리 제독이 4척의 군함을 이끌고 우라가(浦賀)항에 들어와 개국을 요구했다. 겁을 먹은 일본은 시모다(下田)와 하코다테(箱館) 등의 항구를 차례로 열어가다 1868년에는 인구 2만5000여 명의 고베항까지 개방하게 되었다. 1984년 메이지(明治)유신이 있기 전까지 일본에서는 ‘다이묘(大名)’라고 하는 지방 영주들이 ‘번(藩)’이라는 각자의 지배지를 다스렸다. 이러한 다이묘를 다시 중앙에서 지배한 것이 ‘바쿠후(幕府)’다.

    메이지유신은 바쿠후를 없애고 천왕을 중심으로 뭉치자는 것이었다(大政奉還). 이때 일본의 지도자들은 번을 없애고 현을 설치했는데(廢藩置縣), 이러한 현들이 발전해 지금의 49개 도·도·부·현이 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도·도·부·현에는 다이묘가 살던 성(城)이 있고, 다이묘의 성이 있는 곳은 지금도 그 현의 중심도시가 되고 있다. 그러나 단 두 현이 예외인데, 그 중의 하나가 고베시다. 고베는 역사적으로는 결코 효고현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개항 이후 빠르게 발전해 현청을 유치함으로써, 고베는 다이묘의 성이 없는 유이(唯二)한 현청 소재지가 되었다. 페리 제독에 의한 강제 개항이 없었으면 고베는 결코 번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활력과 인정이 넘쳐나는 이국적인 항구도시

    고베시내에 있는 이국풍의 부호 저택들

    고베를 개항하자 유럽인들이 몰려와 외국인 거류지를 만들었다. 고베 주민들은 서양인들을 전혀 반기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거류지에 사는 외국인들이 면책특권을 받고 (일본 정부에) 세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이 구미열강과 불평등조약을 맺은 데 따른 것이었다. 고베의 외국인 거류지는 일종의 조차지(租借地)가 되었다. 1891년 마침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태자가 군함 7척을 이끌고 고베항에 들어와 교토(京都)를 거쳐 오츠(大津)시에 체류하게 되었다. 니콜라이 황태자를 경호하던 일본 경찰관이 민족의식에 불타 황태자의 얼굴을 칼로 그어버렸다(오츠 사건). 그로 인해 러시아와 일본간에는 긴장이 형성되고, 고베항에 들어온 러시아 군함 7척은 중무장을 하고 대기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풀기 위해 메이지 천황이 교토로 두 번이나 달려와 직접 니콜라이 황태자를 위문하며 간신히 러시아의 분노를 달랬다. 오츠 사건은 불평등조약에 의한 일본의 개항에 대한 당시 일본인의 반감을 보여주는 사례다.

    활력과 인정이 넘쳐나는 이국적인 항구도시

    고베 시내를 흐르는 토가천을 이용한 야외 수영장

    고베시내에 있는 이국풍의 부호 저택들 19세기 후반 외국인들이 살았던 거류지가 지금은 고베의 자랑거리가 된 ‘이진칸(異人館) 거리’다. 외국인 거류지에 있던 서양식 건물을 도시 북쪽으로 옮겨 재배치한 것인데, 서양인들이 살았던 고급주택들은 이국문화를 소개하는 박물관이나 고급 레스토랑·양품점 등으로 탈바꿈했다. 어느 나라나 20∼30대의 젊은 여성들은 유럽풍물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주말만 되면 고베는 물론이고 오사카와 교토 등 인근 대도시의 처녀들이 이곳으로 몰려든다. 덩달아 총각까지 모여들어, 이곳은 손꼽히는 ‘맞선 장소’이자 데이트 코스가 되었다.

    130여 년의 역사밖에 안되지만 고베는 이진칸 거리라는 대단한 고급문화소비지역을 갖게 되었다. 운명처럼 다가오는 상황을 거부하기보다는 현명한 방향으로 수용함으로써 발전의 기회로 삼은 것이 고베 발전의 견인차가 되었던 것이다.

    20세기 들어 조선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 국가에서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했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104만명 정도가 브라질과 미국 등으로 떠났는데, 이들이 번창을 거듭해 지금 일본은 250만명 정도의 재외동포를 갖게 되었다.

    1908년부터 고베항은 신대륙으로 가는 일본인들의 출발항이 되었다. 특히 남미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 1929년에는 브라질로 가는 이주민들이 일시 머무는 수용소까지 만들어졌다. 이때 구마모토(熊本)현 출신의 한 부부가 고베항을 거쳐 남미(페루)로 가 2세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2001년 민중봉기를 당해 일본으로 도주해온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페루 대통령이다.

    해외로 이주한 일본인의 40%가 출국지로 이용한 곳이 고베다. 때문에 고베는 단시간에 대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2차대전 직전인 1940년 고베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인구 100만의 대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2차대전 내내 연합군의 공습을 받아 패전 후 고베시의 인구는 40만 명 선으로 급감했다.

    활력과 인정이 넘쳐나는 이국적인 항구도시

    1995년 1월17일 새벽의 지진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고베시내 모습

    고베 시내를 흐르는 토가천을 이용한 야외 수영장 발전하는 도시의 첫째 조건은 사람이 모여야 한다. 사람이 떠나는 도시 치고 살기 좋은 도시는 없는 법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에서는 특수가 일어나 고베항은 다시 붐비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50년대 중반 다시 인구 100만을 돌파하며 초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이때 고베항의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른 곳이 오사카항이다. 고베와 오사카는 간사이 지방에 속하는데, 두 항구가 경쟁적으로 번창함으로써 간사이 일대는 대단위 공단으로 변모하였다. 그리하여 고베제강·신일본제철·가와사키(川崎)중공업·미쓰비시(三菱)조선소·미쓰이(三井)중공업 등 일본의 대표적인 중공업 회사의 공장들이 고베와 오사카를 잇는 임해지역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도쿄와 요코하마도 세계적인 항구인데 두 도시는 간토(關東)지방을 대표한다. 고베항과 오사카항이 경쟁적으로 간사이의 경제를 이끌었다면, 도쿄항과 요코하마항은 간토지역 경제를 살리는 탯줄이다. 이 경쟁에서 간사이는 간토를 앞질렀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경인공업지역의 경제력이 부산-울산으로 이어진 영남공업지역을 앞서고 있으나, 일본에서는 지방이 중앙을 이긴 것이다.

    페리 제독에 의한 강제 개항 이후 일본인들은, 지역을 국제화하는 것이 발전의 첫걸음임을 분명히 깨달았다. 일본인만큼 인공섬을 잘 만드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물동량은 넘쳐나는데 새로운 항구를 지을 곳이 없자, 고베시는 오사카만에 새로운 항구를 짓기 위한 인공섬 건설에 착수했다. 먼저 ‘포트 아일랜드(port island)’라는 인공섬을 만들고 이어 ‘롯코(六甲) 아일랜드’라는 인공섬을 만들었다.

    오사카만은 수심이 15m가 넘어 매우 깊다. 이러한 바다에 인공섬을 만들었으니, 고베시는 섬 전체를 부두로 활용할 수 있었다. 고베시는 서독정부로부터 차관을 받아 시 북쪽에 있는 야산을 깎아 긁어낸 흙으로 인공섬을 만들고, 야산 자리는 고급 주택지로 분양했다.

    1995년 1월17일 새벽의 지진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고베시내 모습 부산은 서울 이상으로 교통이 혼잡하다. 부산항으로 들고나는 컨테이너 트럭과 부산시민들이 이용하는 차편이 시내 한복판에서부터 뒤엉켜 무시로 교통체증이 일어난다. 무질서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고베는 전혀 그렇지 않다. 두 인공섬을 비롯한 항구에서부터 시 외곽으로 빠지는 고가(高架) 고속도로가 곳곳에 건설돼 있어 컨테이너를 실은 트럭들이 고베 시내로 들어올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은 가히 철도의 천국이라 할 만하다. 변변치 않은 지방도시에도 전철과 지하철이 건설돼 있다. 철도가 많은 사람들의 이동을 담당해주기 때문에, 자동차 대수는 훨씬 많아도 한국에서와 같은 종일 체증현상이 덜 일어나는 것이다. 일본이 프랑스보다 먼저 ‘신간센(新幹線)’이라는 고속열차를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었다.

    도시 고속도로와 더불어 철도가 고베항의 물동량을 신속히 실어 나른다. 이러니 고베 시내는 붐비지 않고 안전하며 공기 또한 맑은 것이다. 오사카는 평지에 세워진 도시라,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오사카에는 1592년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지었다는 오사카성을 비롯해 많은 역사 유적이 있다. 서울처럼 역사가 오랜 도시다보니, 오사카는 공업단지와 상업지역·주거지역이 혼재하며 발전하게 되었다.

    반면 고베는 부산처럼 높은 산을 등지고 좁은 평지에 만들어졌다. 고베시는, 시 북쪽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롯코산 지역을 고급 주택가와 공원지대로 개발했다. 이러한 고급주택과 공원지역이 이진칸 거리 등과 어우러져 고베를 고급 전원주택 지역으로 만들었다.

    코 앞에 있는 바다에서는 하루에도 수억t씩의 물동량을 싣고 내린다. 하지만, 이것은 도시고속도로와 철도를 통해 신속히 시 외곽으로 빠져나가므로 고베시민이 사는 데는 전혀 불편을 주지 않는다. 고베 시내에서는 고베항구에서 발생하는 물류에 따르는 막대한 금융거래를 위해 금융기관 등이 밀집해 있을 뿐이다.

    ‘뱅커(banker)’로 불리는 금융기관 종사자만큼 고급문화를 누리는 직업인도 드물 것이다. 이들은 거래선과 투자대상을 찾아 세계 각지를 여행하기 때문에 고급 호텔에 투숙할 기회가 많다. 뱅커들이 몰려듦으로써 고베는 고급 문화지역이 되었다. 항구를 제외한 시 중심부에는 금융기관이 밀집한 오피스타운과 이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찾는 고급 문화지역이 형성되고, 밖으로는 고급 주택가가 형성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경찰은 고베시를 외국인들이 밤늦게까지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는 안전한 곳으로 만드는 데 노력하게 된다. 때문에 오사카에 직장을 가진 부호들까지도 고베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다.

    1995년 1월17일 새벽에 일어난 지진으로 홍콩·싱가포르와 더불어 세계 1∼3위를 다투며 잘 나가던 고베항은 한순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지진이 나면 땅이 대개 좌우로 흔들리는데, 특이하게도 고베에서 일어난 지진은 상하로 움직였다. 상하로 땅이 움직이는 지진은 같은 진도(震度)의 옆으로 흔들리는 지진보다 훨씬 더 많은 피해를 가져온다.

    지난해 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로 희생된 (비공식)사망자는 3251명이다. 그런데 1995년 일어난 지진으로 고베시에서는 그 두배쯤에 해당하는 6432명이 죽었다. 당시 육지 쪽과 인공섬에 건설된 고베항에는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거대한 갠트리(gantry) 크레인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갠트리 크레인 뒷줄의 야적장에는 컨테이너들이 4∼5단으로 적재돼 있었다. 이러한 거대한 물류 시스템들도 지진으로 인해 한순간에 쓰러졌다. 상당기간 고베항은 배를 접안조차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고베는 과거 수백년 간 지진이 없던 곳. 일본의 부호들은 이러한 점까지 고려해 고베로 옮겨왔는데 사상 최악의 지진이 몰아쳤으니 이곳도 살 곳이 못된다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이 떠나게 되었다. 지진 직후 고베시의 인구는 순식간에 10여만명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고베시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형 참사가 일어나면 졸지에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파괴된 상점이나 슈퍼마켓을 약탈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세계 최고 선진국에서도 마찬가지다. 1994년 1월17일 지진을 당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도 히스패닉계와 흑인을 주축으로 한 도시 빈민들의 약탈이 대규모로 발생했다.

    그러나 고베에서는 사상 최악의 지진이 일어났음에도 상점이나 슈퍼마켓이 털렸다는 보고가 거의 올라오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언론이 주목하지 못하고 지나가 묻혀버렸는데, 고베시의 지도자들은 ‘현명하게도’ 이를 지켜보았다. 이들은 여기서 희망을 가졌다.

    이들은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사실을 발견하고 희망을 굳히게 되었다. 일본은 외국인의 이민을 받는 나라가 아니다. 한국만큼은 아닐지라도 폐쇄성이 강한 사회인지라, 외국인이 일본에 건너와 직업을 갖는 게 쉽지가 않다. 그러나 외국과 거래하기 위해서는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있어야 한다.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폐쇄사회적 특성에 막힌 일본은 새로운 대안을 찾아냈다. 20세기 초 고베를 중심으로 한 일본 항구를 통해 신대륙으로 나간 해외동포를 받아들인 것이다.

    미국이나 브라질 등에서 시민권을 얻어 그 나라 국민이 된 일본인 가운데 일본에서 취업하고자 하는 동포가 있으면, 일본 법무성은 그들에 한해서는 취업 비자를 쉽게 발급해 주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고베에는 외모만 일본인인 외국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고 있었다.

    교포 2,3세쯤에 해당하는 이들은 날 때부터 이국 물을 먹었기 때문에 일본어에 서툴렀다. 이런 상태에서 지진이 일어났으니 이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구호소가 차려져 음식과 구호품을 배급해도 언어가 짧은 이들은 번번이 기회를 놓쳤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을 인정 있는 사회라고 믿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정이 많은 곳이 일본사회다.

    고베 지진 직후 많은 NGO(비정부기구)들이 자발적으로 구호활동에 참여했는데, 고베에 있는 일본계 외국인들의 고통을 발견한 것이 바로 NGO들이었다. NGO들은 곧 외국어에 능숙한 회원을 뽑아 외국어로 구호 방송을 하는 등 적극적인 협조에 나섰다.

    NGO들이 고베시청과 효고현보다 더욱 열심히 구호활동을 한 사실이 일본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일본 중앙정부가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NGO는 사단법인도 재단법인도 아닌 임의단체이므로, 당시의 법률로는 정부가 이들을 지원해줄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일본 정계에서는 NGO에 대한 정부 지원을 법제화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다.

    NGO에는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하는 기구’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반국가기구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하는 성격을 가진 기구인데, 정부가 이들을 지원한다는 것은 명분이 서지 않는 일이다. 여기서 일본인은 절묘한 타협책을 만들어냈다. 비정부기구(NGO)가 아니라 ‘비영리기구(NPO: Non Profit Organization)’라는 용어를 만들어, 정부는 NPO에 대해 예산을 지원한다는 법률을 만든 것이다(특정비영리활동추진법).

    간사이 대지진이라는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 NGO는 정부기관보다 먼저 그리고 더욱 열심히 이재민을 도왔고, 정부는 NGO들을 위해 NPO라는 이름과 특정비영리활동추진법을 만든 윈-윈 게임을 연출했다. 간사이 지진은 고베시의 인정과 외국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는 좋은 기회였다.

    이 과정에서 고베시는 고베시에 거주하는 일본계 외국인들이 고베시의 번영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이들은 고베에 들어온 외국인들이 재산을 늘리고 풍요롭게 살 수 있어야 고베가 발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때문에 고베시는 지진복구사업을 벌이는 동시에 개방화에 더욱 노력했다.

    이러한 개방화가 이진칸 거리를 비롯해 고베만이 갖고 있는 이국 풍물과 결합함으로써 고베는 주민과 외국인이 되돌아오는 안정된 도시로 다시금 자리잡게 되었다.

    고베시가 인공섬을 만들어 항구를 확충해갈 때 라이벌 오사카시는 공항을 짓기 위한 인공섬 건설에 들어가 간사이공항을 완성했다. 오사카는 도쿄에 이어 일본 제2위의 도시인지라, 간사이지방에서는 최고의 도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항구만 놓고 본다면 고베는 오사카에 결코 뒤지지 않는 도시다.

    150만 인구와 13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고베가 오사카에 흡수되지 않고 오사카와 경쟁하며 발전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고베항이 가진 국제성에 있다.

    1994년 간사이공항이 개항하자 오사카와 고베 간의 역학관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간사이공항이 간사이 지역을 대표하는 국제공항이 되면서 오사카는 이 지역의 중심도시이고, 고베는 오사카의 위성도시인 듯한 느낌을 주게 된 것이다. 여기에 지진까지 겹치자 고베의 존재는 더더욱 희미해져 갔다.

    고베 지도층은 바다만 알고 하늘을 몰랐던 것을 한탄했다. 그리고는 인공섬 ‘포트 아일랜드’를 확충하는 공사와 함께 이 인공섬 앞에 고베공항을 짓기 위한 또 하나의 인공섬 건설에 착수했다. 고베공항은 2005년쯤 개항할 예정인데, 이때쯤이면 간사이공항 측도 인공섬을 늘려 또 하나의 활주로를 완공한다.

    선수를 차지한 오사카가 계속해서 앞서가 버리면, 고베공항은 간사이공항을 보조하는 역할 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보조공항은 곧 적자 공항이 될 것이고, 적자가 쌓이면 고베시의 재정은 고갈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고베시는 고베공항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여객 공항으로는 간사이공항과 경쟁할 수가 없어 간사이공항이 갖지 못한 화물기 전용 공항으로 짓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리 보고 저리 재봐도 고베시를 국제화하는 것 외에는 고베를 살릴 방법이 없기 때문에 이들은 더 이상의 좌고우면을 버린 것이다.



    살기 좋은 도시는 없다, 그러나…


    고베 시내에서는 서유럽의 중소도시에서처럼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시내버스는 디젤이 아닌 천연가스를 쓰기 때문에 매연은 물론이고 소음도 적었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전철은 조용했다. 시끄러운 것은 컨테이너를 끌고가는 대형 트럭뿐인데, 이들은 고가 고속도로를 통해 재빨리 시 외곽으로 빠져나가므로, 고베 시내는 과연 인구 150만의 도시인가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범죄가 거의 없어 외국인도 밤늦게까지 활보할 수 있는 도시. 여기에 일본 경기만 살아난다면 고베는 단숨에 윤기 나는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50만 인구를 품고 있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베는 나름대로의 활력을 창출할 수 있는 대도시다. 그런데도 산뜻한 분위기와 청결한 환경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인정까지 갖춰가며 살 만한 도시로 만들어가고 있다.

    경제력과 인정을 두루 갖춘 살 만한 도시가 살기 좋은 도시다. 인구 100만이 넘는 한국의 대도시들은 성장 속도가 너무 빨라 불균형한 모습과 함께 인정이 메마른 도시가 돼버렸다. 고베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해주는 도시임에 틀림없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