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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 나라’ 한국! 골드러시 시작됐다

대한광업진흥공사의 황금맥 찾기

  • 안영배 < 동아일보신동아기자 > ojong@donga.com

‘금의 나라’ 한국! 골드러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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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금은 개도국이나 중위권 국가보다는 선진국에서 더 많이 생산해낸다. 전통적으로 다이아몬드와 금광으로 유명한 남아공이 2000년 기준으로 428t으로 1위를 기록했고, 그 뒤를 이어 미국(328.4t), 호주(290.8t), 중국(172.8t), 캐나다(158.4t), 러시아(125.9t) 순이다.

금생산량에서 압도적인 1위를 달리는 남아공의 경우 너무 많은 금광 때문에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영국은 전쟁을 일으켜 남아공을 영국령으로 삼은 이후 30년간 채광한 금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금 졸부국’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남아공의 금광 개발 역사는 남의 일 같지 않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전쟁특수가 끝난 이후 두 차례나 경제공황을 겪은 일본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통화(通貨) 가치를 지닌 금 수집에 혈안이 됐고, 당연히 식민지 조선은 무차별적으로 금 수탈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흔히 광물이 많이 묻혀 있는 광맥을 표현할 때 쓰는 ‘노다지’라는 말에는 그런 아픈 과거가 묻어 있다. 일제 때 우리나라 금광 개발의 이권을 거머쥔 서양의 광산주들은 값싼 임금으로 노역에 동원된 인부들이 행여 채굴된 금을 훔쳐내기라도 할까봐 “노 터치”(No touch)를 연발했다. 금광에서 하도 노 터치, 노 터치 하며 영어가 쓰이다 보니, 어느새 일확천금이나 횡재를 암시하는 우리말 ‘노다지’가 탄생했던 것이다.

일제 시절만 해도 우리나라는 금 노다지판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1930년 6186kg(순도 99.9%, 이하 동일)의 순금 생산량을 기록한 이후 해마다 그 생산이 늘어만 갔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7년에는 2만2848kg이 생산됐고, 다시 일본이 1941년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유발된 대동아전쟁 즈음에는 한해 평균 2만6000여kg이 생산됐다. 이 기간 조선총독부에서는 광적으로 금을 매집했고, 금값 역시 지속적으로 올라갔다. 전쟁을 수행하는 일본으로서는 금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이후 우리나라 금광업자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일지금맥(一指金脈)’이라는 말도 노다지와 관련된 용어다. 금맥의 폭이 새끼손가락 하나 굵기 정도는 돼야 금광을 파느라 쓴 화약값 이상을 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경제성 있는 금광을 가리켜 바로 노다지 금광이라고 한다. 1930년대 한국의 ‘골드 러시’ 현상을 연구한 바 있는 전봉관씨(한신대 강사)는 노다지 금광으로 떼돈을 번 전설적인 금광왕들도 여럿 있었다고 말한다.

“1930년대에서 194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이른바 ‘황금광시대’였고, 당연히 일확천금을 거둔 전설적인 금광왕들도 여럿 탄생했다. 황금광시대 사람들은 조선 제일의 금광왕으로 친일활동을 해온 최창학을 꼽는 데 이견이 없었고, 그 뒤를 이어 방응모, 박용운, 이종만, 김태원 등을 제2인자로 거론하곤 했다. 특히 방응모씨가 발견한 교동금광은 말 그대로 노다지 금광이었다. 방씨는 금광으로 떼돈을 번 이후 조선일보사를 인수했는데, 이광수의 소설 ‘흙’에서도 그가 금광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사실이 언급돼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아무튼 일제 때 하도 금을 많이 캐갔기 때문인지 1945년 8·15광복 이후 한국의 금생산량은 해가 다르게 줄어들었다. 급기야 1997년 국내 최대의 금광으로 고군분투하던 무극금광(충북 음성군)마저 채산성 문제에 부딪쳐 생산을 중단함으로써, 한국은 순금 생산 제로국으로 추락하고 말았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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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배 < 동아일보신동아기자 > oj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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