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아’ 2002년 3월호에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의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에 관한 중간보고서’에 대해 당시 수사관어었던 차철권씨가 반박하는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필자는 이 기사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려고 한다. 우선 조사중인 사건의 피조사자 주장을 전면적으로 소개한 것이 이례적이다. 이로 말미암아 자칫 사건의 진상이 그릇되게 인식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관련된 수많은 피조사자들의 향후 진술이 차씨의 주장에 짜맞추어질 위험까지 갖고 있어 걱정스럽다.
필자는 최종길 교수 의문사에 대한 대표진정인 중 한 사람으로서 차씨의 증언이 조사중인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절감하고, 차씨 증언 중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한 차질없는 노력이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일념에서 붓을 들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위원회 관계자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들의 도움으로 필자는 방대한 관련자료를 열람할 수 있었다.
차씨는 ‘신동아’ 인터뷰에서 ‘나는 천지신명께 맹세코 최교수를 뺨 한 대 때린 일이 없고, 더구나 타살한 사실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추진위원회’는 물론 국민이 바라는 것은 객관적인 근거에 입각한 진실이다. 필자는 차씨의 글을 읽은 즉시 위원회에 찾아가 자료를 하나하나 찾아 읽으면서 차씨의 증언을 낱낱이 해부했다. 그 결과 차씨는 모두 47회에 걸쳐 거짓증언을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차씨의 거짓말을 다음과 같은 6개 항목으로 나눠 살펴보자. 1. 혐의사실과 조사동기 2. 조사과정과 조사방식 3. 7층 조사실로의 이동시점과 그 이유 4. 7층에서 최교수가 조사받은 장소 5. 간첩자백 6. 자살과 타살 등이다.
우선 차씨는 최교수를 조사하게 된 동기와 혐의사실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고 있으나 그 가운데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대목은 하나도 없다. 차씨의 주장을 하나씩 살펴보자.
(1) “A씨로부터 대공 용의점 최초 제보받았다.”
과연 중정은 A씨로부터 최교수에 대해 어떤 대공 용의점을 제보받았는가? A씨의 ‘제보’라고 차철권씨가 주장하는 문서는 A5용지 약 반 장 분량에 ‘최 교수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고교 동창인 이재원에게서 800마르크(약 47만원)를 빌렸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내용과 ‘최교수가 자본주의 사상에 충실하여 공산혁명을 하기에는 부적합한 자’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내용이 전부다.
이는 제보라기보다 이른바 ‘카더라 통신’에 불과한 것으로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불과한 내용이다. 이 중 어떤 내용을 과연 대공 용의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 문서는 최교수에게 대공용의점이 없음을 시사하는 문서라고 하는 편이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사실 이 문서는 그 내용의 진위는 물론 작성된 시점 자체도 불분명하다. 다시 말해 최교수 사후에 작성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문서다.
더구나 이 문서를 작성한 A씨는 누구인가? 그는 1973년 최교수 사망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중정의 공작원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필자는 위원회에 A씨에 대한 신분 확인 요청을 했으나 위원회는 사생활 침해의 우려가 있다며 자세한 신상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A씨의 공작명이 ‘H’로 시작된다는 점만은 확인해주었다. 필자는 또 위원회에서 A씨를 조사한 결과 그로부터 ‘최교수는 간첩이 아닙니다’라는 진술을 받았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차씨가 주장하듯 위와 같은 내용이 정말 대공혐의점일 수 있다면 세상 어느 누구도 간첩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2) “A씨는 최교수와 인천 ㅈ고 동창생이다.”
이 주장은 거짓말이다. 차씨 스스로 위와 같은 내용이 용의점을 인정할 수 있는 제보라고 주장하기에 민망했던지, A씨와 최교수가 마치 서로 잘 아는 사이였던 것으로 독자를 오도하며 제보의 사실성을 믿도록 부추기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A씨는 최교수와 인천 ㅈ고 동창생이 아닐 뿐 아니라 생면부지의 타인이다. 인천 ㅈ고 졸업생 명부에는 A씨의 이름이 없다.
(3) “최교수가 A씨에게 전화를 걸어 ‘나는 서독으로 유학 온 것을 후회한다. 너도 조심하라’고 말했다.”
이것도 거짓말이다. A씨는 최교수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어떻게 최교수가 ‘너도 조심하라’는 내용의 전화를 A씨에게 했겠는가? A씨 스스로 위원회의 조사를 받으면서 최교수와 개인적으로 접촉한 적이 전혀 없다고 진술했다.
(4) “구라파 간첩단 사건(정확한 명칭은 ‘유럽거점 대규모간첩단사건’)을 수사하던 5국 수사1과의 조사과정에서 최교수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에 1과에 존안자료를 넘겨주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주장은 거짓말이다. 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구라파 간첩단 사건을 수사한 수사관은 물론 이 사건으로 조사 받았던 어느 누구도 최종길 교수에 대해 단 한마디의 질문을 하거나 받은 사람이 없다. 또 하나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 간첩단 사건 자체가 조작이라는 사실이다.
(5) “수사1과에서는 최교수가 부담스러워 조사하지 않고 존안자료를 갖고 있다가 다시 10과로 넘겼다.”
수사1과에서 최교수를 조사하지 않았다는 차씨의 말도 거짓말이다. 위원회에 의하면 수사1과의 김○○ 수사관은 같은 과 서○○ 과장의 지시로 최교수를 내사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김○○ 수사관은 내사 결과 최교수에게 대공혐의가 없다는 공식적인 결론을 얻었다는 사실도 진술했다. 차씨는 이 점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부터 최교수에게 대공 혐의점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차씨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최교수의 자살동기를 비롯해 그간의 증언이 송두리째 거짓말이라는 걸 나타내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6) “최교수에 대한 조사는 순수대공 용의점 때문에 시작되었다.”
이 주장도 거짓말이다. 대공 용의점이 있었다면 분명 수사를 담당한 주체는 차씨가 속한 공작과가 아니라, 사건을 검찰에 송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수사과였어야 한다. 중정이 무엇을 하는 조직인가? 대공 용의점을 가진 자라면 암약하는 간첩망의 일망 타진을 위해 사전내사를 철저히 하고 용의자의 동선과 자금줄 그리고 보고방식은 물론 보고라인을 캐서 옴짝달싹하지 못할 만큼의 증거를 확보한 다음 수사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중정은 이 사건에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를 제시하겠다. 우선 최교수에 대한 수사착수를 차씨에게 지시한 장○○ 단장은 위원회의 조사를 받으면서 ‘내사 결과 최종길에 대한 혐의가 전혀 없었다’고 진술했다. 담당 과장이었던 안○○씨는 ‘공작과로 이 사건이 배당된 이후 어떠한 내사활동도 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더욱 결정적인 사실은 주무수사관이었던 차씨 본인의 진술이다. ‘최교수는 조사를 위해 데려온 것이 아니다. 최교수는 공작여건 개발과 공작심사를 위해 데려온 것이다’ 이렇게 진술해놓고도 이제 와서 엉뚱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이유는 무엇인가? 본인의 서명과 무인까지 찍혀 있는 이 진술조서도 누군가가 조작했다고 주장하려는가?
(7) “저(차철권)는 오로지 최교수의 서독 체류기간 중에 어떤 혐의점이 있는지를 찾는 데 주력했습니다. 최교수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학비는 장학금으로 때운다 하더라도 생활비는 필요한 것 아닙니까. 최교수 건을 먼저 내사했던 수사1과의 동료가 ‘우리도 그 부분을 알아봤는데 최교수의 형은 두 번밖에 돈을 부쳐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딸린 식구가 있어 형은 동생의 생활비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차씨의 이 진술이 거짓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최교수가 다니던 학교 즉, 독일의 쾰른대학교에서 무슨 학비가 드는가? 독일의 대학교는 학비(등록금)가 무료다. 더구나 최교수는 당시 훔볼트재단으로부터 매달 약 60여 만원에 달하는 장학금을 받았다. 그 액수는 당시 독일 학우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많은 액수였다. 더구나 최교수는 폴크스바겐 주식에 투자해 용돈을 벌기도 했고, 매학기 집에서 오는 돈으로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당시 유학생들의 증언을 통해 입증됐다. 최교수의 가족들은 차씨의 진술을 보고 ‘사건 당시에도 최교수에게 매학기 빠짐없이 송금한 사실을 기껏 확인해놓고는 왜 이제 와서 거짓말을 늘어놓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최교수에게 두 번밖에 송금한 적이 없다’는 차씨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수사1과의 동료는 누구인가? 위원회의 조사 결과 그런 진술을 한 수사관은 아무도 없었다.
(8) “그날(10월17일) 밤 우리 직원들은 쪽지를 갖고 최교수 집에 가 식모에게 보여주고, 식모의 협조를 얻어 가택수색을 했습니다. 가택수색을 한 동료들이 최교수 집 다락 한 구석에서 오래된 수첩을 하나 찾아냈다며 건네주었는데 그 수첩을 자세히 살펴보니 일본 주소가 기재돼 있었고, 최교수의 ㅈ고 선배이자 북괴 공작조직의 구라파 거점책인 노봉유(盧鳳裕·당시 프랑스 거주)와 동베를린사건 때 한국에서 독일로 도주한 재독간첩 이재원(李在元)의 이름이 기재돼 있었습니다.”
이것도 거짓말이다. 1973년 10월에 최교수의 집을 ‘가택수색’한 사람은 없었다. 그 근거는 첫째, 필자가 위원회에서 본 진술조서 등에는 수사라인에 있었던 사람들이 ‘수색’이 아니라 최교수의 협조를 얻어 수첩을 받아왔다고 진술하고 있다. 둘째, 최교수의 아들인 최광준 교수(경희대·당시 10세)의 목격담이다. “중정에서 나왔다는 두 명의 수사관은 응접실에 얌전히 앉아 있었고 당시 우리집에서 일하던 아주머니(차씨는 ‘식모’로 표현) 김○○씨가 수첩을 건네주었던 것으로, 나는 그 두 사람의 얼굴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더구나 차씨는 ‘노봉유와 이재원이 간첩이다’라고 주장하는데 더 이상 주장만 하지 말고 근거를 제시했으면 한다. 필자가 위원회에서 본 자료에 그들이 간첩이라는 증거는 없었다.
(9) “최종길 교수가 이재원에게 800마르크를 빌린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차씨의 이 주장은 거짓말이다. 차씨는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그런 말을 하는지 분명히 제시하기 바란다. 차씨는 1973년 중정 감찰실 조사와 1988년 검찰 조사과정에서 그리고 위원회의 조사를 받으면서 위와 같이 진술한 적이 전혀 없었다. 이재원에게서 돈을 빌린 사실이 있다는 내용이 최교수의 자술서에 나오는가? 아니면 그 어디에 나오는가? 차씨는 “내가 들은 것이니까 틀림없어”라고 주장할 뿐이다.
(10) “최교수는 18일 오후 4시30분쯤 동백림 왕래를 자백했다. 이때 동행한 사람은 노봉유였다.”
이 주장은 거짓말이다. 우선 동백림 왕래를 자백했다는 시점이 다르며 동행한 사람도 노봉유가 아니라 황○○이다. 동백림 자백 시점은 18일 새벽 2시30분을 전후한 시점이 맞다. 다른 수사관들도 모두 그렇게 진술하고 있고 차씨 자신도 이제껏 수차례나 일관되게 진술해왔다. 그러다가 위원회의 조사를 받은 뒤 갑자기 자백시점을 18일 오후 4시30분으로 번복했다.
왜 그럴까? 이제는 동료 수사관들조차 등을 돌려 차씨가 극구 주장하는 최교수의 간첩자백, 투신자살 등의 알리바이가 무너지고, 자신이 고문한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자 극도의 고립감과 공포감에 굴복한 탓인가? 차씨가 동백림 왕래의 자백(?)시점을 18일 오후 4시30분으로 옮긴 것은, 그때가 차씨와 보조수사관 김상원씨만이 최교수와 같이 있던 시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차씨와 김씨를 제외한 제3자는 아무도 증언할 수 없는 시간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차씨는 자신의 주장이 자료와 동료들의 증언으로 계속 무너지자 자신과 김상원씨만의 ‘성(城)’으로 퇴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상원씨는 검찰수사 직후인 1988년 미국으로 건너가 현재 시애틀에 거주하고 있으며, 위원회의 조사요청에 일절 응하지 않고 있다.
최교수가 동백림 왕래를 자백했다지만 실상 자백 운운할 만한 내용도 아니다. 동서독이 자유롭게 왕래하던 1958년 유학시절에 전철을 타고 당시 유학생이던 황○○와 함께 국경에 위치한 동베를린 역까지 갔다가 겁이 나서 원래 의도했던 시내구경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되돌아왔다는 내용이 전부다(‘동아일보’ 2001년 10월22일자 참조).
물론 차씨는 이런 내용만으로도 최교수가 간첩임을 확신하는 수사관이다(이는 필자가 비아냥거리기 위해 쓰는 표현이 절대 아니다. 차씨는 위원회의 조사관들에게 “동독에 간 사람들은 모두 간첩입니다. 그건 패키지예요. 동독에 갔다 하면 반드시 평양에 가는 거구.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요. 당연히 최교수도 북한에 간 거요. 당신들이 대공을 뭘 알아”라며 흥분한 상태로 소리치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다고 한다).
관계자들의 엇갈린 진술
이상 필자는 최교수에 대한 조사동기와 애초 차씨가 최교수에 대해 혐의를 가졌다고 주장한 10가지 내용이 거짓임을 근거를 들어가며 밝혔다.
사실 필자가 여기서 제기한 내용의 일부는 이미 ‘신동아’ 2002년 2월호(김형태 의문사진상규명위원의 최종길 사건 중간보고)에 실린 것이다. 그렇다면 차씨는 3월호 인터뷰에서 김형태 위원이 제기한 논거에 대해 반론을 제기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천지신명에 대한 맹세’라며 독단적인 주장을 늘어놓았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거짓말’이란 단어를 너무 많이 사용한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나열하는 주장, 검증이 불가능한 주장, 허망한 맹세 따위는 우리를 실망스럽게 한다. 동백림 국경의 전철역에 들렀다가 겁을 먹고 즉각 돌아온 사람을 간첩임이 틀림없다고 단정하고, 이 단정을 근거로 북한에 갔다온 사실을 자백하라고 고문한 수사관이 애국자가 되고, 아무런 용의점도 없는 사람을 공작의 표적으로 삼은 뒤 법적인 근거도 없이 데려다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수사기관이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무고한 이를 사망케 하고 이것도 모자라 ‘간첩’으로 둔갑시키는 정보기관이 지배하고, 뻔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아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 사회, 이러한 사회에 우리 국민이 살고 있다면 이는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과거의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바로잡지 않는 한 우리는 이러한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장래가 촉망되던 한 젊은 학자가 아무런 혐의도 없이 중앙정보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50여 시간 만에 차가운 주검으로 변했다. 그에게는 뚜렷한 자살의 동기가 없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최교수가 사망한 뒤 그를 간첩으로 발표함으로써 자살의 동기를 조작하려 했다. 그러나 최교수에게 간첩혐의가 없음이 명백히 밝혀진 이상, 최교수가 자살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도 사라져버렸다.
마지막으로 차철권씨에게 전한다. 고문사실을 인정할 용기는 없는가? 여기에 당신이 인정할 수 있도록 자세히 서술하였으니, 이제는 마음의 짐을 벗고 용서를 구하기 바란다. 뉘우치는 것이 용서의 전제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차씨는 매우 친절하고 조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최교수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고 따라서 단 한 차례도 최교수를 때리거나 폭언을 퍼부은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는 ‘최교수가 서울대 법대 교수여서 사회적 지위가 높은 데다가 최교수의 친동생이 중정의 감찰실에 근무하고 있었기에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과연 근거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첫째, 당시 수사라인에 있던 수사관들 중 차씨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진술이다. 최교수에 대한 수사착수를 지시했던 장○○ 단장, 안○○ 과장, 고○○ 계장, 수사관이던 양○○, 김상원, 양△△씨, 조○○ 차장보, 손○○ 감찰실장, 안△△ 5국장, 감찰실 수사관으로 사건 당시 차씨와 보조수사관 김상원씨를 조사했던 김○○, 김△△, 이들 모두가 최교수에 대한 차씨의 고문사실을 인정했다. 특히 최교수 수사에 참여했던 수사관들의 목격진술을 보면 ‘몽둥이로 구타한 사실’ ‘각목을 끼우고 발길질하고 주먹으로 구타한 사실’ 등 시점과 장소 방법이 분명하게 명시된 구체적 고문사실이 적시되어 있다. 물론 변○○ 수사관도 고문에 가담했지만, 주로 고문한 사람은 차씨라고 진술하고 있다.
둘째, 차씨 본인의 자백이다. 차씨 스스로 1973년 감찰실에서 조사받으면서 ‘최교수의 뺨을 때리고 수차례 구타했다’고 자백하고 있다. 물론 이 조서에는 차씨의 친필 사인과 무인 그리고 간인이 있다.
셋째, 차씨와 함께 최교수의 투신자살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김상원씨의 진술이다. 김씨는 1973년 중정에서 작성한 감찰실 진술조서에서 ‘차철권이 최교수를 수차례 때리는 것을 보았다’고 진술했다.
넷째, 부검 감정서에서 나타나는 사진증거다. 국내외 법의학자들은 부검사진에 나타난 최교수 엉덩이 부분의 피멍과 슬와부의 상처 등이 생전에 상당한 구타로 인해 생긴 고문의 흔적이라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렇게 볼 때 ‘천지신명에 맹세코 뺨 한 대 때린 적도 없고 폭언을 퍼부은 적도 없다’는 차씨의 주장은 완전히 거짓임이 입증된다.
차씨는 또한 SBS TV의 ‘뉴스추적’프로그램 방영시 나온 부검사진 중 발바닥을 찍은 사진이 최교수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진이라고 주장한다. 이 것도 정말 황당한 주장이다. SBS가 방영한 사진은 위원회의 사건기록에 편철된 것으로 차씨도 위원회에서 조사받을 때 이 사진을 본 바가 있다고 한다. 이 사진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보관중인 부검원장의 사진필름을 일일이 대조하여 촬영한 사진이다. 그런데도 조작된 사진이란 말인가?
부검사진과 관련된 차씨의 황당한 주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차씨의 말을 그대로 옮겨보자. “철책에 부딪칠 때의 충격이 아니면 (엉덩이 부근에) 그렇게 굵은 피멍이 일자로 생길 수 없습니다. 계단 주변에 철책을 설치해놓았는데, 7층 화장실 바로 밑에 있는 철책의 한 부분이 뭔가에 강하게 부딪힌 듯 아래쪽으로 구부러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화장실에서 투신한 최교수가 철책에 부딪쳐 4∼5m쯤 튕겨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도 거짓말이다. 차씨가 법의학자가 아니라는 점은 논외로 하고 접근해보자.
차씨는 우선 철책의 한 부분이 뭔가에 강하게 부딪힌 듯 아래쪽으로 구부러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현장을 촬영한 사진에 나타나는 철책은 전혀 구부러져 있지 않다. 따라서 차씨는 철책이 구부러져 있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물론 그런 경우가 있다면 최교수의 사체가 있던 장소조차 조작되었다는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사체가 있던 장소가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철책에 부딪힌 곳(그런 것이 있다고 가정해도)은 엉덩이 부분이 아니다. 25m의 높이에서 떨어질 때 발생하는 위치에너지는 약 150t이다. 만약 엉덩이 부분이 철책에 부딪혔다면, 그 안의 뼈에는 응당 상당한 정도의 분쇄골절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부검 감정서에 그러한 손상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인가? 철책에 엉덩이가 부딪힌 적이 없다.
그 부분의 상처는 목격자들의 진술처럼 몽둥이 구타에 의해 생긴 상처다. 조○○ 차장보, 손○○ 감찰실장, 장○○ 단장, 안○○ 과장은 물론 차씨를 제외한 모든 수사관들이 이 사진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부하(혹은 동료)들을 믿었는데 이럴 줄 몰랐다. 인간 이하의 짓을 저지른 것이다. 엉덩이의 상처는 몽둥이로 심하게 매질해서 생긴 상처가 분명하다. 이런 정도의 상처를 입고 어떻게 스스로 걸어다닐 수가 있었겠는가.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차씨는 이 부분에 대해 위원회의 조사를 받으면서 처음에는 부검사진이 최교수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다가 나중에는 “최교수의 사진은 맞는 것 같은데 철책에 부딪혀 난 상처다. 만약 맞아서 난 상처라면 정상적으로 걸어다닐 수도 없을 것이다. 고문한 적이 없는데 어째서 이런 상처가 났는지 모르겠다. 법의학자들이 아무리 고문의 흔적이라고 주장해도 그게 무슨 증거냐. 나는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또 자신이 1973년 감찰실에서 작성한 진술조서에 최교수를 고문했다는 내용이 나오자 이 문서는 중정 혹은 위원회에서 조작한 문서라고 주장하다가 나중에는 “그런 내용이 있는 줄 모르고 조서를 읽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렇게나 날인했다. 나를 조사한 수사관이 조서의 문답내용을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등 횡설수설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차씨의 거짓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최교수를 조사한 장소에 대해서도, 지하 조사실에서 7층으로 옮긴 시점은 물론 옮긴 이유도 거짓이다. 7층 조사실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한 내용도 거짓이며, 최교수의 7층 화장실 투신정황도 만들어낸 것이다. 위원회에서 집중추궁을 받은 내용이라고 말한 부분도 거짓말이다. 투신 전에 수사1과 2계의 김○○ 계장에게 말했다는 내용도 거짓말이다. 투신 후 안○○ 과장에게 보고했다는 내용도 거짓말이고, 검사가 새벽 4시40분경에 최교수의 사체를 검시했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이제부터 필자가 차씨의 주장을 거짓말이라고 단정하는 근거를 제시하겠다.
차씨는 ‘최교수가 조사받은 장소가 7층 VIP조사실이고 그곳은 대공처 합심계에서 관리하는 곳이며, 수사단에서 그곳을 사용하려면 대공처에 사용협조를 의뢰하고, 그곳에서 승인해줘야 가능하다.
수용대상은 자수한 거물 간첩이나 역용(역공작) 가치가 있는 간첩, 합심(합동 심문)이 필요한 인물 등이다. 이 조사실을 사용하기 위해서 협조전을 만들어 합심계의 승인을 받고, 지하 조사실에서 최교수에게 저녁식사를 들게 한 후 저녁 7시쯤 VIP조사실로 올라갔다’고 주장한다. 이 얘기는 거짓이다.
첫째, 최교수는 간첩임을 자백한 사실이 없으므로 VIP실의 수용대상이 될 수 없다. 합심실이란 말 그대로 대공관계의 여러 부서들이 자수한(혹은 자백한) 간첩을 대상으로 필요한 정보를 빼내기 위해 각 기관이 수사관들을 파견해 합동으로 심문하는 곳이다. 자백도 하지 않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 절대 아니다.
둘째, 합심계의 조장으로 당시 7층에 있던 강○○씨는 차씨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한다. 강씨는 ‘최교수 건으로 협조전을 받은 적이 없는 데도 사건 당시 마치 협조전을 받은 것처럼 진술하고, 또 최종길을 VIP실에 수용한 것처럼 진술한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저는 최교수를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고 진술하고 있다.
셋째, 당시 합심조 경비원들은 최교수가 VIP실에 수용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VIP실에 피의자를 수용할 때는 일반 수사관이 아니라 합심실 직원들이 지하 조사실에 직접 내려가서 신병을 인수하며, 이 경우 명령계통이 대공처이기 때문에 예외가 있을 수 없고, 최교수의 신병을 인수한 적이 없다고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
넷째, 차씨 자신이 위원회의 조사를 받으면서 ‘최교수를 수용한 장소는 VIP실이 아니라 7층 일반 조사실이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더구나 차씨는 최교수를 지하 조사실에서 7층으로 옮긴 시점도 오락가락하는 진술을 하고 있다. 1973년 조사와 1988년 검찰 조사에서는 오전 10시라고 했다가 이제 와서는 오후 7시라고 주장한다. 이런 진술을 신뢰할 수도 없으려니와 여러 수사관과 경비원들의 진술을 종합할 때, VIP실에 최교수를 수용했다는 것, 그리고 협조전을 작성했다는 진술은 거짓이다.
다음은 최교수를 지하에서 7층으로 옮기게 된 이유를 살펴보자. 차씨는 “(18일 저녁) 자기 귀로 최교수의 자백(동백림 왕복사실을 말함)을 확인한 장○○ 단장은 제게 ‘최교수님은 서울대 법대 교수님 아닌가. 이런 분을 어떻게 지하실에서 조사하느냐? 당장 7층으로 모셔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7층 VIP 조사실로 올라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도 거짓말이다.
장○○ 단장은 1973년 감찰실에서 작성한 진술서와 1988년 검찰에서 작성한 진술조서에서 ‘최종길 교수가 간첩임을 자백했기 때문에 회유할 목적으로 7층으로 장소를 옮겼다’고 진술했다. 장단장은 이번에 위원회의 조사를 받으면서 자신이 7층으로 옮기라고 지시한 것은 맞지만, 부하직원들이 최교수가 간첩임을 자백한 것처럼 자신을 속였기 때문에 그렇게 지시한 것이며 지금 생각해보니 타살을 자살로 위장하려고 그렇게 자신을 속인 것이라는 생각에 분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장단장은 또한 “최교수는 전혀 간첩이 아님에도 사후에 ‘간첩’으로 발표되었다. 최교수는 분명 간첩임을 자백한 일이 없는 데다가 증거도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최종길을 직접 만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그뿐 아니다. 차씨 스스로 “장단장은 최교수를 본 사실이 없다”고 진술했다. 그렇게 진술하고도 차씨는 ‘신동아’ 인터뷰에서 장단장이 최교수를 만났다고 말했다.
최교수가 7층에서 조사받은 것이 사실이냐의 여부를 떠나 7층에서의 조사 정황에 관한 차씨의 진술 역시 거짓이다. 다시 차씨의 말을 들어보자. “최교수는 동베를린에 두 번 갔다왔다고 했다. 북괴에 몇 번 다녀왔냐고 캐묻자, 그는 모스크바를 경유해 한 번 갔다왔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진술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는 침묵한다. 침묵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차씨와 마지막까지 함께 있던 김상원씨조차 간첩자백 사실을 부정한다. 그는 “최교수가 이렇다 할 만하게 자백한 내용이 없어 자살할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는 7층에서도 최교수가 북한에 갔거나 간첩사실을 자백한 적이 없다는 확실한 증거다. 차씨 스스로 1973년 감찰실 조사에서 ‘북한에 갔다’거나 ‘간첩임을 자백했다’고 진술한 바가 전혀 없다.
차씨는 위원회에서 이 부분을 추궁받자 처음엔 ‘하도 정신이 없어서 빼먹고 진술했다’고 하다가, 위원회 조사관들이 ‘사소한 시간대나 행동도 자세히 진술한 사람이 정신이 없어서 가장 중요한 입북문제를 빠뜨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추궁하자 ‘진술서가 진본이 아니라 조작된 것이어서 그런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차씨는 1988년 검찰 조사 때도 “최교수가 입북해서 노동당에 입당했으며, A3 수신을 했고, 공작금으로 2000달러를 받았고, ○○구역에서 17일간 밀봉교육을 받았다’고 자백했다. 그래서 이를 근거로 최교수를 추궁하며 대한민국의 최고학부인 서울대 법대교수가 김일성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가족의 이름까지 갖다바쳤으니 이를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자 최교수가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위원회에서 이 부분의 진위를 캐묻자 차씨는 “제가 사실과 다르게 진술한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이렇게 진술한 것은 고인의 명예를 손상한 것이므로 최종길의 유가족에게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며칠도 안되어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한 내용을 인터뷰를 통해 뒤집었던 것이다.
최교수가 ‘입북 자백’을 한 사실이 없다는 근거는 또 있다. 차씨와 7층 조사실에 같이 있었던 보조수사관 김상원씨는 22∼01시경까지 주무 수사관 차씨가 신문하는 것을 보조했고, 그 동안 차씨가 노봉유와 연락을 취한 듯한 ‘편의주소’가 적힌 최교수의 수첩을 제시하며 ‘누구의 글씨이며 누가 가르쳐주었느냐’ ‘파리에 갔을 때 전화를 어떻게 걸었느냐’ 등의 질문을 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는 또 ‘차직원(차철권씨를 말함)은 최종길에 대해 진술의 모순점, 거짓진술에 대한 방증 등을 열거하며 하나하나 추궁하기 시작했고, 자신은 옆에서 바른 대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라고 거들며 조사가 진행됐다’고 진술한다.
김상원씨의 진술만으로도 최교수가 입북사실을 자백했다는 차씨의 주장이 거짓임이 쉽사리 드러난다. 차씨 자신도 7층 조사실에서 최교수에 대해 노봉유와의 접선 등과 국내조직이 있는지에 대해 계속 추궁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최교수가 북한에 다녀왔다는 내용을 진술했다는 주장은 허구일 뿐이다.
최교수의 7층 화장실 투신정황에 관한 차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는 투신정황을 설명하며 “이상한 예감이 들어 재빨리 방을 나와 화장실로 가는 복도로 꺾어드니 화장실 문에서 4m쯤 떨어진 복도에서 김직원이 겁먹은 표정으로 화장실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복도에는 경비원 한 명이 책상을 놓고 앉아 있었는데, 그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김직원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제가 무슨 일이냐 하니, 김직원은 화장실 문을 가리키며 ‘저기…. 저기….’ 하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 출입문으로 가보니, 최교수가 상체는 이미 창 밖으로 내놓은 채로 화장실 창틀을 우뚝 밟고 서 있는 것 아닙니까. 최교수는 양손을 뒤로 돌려 창틀 기둥과 창을 잡고 있었습니다. 여차 하면 손 쓸 사이도 없이 투신해버릴 수 있는 상태라, 다가가지도 못하고 화장실 출입문에서 ‘최교수님, 이게 무슨 경솔한 행동이요. 가족을 생각하시오. 우리 대화로 해결합시다’ 하는데, 최교수는 ‘아…아-’ 소리를 지르며 몸을 떨어뜨렸습니다”고 했다.
“차씨가 허위로 진술하도록 시켰다”
‘아…아-’는 거짓말이다. 차씨는 이제까지 최교수가 사고 직전에 보조수사관 김상원씨와 함께 7층 화장실로 가는 것을 목격한 7층 경비원이 있다고 주장해왔다. 차씨는 ‘신동아’ 인터뷰에서 “1988년 검찰에서는 이 경비원을 찾았는데 수원에서 과일행상인가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며 “위원회는 이 경비원을 찾아서 물어보면 된다”고 자신감을 비치기도 했다. 필자가 위원회에서 관련 사실을 확인한 결과 차씨는 ‘신동아’ 인터뷰 훨씬 전부터 위원회가 7층 경비원을 찾아 조사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위원회 조사관들은 차씨에게 임○○라는 이 경비원의 진술을 보여주며 차씨의 진술과 엇갈리는 부분을 추궁했는데, 이를 익히 아는 차씨가 ‘위원회는 경비원을 찾아서 조사하라’는 엉뚱한 주장을 한 이유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어쨌든 이 7층 경비원 임○○는 1973년 감찰실과 1988년 검찰 조사에서 최교수의 사망사고 직전, 최교수가 김상원 수사관과 함께 조사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한 바 있었다. 그러나 위원회에서 그는 충격적인 내용을 털어놓았다. 그는 “‘화장실 쪽에서 악! 하는 (고함)소리를 들었다’는 내용, ‘사망 직전에 최종길 교수가 조사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 그리고 ‘그 시간이 새벽 1시30분이었다는 내용’ 등이 바로 차씨가 나에게 허위로 진술하도록 시킨 내용입니다. 그렇게 시킨 이유는 타살을 자살로 만들려는 의도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화장실 앞에 책상을 놓고 경비원이 근무를 서고 있었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7층 경비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수사관들은 물론 차씨 자신도 경비원이 근무하던 장소를 7층 안쪽(서쪽)의 복도라고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투신정황에 대한 진술도 현격한 편차가 있어 실제 상황을 목격한 자의 진술이라고 볼 수 없다. 이를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자.
1. 최교수와 신체적인 접촉에 관한 진술
“창문틀에 거의 다 올라가서 구부린 자세로 바깥쪽을 향하여 서 있는 것을 보고 안으로 뛰어들어가서 발목 쪽을 잡았으나 용의자가 놓지 않으면 뛰겠다는 말을 듣고 순간 당황하여 몇 발 뒤로 후퇴하였고 잠시 후에 신체접촉 없이 최종길 교수가 투신했다.”(김상원)
“우측 발목을 잡았다.”(김상원)
“창문에 올라가 있는 상태에서는 신체 접촉이 없었고, 뛰어내리는 순간 다가서면서 바짓가랑이를 스칠 정도로 손이 닫기만 했다.”(김상원)
“창문 위에 올라가 있는 최종길의 우측 발목을 양손으로 꽉 잡았다.”(김상원)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씨의 진술이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2. 최교수를 화장실에 보낸 뒤 차씨의 위치
“소변을 보고 와서 사실대로 얘기할 것을 다짐케 한 다음 새벽 1시35분경 김상원이 최종길 교수를 화장실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후 본인은 김○○ 계장에게 들러 최종길의 진술과정을 간단하게 설명하고…(중략) 김○○ 계장이 있던 사무실 문을 열고 복도에 한 발자국 디디는 순간 고함소리가 들렸지만, 그대로 신문실을 향해 가는 도중 ‘경비병’ 하는 고함소리가 들려 이상하게 생각하고 9과의 끝 방을 열어보았으나 한 사람도 없음으로 재차 변소 쪽 복도로 돌아 변소입구를 쳐다보았더니, 김상원이 변소 문 입구에 창백한 얼굴로 서서 말도 못하고 있기에 급히 변소 입구를 쫓아가서 변소 안을 바라보니….”(차철권)
“화장실에 갔다와서 다 이야기하겠다고 하여 김상원에게 데려갔다 오라고 지시한 후 본인 혼자 문답내용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약 5분이 지났을 때 무슨 고함소리가 들려 화장실로 뛰어가니….”(차철권)
3. 최교수가 창문에서 투신(?)할 때 김상원씨와 차철권씨의 위치에 관한 진술
“차철권이 화장실 출입문에 도착하던 찰라 최종길은 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김상원)
“차철권과 방호원이 온 후에도 계속 설득하다가 순간적으로 뛰어내릴 동작을 취하기에 저는 엉겹결에 뛰어가서 잡으려고 하였으나 바짓가랑이를 스칠 정도로 손이 닿기만 하고 최교수는 밑으로 뛰어내렸습니다.”(김상원)
“화장실 출입문에서 ‘최교수님, 이게 무슨 경솔한 행동이요. 가족을 생각하시오. 우리 대화로 해결합시다’ 하는데, 최교수는 ‘아…아-’ 소리를 지르며 몸을 떨어뜨렸습니다.”(차철권)
“화장실 문에서 4m쯤 떨어진 복도에서 김직원이 겁먹은 표정으로 화장실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제가 무슨 일이냐 하니, 김상원은 화장실 문을 가리키며 ‘저기…. 저기…’ 하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차철권)
“난 당신 아버지를 보지도 못했어요. 김상원이 혼자서 화장실로 데리고 갔지. 이미 뛰어내린 뒤였어요.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가 없어 비상계단을 통해 황급히 뛰어내려가 봤더니 이미 절명한 상태였어요.”(차철권, 1998년11월 SBS 취재중 최종길 교수의 아들 최광준 교수와의 전화통화)
차씨에 따르면 보조수사관 김씨는 최교수가 화장실 창문으로 뛰어내리려는 중요한 순간에 최교수를 방치하고 복도에 나와 겁먹은 상태로 화장실을 가리키고 있었으나, 김씨 자신은 화장실에서 최교수를 계속 설득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김씨가 분신술을 쓰지 않는 한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진술이다. 또 김씨는 최교수의 발목을 꽉 잡았다고 했다가, 금방 신체접촉은 없었다고 말을 뒤집는다. 더구나 7층 경비원은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없으며 고함도 듣지 못했고, 다만 누군가가 사망했다며 7층 화장실 앞에서 경비를 서라고 차씨가 지시해 경비를 섰다고 진술했다. 또 ‘차씨가 시키는 대로 진술한 것으로 그 진술은 사실과 다르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차씨는 최교수를 화장실에 보낸 뒤 혼자 문답내용을 정리중이었다고 하다가, 어느 때는 김○○ 계장 방에 가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그 방에서 김○○ 계장과 나눴다는 대화내용도 오락가락이다(이는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차씨가 위원회에서 집중 추궁을 받은 내용이라고 말한 부분도 거짓말이다. 차씨는 ‘신동아’ 인터뷰에서 “저는 위원회에서 최교수가 18일 밤 12시쯤에 투신자살한 것 같다고 진술했는데, 위원회가 확보한 자료에는 19일 새벽 1시40분쯤으로 돼 있었습니다. 위원회측은 왜 사망시간이 1시간40분이나 차이가 나는가. 1시간40분 사이에 최교수를 고문치사해 건물 밖으로 떨어뜨린 것은 아닌가 하고 집중 추궁했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이 부분을 위원회에서 확인했다. 그 결과 차씨가 위원회에서 밤 12시에 투신했다는 진술을 한 적이 없으며, 위원회 조사관들이 1시간40분 사이에 최교수를 고문치사해 건물 밖으로 떨어뜨린 것 아니냐고 집중추궁한 사실도 없음이 밝혀졌다. 위원회에서 차씨에게 ‘최교수를 고문 치사한 것 아니냐’고 추궁한 것은 사실이지만, 추궁의 근거는 타살을 진술하는 동료 수사관들의 진술과 몽둥이로 최교수를 고문했다는 목격진술 그리고 법의학적인 증거와 여러 번에 걸친 차씨의 번복 진술이었지, 단순히 사망시간대의 차이를 갖고 집중해서 추궁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7층 조사실에서 안○○ 과장이 4시간 동안 최교수와 대화를 나눴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차씨는 저녁 9시쯤 안○○ 과장이 조사실로 들어와서 새벽 1시쯤에서야 조사실을 나갔고 그로 인해 조사를 제대로 못했다고 주장한다.
우선 차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통상 저녁 10시가 되면 보조심문관이 청사 밖으로 나가서 사온 족발이나 빵·과일·소주 등으로 야식을 먹는데, 그날은 과장과 최교수 간의 이야기가 길어져, 밤 11시쯤 김직원이 야식을 사오게 되었습니다. 저와 과장·김직원·최교수는 책상 위에 신문지를 펼쳐놓고 야식을 같이 먹었습니다. 야식을 먹는 동안에도 과장은 계속 최교수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다가 19일 새벽 1시10분쯤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무려 4시간이 넘게 심사에는 전혀 도움되지 않는 주제로 최교수와 대화한 것이지요.” 차씨의 이 얘기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물론 없다.
위원회 조사과정에서 확보된 진술을 근거로 이 말이 거짓임을 입증해보자. 우선 차씨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차씨가 7층 조사실에 같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보조수사관 김상원씨도 마찬가지다. 김씨는 22∼01시경 주무수사관 차씨가 신문하는 것을 보조했고, 그 시간대에 차씨가 최교수를 추궁하는 가운데 노봉유와 연락을 취한 듯한 ‘편의주소’가 적힌 최교수의 수첩을 제시하며 ‘누구의 글씨이며 누가 가르쳐주었느냐’, ‘파리에 갔을 때 전화를 어떻게 걸었느냐’ 등으로 추궁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는 차씨의 진술이 거짓임을 입증한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있던 사람이 안과장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이 차씨가 최교수를 상대로 끈질긴 추궁을 하고 있었다고 하지 않은가?
차씨 스스로도 1973년 감찰실에서는 물론 1988년 검찰 조서에서도 저녁 9시경에 안과장이 잠시 다녀간 적이 있을 뿐이라고 진술했고, 위원회에서 조사받을 때도 안과장이 장시간 7층 조사실에 머문 적이 없다는 취지의 진술을 했다.
차씨는 1988년 검찰에서 이렇게 말했다. “18일 밤 12시경 안과장에게 ‘최종길 교수가 북에 갔다왔다’고 보고한 사실이 있습니다.” 피의자와 같이 있는 방안에서 안과장에게 보고했단 말인가? 참으로 어이없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이 부분에 관한 안과장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18일 밤 9시경 7층 조사실에 잠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최교수와 대화를 나눈 사실은 없고, 그 방에 머문 시간도 5분이 채 안됩니다.”
장단장으로부터 수사1과의 정○○ 계장한테 가서 조사받으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주장도 거짓말이고, 이때 최교수를 조사하며 작성한 녹지와 최교수 집에서 압수한 수첩 등을 넘겨주었다는 말은 물론 녹지와 수첩이 사라져버렸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다.
장단장은 정○○ 계장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사람이 죽었으나 송치서류를 작성해야 한다고 했고, 차씨에게 송치서류 작성을 도와주라고 지시했을 뿐 정계장에게 조사받으라고 지시한 사실은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도 차씨가 수사과의 조사를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만약 차씨가 조사를 받는다면 중정의 조직편제를 볼 때 당연히 감찰실의 조사를 받아야 하고, 실제로 감찰실의 조사를 받았다.
정계장 역시 “차씨를 조사한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전해들은 사건정황을 받아 적어 송치서류를 작성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는 또 최교수가 사망한 뒤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했음을 인정하면서, 지시에 따라 그렇게 했으나, 분명 잘못된 일로써 반성한다고 진술하고 있다. 또한 송치서류를 한번에 작성한 것이 아니라 차씨와 장○○ 단장 등이 준 짤막한 메모지를 몇 번에 걸쳐 전달받아 내용을 보완 수정해가며 작성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현장검증 서류도 사체를 보지도 못하고 작성한 것이며, 작성시점도 검증조서에 나와 있는 새벽 4시30분경이 아니라 그날 오후 사무실에서 권○○와 함께 작성했다고 진술했다.
수첩이 사라졌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이 수첩은 검찰의 송치서류 목록에 압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검찰에서 증거물로 가져간 것이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새벽 4시40분경에 검시했다는 주장도 거짓말이다. 차씨는 인터뷰에서 “10월19일 새벽 현장으로 달려온 안○○ 대공수사국장(당시 현직 검사)이 새벽 4시40분쯤 서울지검 공안부의 당직검사를 불러내 검시하게 하고, 최교수 시신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간 것으로 압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거짓이라는 근거는 첫째, 새벽 4시40분쯤 최교수의 사체는 이미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이날 새벽 4시5분경 최교수 사체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안치됐음을 확인했다. 둘째, 검사가 최교수의 사체가 있던 현장에 온 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해도 이날 새벽 현장에 달려왔다는 검사는 당직 검사가 아니다. 변사사건이 발생하면 당직검사가 현장에 오거나, 당직검사가 긴급한 일이 있어 업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경우 위임을 해서 다른 검사를 보낼 수 있으나, 이 경우에는 이런 정상적인 절차를 전혀 밟지 않고 사적 라인을 통해 중정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공안부 검사를 현장으로 부른 것이다. 물론 이 검사가 현장에 왔다는 증거도 없다.
차씨가 최교수의 투신(?) 직전에 수사1과 2계의 김○○ 계장에게 말했다는 내용도 거짓말이다. 차씨는 인터뷰에서 “최교수에 대한 심사결과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형님 일이 많나보지요’ 하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고 저를 본 김계장이 ‘어떻게 되어 가느냐’고 묻기에 ‘최교수가 동베를린과 북한에 갔다왔다고 했으니 틀림없는 간첩 아닙니까. 이제 서울대에 침투한 간첩을 잡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김계장은 ‘빨리 자술서를 쓰게 하라’고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차씨는 최교수 사망 직후에 쓴 진술서에서 ‘1973년 10월19일 새벽 1시35분경에 김직원이 최교수를 화장실로 데리고 나가는 것을 보고 좀 있다가, 김○○ 계장이 야근하는 방을 찾아가 최종길 교수가 동백림에 왕래했다는 진술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며 간첩 여부를 판단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진술했다. 이 진술서에는 최교수가 ‘북한’에 갔다왔다는 내용은 전혀 없다. 갑자기 어느 누구도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북한을 끼워넣어 자신의 거짓 주장을 은폐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보조수사관 김씨의 진술을 다시 들어보자. “차철권은 계속 최교수를 압박하며 추궁했고 그때까지 최교수는 혐의 사실을 부인할 뿐 이렇다 할 만한 내용을 자백한 사실이 없습니다.” 이쯤 되면 독자들도 차씨가 무슨 이유에서 중정에서 작성한 자기 자신의 진술서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