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호

부산의 환희 대구의 한숨 인천의 눈물

한국축구, 기적의 현장을 가다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입력2004-09-06 13: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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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장에서 길거리에서 TV 앞에서…. 5000만 국민은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과 ‘오 필승 코리아’를 외쳤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FIFA랭킹 40위인 한국이 5위인 포르투갈을 깨고 대망의 월드컵 16강에 진출한 것이다. 전국의 거리는 붉은 물결로 뒤덮였고, 지구촌 축구팬들은 경악했다. 2002년 6월, 한국은 분명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 가슴 뭉클한 현장을 밀착 취재했다.
    후반 25분. 이영표가 페널티 에어리어 왼쪽에서 반대쪽으로 크로스 센터링을 올렸다. 가슴으로 볼의 속도를 죽인 박지성은 오른발로 포르투갈 콘세이상의 키를 살짝 넘긴 뒤,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볼이 그라운드에 닿는가 싶더니 박지성의 왼발이 불을 뿜었다. 포르투갈 바이아 골키퍼의 다리 사이를 뚫는 골이었다. 감히 58스웨덴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의 펠레가 빚어낸 묘기와 94미국월드컵 준준결승에서 네덜란드의 베르캄프가 선보인 예술에 견줄 만한 그림 같은 슛이었다.

    우승후보 포르투갈은 그렇게 무너졌다. 66잉글랜드월드컵에서 북한에 뼈아픈 3대5 역전패를 안겼고, 91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도 역대 최강의 남북단일팀을 울렸던 포르투갈. 한국축구는 바로 그들을 제물로 16강 진출의 쾌거를 이룩했다. 한국인들은 2002년 6월14일 밤의 감동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부산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인천으로 옮겨가며 한반도 전역을 들끓게 했던 ‘16강 신화’의 현장을 직접 취재했다.

    부산에서 시작된 신화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출발이었다. 일부 축구인들은 조심스럽게 98프랑스월드컵의 악몽을 떠올렸다. 황선홍의 부상, 선수단의 불화설, 첫 경기 역전패…. 생각만해도 끔찍한 4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하지만 한국팀은 여러 모로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 거스 히딩크라는 명장이 있었다.

    프랑스와 세네갈의 개막전이 벌어진 5월31일, 모 스포츠신문 1면에 ‘최용수의 부상이 히딩크 감독에 대한 항명일 수도 있다’는 폭로성 기사가 실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표팀의 경기력을 크게 해칠 만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히딩크 감독과 최용수는 보도내용을 강력히 부인하며 조기진화에 나섰다. 곧이어 살림꾼 이영표가 차두리와 부딪쳐 쓰러지는 바람에 첫 경기에 뛸 수 없다는 비보가 선수단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빨리 엔트리를 교체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치는 와중에 히딩크는 “그대로 간다. 이영표는 꼭 필요하다”며 선수들의 동요를 막았다.



    경주 훈련캠프를 떠나 부산으로 이동하면서 히딩크 감독은 폴란드전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싸움을 앞둔 장수가 승리를 장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히딩크의 여유는 여느 때와 달랐다. 그것은 한국대표팀이 부산에서 나이지리아와 스코틀랜드를 꺾었다는 역대 전적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히딩크감독은 이미 동구권의 강호 폴란드의 장단점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폴란드전을 하루 앞둔 6월3일 저녁부터 부산 사직동은 축구열기에 휩싸였다. 6월4일 아침부터 잔여 티켓을 팔겠다는 발표가 나온 직후 전국에서 축구팬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광주에서 제주에서 달려온 사람들은 “한국축구가 이번에는 48년의 한을 풀 수 있을 것 같다”며 들뜬 모습으로 밤을 지새웠다.

    6월4일 오전 기자가 사직동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 도착했을 때 야구장 주변은 장사진을 이루었다. 티켓 매진이 시시각각 다가오면서 선택받은 소수와 선택받지 못한 다수의 희비가 엇갈렸다. 10m 앞에서 티켓이 끊겼다는 김영진(45)씨는 “암표라도 구하려고 30만원이나 준비했는데” 라며 아쉬워했고, 이틀째 영업을 포기하고 줄을 섰다는 택시기사 우영범(38)씨는 “일찌감치 해운대에 가서 자리를 잡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축구팬들의 열기와는 다른 측면에서 기자는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부산의 날씨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무더웠기 때문이다. 오전인데도 나무 그늘을 찾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좋은 징조가 보였다. 기상청은 6월4일 저녁 부산지방의 기온이 20℃를 약간 상회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날 저녁 부산 경기장의 기온은 23.9℃(체감온도는 28℃ 안팎)까지 올라갔다. 게다가 습도는 70%. 한국으로서는 천혜의 요새에서 폴란드를 만난 셈이다. 마치 제갈공명과 주유가 적벽에서 조조의 백만대군을 유린했던 것처럼.

    4일 오후 4시. 경기장 주변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10여 명씩 무리를 지은 폴란드 응원단이 잠시 기세를 올리기도 했지만, 금세 ‘대한민국’을 외치는 붉은 악마의 함성에 묻혀 버렸다. 야구장 앞에서는 풍물패가 분위기를 돋우었고, 실내체육관으로 이어지는 도로변에는 사회보험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 붉은색 옷차림이어서 얼핏 ‘붉은 악마’처럼 보였다.

    이 무렵 사직동 주변 식당과 호프집에서는 중국 대 코스타리카전, 일본 대 벨기에전을 시청하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삼성전자 대리점 앞에는 대형 멀티비전 두 대가 일본전을 생중계하고 있었는데, 교복 차림의 청소년들이 성별로 나뉘어 응원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벨기에가 골을 터뜨릴 때마다 남학생들이 박수를 치는가 하면, 일본이 득점한 순간에는 여학생들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2대2. 일본과 벨기에는 끝내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일찌감치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 입장한 관중들은 일본이 비겼다는 소식에 안타까운 반응을 보였다. 사우디와 중국이 패했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이 이겨야만 아시아 축구의 체면이 선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재미있는 건 어느 누구도 한국이 폴란드에 질 것으로 예상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국이 FIFA랭킹에서 한참 뒤지는 데도 한국 축구팬들은 낙승을 점치고 있었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그 해답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5만4000명을 수용하는 경기장이 조그만 틈도 없이 꽉 들어찼다. 사방이 붉게 물든 가운데, ‘붉은 악마’가 주도하는 응원에 관중들이 뜨겁게 호응했다. 본부석 건너편 오른쪽에 자리잡은 폴란드 응원석에서는 이따금씩 국기만 휘날릴 뿐, 운동장 분위기에 짓눌린 모습이 역력했다.

    드디어 선수단이 입장하고 양국 국가가 연주되는 순간, ‘붉은 악마’가 ‘Win 3:0’이라는 카드섹션을 연출했다. 곧이어 중계방송 카메라가 귀빈석을 비추자 양국 정상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빨간 모자에 응원용 머플러를 목에 걸고 박수를 친 반면, 알렉산더 크바시니에브스키 폴란드 대통령은 자국의 국가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응원을 시작한 붉은 악마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휘슬이 울리기도 전에 ‘붉은 악마’가 기선 제압에 나섰다. 5만여 명이 동시에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을 연호하는 장관이 펼쳐졌다. 폴란드는 그라운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처음부터 세차게 몰아붙였다. 폴란드의 원터치 롱패스에 한국 수비진이 잇따라 뚫렸다. 관중들은 폴란드 선수들이 공을 잡을 때마다 ‘우’ 하고 함성을 질렀지만, 폴란드의 기세는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20분이 흘러갔다.

    다소 수세적이었던 경기의 흐름은 아주 엉뚱한 곳에서 반전됐다. 최후방에 처져 있던 홍명보가 센터 서클을 넘어 폴란드 문전으로 치고 들어가 회심의 중거리슛을 날린 것이다. 비록 볼은 폴란드 수비수의 몸을 맞고 골문 뒤편으로 날아갔지만, 이 한방을 기점으로 한국 선수들의 몸놀림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홍명보가 나가면 분위기가 바뀐다’는 모 방송사 아나운서의 말처럼, 한국 선수들은 잠시 후 한반도 전역을 뒤흔드는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전반 25분 이을용이 왼쪽에서 낮은 센터링을 올렸다. 폴란드 수비를 통과한 볼은 자로 잰 것처럼 황선홍의 발끝에 달라붙었다. 황선홍이 각도를 90도나 틀어 왼발로 강하게 발리슛을 때렸는데, 그것이 폴란드 두데크 골키퍼를 뚫었다. 골이었다. 손에 가볍게 입을 맞춘 황선홍은 포효하는 사자처럼 한국팀 벤치로 뛰어나가며 골 세리머니를 연출했다. 1대0. 황선홍 개인으로서는 A매치 50번째 골이었고, 한국이 월드컵에 도전한 이래 두번째로 뽑아낸 선취골이었다.

    5만여 관중이 일제히 일어나 함성을 질렀다. 메인 카메라는 눈물을 글썽이는 붉은 악마와 두 주먹을 불끈 쥔 황선홍의 모습을 계속해서 클로즈업했다. 히딩크 감독이 특유의 주먹 지르기 포즈를 취하는 장면도 수차례 컬러 전광판을 장식했다. 또다시 그라운드를 뜨겁게 달구는 ‘대~한민국’…. 풀죽은 모습으로 킥오프 하는 폴란드 선수들…. 승부의 축은 일찌감치 한국 쪽으로 기울었다.

    무엇보다 황선홍이 득점한 점이 기자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는 건국대 시절 연습경기에서 펄펄 날다가도 실전에서는 몸싸움이 약해 고전했다.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수돗가에서 물을 가득 퍼마시고 시합에 나섰다는 황선홍, 그렇게 들이킨 수돗물이 몸속에서 일으키는 리듬을 따라 슛을 때렸다는 황선홍…. 그렇게 출렁거리며 골을 터뜨려 별명도 ‘황새’였던가.

    “폴란드가 얼었어”

    전반전이 끝났다. 기자는 옆에 앉아 있는 명지대 김희태 감독에게 관전평을 부탁했다. 김감독은 한마디로 경기내용을 정리했다. 역시 프로는 다르다.

    “폴란드가 얼었어.”

    김감독은 골을 넣은 황선홍보다 뒤에서 열심히 커버플레이를 한 박지성 김남일 유상철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특히 박지성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새삼 두 사람이 사제간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지성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갈 실력이 안됐잖아. 그런데 저 놈을 데리고 호주 전지훈련 가서 프로팀과 맞붙였거든. 그리고 나서 허정무 감독이 이끌던 올림픽대표팀과 평가전을 벌이면서 눈에 띈 거야. 허감독이 지성이를 뽑으니까 얼마나 말들이 많았다고. 나하고 친해서 뽑았다나 어쨌다나. 내가 볼 때는 한국대표팀에서 지성이가 최고야.”

    박지성은 명지대 시절부터 “발에 모터를 달고 다니는 선수”로 불렸다. 90분 내내 쉴새 없이 뛰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하지만 부지런한 움직임에 비해 매스컴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런 박지성에게 김감독은 얼마 전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너도 틈이 나면 드리블을 하고, 슛도 날려라. 그래야 스타가 될 수 있다” 김감독은 박지성이 잉글랜드전과 프랑스전에서 연속 골을 터뜨리자, 자신의 주문이 통한 것 같아 뛸 듯이 기뻤다고 한다.

    후반전이 시작됐다. 경기의 주도권은 완전히 한국으로 넘어왔다. 황선홍 대신 들어온 안정환이 공격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폴란드 선수들은 자신들의 스타일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이런 팀이 어떻게 유럽예선에서 노르웨이와 우크라이나를 물리쳤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후반 8분 페널티에어리어 중앙을 치고 들어가던 유상철의 오른발이 번쩍들리는가싶더니 폴란드 골문에 걸린 육각형 그물이 세차게 흔들렸다. 유상철은 ‘붉은 악마’가 위치한 스탠드를 향해 손바닥을 아래에서 위로 긁어 올리는 골 세리머니를 연출했다. 5만여 관중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98프랑스월드컵 벨기에전에 이어 두 경기 연속골을 터뜨린 유상철을 연호했다.

    94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 한국축구의 기대주로 떠올랐고, 일본 J리그에서는 골게터로 활약한 유상철. 그도 건국대를 나왔다. 고등학교에서 잘한다는 선수는 연세대 고려대 한양대에 몰리던 시절, 그는 고정운 황선홍과 더불어 건국대가 배출한 슈퍼스타다. 축구전문가들은 말한다. 유상철의 플레이는 거칠지만, 그의 ‘한방’은 가공할 만하다고. 유상철은 공격과 미드필드, 수비능력을 두루 갖춘 멀리플레이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히딩크 감독의 남다른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후반 16분 유상철이 부상으로 빠지고 이천수가 들어왔다. 히딩크 감독은 이천수를 사이드로 돌리고 박지성을 중앙에 배치했다. 두 골 차에 만족하지 않고 추가골을 터뜨리겠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안정환 박지성 차두리는 결정적인 찬스를 번갈아가며 무산시켰다. 한국축구의 월드컵 징크스 중 하나인 ‘두 골의 벽’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후반 43분. ‘붉은 악마’는 “이겼다”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선수들은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패스는 번번이 끊겼고, 위치선정과 방향전환도 유럽예선 때와 달라 보였다. 2002년 3월28일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두 골을 실점하고 허둥대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마침내 주심이 경기종료를 알렸다. 히딩크 감독은 코칭스태프와 일일이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월드컵 도전 48년만의 첫승을 자축했다. 한국 선수들이 골대 뒤편 광고판을 뛰어넘어 ‘붉은 악마’ 응원석으로 달려가자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은 또 한번 광란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관중들의 환호에 답한 히딩크,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어던진 차두리와 이천수, MVP로 선정돼 카메라에 둘러싸인 유상철…. 한국축구 100년 역사를 바꾼 축제는 그렇게 달아올랐다.

    한국 선수들이 라커룸으로 퇴장하자 이번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운동장으로 내려왔다. 정회장은 붉은 악마 응원석 앞에 서서 한동안 움직일 줄 몰랐다. 정회장은 응원단과 함께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운동장 트랙을 한바퀴 돌았다. ‘월드컵이 끝난 뒤 큰 꿈을 꾸겠다’며 대권도전의 뜻을 밝혀온 그였기에, 폴란드전 승리의 의미는 남달랐을 것이다.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 주위를 가득 메우고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치는 축구팬들을 뒤로하고 해운대로 향했다. 이날 부산에서는 10여 개의 대형 전광판이 설치됐는데, 부산역 광장과 해운대에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렸다. 해운대로 가는 동안 도심 곳곳에서 유럽에서나 볼 수 있던 풍경들이 펼쳐졌다. ‘대~한민국’ 박수에 맞춰 자동차 경적을 울리는가 하면, 대형 태극기를 들고 도로 한복판으로 질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을 피해가며 조심스럽게 차를 몰던 택시 기사는 “월드컵 개막일 이후 무단횡단과 합승 단속이 심했는데, 오늘은 다 봐주는 것 같아요. 축구가 참 대단하네요”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6월5일 0시30분. 해운대는 대낮처럼 밝았다. 도로변에서는 술판이, 해수욕장 백사장에서는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축구가 끝난 지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축제는 계속되었다. 언더그라운드 가수가 나와 ‘라밤바’를 부르자 외국인과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격정적인 댄스를 선보였다. 노래가 끝나면, ‘대~한민국’ 박수가 이어지고, 박수가 멈추면 또 다시 춤판이 벌어졌다.

    시작이 반이라면 한국은 5부 능선을 돌파한 셈이었다. 난적으로 예상했던 폴란드를 물리쳤기 때문에 16강진출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기자는 ‘포르투갈이 미국을 물리치면 여유있게 미국전을 준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6월5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 도착했다. 수원에 모인 축구팬들도 폴란드전의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듯했다. 포르투갈과 미국이 몸을 푸는 중에도 한국의 폴란드전 골 장면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다. 현장에서 양 팀을 분석중인 히딩크 감독의 모습이 전광판에 나타나자 관중들은 환호했다.

    미국은 플레이메이커 레이나와 공격수 매시스가 빠진 반면, 포르투갈은 부상에서 완쾌되지 않은 피구까지 투입했다. 때문에 베스트 11의 면면에서 포르투갈의 우세를 점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어쩌랴. 공은 둥글고, 축구는 인간의 신체 중 가장 부정확한 발로 하는 스포츠인 것을….

    축구공은 둥글다

    경기 시작 3분 만에 미국의 오브라이언 선수가 선취골을 터뜨렸다. 당황한 포르투갈 수비들은 공을 걷어내기에 바빴고, 미국은 그 틈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전반 29분 포르투갈의 자살골과 35분 맥 브라이드의 그림 같은 헤딩슛으로 스코어는 순식간에 3대0으로 벌어졌다. 이제 66잉글랜드월드컵의 에우제비오가 아니라면 포르투갈은 치욕의 패배를 당할 수밖에 없다. 과연 피구는 에우제비오의 뒤를 이을 것인가?

    포르투갈의 반격은 너무 늦게 불이 붙었다. 몸이 무거운 선수들은 패스미스가 나올 때마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고, 교묘하게 시간을 끄는 미국 선수들의 플레이에 말려들어 쓸데없는 파울을 남발했다. 3대2. 우승후보 포르투갈의 데뷔전은 초라했다. 선수들은 인사도 하지 않고 라커룸으로 퇴장했고, 포르투갈 응원단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1라운드 결과 당초 2강으로 꼽혔던 포르투갈과 폴란드가 나란히 1패를 기록하면서, D그룹도 ‘죽음의 조’로 돌변했다. 수원월드컵경기장에 나온 축구인들은 한결같이 “포르투갈이 첫 경기에서 패했지만 엄연한 우승후보이고, 폴란드도 무기력하게 3패를 당할 팀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그렇다면 6월10일 한미전은 운명의 격돌이 될 수밖에 없다. 어느 팀이든 패하면 16강 경쟁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번만은 ‘경우의 수’라는 덫에 빠지지 않기를 기대했지만 D그룹의 판도는 2차방정식을 넘어 3차방정식 수준으로 얽혀버렸다.

    한국과 미국. 두 나라의 대결은 이미 축구 경기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모 대학 총학생회가 반미응원을 펼치겠다고 선언하자, 정부는 반미응원을 규제하겠다고 발표했다. 붉은 악마는 기자회견을 통해 ‘반미응원은 없다’고 못박았지만,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에서 미국의 오노 선수에게 금메달을 빼앗긴 김동성은 고심 끝에 대구행을 포기했다. ‘김동성이 나타나면 관중들이 흥분할 수도 있다’는 게 경기관람을 취소한 이유였다.

    한미전을 앞둔 양팀의 신경전도 대단했다. 특히 심판문제를 놓고 양측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먼저 한국은 미국대표팀이 FIFA 심판들과 같은 호텔에 묵은 것을 문제삼았다. 이 호텔은 당초 한국대표팀의 투숙을 거부한 곳이어서 더욱 문제가 됐다. 결국 FIFA가 한국의 항의를 받아들여 심판진의 숙소를 옮기는 것으로 파문이 마무리됐지만, ‘미국이 돈으로 심판을 구워삶으려 한다’는 세간의 의혹마저 잠재우지는 못했다.

    반면 미국은 한미전 주심 우르스 마이어씨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터뜨렸다. 마이어씨는 98프랑스월드컵 미국 대 이란전에서 주심을 맡았는데, 미국은 이 경기에서 이란에 패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 기자들은 ‘스위스 심판이 나오면 진다’는 역대 월드컵의 징크스를 떠올리며 한국의 홈 어드밴티지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구의 날씨는 최상

    6월10일 아침 7시. 기자는 전남 목포에서 광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라디오에서는 ‘손석희의 시선집중’이 흘러나왔다. 날이 날인지라 이 프로그램은 한미전 소식에 긴 시간을 할애했다. 어떤 여학생이 축구를 꼭 보고 싶은데, 수업 때문에 걱정이라고 말하자, 손석희 아나운서는 직접 담임 선생님과 통화하면서 “오늘은 단축수업을 할 수 없냐”고 요청했다.

    광주에서도 축구의 열기는 대단했다. 고속버스터미널 앞에서 유세중이던 지방선거 후보자는 “오후 3시부터는 유세를 중단하고, 축구를 봅시다”라며 ‘축구는 한국, 시장은 ○○○’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터미널측은 “오후 3시 이후에 출발하는 고속버스는 대구행 외에는 티켓이 거의 팔리지 않았다”고 말했으며, 대구로 떠나는 버스에는 붉은 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8시20분. 광주지역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광주에서 대구로 넘어가는 동안 차창에 빗물이 계속해서 부딪혀왔다. 지리산 자락의 끄트머리인 거창휴게소를 넘어갈 무렵에는 우산 없이 다니기 힘들 만큼 빗발이 굵어졌다.

    많은 축구전문가들이 미국전은 더울수록 유리하다고 전망했다. 그것은 한국 선수들이 체력적으로 앞서기 때문이다. 한국은 역대 월드컵에서도 악조건일수록 좋은 경기를 펼쳤다. 최초의 무승부를 기록한 86멕시코월드컵 불가리아전은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수중전이었고,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는 94미국월드컵 독일전은 40℃의 불볕 더위 속에서 치러졌다. 그런 점에서 한국이 오후 3시30분에 대구에서 미국과 만난 건 행운이었다.

    하지만 적당히 비가 내릴 경우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장대비가 퍼붓는 상황이라면 불리할 게 없지만, 무더위를 식힐 만큼의 비는 한국보다 미국에 유리하다. 기자는 급한 마음에 기상청에 전화를 걸었다. “곳에 따라 비가 내릴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대구지방은 맑겠습니다.” 기상청의 보도는 정확했다. 버스가 합천터널을 지나 경북지방으로 들어서면서 구름이 걷혔다.

    오후 2시. 대구월드컵경기장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한낮이다보니 6월4일 부산의 밤 풍경보다 붉은 빛깔이 더욱 선연했다. 곳곳에서 성조기를 몸에 두르고 ‘USA’를 외치는 미국인들도 눈에 띄었지만,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거리 출정식까지 벌인 ‘붉은 악마’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대구의 날씨는 역시 한국 편이었다.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의 햇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간간이 비가 뿌렸다. 여우비였다. 무더위를 식히는 소나기가 아니라, 더운 날씨를 더욱 후텁지근하게 만드는 이슬비였다.

    경기장 주변에서부터 출입구까지 경찰들이 촘촘히 서 있었다. 미국 선수들이 대구경기장으로 올 때는 군 장갑차까지 동원됐다. 경기장 상공에서는 쉴새없이 헬리콥터가 떠다녔다. 물론 기습테러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축구경기를 하면서 군대의 힘까지 빌어야 하는 미국의 신세를 불쌍하게 여기는가 하면, 정부가 미국팀을 과잉보호하고 있다며 쓴소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미국 국가와 애국가가 차례로 울려퍼졌다. 붉은악마는 부산에서는 폴란드 국가가 끝나기도 전에 응원전을 펼쳤지만, 대구에서는 미국 국가를 끝까지 경청했다. 스탠드 상단에서 잠시 ‘우’ 하는 소리가 나왔지만, 동조자는 별로 없었다. 양국 국가 연주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탠드 앞쪽에 우뚝 서서, 붉은색 물결을 바라보며,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던 중년 남자는 결국 경찰과 함께 그라운드 밖으로 사라졌다.

    히딩크 감독은 폴란드전 멤버를 그대로 내보냈다. 미국은 포르투갈전에서 결장했던 미드필더 레이나와 공격수 매시스를 투입했다. 미국의 비슬리와 한국의 송종국은 시작하자마자 빠른 스피드로 측면을 돌파하며 긴장감을 높였다. 경기내용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이었지만, 주도권은 한국이 잡았다.

    축구는 찬스에서 골을 터뜨려야 이기는 경기다. 전후반 89분 30초를 리드해도 마지막 30초 만에 한골을 먹으면 지는 경기다. ‘위기 뒤에 찬스, 찬스 뒤에 위기’라는 말은 축구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좋은 흐름에서 득점하지 못하면 이길 확률은 떨어진다.

    미국전에서 첫골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미국은 2001년 이후 선취골을 내준 8차례의 A매치에서 모두 패했다. 반면 선취골을 따낸 22차례의 경기에서는 16승4무2패로 압도적 우세를 지켰다. 따라서 한국이 먼저 득점한다면 승산은 매우 높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승리의 여신은 한국을 비켜가는 듯했다.

    황선홍의 붕대 투혼

    불길한 사고가 터졌다. 한국의 스트라이커 황선홍이 몸싸움을 벌이다 넘어져 눈 위가 찢어졌다. 황선홍이 경기장 밖으로 나가 치료를 받고 머리에 붕대를 감았다. 팀의 맏형이 빠지자 선수들이 동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곧이어 미국의 도노번과 비슬리가 한국의 양 사이드를 파고들었다. 송종국과 이을용이 잇따라 뚫렸다.

    미국은 그 틈을 정확하게 공략했다. 한국팀 일자 수비라인의 밸런스가 흔들리는 순간, 왼쪽 중원을 치고 들어가던 오브라이언의 센터링이 매시스의 발 끝에 떨어졌다. 매시스가 왼발로 찔러넣은 슛이 그대로 골인. 미국이 먼저 득점했다. 미국 응원단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과거 한국축구는 실점한 뒤 급격히 조직력이 허물어졌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한국 선수들은 강한 압박을 펴며 다시 경기의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그 결과는 전반 38분에 나타났다. 황선홍이 미국 문전에서 수비수 제프 아구스에 걸려 넘어지자 마이어 주심은 지체없이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문제는 키커. 박지성 대신 투입된 이천수는 공을 만지작거리며 욕심을 냈다. 하지만 그는 큰 경기에서 두 번이나 PK를 실축한 전력이 있다. 선수들이 벤치 쪽을 바라보자 히딩크 감독은 이을용을 지목했다. 오래 전부터 PK는 박지성 이을용 송종국 순으로 맡긴다는 구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6만여 관중이 함성을 지르는 가운데, 이을용이 왼발 인프런트로 살짝 감았다. 하지만 발 동작이 프리덜 골키퍼의 눈에 잡혔다. 노골. 프리덜 골키퍼의 선방이었다. 한국은 천금 같은 동점 기회를 날려버렸다. 관중석 여기저기서 “왜 이을용이 차노” 하는 한탄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붉은악마는 이을용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이 무렵 본부석 반대편 스탠드에서는 아슬아슬한 장면이 벌어졌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열심히 ‘USA’를 외치던 일군의 미국인들이 슬그머니 자리를 옮긴 것이다. 경기 초반에는 한국인들과 서로 과자를 나눠먹으며 웃으면서 응원했지만, 이을용의 페널티킥이 빗나가면서 다소 험악한 상황이 연출됐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표정은 속일 수 없는 법. 그들은 성조기가 펄럭이는 쪽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해서 ‘USA’를 외쳤다.

    후반전이 시작됐다. 한국은 동점골을 뽑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찬스도 많았다. 하지만 골 결정력 부족이라는 한국축구의 고질병이 도졌다. 후반 1분 설기현은 단독 찬스를 맞았지만, 득점하지 못했다. 후반 10분 히딩크 감독은 투혼을 발휘하던 황선홍을 빼고 안정환을 투입했다. 이때부터 한국 공격진이 활기를 찾았다. 7만여 관중들도 파도타기 응원으로 그라운드의 열기에 불을 지폈다.

    안정환의 스케이팅 세리머니

    후반 34분 마침내 기다리던 동점골이 터졌다. 이을용이 미드필드 왼쪽에서 높게 올려준 프리킥이 안정환의 머리에 맞고 골문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을용은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처럼 흥분했고, 안정환은 골을 확인한 뒤 코너플래그 쪽으로 달려가 ‘준비한’ 골 세리머니를 연출했다. 월드컵 사상 최초로 펼쳐진 쇼트트랙 스케이팅 세리머니다.

    한국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 김동성과 안정환은 서로 잘 아는 사이다. 안정환은 어릴 때 스케이팅을 했고, 김동성은 안정환의 팬이었다. 안정환이 이탈리아 프로리그에 진출했을 때, 김동성은 이탈리아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당시 김동성은 직접 운동장을 찾아 안정환을 응원했는데, 이때부터 두 사람은 가끔씩 연락하며 지냈다고 한다.

    안정환의 골 세리머니에서 압권은 역시 이천수였다. 안정환이 스케이팅 동작을 취하자 설기현 최용수 최진철 등도 동참했는데, 이 순간 이천수는 안정환의 등을 살짝 건드리고는 뒤로 넘어질 듯한 포즈를 취했다. 바로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미국의 오노 선수가 김동성에게 했던 ‘할리우드 액션’의 복사판이었다.

    한국의 일방적인 공세가 계속됐다. 그러나 ‘한방’이 부족했다. 후반 44분 이을용이 미국의 왼쪽 수비벽을 무너뜨리며 최용수에게 완벽한 득점찬스를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최용수는 공을 골문 위로 날려버렸다. 98프랑스월드컵 벨기에전에서 결정적인 역전 찬스를 무산시킨 장면과 비슷했다. 이 순간 이을용은 그라운드에 드러눕고 말았다. PK 실축의 아픔이 컸던 탓일까. 이을용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지만, 더 이상 힘을 내지 못했다. 곧이어 경기종료 휘슬이 울렸다. 1대1. 한국은 다 이긴 경기를 놓치고 말았다.

    운동장 곳곳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많은 사람들은 16강진출이 어려워졌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과 미국이 나란히 1승1무를 기록했지만, 포르투갈과 맞붙어야 하는 한국보다 폴란드를 상대로 싸우는 미국이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일부 관중들은 이을용의 PK 실축을 물고 늘어졌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그 놈 때문에 비겼잖아. 한국이 1승1무 전적으로 마지막 경기를 준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야”라며 위안을 삼았다. 이을용. 그는 6월10일 한·미전에서 ‘천당과 지옥을 오간’ 선수였다.

    경기장을 빠져나오는 붉은 물결 속에서 이차만 전 부산대우 감독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월드컵과 한번도 인연을 맺지 못했다. 대한축구협회는 98프랑스월드컵이 끝난 직후 사상 최초로 국가대표팀 감독을 공개 선발한 적이 있다. 후보는 김호곤 이차만 허정무 감독이었다. 공개토론회에 이은 비밀투표 결과 이감독은 3위에 그쳤고, 결선투표에서 허정무 감독이 됐다. 하지만 허정무 감독도 2000년 시드니올림픽과 아시안컵에서 국민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이 전감독은 한국선수들의 몸이 평소보다 무거웠다고 진단했다. 날씨가 덥다보니 생각보다 빨리 지쳤다는 것이다. 이 전감독은 “우리가 선취골을 넣었다면, 3대1 정도로 이길 수도 있는 경기였다”고 미국전 경기내용을 분석한 뒤 “포르투갈을 이기기 위해서는 정신무장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저녁 8시. 이번엔 동대구역과 고속버스터미널이 붉은 색으로 뒤덮였다. 대구로 몰려들었던 축구팬들이 저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표를 구하느라 분주했다. 임시열차 티켓은 일찌감치 다 팔렸고, 긴급 투입한 관광버스도 만원이었다. 이런 가운데 일찌감치 심야 우등고속을 예약해놓고 폴란드와 포르투갈의 일전을 관람하는 ‘사커마니아’들이 눈길을 끌었다. 물론 그들은 폴란드를 열심히 응원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대~한민국’ 구호를 외치면서.

    장대비가 퍼붓는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포르투갈은 폴란드를 유린했다. 그들은 미국전 패배를 폴란드에 분풀이하듯 초반부터 적극 공세를 폈다. 반면 폴란드는 객관적 전력의 열세에도 상대 공격수들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바람에 대량실점을 재촉했다. 4대0. 고속버스터미널은 후반 폴란드가 반칙으로 한 골을 넣었을 때 잠시 환호성이 터져나온 것을 빼고, 90분 내내 침묵에 휩싸였다. 네번째 골이 터졌을 때는 여기저기서 “우리가 저런 한심한 팀을 이겨놓고 그렇게 기뻐했단 말인가” 하는 탄식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해트트릭을 기록한 파울레타, 강한 압박으로 폴란드의 예봉을 꺾은 핀투, 화려한 개인기의 피구, 경기의 완급을 절묘하게 조절한 후이 코스타…. 포르투갈 선수들은 미국전과는 다른 몸놀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6월11일. 포르투갈전을 사흘 앞두고 인천 문학경기장 앞에 텐트족이 등장했다. 해외에서 팔리지 않은 입장권을 먼저 구입하기 위해서다. 일부 매스컴은 ‘인천상륙작전’이라며 분위기를 띄웠다. 승점으로 볼 때 한국은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히딩크 감독은 ‘이기는 축구’를 선언했다. ‘이기는 작전이라야 비길 수 있고, 비기는 작전이라면 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히딩크는 정공법을 택한 셈이다.

    6월11일과 12일, 한국과 일본에서는 잇따라 이변이 발생했다. 11일엔 프랑스가 덴마크에 0대2로 패해 예선 탈락했고, 12일엔 아르헨티나가 스웨덴과 비기는 바람에 1라운드를 통과하지 못했다. 2002한일월드컵이 열리기 전부터 세계의 도박사들이 우승후보 1순위로 꼽은 두 팀이 덜미를 잡힌 것이다.

    두 경기는 포르투갈전을 앞둔 한국이 곱씹어볼 구석이 많았다. 특히 강팀도 궁지에 몰리면, 경기를 그르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프랑스와 아르헨티나는 반드시 이겨야만 16강에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무리한 공격을 시도하다가 선취골을 내주고 자멸했다. 여기에 한 가지 변수가 있다. 덴마크와 스웨덴은 막강한 수비력으로 프랑스와 아르헨티나의 화력을 막아냈지만, 한국 수비진이 과연 포르투갈의 예봉을 꺾을 수 있느냐다.

    6월14일. 오전 7시부터 광화문에 태극기를 든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오후 5시30분 경기를 3시간 앞두고는 시청부터 세종문화회관까지 거대한 붉은 띠가 만들어졌다. 인천행 지하철에서는 승리를 자신하는 목소리가 가득했다. 이들에게 객관적 전력의 차이는 무의미했다. 한국축구는 1승1무만으로도 대형사고를 친 셈이지만, 축구팬들의 마음은 벌써부터 16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DJ가 오면 이긴다

    인천문학경기장 입구에서 김호곤 부산아이콘스 감독을 만났다. 그는 현역시절 뛰어난 수비수로 활약했지만, 한번도 월드컵에 나가지 못했다. 포르투갈전의 승패가 수비에 달렸다는 점에서 김감독의 생각이 궁금했다. 뜻밖에도 그의 대답은 낙관적이었다. “감이 아주 좋아요. 포르투갈 선수들의 컨디션이 너무 나빠요.”

    저녁 7시45분. 김대중 대통령이 경기장에 도착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몇몇 축구인들이 불쑥 한마디씩 던졌다. “대통령이 부산엔 왔고, 대구엔 안 왔습니다. 그런데 부산에서는 이기고 대구에서는 비겼잖아요. 그러니까 오늘은 이길 겁니다” 그러고보니 김대통령이 참석한 경기에서는 극적인 승부가 많았던 것같다. 1997년 9월28일 ‘도쿄대첩’ 때도 김대통령은 야당 대통령후보로서 현해탄을 건넌 적이 있다. 당시 일부 국회의원들은 “일본에 패하면 욕을 먹어야 한다”며 반대했지만, 그는 2대1 역전승의 프리미엄을 톡톡히 누렸다.

    부산에서 대구로, 대구에서 인천으로 올라오면서 운동장의 색채는 더욱 짙어졌다. 부산에서는 특정 구역에 붉은 색이 집중됐지만, 인천에서는 사방이 붉게 물들었다. 관중들이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며 손을 돌릴 때는 마치 ‘FIFA 2002’ 게임에 나오는 가상 스탠드를 연상케 했다. 부산에서 ‘WIN 3:0’, 대구에서 ‘Go KOR 16’을 카드섹션으로 펼쳐보인 붉은 악마가 이번에는 흰 종이로 ‘대한민국’을 아로새겼다. 그러자 5만여 관중이 한 목소리로 ‘대~한민국’을 외쳤다.

    휘슬이 울렸다. 한국은 이영표와 송종국을 후방으로 끌어내려 수비를 두텁게 하고, 김태영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내세웠다. 초반 실점을 막기 위한 히딩크의 방어전술이었다. 경기시작 3분 뒤 스탠드 곳곳에서 함성이 터졌다. 동시에 시작된 대전경기에서 폴란드 올리사데베가 선취골을 터뜨린 것이다. 2분 뒤 이번엔 크리샤워비치가 두번째 골을 성공시켰다. 한국은 이제 세 골을 먹어도 16강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히딩크 VS 올리베이라

    히딩크 감독은 송종국과 이영표를 올리고 김태영을 끌어내렸다. 정상적인 스리백 시스템으로 복귀한 것이다. 전술적으로 파울레타-피구-콘세이상 3명의 공격수를 막기 위해서는 포백이 적합하다. 그런데도 히딩크 감독은 승부수를 띄웠다. 미드필드에서 송종국이 피구를, 이영표가 콘세이상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를 꽁꽁 묶었다.

    주도권을 잡기 위한 양팀의 신경전은 격렬한 몸싸움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 홈 어드밴티지도 작용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산체스 주심은 웬만한 몸싸움에는 파울을 불지 않았다. 마음이 급한 포르투갈 선수들이 심판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전반 26분 핀투가 퇴장당했다. 포르투갈 선수들은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분명한 백태클이었다. 전반 35분 포르투갈은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득점기회를 잡았지만, 파울레타의 슛은 골문을 비켜갔다.

    후반전은 대접전이었다. 한국이 설기현 유상철의 날카로운 슛으로 주도권을 잡는가 했더니, 피구의 코너킥을 받아 파울레타가 백헤딩 슛을 날려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대로 가면 한국과 포르투갈이 16강에 동반 진출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후반 21분 포르투갈 베투 선수가 경고누적으로 두 번째 퇴장을 당하면서 경기의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다.

    대전에서 폴란드가 세번째 골을 성공시키며 승세를 굳힐 무렵, 포르투갈 올리베이라 감독은 과감한 승부수를 띄웠다. 원톱으로 뛰던 파울레타를 빼고 수비력이 좋은 안드라데를 기용한 것이다. 어쩌면 올리베이라 감독은 히딩크 감독에게 ‘사이좋게 비기자’는 메시지를 보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딩크는 승부사다. “6월이면 세계가 한국축구를 보고 놀랄 것”이라고 예언했던 그가 아니던가.

    히딩크 감독은 수비라인을 끌어올려 적극적인 공격을 주문했다. 곧이어 포르투갈의 골문이 열렸다. 박지성의 환상적인 골이 터진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전력을 다해 달려온 박지성을 끌어안았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히딩크는 올리베이라 감독과의 역대 전적에서 열세를 보여왔다. 그런데 세계축구의 변방 팀을 이끌고 깨끗하게 빚을 갚았으니 얼마나 후련했을까.

    포르투갈의 맹렬한 반격이 시작됐다. 올리베이라 감독은 사비에르와 고메스를 투입해 동점골을 노렸다. 29분 피구의 오른발 프리킥이 골포스트를 살짝 빗나갔고, 44분 콘세이상의 슛이 크로스바를 때렸다. 45분이 다 지나고 인저리타임이 3분 남아 있었지만, 인천문학경기장 밖에서는 폭죽이 터졌다. 대전에서는 3대1로 폴란드가 미국을 꺾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관중들은 대전경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국의 D조 1위가 확정됐기 때문이다.

    주심이 경기종료를 알렸다. 포르투갈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주저앉았고, 한국 선수들은 부둥켜안고 16강진출을 자축했다.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플레이를 펼친다는 피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안은 채 그라운드 밖으로 걸어나왔다. 히딩크 감독은 고개 숙인 피구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자신이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있을 때 피구는 라이벌팀 바르셀로나 FC의 핵심 공격수였다. 히딩크는 그런 사람이다. 선수를 찍으면 놓치지 않는다. 발렌시아 감독 시절엔 브라질의 호마리우를 공항에서 납치한 일까지 있었다. 히딩크가 피구를 따뜻하게 위로하는 모습에서 그가 레알 마드리드 감독에 미련을 갖고 있다는 외신보도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야구장 쪽에서는 폭죽이 계속 터졌다. 히딩크 감독은 본부석을 향해 특유의 어퍼컷 포즈를 다섯 번이나 선보였다. 관중들은 ‘대~한민국’에 이어 ‘히딩크’를 연호했다. 한국 선수들은 붉은 악마 응원석으로 달려가 어깨동무를 한 채 발을 구르며 ‘오 필승 코리아’를 불렀다. 그리고는 그라운드로 돌아와 선수단 전원이 손을 맞잡고 양쪽 골라인을 오가며 다이빙 세리머니를 펼쳤다.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선수들 중에 홍명보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10여 년이 넘게 한국축구의 기둥 노릇을 해왔던 그가 눈물을 흘렸다. “이번만은 꼭 한번 이겨보고 싶다”며 월드컵을 기다려온 한국대표팀의 맏형…. 1승을 넘어 16강진출까지 달성한 감격스런 순간에도 그는 후배들을 위한 ‘큰 선물’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라커룸으로 찾아온 김대중 대통령에게 ‘병역 혜택’을 건의해,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낸 것이다. 그의 카리스마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님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경기장 입구에서부터 전철역까지 곳곳에서 태극기가 휘날렸다. 전철역 승강장에서는 ‘대~한민국’ 구호를 슬그머니 바꿔 부르는 젊은이들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대~한민국’ ‘8~강 가자’ ‘4~강 가자’ ‘결~승 가자’ ‘세~계 최강’….

    전동차는 부천을 지나 한강을 건넜다. 서울역에서부터 일군의 붉은 악마들이 플랫폼에 나타났다. 시청 종각 종로3가 종로5가 동대문에서 붉은 악마들은 계속해서 열차에 올라탔다. 차에 탄 사람들과 차를 기다리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대~한민국’을 외쳤다. 새벽 2시 동대문 거리에는 여전히 태극기가 휘날렸다. ‘대~한민국’ 박자구호에 맞춘 자동차들의 경적 퍼레이드도 계속됐다. 2002년 6월의 축제는 그렇게 무르익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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