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의 거리가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월드컵 열기는 갈수록 용광로처럼 달아오른다. ‘대∼한민국!’ 함성은 높아만 간다. 이에 부응하듯, 한국축구대표팀도 ‘순항’중이다. 그러나 이쯤에서 한가지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봄직하다. 결코 예사롭지 않은, 전례도 없는 이 희대의 열정과 일체감, 그 어떤 잣대로도 설명하기 난망한 집단몰입 현상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친지 한 분이 전해준 얘기다. 자신의 친구가 한국팀 경기를 보았냐고 묻길래 보지 못했다고 답했단다. 축구가 재미 없어서가 아니라 그날따라 공교롭게도 못볼 사정이 생겼단다. 그런데도 그 친구는 대뜸 이런 반응을 보였단다.
“너, 알고보니 매국노구나.”
물론 우스갯소리일 것이다.
개막 이전, 월드컵 열기를 높이기 위해 갖가지 궁여지책이 쏟아져나올 때였다. 필자도 홈스테이 조직을 위한 한 모임에서 사회자의 부탁으로 ‘한 말씀’할 기회를 가졌다. 당시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난다.
“솔직히 16강에 진출하면 더없이 기쁘겠지만, 우리가 목숨 걸고 성취해야만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설령 16강에 오르지 못한다 해도 이를 도약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한국대표팀에 성원을 보내고 외국 손님들을 반갑게 맞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우리 전통문화와 생활습관을 올바로 알려 세계 속에 한국의 위상을 드높이자….”
그런데 이런 필자의 말을 들은 다혈질의 사회자가 “틀렸다”는 지적을 하고 나왔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반드시 16강에 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보다 더 길게 발언한 그의 이야기인즉슨, 필자처럼 나약한 말을 해선 안된다는 거였다. 사실 필자는 축구 전적에만 집중되는 분위기를 좀 가볍게 해보려고 그런 발언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매국노’란 표현까진 안썼지만, 앉아 있기 무안할 정도로 필자를 나무랐다.
16강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며, 필자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은 바로 그 두가지 에피소드다. 어쩌면 그것들이야말로 이후 터져나온 월드컵 열기를 예견케 해준 작은 사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온종일 TV에서 흘러나오는 ‘대∼한민국’ 함성을 들으며 대(對) 포르투갈전에서 터진 절묘한 골을 보고 또 보았다. 속이 다 시원했다. 속이 시원하다는 건 재미있다는 경지, 기분좋다는 경지, 기쁘다는 경지를 넘어서는 그 무엇, 그러니까 카타르시스 메커니즘이다. 쌓인 속을 풀어주고 위무해주는 그 신명 앞에서 누구인들 기(氣)가 살지 않겠는가.
한국인의 기질
사람들이 자신의 인격수준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듯, 집단도 변수는 다르지만 집단 자체의 성격을 지니게 마련이다. 먼저 한가지 이해할 것은 성격(性格·personality)과 기질(氣質·temperament)은 용어부터 다르다는 점이다. 흔히 성격은 타고나는 것이어서 일생동안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도 곧잘 인용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기질은 타고나지만 성격은 후천적 학습에 의해 만들어진다. 기질은 개인 특유의 행동양식인 성격의 기초가 되는 유전적이고 생물학적인 성질이다. 반면 성격은 다분히 기질이 어떻게 학습되어지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때문에 후천적이다. 바꿀 수 없는 게 기질이라면 반대로 성격은 바꿀 수 있다.
고서들을 보면, 한국인을 지칭할 때 ‘가무를 좋아한다’는 말이 꼭 따라붙는다. 우리 역사서든 외국인이 쓴 책이든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는 사실은 기질과 성격 면에서 모두 가무를 즐기는 낙천적 민족임을 암시한다. 수많은 역사적 사실을 제쳐두고 하필 ‘가무를 숭상하는 종족’으로 묘사한 걸 보면 그 정도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질적으론 다분히 가무를 즐기는 신명꾼들이지만,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그 신명을 가로막는 사건들에 파묻혀 오래 살다보면, 성격 한 구석이 맺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한국의 문화를 한(恨)의 문화라고 하겠는가.
이를 더 실감케 하는 증거로 미국 정신의학자들이 활용하는 진단편람이 있다. 이 편람은 서양의학적 기준으론 도저히 해석하기 어려운 질병이 있다고 했다. 세계적으로 25개 정도를 드는데, 이중 한국이 2개를 차지한다. 하나는 화병(火病·Hwa-byung)이고 다른 하나는 신병(神病·Shin-byung)이다. 신병과 화병은 기질과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한국 문화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질병을 개념화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특징을 지닌다. 때문에 이 질병들을 문화증후군이란 새로운 용어로 진단편람에 넣고 있는 것이다.
화병. 한국의 많은 여성들이 앓아온 병이다. 우울증도 아니고 분노로 인한 자괴감도 아니며, 정신과 신체의 증상만으론 해석할 수 없는 병이다. 그래서 보통 이 세 가지 모두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으로 설명한다. 그 원인은 한(恨)이다. 그 원인은 억압이다. 한이나 억압은 정서와 매우 깊은 관계가 있고, 정서는 정이라고도 표현되는 감정적 양태가 주를 이룬다. 이런 기질적 정서는 맺히기도 잘하고 풀리기도 잘한다.
월드컵 열풍 이후를 예측해보기 위해선 이런 기질 외에도 현재 한국인이 지니고 있는 후천적 성격 몇 가지를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몇 년 전 젊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집계된 한국인의 성격을 요약해본 것이 있다.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으로 상위에 오른 몇 가지는 이렇다.
(1)성급하다 (2)감정적이다 (3)비합리적이다 (4)남의 눈치를 본다 (5)집단주의다 (6)허세를 부린다 (7)이기적이다 (8)변화를 싫어한다 (9)내성적이다 (10)권위적이다. 이것이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으로 상위에 오른 열가지다. 물론 이 결과는 특정 연령층의 반응이라 한국인을 대표한 결과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한 단면을 보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응답 학생들의 ‘자아방어’에 대해서도 검사해보았다. 자아방어란 개인이 주변과 적응하기 위해 사용하는 습관적 행동이나 사고로서 적응양식과 관계가 있다. 말로는 한국인의 특징이 ‘그렇다’고 스스로 표현하면서도 정작 응답자 자신의 자아는 어떻게 방어 메커니즘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본 것이다. 4가지 특징이 있었다. (1)반동형성(反動形成·reaction formation) (2)동일시(同一視·identification) (3)수동공격성(受動攻擊性·passive aggressive) (4)투사(投射·projection)가 그것이었다.
이것들은 피검자의 내면적 적응양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간단히 주석을 달면, 반동형성이란 받아들일 수 없는 충동이나 욕구로부터 벗어나려 그와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는 격이다. 동일시란 주위의 중요 인물들의 태도와 행동을 닮는 것을 말한다. ‘공격자와의 동일시’란 것도 있는데, 이는 부정적인 것을 비판하면서도 그 부정적 면을 닮는 경우다. 시어머니 욕하면서 시어머니 닮는 것과 같다. 수동공격성이란 자신의 공격성을 남의 힘을 빌어 표현하거나 비협조적 태도로 표현하는 것이다. 투사란 자신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동이나 욕구를 외부 탓으로 돌리는 것을 말한다. 잘되면 내 탓, 잘못되면 조상 탓인 것과 같다.
이상이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의 현주소라면, 월드컵 열풍에 목숨 건 듯 비치는 이유와 함께 우리들이 그토록 소망했던 목표(실제든 거품이든)를 이루지 못했을 때의 행동양식을 유추해보는 근거가 될 것이다. 집단행동의 결과는 언제나 개인의 갈등이 집단의 역동성과 맞물려 일어나고, 또 이에 불을 당기는 다변적 요인이 있을 때 더욱 쉽게 행동화할 수 있는 속성이 있다. 때문에 한국대표팀이 16강에서 밀려난다면 그 한을 또 어떻게 쌓을 것이며, 어떤 행동화로 카타르시스를 분출할 것인지 정말 긴장됐었다. 위에서 설명한 개인으로서의 한국인이 지닌 성격표현이나 자아방어기제가 집단행동화에 아주 중요한 기폭제로 작용할 소지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었다.
기질적으로 가무를 좋아한다는 것은 낙천적임을 뜻한다. 이럴진대, 후천적으로 억압을 한으로 맺고 수동공격적으로 살아온 처지라면 누군가 불을 지르기만 하면 쉽게 타오를 속성인 터인데, 그 후유증을 누가 걱정하지 않으랴 싶다. 붉은 악마의 헌신적 응원도 정신역동적으로 본다면 개개인의 맺힌 한이 많다는 뜻이다. 맺힌 한을 개인적으로 행동화하기보다는 집단역동을 빌어 수동공격적으로 표현하며, 열성적인 리더의 행동양식을 그대로 모방하는 가운데 에너지가 응집된 것으로 해석된다.
역사적인 에너지의 결집
우리가 지닌 기질과 성격으로 미뤄 그같은 집단행동화 결과는 쉽게 예측된다. 투사라는 방어가 한몫 했을 것이다. ‘누구 때문에’라며 원인을 외부로 뒤집어 씌우는 일인데, 뒤집어 씌우지 않더라도 뒤집어써야 마땅한 사건이나 사정이 우리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판에, 만일 우리가 졌었다면 어떤 형태로든 그 억눌림이 집단행동화했을 것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 집단행동화할 것인가 하는 것은 럭비공처럼 정말 어디로 튈지 아무도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쨌든 이겼으니 정말 기쁘다. 만일 졌다면 어땠을까. 한번 가정해보자.
“당신이 신나는 월드컵, 그것도 우리나라가 출전한 D조 경기를 보러갔는데 우리 팀이 결승골을 성공시켜 승리했다면 기쁠 것이다. 즐거울 것이다. 속이 시원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감도 생길 것이다. 낯선 사람에게도 너그러워질 것이다. 우쭐해질 것이다. 이런 만족감을 누구와도 나누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열광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상대 팀에 일격을 당해 다 이긴 경기를 망쳤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할 수 없는 일로 체념할 수밖에 없겠지만, 일단은 분한 마음일 것이다. 아쉬울 것이다. 화가 날 것이다. 흥분할 것이다. 그리고 행동화할 것이다. 축구장을 나오면서 아수라장이 된 군중 속에 끼어 당신도 한몫 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모습은 개인의 성격만으론 해석되지 않는다. 소위 집단행동의 역동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집단행동 과정을 설명한 간단한 이론이 하나 있다. 집단행동화에 이르는 네 단계를 설명한 것인데, (1) 주의를 집중할 만한 사건의 발생 (2) 흥분에 의한 소용돌이 (3) 공통된 목표의 출현 (4) 목표를 향한 공격적 행동화가 그것이다.
축구에 진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분명히 화 나는 사건이다. 얼마나 고대하고 준비했던 일인데 패배라니…. 분명 큰 사건임에 틀림없다. 이때는 분명히 자신의 울분을 군중의 힘을 빌어 흥분의 소용돌이로 공유할 것이다. 내가 흥분한 게 아니라 다수가 흥분한 속에서 나도 흥분하는 수동공격형의 소용돌이가 점화되는 것이다. 공동의 목표는 이겨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져버렸으니 목표를 잃게 됐다.
이때 작용하는 것이 투사 메커니즘이다. ‘누구 때문에’란 편리한 투사 기전이 있다. 직접적으로는 축구 관계자겠지만, 광범위하게는 개인이나 집단이 가졌던 모든 억압된 핵심요소들이 결합하여 누군가에 의해 주도되는 공통된 목표가 다시 생겨나는 것이다. 일단 공통 목표가 설정되면 군중은 목표를 향해 돌진할 뿐이다. 이런 이론대로라면 우리가 이겼기에 천만다행이라는 긴장감을 떨쳐버릴 수 없다(꼭 그렇게 진전됐을 것이란 단정이라기보다, 그런 인위적 공통 목표를 설정할 요소들이 현재 너무 많이 깔려있다는 말을 강조한 것이다).
집단행동도 개인 성격의 발달처럼 사회적 발달의 한 단계에서 볼 수 있는 과정이라 생각된다. 개인이 어리면 유치한 행동을 하고, 성장하면 성숙한 행동을 하듯, 사회란 집단도 그 발달 단계에 따라 미숙하거나 성숙한 집단행동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붉은 악마가 주도한 이번 월드컵 응원은 경기장 내외를 막론하고 전국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어 일체감을 부여해 역동적 모티브를 제공했다. 되돌아보더라도 언제 우리가 자발적(조직화의 노력은 일부 있었겠지만)으로 이런 일체감을 나눠본 적이 있었나? 역사적 사건이다. 역사적인 에너지의 결집이다.
월드컵이 아니더라도 열풍이 지나가면 허전한 법이다. 카타르시스라고 하지만 그 카타르시스도 지나가면 그뿐이다. 그보다 더 강한 카타르시스에 대한 욕구가 생기기 때문에 시원한 것은 잠시일 뿐이다.
열풍이 지나간 흔적 위엔 상반된 두 가지의 극단적 현상이 자생한다고 생각된다. 그 하나는 의연함이고 다른 하나는 분노다. 우선 16강이 좌절됐었다고 가정하면, 어떤 형태로든 집단적 행동화로 수동공격적 욕구를 해소하려 했을 것이다. 간단한 화풀이에서부터 심하게는 무질서의 극치까지 상상해볼 수 있다. 이러쿵 저러쿵 탓할 사건들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투사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투사 내용의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기존 질서를 위협할 만큼의 사건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집단현상은 개인의 갈등에 바탕을 두고 있긴 하지만, 집단이란 특수한 역동성 때문에 동질적인 위안과 일체감을 준다. 이 모든 것은 분노의 표현이다. 분노란 우리가 기대했던 소망의 수준에 미달하면 누구에게나 생기는 현상이다. 하지만 분노를 어떻게 조절하는가 하는 행동양태는 개인별로 아니면 사회적 안정성의 측면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다.
1950년대 한 외국학자는 한국인의 특징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사람은 정서적으로 내향성이 강하지만 정서적 불안정도 심하여 감정의 억압과 발산이 교체되어 나타난다.” 화병이라고까지 표현되는 한국인의 문화증후군이 정서적으로 내향성과 관계있다면,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점은 바로 수동공격성으로 표현되는 집단행동화를 의미한다.
그런데 16강에 오르고 나니 이런 것들이 모두 기우였음이 증명됐다. 성급한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국민들의 성숙한 자세’라고 단정해버린다. 나는 이것이 성숙이긴 하지만, 이겼으니까 그런 것이라고 보고 싶다. 과연 졌어도 그랬을까. 앞서 말한 피검자의 방어기제 가운데 반동형성이란 것이 있는데, 우리가 졌더라도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듯 마음을 비웠을까 의문이 남는 것이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발달과정은 같다는 느낌이다. 지구상에 여러 종족과 여러 사회가 있지만, 서로 다른 이유는 개인이나 종족이 발달해가는 과정의 속성이나 속도가 판이하기 때문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비슷한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확신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개인 속성이나 집단행동 성향이 이런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설명해야지, 나쁘고 좋다거나 애국자 아니면 매국노란 식의 극단적이고 이분법적 논리는 옳지 않다.
신명풀이와 한풀이
외국의 석학들 가운데 한국인은 지도자를 동일시하는 행태가 강하다고 지적하거나, 공동의 위기를 맞아야 일체감을 갖는다고 지적한 사람도 있다. 이런 학자들은 한국의 정치인들이 좀더 안정된 정치를 해왔다면, 지금보다 더욱 성숙한 발전을 이뤄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늘 분열처럼 비쳐지는 각양각색의 목소리가 있지만, 그 속에는 공동의 적과 적개심의 대상만 있다면 똘똘 뭉치는 속성이 잠복해 있다는 것이다.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우리가 한동안 일본을 꼭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민족적 일체감을 생각한다면, 그 말의 의미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 월드컵 16강 진출로 그동안 우리 자신을 비하해왔던 열등감이 사라지는 계기를 만들었고, 나아가 열강과도 어깨를 겨눌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은 사회적 발달 단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기쁜 일이다.
그러나 붉은 악마들이 보여준 일체감이 신명풀이인지 한풀이인지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설사 그것이 한풀이였다 하더라도 긍정적인 힘으로의 전환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그만큼 예전에 비해 사회가 발전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회 구성원 중에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소수의 리딩그룹이 있고 다수의 사람들은 리딩그룹의 지도력을 동일시하며 살아간다. 대표팀 감독 히딩크를 대통령감으로 ‘수입’해야 한다는 농담을 즐기는 이들도 있는데, 이는 히딩크의 지도력에 대한 선망을 표현한 것이다. ‘히딩크 신드롬’으로까지 불리며 사회 전반에 번져가는 이런 농담들은 그의 지도력이나 경영능력을 이해하고, 그런 경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사회가 성장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히딩크가 명장이라도, 그가 낙하산식 혹은 지연과 학연에 치우친 선수 선발, 주먹구구식 훈련, 축구팀이 산으로 올라갈 정도로 간섭하는 사람들, 감독 흔들기 등 케케묵은 옛 풍토의 한가운데 머물러 있었다면 그인들 좌초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을 것이다. 16강 진출은 이제 그런 식의 선수 선발을 고집하거나, 정신력 운운하며 억지만 써서는 비전이 없다는 것을 통찰한 사회적 수준이 이뤄낸 값진 결과라고 본다. 긍정적인 변화다. 비단 축구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균등한 단계적 발달이 조화를 이룸으로써 우리들이 소망하는 문화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이제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부패하고 무질서하고 공황상태인데, 축구만 기를 펼 수 있는 상황은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훈련을 위해 과감히 투자해야만 발전할 수 있고, 그 뒤에 일체감을 바탕으로 공동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신바람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마음으로 체득한 소중한 경험을 준 2002한일월드컵이다. 소위 사회지도층이라 불리는 사람들, 특히 정치·경제·교육 등을 담당한 이들의 도덕성을 사회 구성원 다수가 동일시할 수 있는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점을 히딩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 앞에 닥칠 일이나 위기를 침착하게 극복할 수 있도록 능동적 집단을 형성해나가야 하는 점이다. 신바람 나서 신명풀이를 하는 것이나, 화 나서 화풀이를 하는 것이나, 외견상 집단행동으로서의 양태는 유사하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 잠재한 에너지는 확연히 다르다. 신명풀이가 긍정적인 에너지로의 전환으로 바람직한 면을 가졌다면, 화풀이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통찰해야 한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무엇보다 기가 살아서 기분이 좋다. 단지 기우로 남는 한가지 욕심이라면, 이 기운이 생산적 에너지로 이어지고 활용되길 바라며, 또 다양한 가치를 수용하는 연습의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그 기운이 열등의식과 적개심 그리고 화풀이 같은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신명풀이로서의 즐거운 일체감으로 발전하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