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호

한국형 에이즈 환자 1호를 찾아라!

미군부대 윤락녀냐 동성연애자냐

  • 감명국 < 자유기고가 > eos@newsbank21.com

    입력2004-09-07 13:3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에이즈(AIDS)에도 ‘토종 바이러스’가 있다. 이 한국형 에이즈 바이러스 1호 환자를 추적하면 에이즈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경로를 알 수 있다. 1호 환자를 쫓아서 국내 에이즈 감염 체계 데이터베이스를 만들면 에이즈를 관리하고 예방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새로운 감염자가 발견되더라도 게놈 상황표를 통해 감염 경로를 추적할 수 있고, 전파자가 확인되면 제3자에게 옮길 가능성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
    월드컵 첫승의 감격이 전국을 뒤덮은 6월초. 용광로 같은 축구 열기 속에서도 묻어버릴 수 없는 섬뜩한 사건이 신문 사회면 한 모서리에 실렸다.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환자인 윤락여성 구아무개(28)씨가 여수와 포항 등지를 오가며 수백명의 남성과 성행위를 가져온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에이즈 엽기 괴담’이 현실로 우리 앞에 다가선 셈이다. 이 지역의 경찰서와 보건소는 한때 뭇남성들의 폭주하는 문의전화로 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구씨의 인상착의와 함께, 에이즈의 초기 증상 및 검사 방법 등을 묻는 사람들의 초조하고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세계 어느 나라 못지않게 매매춘 행위가 폭넓게 퍼져 있는 국내 유흥문화. 여기에 어느 대학교수의 “에이즈는 성병”이라는 단정처럼 섹스를 통해 일파만파로 퍼져가는 에이즈 바이러스(HIV)의 심각성. 이번 사건은 그동안 “에이즈 방역체계만큼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하던 보건 당국의 허점을 HIV가 인체에 침투하듯 파고든 강력한 경고였다.

    ‘에이즈 엽기 괴담’이 발생한 직후인 6월7일.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에 위치한 국립보건원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취재를 요청하자 관계자는 대뜸 윤락녀 구아무개씨에 대한 보건당국의 입장부터 해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취재 목적은 따로 있었다. 국내의 에이즈 ‘1호 환자(Patient Zero)’ 추적 연구가 어느 정도까지 진척되고 있는지가 필자의 주된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국내 공식 에이즈 감염자수 1686명

    국립보건원 방역과 이종구 과장은 “현재 국내의 에이즈 감염자는 지난 3월까지 1686명으로 집계되었다. 학계에서는 실제 감염자 수가 이보다 약 3∼5배 정도 더 많지 않냐고 추정한다. 하지만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10배수 이상일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또한 숨어있는 국내 감염자도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구씨 경우처럼 본인이 음성적으로 윤락 행위를 할 경우, 이를 엄격히 통제할 수 있는 장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과장은 “에이즈 감염자는 6개월마다 종합병원에서 항체검사를 받고 정기적으로 투약, 상담토록 돼 있으나 이를 어겨도 처벌할 규정이 없어 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렇다면 국내의 에이즈 방역 대책은 속수무책인가? 한 관계자는 “조만간 획기적이고 진일보한 연구 결과가 발표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호 환자’를 추적해 국내 에이즈 감염체계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최근 서울대 등 학계에서는 국내 에이즈 감염자의 바이러스를 분리해 유전 정보를 분석한 결과, 한국인만의 뚜렷한 특징이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일명 ‘한국형 바이러스(Korean clade)’가 그것이다. 수많은 변종 바이러스 가운데 국내 감염자의 경우 유독 한 변종 바이러스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특정의 한두 사람이 국내에 에이즈를 집중적으로 전파했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학계에서는 다행스러워하는 입장이다. 그만큼 실체에 접근하기 쉽기 때문이다.

    국립보건원에서는 이에 기초하여 현재 국내 에이즈 ‘1호 환자’를 추적중이다. 이과장은 “국내 에이즈 감염자의 경우, 1990년대 이후 거의 대부분이 국내 성접촉에 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내 에이즈 감염자는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맞는 에이즈 바이러스 연구가 시급하고, 그런 면에서 ‘한국형 바이러스 1호 환자’ 추적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보건 당국도 ‘1호 환자’연구에 거는 기대가 꽤 큰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1호 환자’란 무엇인가. 그리고 ‘1호 환자’추적으로 국내 에이즈 연구가 획기적으로 발전하리라는 ‘성급한’ 기대는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현재 세계 에이즈 연구는 미국이 이끌고 있다. 미국에서는 1981년 에이즈가 처음 보고된 이후부터 연구를 시작했다. ‘1호 환자’라는 말이 처음 화제가 됐던 것도 미국이다. ‘1호 환자’란 질병의 씨앗을 제일 먼저 퍼뜨린 사람을 의미한다. 미국은 ‘1호 환자’를 다양하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추적했는데, 그 결과 어느 항공사 남자 승무원이었다.

    감염자 수백명의 원인 제공자로 드러난 그는 직업 특성상 해외 각 지역의 여성과 성관계를 갖다가 우연히 에이즈에 감염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감염 사실을 모른 채 미국에서 숱한 성관계를 가졌고, 그로 인해 수십명의 여성들이 감염된 사실이 밝혀졌다. 그 여성들을 매개로 다시 수백명이 넘는 2차, 3차 감염자가 생긴 것이다.

    국내에서 ‘1호 환자’연구의 중요성이 언급된 것은 1998년부터다. 국내 에이즈 연구의 대표적인 학자로 꼽히는 서울대 김선영 교수는 “한국에는 ‘한국형 에이즈 바이러스’가 있으며 원인 제공자인 ‘1호 환자’가 있을 것이다. ‘1호 환자’를 추적하면 질병의 감염 경로 및 속도 유형을 밝히는 단서가 나오기 때문에, 치료를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라고 주장했다.

    인류와 HIV 간의 쫓고 쫓기는 전쟁이라고까지 표현되는 에이즈 연구. 2010년 이내에 반드시 정복하겠다던 인류의 에이즈 연구는 불행하게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HIV를 확실히 잡지 못하는 이유는 염색체(Genome)가 RNA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RNA 성분은 그 효소가 정교하지 못해 바이러스 증식을 위한 유전정보 복제 때 실수를 자주 저지른다. 즉 수많은 변종 바이러스를 만드는 것이다. 감기와 구제역 등도 마찬가지 경우다. HIV처럼 RNA 구조로 되어 있는 염색체는 치료 약물의 그물을 수시로 벗어나는 지독한 변종 바이러스들이다.

    세계의 내로라하는 생물의학계 석학들은 지난 1980년대 초 처음 에이즈가 알려진 이후, 20여 년간을 에이즈 정복에 매달리고 있다. 그 결과 질환이 발생한 지 불과 2년 만에 그 원인 바이러스가 HIV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그로부터 2년 후 HIV 염색체 전체가 밝혀졌다.

    1987년에는 에이즈 치료제의 효시인 AZT가 나왔다. 이때만 해도 에이즈 정복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하지만 HIV는 그리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마치 인간의 능력을 비웃듯 변형에 변형을 거듭했다. 현재 HIV의 종류는 숫자를 열거하기 힘들 만큼 수많은 변종이 가지치기를 계속하고 있다. 감염자 체내에서 하루에만 1백억개 이상의 새 바이러스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중 10만분의 1에 해당하는 바이러스 10만개가 변종 에이즈 바이러스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바이러스 중 단 1개라도 치료 약물에 내성을 가지는 새 바이러스가 생성된다면 인류는 다시 연구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한때 HIV 99%를 죽이는 획기적인 치료제로 알려졌던 AZT도 그 효능이 한계에 이른 지 오래다. 현재 치료제로 가장 각광받고 있는 ‘칵테일 요법’은 여러가지 약물을 섞어서 최대한 많은 변종 바이러스를 죽인다. 하지만 이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칵테일 요법으로 치료한다 해도 내성을 가진 또 다른 변종 바이러스(학계 일부에서는 이를 ‘슈퍼 에이즈 바이러스’라고 부른다)가 언제 생성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김선영 교수는 이런 HIV의 인체 침투를 ‘스파이’로 비유해 설명하고 있다. “HIV라는 간첩이 적진(인체)에 침투하면 주요 시설(인간의 면역체계와 관련된 세포)을 공격하여 RNA로 구성된 자신의 염색체를 인간 염색체 성분인 DNA로 바꾼다. 즉 적군 복장으로 변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완벽한 변장술로 적 중추시설 심장부(세포 핵)까지 잠입해 ‘인테그라제’라는 단백질을 무기로 인간 유전자의 한 귀퉁이를 끊은 뒤 그곳에 DNA로 변신한 자신의 유전자를 심는다. 그러면 HIV는 인간 유전자와 동일한 형태로 체내에 존재하게 된다. 즉 변장한 스파이가 적진에서 마음껏 활개칠 수 있는 신분과 지위를 얻는 셈이다. 그리고 얼마 안가 그 사회 조직은 활발한 스파이 활동으로 서서히 허물어지게 된다.”

    변종 바이러스가 연구 걸림돌

    애초의 전망과는 달리 에이즈를 완전히 정복하는 것은 요원하리라는 비관론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현재 알려진 HIV의 종류는 무척 많지만 큰 줄기로 분석하면 20여 종으로 볼 수 있다. 물론 ‘한국형 바이러스’는 이보다 더 하위 개념이다.

    여기서 대략적인 큰 줄기만 살펴보자. HIV는 크게 1형과 2형으로 나뉜다. 1형은 침팬지에서, 2형은 아프리카 검댕원숭이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HIV-1형은 다시 M, O, N형으로 나뉘고, M형은 유전자 조직에 따라 A, A1, A2, B, C, D, E, F1, F2, G, H, J, K형 등으로 나뉜다. 이 종의 변종도 수십개로 가지를 친다. HIV-2형도 이미 7종(A∼G)의 변종이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각 유형은 지역별 특성을 지닌다. 전세계적으로 HIV 가운데 가장 많은 수치인 16%를 차지하는 B형은 흔히 구미형 유럽형 호모섹스형 바이러스로 알려지고 있다. A형과 C형은 아프리카에서, D형은 인도에서, E형은 태국 등 동남아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다. HIV-2형은 서아프리카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미국과 서구 유럽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일대의 바이러스 유형인 B형은 다시 유전자의 아미노산 배열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종류가 나뉘는데, ‘한국형 에이즈 바이러스’는 이 가운데 한 종류다. 즉 그 계보는 HIV-1형-M형-B형-한국형 에이즈 바이러스로 분류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97년 김선영 교수의 연구 결과로 처음 발표되었고, 곧 국립보건원에서 국내 에이즈 감염자를 대상으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국립보건원 면역결핍연구실의 이주실 실장은 “현재 국내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 가운데 약 80% 이상이 ‘한국형 HIV’형태를 띠고 있다”고 밝혔다.

    국립보건원 면역결핍연구실은 지난해 ‘국내에서 유행하는 HIV 전파 경로 유형’을 집중 조사해 자료를 낸 바 있다. ‘1호 환자’ 추적의 당위성을 설명해주는 자료다. 이 연구자료를 통해 국내 에이즈 감염 실태를 알 수 있다.

    국내 감염은 대부분 동성 또는 이성간의 성접촉에 의한 것으로 그 비율은 무려 89%다. 수혈 및 혈액제제는 3.4%, 수직 감염(모유 등)은 0.2%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원인 불명자 7.4%도 대부분 성관계에 의한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섹스가 직접 원인인 셈이다. 특히 1996년 이후 신규 감염자 분포에서 동성연애 감염 비율이 40%에 가까운 점이 눈길을 끌었다.

    연도별 변화에도 이런 특징이 두드러졌다. 1993년 이전에는 해외에서 감염된 사람이 전체의 40∼50%를 차지했으나, 1995년을 기점으로 이후에는 국내 감염이 거의 80%였다. 최근에 발생한 에이즈 환자 역시 거의 대부분은 국내 감염이었다. 역시 ‘한국형 에이즈 바이러스’의 존재 근거가 되는 수치다.

    한 가지 특기할 점은 국내 환자의 남녀 성비율을 보면 남성이 6.5:1로 압도적 다수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는 외국 사례에 비추어볼 때 의문스러운 수치다. 남성이 여성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경우는 미국, 유럽에서 보듯이 동성연애 감염 비율이 이성 성접촉보다 훨씬 높은 경우다. 실제 미국은 동성애 감염 비율이 46%로, 이성 접촉 감염(11%)보다 훨씬 앞서고 있다.

    하지만 국내 HIV 감염 원인 1위는 이성간의 정상적 섹스로 그 비율이 66%나 된다. 이성간 성 접촉이 HIV 감염의 주원인인 아프리카나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 조사한 감염 남녀 성비는 1:1이다. 궁금한 대목이다. 이실장은 이같은 조사 결과에 대해 “국내의 HIV 감염 경로에서 동성연애 비율이 과소평가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동성애 감염 과소평가

    국내에서 ‘한국형 HIV 바이러스’가 급속하게 퍼지는 현상은 이 조사 결과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B형과 nonB형(B형을 제외한 다른 모든 유형)의 비율은 16:13으로 이 기간중 B형이 차지하는 비율은 55.2%에 그쳤다. 그러나 1993년부터 2000년까는 B형이 무려 84.8%나 된다. 남성의 경우 국내 감염자는 B형이 100%였다.

    반면 해외에서 옮은 이는 모두 nonB형이었다. 이 당시는 ‘한국형 바이러스’를 따로 구분짓지 않고 전체 B형 범주에 넣어 조사했다. 오늘날 B형의 80% 이상이 ‘한국형 바이러스’인 점을 감안하면 1994∼95년을 기점으로 국내에서 B형, 그중에서도 특히 ‘한국형 바이러스’가 집중적으로 퍼졌음을 쉽게 알 수 있다. 1990년대 이후부터 ‘한국형 바이러스’라는 출중한 국가대표 선수가 단독 드리볼을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보건당국이나 학계에서 ‘1호 환자’연구를 서두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실장의 설명을 들어보자.

    “1호 환자는 비단 한 개인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몇 명의 집단이 될 수도 있고, 어느 특정 지역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조사 결과, 국내 에이즈 바이러스는 뚜렷한 하나의 특징을 가진 바이러스 집단이 매우 강한 번식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집단이 1990년대 이후 지금까지 국내 에이즈 바이러스를 장악하고 있는 셈이다. 이 집단을 역학조사해서 역추적으로 최초 발생지를 찾아내야 한다.”

    어찌 보면 ‘1호 환자’ 추적은 국내 에이즈의 역사를 다시 한번 통찰하자는 의미와 같다. 한국 최초의 에이즈 감염자는 지난 1985년 11월 중동의 사막에서 일하던 한 근로자다. 이듬해인 1986년에 5명이 더 발견되었고, 이후 급속히 퍼졌다. 물론 모두 해외에서 옮았다. 이때부터 국내에도 ‘에이즈 공포’가 본격적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1987년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이 제정된다.

    한국인 최초 감염자는 중동 근로자

    그렇다면 한국의 에이즈 ‘1호 환자’는 중동에서 일하던 그 근로자일까? 그렇지는 않다. 현재 애석하게도 국립보건원에는 이 환자에 대한 어떠한 유전자 정보나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그 환자가 ‘B형’인지, 또는 ‘한국형 바이러스’ 소유자였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물론 그 환자는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1호 환자’로 보지 않는 이유는 그가 감염을 확인한 뒤 제2, 제3의 전파 행위를 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우디 현지에서 병이 옮은 사실이 확인된 후 곧바로 국내로 소환, 당국의 보호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5년 이후 해마다 에이즈 감염자가 늘어났지만, 국립보건원의 당시 자료는 상당히 미흡한 수준이다. 김선영 교수는 이에 대해 안타까운 말을 전하고 있다.

    “외국에 견주면 국내의 에이즈 감염자 숫자는 아주 적은 편이다. 보건 당국이 심각성을 인식하고 환자 유전자 정보와 자료를 초기 단계부터 착실히 준비해두었더라면 아마 지금쯤 전체 감염자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방대한 ‘게놈(염색체) 상황판’을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것으로 감염성 질환 관리체계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1000여 명 이상으로 환자가 급격히 불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번 여수 윤락녀 구씨 사건도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초기 국내 자료가 부족한 점은 국립보건원의 이실장도 일부 인정하고 있다. 1985년에 나타난 첫 감염자에 대한 정보는 물론 1980년대 자료 전체가 불투명한 실정이다. 1990년대 들어서 어느 정도 자료의 중요성을 인식했지만,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95년 이후부터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김교수는 “1990년대 이후 자료만이라도 면밀하게 역학조사하면 ‘한국형 바이러스’의 특징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완벽한 의미의 ‘1호 환자’는 어렵겠지만, 그 실체나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현재 이 연구는 국립보건원 면역결핍실과 서울대 미생물학과 천종식 교수가 함께 진행하고 있다. 이 실장은 6월초 현재 연구 진척도를 30% 정도라고 귀띔했다. 앞으로 두세 달 정도 더 연구해야 윤곽이 드러난다고.

    서울대 천교수 연구실에는 HIV 조직표가 그려져 있다. 현재 남은 작업은 ‘한국형 에이즈 바이러스’의 각 샘플로 유전자 염기서열을 분석하고 이를 역추적하는 것이다. 천교수 역시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라며 대단히 신중하게 전망하고 있다.

    “반드시 필요한 연구 작업인데, 때 늦은 감이 있다. 국내 감염자의 유전자 샘플과 자료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1호 환자’의 실체에 얼마만큼 다가갈 것인지가 관건이다”

    국립보건원에는 국내 감염자들의 유전자 역학구조와 면담 자료가 있다. 1차적으로 각 샘플들의 역학구조를 분석해 병이 옮은 경로를 파악한다. 즉 계보도를 그리는 것이다. 다음 이 계보도에 당사자들이 진술한 감염 경로를 대입해 그 뿌리를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이다.

    현재 연구팀 관계자들은 국내 1호 환자 진원지를 외국인 상대 유흥업소가 많은 지역과 그곳의 윤락녀로 보고 있다. 이는 ‘한국형 바이러스’가 미국과 유럽에서 많이 발견되는 B형에 속한다는 점과 1980년대 후반에 발견된 초기 HIV 감염자 면담 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다. 지난 1986년에 발견된 국내 최초의 여성 환자는 외국인 상대 윤락녀였다. 특히 1986년부터 1988년까지 3년간 국내 감염자 35명 가운데 여성이 무려 13명이었다.

    이들의 직업은 모두 외국인 상대 윤락녀였다.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당시 감염 장소를 조사해보면 미군 부대 근처 윤락업소임을 알 수 있다”고 귀띔했다. ‘한국형 바이러스’의 최초 진원지가 미군부대일 수도 있다는 가설이 제기되는 셈. 이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대단히 조심스럽다.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국립보건원에서도 비슷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1호 환자’일 가능성이 높은 집단은 윤락가와 동성애자라는 것. 현재 한국형 바이러스 감염자 통계를 보면 남성이 여성보다 6∼7배나 많다. 그런데도 초기 환자의 성비는 비슷하다. 따라서 1980년대 후반의 ‘한국형 바이러스’를 윤락여성이 이끌어왔다면, 1990년대 들어서는 동성애자 그룹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이 높다.

    국내 에이즈의 진원지가 사창가라는 가설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국내 여성 감염자는 남편에게서 뜻하지 않게 옮은 일부 가정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윤락여성이다.

    1990년 11월에 에이즈 감염자로 밝혀진 여성 최모씨(당시 31세)는 내국인을 상대로 하는 카페 종업원이었다. 그전까지 모든 여성 감염자가 외국인 상대 윤락여성이었다. 그는 최초의 내국인간 성접촉으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윤락여성이다. 학계에서는 “국내 남성 동성애자의 경우, 대부분 여성과도 성접촉을 하는 양성애자가 많기 때문에 최씨의 감염 제공자를 추적하면 의외의 동성애자 계보가 돌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동성애자 진술 거부가 문제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국내 HIV의 두 가지 감염 경로 가운데 윤락여성을 매개로 한 계보는 비교적 추적이 쉽지만 동성애자 경우는 신분 노출을 꺼리는 당사자들의 침묵으로 찾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처럼 ‘1호 환자’를 쫓는 작업에서 부딪히는 가장 큰 어려움은 당사자들의 부정확한 기억이나 진술 거부 등이다.

    예를 들어 국내 감염자 가운데 수혈로 피해를 본 것으로 확인된 A와 B(1991년 당시 고교생과 초등학생)에게 공급된 혈액은 동성애자인 김모에게서 채혈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김씨는 끝내 자신의 감염 경로를 밝히지 않아 계보도는 현재 2대에서 멈추고 있다. 1991년 성직자 신분으로 에이즈 환자로 판명된 김모씨 역시 “해외여행이나 윤락여성과의 성접촉 등이 전혀 없었다”고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이처럼 일부 감염자의 진술 거부로 계보도가 중간에서 끊어지는 경우가 많다.

    천교수가 가장 우려하는 대목은 계보 조직표 특성상 중간 단계에서 끊겨 버리면 위 아래를 이을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나 “최대한 가능성을 유추해서 실체에 다가가도록 하겠다”는 것이 연구팀의 의지다. 보건당국이 기대하는 것처럼 천교수 역시 “1호 환자 찾기는 앞으로 국내 에이즈 확산을 막는 데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방역 효과를 강조했다.

    굳이 전문가 설명을 빌리지 않더라도 ‘1호 환자’ 추적은 국내 에이즈 연구에서 상당한 성과를 올릴 것으로 기대된다. 질병과 바이러스의 뿌리를 찾는 것이 치료의 첫 단계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직접적 효과로 네 가지를 꼽는다.

    첫째, 한국형 바이러스의 역학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천교수는 “국내에 들어온 여러 유전자 가운데 왜 유독 ‘한국형 바이러스’만 끈질긴 생명력과 강한 번식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 그리고 나머지 바이러스들은 왜 쇠퇴했는지 밝히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바이러스 번식력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한국형 바이러스’에게 좋고 나쁜 환경이 무엇인지 가늠해볼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음식과 체질이 특정 바이러스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규명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획기적인 성과가 되는 셈이다.

    둘째, 집중적으로 병을 옮기는 감염 집단 실체를 밝히면 사전 예방 효과가 커진다는 점이다. 이실장은 “국내 에이즈 환자 성비를 볼 때 동성연애 감염자가 실제보다 훨씬 강한 번식력을 갖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히고 있다. 즉 ‘한국형 바이러스’의 전파력이 동성연애에서 좀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조사 결과가 나온다면 방역 대책을 한 곳으로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특정 지역, 특정 윤락촌이 ‘1호 환자’ 근원지로 밝혀질 경우 역시 그 집단에 대한 집중적인 단속과 계몽으로 더 이상의 확산을 막을 수도 있다는 전망이다.

    셋째, 우리 체형에 맞는 백신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놓으면 감염 경로를 정확히 쫓을 수 있고, 백신, 진단제를 만드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약품이 주로 자국내 감염자를 대상으로 한 B형 백신이다. ‘한국형 바이러스’는 미국형과는 뚜렷하게 다를 수도 있다. 그래서 독자적인 연구 개발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넷째, 무엇보다도 국내 에이즈 실태를 한눈에 볼 수 있어 국민 계몽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이는 그 어떤 홍보 광고보다도 확실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물론 앞서 연구팀이 지적한 대로 ‘1호 환자’ 추적이 그리 쉬울 것 같지는 않다. 국내에 에이즈가 서서히 퍼질 무렵인 초기에, 좀더 적절하고 빠르게 대응하지 못한 탓에 자료가 부족하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오늘날에도 행정 당국의 인식이 뚜렷하게 개선될 조짐이 없다는 점이다.

    보건복지부는 얼마전 예산상 어려움을 들어 환자 바이러스 검사비 지원을 중단했다. 국립보건원 한 관계자는 원내에서 진행중인 ‘1호 환자’ 추적 연구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에이즈 관련 부서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다. 또 “에이즈는 이제 감기 같은 만성질환 정도로 치료가 가능한 질병이 아니냐”고 태평스레 말하는 관계자도 있었다.

    학계의 연구 실태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나마 학계는 정부 보조도 전혀 없는 실정이다. 김교수는 “국내 에이즈 환자가 드러난 수치상으로 적다는 이유만으로 연구비 지원에 인색한 것은 근시안적인 발상”이라고 정부를 비난했다. 그는 또 “미국은 에이즈 연구팀만 1000개가 넘는데, 국내는 10개도 안된다. 그나마 에이즈 바이러스를 키우는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연구라도 할 텐데, 국립보건원과 서울대, 포항공대 등 3군데 정도밖에 안된다”며 정부의 빈약한 지원을 아쉬워했다.

    한 국립대학의 아무개 교수는 “만약 한국형 바이러스와 미국형 바이러스를 연구해야 할 상황이라면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라고 필자에게 반문했다. 그는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지만, 국내 학자들은 아마도 미국형 바이러스를 택할 것이다. 그건 돈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형 바이러스를 연구한다고 해서 누가 지원해주겠는가. 정부에서도 ‘기껏 1000명 남짓 되는 환자를 위해 매번 수백억원을 쏟아부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하는 형편이다”고 개탄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