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호

조평통 서기국 ‘이회창 죽이기’ 나섰다

북한의 2002 대선 개입 내막

  • 최영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cyj@donga.com

    입력2004-09-07 10: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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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은 5월 이후 노동신문을 동원하여 이회창을 집중 공격하고 있다. 6월13일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명의로 이회창 고발장까지 냈다. 북한은 왜 한국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은 정황까지 들어가며 이회창을 ‘때리는’ 것일까? 잠재적 대선 후보인 박근혜에게 공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속셈을 분석했다.
    5월과 6월 내내 북한 언론은 시리즈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비난하는 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5월17일자 평양 조선중앙통신 보도다.

    ‘리회창이 깨끗한 핏줄을 타고 서민행보를 걸어온 것처럼 광고하고 있는 것은 정치 협잡꾼의 너절한 추태다 … 리회창의 애비는 일제 때 일본인도 오르기 힘든 검찰서기 노릇을 하면서 애국적 독립운동가를 처형·학살하는 도적질을 수많이 감행했고, 8·15 광복 후에는 친미주구로 둔갑하여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리회창은 잔뼈가 굳기 전부터 일본옷을 입고 일본말을 하며 일본인 행세를 하고 돌아쳤으며 8·15 후에는 미국을 섬기며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광신자로 악명을 떨쳤다. 리회창은 자기가 법관 출신으로서 법치주의자, 원칙주의자로 자처하지만, 직권을 이용하여 수많은 부정부패 행위를 감행하였다. 그는 그 무슨 후원회요 혁신위원회요 하는 것을 만들고 긁어 모은 돈으로 밀자금을 조성하고 부정협잡 선거를 치렀으며 호화주택을 사들이고 부화방탕한 생활을 했다. 리회창은 청렴결백한 척하지만 그의 행적을 들추면 더럽고, 너절하며 악하기 그지 없다.

    대통령 선거를 6개월 정도 앞두고 이른바 북한의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북한의 이런 작전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남북간에 대화가 시작된 때부터 대선과 총선 등 한국의 주요 선거마다 북한은 유권자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직간접적인 시도를 해왔다. 군사독재정권 시절에 일어난 사건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1980년대 후반 이후 그런 시도는 두드러졌다.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



    1987년 대선 직전에 발생한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고를 보자. 폭파범 김현희는 선거 하루 전날 서울로 압송되었다. 국내 입국 시점을 두고 논란이 있었으나 결국 이 사건은 집권여당이던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92년 대선 때는 ‘이선실 간첩단’이라 불리는 남조선노동당 사건이 대선 정국을 강타했다. 이 사건은 신한국당 김영삼 후보의 당선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됐다. 15대 총선을 일주일 남짓 앞둔 1999년 4월4일 북한은 일방적으로 정전협정 파기를 선언하고 5일부터 7일 사이 매일 수백명의 무장병력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투입해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판문점무력시위 사건이다.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은 유세현장에서 ‘안정론’을 강조했고 선거 결과 신한국당은 130석, 국민회의는 79석을 얻는 데 그쳤다. 당시 국민회의는 이 사건을 총선 패배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과거 일어난 북풍이 북한의 단독 도발이었는지, 아니면 한국 정부와 교감을 이룬 상태에서 일어난 것인지 그 내막은 남북한의 최고 권력자만이 알겠지만, 적어도 1996년까지만 해도 북한 변수는 확실하게 먹혀들었다.

    그러나 1997년 대선부터는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1997년의 북풍은 좀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1차 북풍으로 월북한 오익제 전 천도교 교령의 김대중 후보 지지 편지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건은 여당의 이회창 후보에게 유리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국민회의측은 한나라당 정재문 의원과 북한 조평통 안병수 부위원장이 중국 베이징에서 접촉했다며 맞불 작전을 폈다. 이 사이에 ‘김대중 X파일 사건’ ‘윤홍준 기자회견 사건’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1997년의 북풍은 이전투구의 양상으로 번졌다. 1997년의 ‘북풍’은 선거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국민들은 선거 때마다 고질적으로 등장하는 북한 변수를 냉철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정부 들어서도 북풍은 그치지 않았다. 2000년 4월10일, 16대 총선 투표일을 사흘 앞두고 정치권은 충격에 휩싸였다. 청와대가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합의했다고 전격 발표한 것이었다. 민주당은 정상회담 발표가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고 실향민과 부동층을 움직일 수 있는 변수가 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발표시기를 문제삼으며 선거용이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정반대였다. 한나라당이 133석, 민주당은 115석으로 야당인 한나라당의 승리였다. 선거 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정상회담 발표가 수도권 일부에서만 민주당 득표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영남지역에서는 오히려 이 발표가 역풍으로 작용하여 한나라당 표를 결집하는 요인이 되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오는 12월 대선을 앞두고 어김없이 북한의 ‘작업’이 시작되고 있다. 12월18일 대선 당일까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는 모르지만, 북한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을 쓰고 있다. 지금까지는 테러, 무력시위, 간첩사건 등 돌출적인 방법을 썼다면, 올해는 북한의 관영 매체를 활용해서 특정 후보를 비난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또 그 비난은 과거같은 일방적인 흑색선전이 아니라, 치밀한 취재를 통해서 나름대로 근거를 조목조목 들이대고 있다. 그 근거도 국민 상당수가 공감할 수 있는 한국의 대중매체이거나 공개된 자료 일색이다. 공개된 자료를 대지 못할 경우는 6하 원칙에 따라 치밀하게 사건을 구성하여 누가 보더라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북한의 이런 태도는 선거전에서 특정 후보가 상대 후보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것과 같은 수법이다. 이는 국내 일간지에서 한창 인기를 끌었던 ‘대선 후보 검증 시리즈’와 다를 바가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거론 대상이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

    좋은 예가 있다. 지난 5월14일과 22일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는 각각 관훈토론회에서 패널리스트들의 질문을 받고 남북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계승한다고 공언해온 노무현 후보는 김대통령의 3단계 통일론에 대해 “3단계 통일방안의 내용을 외우지 못하고 있다. 암기하려고 노력했는데 못 외웠다”고 말했다. 노후보는 또 북한의 통일방안인 고려연방제에 대해 “깊이 읽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가능하지 않는데 가능한 것을 전제로 그 토대 위에서 연방제를 해석하고 매달릴 필요가 있는가”라고 했다.

    알려진 대로 1980년 제6차 노동당대회에서 채택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은 그 실효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북한 정권이 펼치는 대남·통일정책의 핵심개념이다. 노후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과 통일정책을 계승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정책의 기본을 모르면서 무엇을 어떻게 계승하겠다는 것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회창 후보는 “6·15 선언의 원칙과 정신을 살릴 것이나, 2항은 그대로 갈 수 없으며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면서 “이 조항을 폐기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후보는 이에 관한 질문이 계속 이어지자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이 2항을 바로 폐기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 오만한 자세로 보이기도 할 것”이라며 ‘폐기’가 아니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의미라고 발언을 정정했다.

    6·15 공동선언 제2항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제안이 서로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후보는 이 조항을 ‘연방제 합의’로 오해한 듯하다. 이후보가 이처럼 중대한 사안에 대해 한 자리에서 두 말을 한 것은 남북관계에 대한 그의 인식능력을 반영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후보가 “대북 포용 기조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현정부의 햇볕정책과 기조가 같다”고 여러 번 말했지만 남북 사이의 구체적인 교류·협력에 대해 애매하게 반응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재미있는 것은 북한의 반응이다. 북한 로동신문은 5월30일 논평을 통해 이 후보의 6·15 공동선언 2항과 관련한 발언을 ‘천추에 용납 못할 반통일적 망발’이라고 공격했다. 로동신문은 “이회창이 북과 남의 통일 방안에 공통점이 있을 수 없다고 전면부정하면서 떠들고 있으니 초보에 초보도 모르는 무지의 표현”이라면서 “사물현상의 기초적인 이치도 모르는 분자가 어떻게 법관 노릇을 했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노후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관훈토론회에서의 이 후보의 발언은 노 후보의 발언과 맞물려 있었다. 따라서 노 후보에 대해서도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 반응을 보일 법도 한데 일절 언급이 없었다.

    평양당국은 또 이날 로동신문 논평을 통해 6·15 선언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뒤집기까지 했다. 문제의 2항이 연방제에 남북이 합의했다던 종래의 아전인수격 주장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그들은 이 조항이 “서로의 통일방안의 공통점을 인식한데 기초하여 그것을 적극 살려 통일을 지향해 나가기로 했다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현 정부와 해석을 같이 한 것이다.

    조평통의 이회창 고발장

    북한의 ‘이후보 때리기’는 6월13일 완결판이 나왔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명의로 나온 ‘이회창의 반민족적, 반통일적 죄행 고발장’이 그것이다. A4 10장 분량의 이 고발장은 이회창 후보의 △과거 법관 시절 행적 △정계 입문 뒤 행적 △아들 병역비리, 호화빌라 물의, 최규선씨 자금 수수설 등 최근 스캔들을 낱낱이 들추고 있다.

    이 고발장은 가장 먼저 이회창 후보가 1961년 5·16혁명재판소에 배석판사로 참가하여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다고 언급하고 있다.

    「일제통치 시기 검찰서기로 수많은 독립운동자들을 잡아가두고 처형하는데 앞장섰던 친일역적인 애비 리홍규의 피를 이어받은 리회창은 법관 초년기부터 파쑈 통치의 손발이 되어 무고한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재판 처형하였다 … 민족일보 사장 사형사건은 그 대표적 실례의 하나이다 …당시 리회창은 … 민주화와 나라의 평화통일을 주장해 나섰던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에게 북(北)정권의 평화통일론을 보도, 선동하여 반국가적 행위를 했다(남조선잡지 1997년 10월호)는 모략과 날조로 일관된 판결로 그를 1961년 12월21일 교수형에 처하게 하였다」

    고발장은 또 1981년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이회창 후보의 판결을 문제삼고 있다.

    「광주학살에 분노하고 파쑈 정권을 비난한 것 밖에 없는 성원들에게 강제로 죄를 들씌워 처형한 것도 다름아닌 리회창이었다. 5공정치법협의회(1997년 당시) 공동대표 박재순은 1차 대법원 판결에서 강우영을 비롯한 4명의 대법관들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무죄 취지의 판결을 내리고 파기 환송한 한울회 사건에 대해 2차 대법원 판결에서 유죄판결을 내린 리회창에 대해 이렇게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남조선 잡지 1997년 8월호)」

    고발장은 이 후보의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재판과, 이후 대법관 시절의 재판을 일일이 거론했다.

    「대법원 판사라고 거들먹거리던 리회창은 … 문부식과 김은숙을 이 방화사건의 주동인물로, 김현장을 배후조종자로, 남강원도 원주교구 교육원 원장 최기식 신부를 이들을 숨겨주었다는 혐의로, 체포 구속한 것을 비롯하여 … 그들에게 악명 높은 보안법을 적용하여 사형을 비롯한 극형을 선고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 그 시기 리회창은 ‘민족통일민주주의 로동자련맹사건’(1990년 4월), ‘혁명적 로동자 계급투쟁동맹사건’(1990년 8월), ‘조국통일촉진그룹사건’(1991년 3월), ‘민족해방활동가그룹사건’(1991년 6월), ‘사로맹인천위원회사건(1991년 6월), ‘사회주의로동자련맹사건’(1991년 9월) 등 수많은 사건들을 조작하고 죄 없는 애국자와 민주인사들을 무자비하게 재판·처형하는 범죄행위를 거리낌없이 감행하였다」

    여기서 조평통 서기국이 적시한 사례들은 ‘없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이회창 후보가 관련되었던 사건들이다. 다만 일부는 확인된 것이고, 일부는 이 후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아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고발장은 이번에는 이 후보의 최근 행보를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다. 지난 1월 미국을 방문해 비무장지대에서 ‘북의 병력을 후퇴배치’’시키고 ‘재래식 무기 감축’과 ‘대량살상무기 개발중단’을 하라는 미국의 주장을 되풀이해서 상전인 미국으로부터 대통령 자리를 담보받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또 6·15 정상회담 직전에도, 회담 자체를 반대했다고 주장했다.

    「력사적인 평양상봉을 앞둔 2000년 5월3일 리회창은 대표단에 야당측 인사들을 망라시키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북남최고위급회담에 정당대표가 참가하게 되면 북이 주장해온 제 정당, 사회단체 련석회의 등 통일전선정책의 일환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있다는 황당한 궤변을 늘어 놓으면서 평양 상봉 자체를 반대해 나섰다(KBS 제1라디오 2000년 6월1일)」

    마지막으로 고발장은 이 후보의 스캔들을 집중 거론하고 있다.

    「안기부 총선자금 모금사건(일명 안풍사건)은 남조선에서 1996년 국회의원 선거 때 안기부가 정부예산을 전용하는 방법으로 조성한 비밀자금을 신한국당선거자금으로 탕진한 대형 부정사건이다. 민주당은 … “황명수씨에게 구속령장이 청구되고 … 강삼재 의원이 검찰의 조사를 받을 예정임에도 의장이었던 리총재만 몰랐다고 하는 것은 부반장과 줄반장이 교무실에서 벌을 서고 있는데 반장은 나는 몰라 하는 격이다”고 조소하였다(문화방송 2001년 1월6일)」

    고발장은 최규선 게이트중 DJ 친인척 관련 부분은 모두 빼버리고 이회창 관련 의혹만 거론하고 있다.

    「지난 4월 남조선에서는 리회창이 거액의 돈을 받았다는 부정뢰물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한때 여야를 제 집처럼 드나들며 활개치던 최규선이 지난해 12월 이른바 방미활동에 써달라고 리회창에게 2억5000만원에 달하는 현금을 찔러 준 사건이다. 이에 대해 관련자들은 최규선씨가 리회창의 방미일정에 도움을 주었으며 윤여준 의원을 통해 2억5000만원을 주었다고 진술함으로써 이 뢰물사건이 사실임을 정확히 립증했다(기독교방송 2002년 5월7일)」

    호화 빌라사건도 어김없이 포함되어 있다.

    「리회창은 년간 집세가 1억원 이상 되는 105평짜리 최고급 호화주택 2채를 지난 4년 동안 공짜로 이용해 왔다. 이것이 폭로되자 리회창은 친척이 빌려 준 집이라고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사실은 그의 녀편네가 15억원의 엄청난 돈을 주고 직접 구입한 것이 공개되었다(문화방송 2002년 4월16일)」

    북한 조평통의 고발장을 살펴보면 북한 노동당이 한국 대선에 후보를 내세워 직접 참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착각할 정도다. 특정 정당과 후보를 때리는 노동신문 보도와 조평통 고발장은 여야가 매일 대변인 논평을 통해 주고받는 정쟁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북한의 대선 개입 전략은 과거와는 사뭇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영남표 잠식 위해 박근혜 선택?

    또 눈여겨볼 대목은 박근혜 대표와 관련한 북한의 입장이다. 지난 5월 박대표의 방북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추측이 많았다. 특히 한나라당은 “박대표가 잠재적 대선 후보임을 생각할 때 대선 정국에 어떻게든 개입하려는 신북풍 음모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DJ와 그 계승자인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노선을 북쪽이 측면지원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고 논평했다. 반면 민주당은 박대표의 방북을 크게 환영했다.

    그러나 박대표의 방북은 김정일 국방위원장 스스로가 원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위원장은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DJ에게 박근혜 의원이 왜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얼마 뒤 언론사 사장단 방북 때에도 박대표를 만나보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재규 통일부 장관이 방북했을 때도 그런 이야기를 했고, 지난 4월 임동원 특보가 갔을 때도 똑같은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만나길 원하던 박대표가 평양을 방문하자 북한은 최고의 귀빈 대접을 했다. 북경까지 특별기를 보냈고, 6·15 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사용했던 백화원초대소를 제공했다. 또 북한 민족화해협의회가 마련한 환영 만찬에서 대남 부문 실세들이 대거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이 날 만찬에는 김용순 노동당 중앙위 비서, 김영대 민족화해협의회 회장, 림동옥 노동당 중앙위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김완수 노동당 중앙위 부부장, 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장 등이 참석했다.

    김용순 비서는 현 정부 출범 이후 줄곧 임동원 특보의 파트너로 활약한 인물이며, 림동옥 제1부부장은 1978년부터 대남 업무를 시작해 이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얼굴 없는 실세’다. 주로 남북간 경제교류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완수 부부장은 2000년 10월 제주에서 열린 제3차 남북장관급회담에 전략수행 요원으로 참석하는 등 무시할 수 없는 대남전문가 그룹에 속한다.

    당 통일전선부 핵심외곽 단체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분야별 대남업무 기구를 총괄하면서 대남 접촉을 시도하고 있는 조평통의 안경호 서기국장은 지난 1982년 조평통 과장부터 시작해 1994년 6월 남북 최고위급 회담을 위한 부총리급 예비접촉시 북측 대표단장을 맡아온 대남 핵심인물이었다. 북측이 박의원을 ‘여사’로 호칭하고 ‘중량급’ 인사들을 내보내 예우한 점은 그의 방북을 통한 대내외적 효과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음을 의미한다.

    전문가들은 북측이 이처럼 박의원을 배려한 것은 남측과의 포괄적인 대화를 강조하려는 전술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본다. 행사를 주관한 김영대 회장은 만찬 연설에서 “이 자리는 누구든 민족을 위하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정견 차이를 넘어 서로의 마음을 합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다시 말해 보수적인 박의원의 방북을 통해 그동안 북측에 적대적이었던 남측 어떤 인사나 단체들도 민족의 장래를 위해 대화 의사를 밝힐 경우 언제든지 방북을 허용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지난 여러 해 동안 북한의 대외관계 행태를 보면 한가지 패턴을 알 수 있다. 즉 한·미·일 3국과의 관계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북한은 두 나라 이상과의 관계를 동시에 추구하기보다는, 특정시기에는 한 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1989년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이 무너진 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결심하고 이를 위해 우선 남한과 대화를 모색했다.

    그 결과 남북은 1991년 기본합의서와 비핵화선언을 채택했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간첩단 사건 등으로 진전을 보지 못하자, 북한은 1992년 초점을 일본에 돌려 가네마루 신을 초청하는 등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했다.

    이 즈음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 핵의혹을 제기하자, 1993년 3월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를 선언하고, 미국과 직접 대화에 들어간다. 1994년 10월 북한 핵문제와 관련한 제네바합의가 이루어진 뒤, 5년간 북한은 한국과 일본을 제쳐놓고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은 잠시 미국이나 일본보다 한국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한국과는 식량지원과 경제협력을 위한 최소한의 관계만을 유지하면서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는데 외교 노력을 집중했다.

    그래서 북한이 박대표에게 최고 귀빈 대우를 한 것이 박대표측 해석처럼 남북관계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준다고 보기 어렵다. 북한은 6·15 정상회담 석상에서 김정일이 직접 거론한 약속을 아직까지 지키지 않고 있다. 지난 4월 임동원 특보가 방북했을 때 받아낸 약속도 감감 무소식이다. 당국간 대화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응하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당국이 박대표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데는 속셈이 있다고 지적한다. 박대표를 한국 보수세력의 대표로 만들어 이회창 후보를 고립하려는 의도라는 분석이다. 박대표가 대통령 후보로 나설 경우, 영남표를 잠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북으로서는 시도해볼 만한 작전이라는 것. 또 박 대표를 통해서도 현 정부의 대북 정책이 지속될 기반을 마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도 고민스럽다. 남북장관급회담도 열리고, 이산가족 상봉도 이루어지고, 정상회담도 성사되었다. 북한이 줄 수 있는 어지간한 충격에도 한국 국민은 이제 동요하지 않는다. 한국 국민의 정치의식이 성숙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역효과를 내기 십상이다. 이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발표 때 증명되었다.

    문제는 아직도 우리 정치권이 북한에게 휘둘린다는 점이다. 북한이 특정 정당, 정치세력과 연대하여 반대세력을 비난하고, 또 특정 정당이 몇몇 언론사와 뜻을 같이해서 북한을 비난하는 대결구도는 바람직스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정치권이 남북문제만큼은 여야를 초월해 대처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여당은 여당대로 북한과 연합해서 이를 선거 국면에 이용하려는 발상을 바꾸어야 하고, 야당은 야당대로 북한을 비난하면서 반대급부로 표를 얻으려는 시도를 삼가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금 방식대로 나가면 여든 야든 김정일 정권에 발목을 잡힐 수밖에 없다. 이번 대선에서 어느 정권이 집권하든 평화통일을 위해 김정일 정권과 협상을 해야 한다. 여당일 경우 자신의 손을 들어준 데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고, 야당일 경우 협상을 새로 시작하려면 엄청난 비용과 공을 들여야 한다. 그런 악순환을 다시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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