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사가 펼쳐진 40여 분 동안 조화와 평화의 정신이 정점에 달했다.” 전세계 5억명 이상의 시청자를 상대로 펼쳐진 ‘한국 CF’, 2002 한·일월드컵 개막식을 지켜본 미국 CNN 방송의 평가다. 한국의 이미지를 압축해 세계에 선보인 이 거대한 이벤트 뒤에는 총연출을 담당했던 손진책씨의 열정이 있었다.
손씨는 바로 전날인 5월31일 저녁 7시30분부터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열린 2002 한일월드컵 개막식을 총지휘했다. 행사를 끝낸 뒤에도 그 뒤처리며 고생한 사람들과의 밤 늦은 회식 때문에 새벽 3시까지 현장에 있다가 돌아온 뒤끝이었다. 개막식 보름 전부터 이런 강행군을 계속했다. 새벽부터 개막식 마무리 연습을 시작해서 재차 3차 반복하고, 자정이 넘어야 끝나는 일과였다. 이제 겨우 행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또 불청객인 필자를 만났으니….
온몸과 영혼에 깃들어 있는 모든 에너지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쏟아 부은 모습. 이것저것 물어도 답변이 허공에 둥둥 떠있는 형국이다. 잠도 제대로 못자고 퍼져 있는 손씨를 보니 얘기를 나눌 형편이 아니지 싶었다. 나중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서운한 발걸음을 돌렸다.
며칠 뒤 다시 만났을 때 그는 긴 머리칼을 아예 밀어버리고 짧은 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있었다. 왜 갑작스럽게 머리를 짧게 쳤냐고 물었다. “변화는 좋은 것 아닌가요?” 당당한 반문이 대답을 대신한다.
“8년간 머리를 길렀어요. 행사를 끝내고 나니 삶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친김에 달려가 머리를 깎아버렸죠.”
오랜만에 머리를 짧게 깎으니 자꾸 간지럽다며 대화 내내 긁적거렸다. 긴 머리칼이 없어진 서운함도 적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손씨에게서는 큰일을 잘 치르고 난 뒤의 홀가분함이 배어 나왔다.
“욕 먹진 않은 것 같네요”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홍죽리 미추산방. 서울 불광동에서 승용차로 40분 가량을 달려 구파발, 장흥을 지나 험한 산을 하나 넘으면 손바닥만한 평야가 나오고, 그 왼편으로 창고 같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도올 김용옥이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극단 미추의 본부다. 1층은 공연장, 2층은 사무실, 3층은 손씨가 거처하는 안집이다. 그의 설명처럼 ‘세상에서 가장 값싸게 지은 건물’이어서인지 외관은 허름하고 엉성하다. 돈 생기면 짓고, 없으면 쉬고 하다보니 완공되기까지 6년이나 걸렸단다.
집무실 벽면에 세워진 서가에는 잡다한 책들이 빽빽히 꽂혀있다. 주로 민속과 문학서적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언뜻 보면 국문학도의 서재쯤으로 보인다. 서가 한쪽에는 부처상이 30개 가까이 놓여있다. 청동 불상에서부터 석불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다시 ‘넘겨짚기’ 직업병이 동한다.
-불교 신자인가보군요.
“신자는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불교와 가깝다고 할 수는 있겠지요. 불상은 그저 취미로 모은 것들이에요.”
서재 안쪽을 가리키는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서가에는 성모상과 예수상, 십자가도 여러 개 놓여있다.
“지방을 돌아다니거나 해외 여행을 할 때면 불상이나 성모 마리아상을 수집하는 것이 취미가 돼버렸어요. 친지나 친구들이 준 것도 있지만 대부분 돈 주고 사들인 것입니다.”
인터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처음이 잘 풀리면 대화는 끝까지 잘 흘러가는 법. 일단 그를 만나기로 한 이유였던 2002 한일월드컵 개막식 얘기부터 해야 마땅하지 싶었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예의성 질문으로 말문을 열었다.
-개막식이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리허설과 본공연을 모두 보았습니다만, 형식상으로는 웅장하고 현란하면서도 내용상으로는 한국 전통과 현대의 이미지를 반영하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내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총감독으로 개막식을 연출한 소감부터 말씀해주시죠.
“욕은 먹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달랑 한마디. 대답치고는 싱겁기 이를 데 없다.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칭찬에 칭찬을 더했건만 반응은 썰렁하기 이를 데 없다. 워낙 과묵한 성격인 데다 말재간이 뛰어난 사람도 아닌 듯했다. 개막식 후의 피로도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없는 말을 지어내가며 칭찬을 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많은 독자들이 TV를 통해 지켜봤겠지만, 개막식은 정교하게 만든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공들여 연습한 흔적이 역력한 수작이었다.
필자가 손씨와 만나던 날 일본 NHK 방송에서는 월드컵 개막식 관련 특집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극단을 찾아왔다. 손씨는 NHK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사이사이 필자와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정신없이 바쁘기는 개막식이 끝나도 마찬가지였다.
NHK 방송팀이 개막식 총연출 방향을 담아가는 내용을 옮기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2002 FIFA 월드컵 개막식 컨셉트는 축구를 통한 평화의 메아리였다. 동양에서는 처음 열리는 21세기의 첫 축구 제전을 알리는 이번 개막식은, 공동 개최국인 한국과 일본은 물론 여전히 불신과 갈등으로 불안한 미래를 살아가는 지구촌 사람들에게 간절한 평화와 화합의 바람을 불어넣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지구상 마지막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한국으로부터 발신된 평화의 메시지는 다른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 보내는 것보다 의미가 크다. 이런 의미에서 ‘동쪽으로부터’라는 테마로 동양에서 보내는 인간과 자연의 소통을 통한 조화와 상생의 이야기를 전세계에 한국의 춤과 소리로 전달한다는 개막식 컨셉트는 탁월한 것이었다.
개막식 행사는 총 4개 마당으로 구성됐다. 월드컵에 모이는 전세계인을 정중하게 환영하는 첫째 마당과 나라와 민족이 서로 다른 이들 모두를 소통의 장으로 인도하는 둘째 마당, 소통 이후 이루어지는 어울림의 셋째 마당, 그리고 여기서 발아한 평화의 씨앗을 인종과 종교, 이념이 다른 세계 각지로 전달하는 나눔의 넷째 마당이 그것이다.
이 같은 기대와 소망은 전 지구에 타전 되었고, 개막식은 잘 짜여진 성공작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훌륭한 예술 제전이었다는 외부평가에 총연출자로서 느낌이 있을 텐데요. 의도했던 메시지가 성공적으로 전달됐는지도 궁금하고요.
“서구 중심적 사고나 행동에서 벗어나 동양적 메시지를 찾아보자는 것이 이번 개막식의 기본 컨셉트였습니다. 서양의 틀에 익숙한 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번 행사에 담긴 동양적 메시지가 강한 인상을 줬겠지요. 재미있는 것은 한국인들을 비롯한 동양인들도 이런 내용물을 보고 신기해 하고 놀랐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도 이미 서양적 정서나 문화에 깊이 젖어있다 보니 ‘우리 것’에 이런 아름다움, 스펙터클, 평화와 화합의 정신이 담겨있구나, 새삼 놀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니 서양사람들은 ‘원더풀’을 연발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들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경이롭게 비쳤다는 겁니다.”
‘오합지졸’이 무용가로 변신
상암경기장과 한강, 주변 공원까지 무대로 삼은 개막식 행사는 규모 면에서도 단연 세계 최대급. 그래서 개막식이 끝나고 난 뒤 문화계 일각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해외에 수출해도 괜찮을 것이라는 반응도 나왔다. 중동이나 유럽 등 다른 나라에서 스포츠 제전이나 굵직한 국제 행사가 열릴 때 콘텐츠와 프로그램을 수출하는 방안도 궁리해 볼만 하다는 것이다.
-동양적 메시지를 담았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됐는지 설명해주시지요.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첫째 마당 ‘환영’에서는 경기장 천장의 불꽃이 하늘로 치솟는 가운데 축무단이 장중하게 그라운드로 들어와 정렬합니다. 축무단이 대고와 소고를 앞세우고 전통 춤사위를 벌이는 모습은 제가 보아도 장엄했습니다. 둘째 마당 ‘소통’에서는 세계의 어린이들이 소망을 담은 종이배를 띄우고, 북과 디지털이 어우러지면서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음과 양이 만나죠. 셋째 마당 ‘어울림’에선 흰 천을 이용한 어울림의 강과 바다가 그라운드에 펼쳐집니다. 아름다운 수묵화의 영상 위로 평화의 성덕대왕 종이 완성되고, 또 종이 울리면서 세계에 평화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종 안의 영상에 각국의 어린이가 나와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보내고요. 마지막 마당 ‘나눔’에서는 6만5000여 관중들이 촛불, 소고, 풍선, 어울림천을 직접 사용해 세계가 하나라며 아리랑을 합창하는 형식이었습니다.”
-그 많은 인력을 어떻게 모았습니까. 연습 기간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출연진은 모두 1300여 명이었습니다. 이중 1000여 명은 군인들이었죠. 이들이 아니었다면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엄청난 인건비를 생각하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축무단 등 군인 출연진과 무용인들은 지난 4월부터 연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문화행사에 전혀 문외한인 군인들은 한마디로 ‘오합지졸’이었다. 처음에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무척 난감했다고 손씨는 말한다.
“병사들은 대부분 백마부대에서 차출한 사람들이었죠. 전문인력이 아니라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숫자 역시 애초에 저희가 필요로 했던 규모에서 크게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부대의 협조를 얻어 소대장급 장교들까지 행사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도무지 손발이 맞지 않아 잠이 오지 않더라고요. 잔디밭은 사용할 엄두도 못내 먼지가 날리는 연병장에서 연습을 시작했지요. 뙤약볕이 내리쬐는 맨땅에서 훈련을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나자 조금씩 나아지더군요. 축무단의 공연은 철저히 안무에 의한 무용이기 때문에 군인들의 사열이나 행군과는 개념이 다르죠. 무용을 한번도 접해보지 않은 사병들이 대다수였고, 당연히 시행착오가 거듭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러나 병사들의 열정만큼은 대단했다. 나중에는 신명이 나 오히려 지친 연출자를 재촉해 연습을 계속하자고 졸라대더라는 것.
“사병들과 함께 무용단에 들어와 연습한 장교들의 경우는 사정이 더욱 딱했어요. 혹독한 기합을 고스란히 받아가면서 무언가 해보려고 애쓴 젊은 장교들에게 더 큰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일반 병사들하고 똑같이 기합을 받으면 자존심이 상하거나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오히려 솔선해서 기를 쓰고 연습했으니까요. 그 모습은 남을 평가하는 데 인색한 제 눈에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세계에 우리를 알리는 기회다’ 하는 애국심으로 연습에 임하는 모습이었어요.”
그렇게 두 달. 적지않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연습을 반복하자 비로소 틀이 잡혔다. 이만하면 무대에 올릴 수 있겠다 싶을 만큼 병사들을 다듬고 나니 어느새 개막식이었다. 그동안 갖은 고생을 다하며 훈련시킨 이들 대부분이 다시는 무대에 서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대로 버리기는 아까운 생각도 든다”고 손씨는 말한다. 그는 이들을 다시 쓸 수 있는 기회가 없을까 고심중이다.
“무용을 익히자 재미를 붙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혹시 전공을 바꾸는 병사가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뙤약볕과 궂은 날씨를 이겨가며 함께 연습하는 동안에는 힘도 들고 짜증도 났겠지만, 병사들에게 이번 무대는 월드컵 개막식에 참여했다는 ‘돈 주고 살 수 없는 경험’이었음은 물론, 예술에 대해 다른 인식을 할 수 있는 계기도 됐을 것이라고 손씨는 자신한다. 오히려 그는 욕심을 부리면 좀더 멋있게 행사를 치를 수 있었는데 예산문제 때문에 준비한 내용의 30% 가량은 버렸다고 아쉬워했다.
‘전통의 재창조’를 목표로
손씨가 이같은 초대형 이벤트를 무난히 소화해낸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전야제 행사를 총연출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것을 세계에 알리자는 취지로 행사를 기획했다. 그러나 올림픽 전야제가 단순히 우리 전통의 모습을 외부에 ‘보여주는’ 데 그쳤다면, 이번에는 그 전통을 ‘다시 창조’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 손씨의 설명이다. 14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시대도 바뀌었고 장비 또한 첨단화했기 때문에 욕심을 부릴 만했다는 것. ‘한국적 전통의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바탕은 그렇게 구체화되었다.
-준비 과정에 애로점은 없었습니까. 간섭하는 사람도 많고, 공명심을 내세우는 사람도 더러 있었을 텐데….
이 대목에서 손씨는 말을 아꼈다. 애로사항을 말하다보면 자칫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누워서 침 뱉는 격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 보였다.
그는 입이 무겁다. 에피소드들이 많이 나와야 지면을 꾸려가는 데 재미가 있을 텐데 생각보다 드라이하다. 지면 메우기가 힘들 것이라는 걱정이 필자의 머리를 스친다. 눈치를 챘는지 손씨는 이번에 함께 작업한 무용의 국수호 교수, 음악의 박범훈 교수와 함께 얘기를 나누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삶’은 ‘이 사람의 삶’이지 ‘세 사람의 삶’은 아니지 않은가.
-행사는 대형 이벤트사가 주관했지요.
“그렇습니다. 이번 행사는 제일기획과 금강기획이 공동으로 작업한 것이지만 김형찬 팀장을 비롯한 기획회사의 뒷바라지와 노하우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인적 자원이나 제작 노하우는 세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들과 호흡을 맞춰 일을 하면서 배운 점도 많았습니다. 엄청난 사람들을 동원하고 관리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문제 등, 체계적인 운영이나 조직화된 움직임은 배울 점이 많더군요. 88 서울올림픽 때와는 팀워크가 비교가 안됩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실력은 대단합니다. 색상, 몸짓, 선 하나도 모두 혼연일체가 되어 착착 진행했지요.
조직위원회의 관련 부서에서도 헌신적으로 도왔어요. 전엔 하찮은 영역 구분이나 자존심 싸움으로 괜히 흠잡고 탓하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대단히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어 참 흡족했습니다.”
개막식 얘기를 뒤로 하고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이쯤해서 ‘인간 손진책’이 궁금해졌을 독자들을 위해서다. 40년 가까운 그의 연극인생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처음 연극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소년시절부터 끼가 발동한 것이지요. 중학교까지는 고향인 경북 영주에서 무난히 학교를 다녔는데, 서울에서 다닌 고등학교 때부터 일종의 ‘예술병’ 같은 것이 생겼거든요. 정상적인 학교 수업을 거의 받지 않았어요. 그림을 모으거나, 수업 중에도 문학서적을 읽거나, 연극과 음악에 빠져 세월을 보냈던 거죠.
특히 그 무렵에는 큰누나(손정숙·서양화가)를 따라서 명동 구경을 자주 다녔습니다. 저보다 열 살 많은 큰누나는 이른바 ‘명동파’였거든요. 명동의 멋과 낭만을 이해하고 즐기는 편이었어요. 둘째 누나(손화숙·주부)나 셋째 누나(손봉숙·한국여성정치연구소 이사장)도 저를 이해하고 격려해주는 편이었어요. 그 무렵 시인 김수영 선생, 소설가 이봉구 선생, 연출가 이보라 선생을 명동에서 뵙기도 했어요. 이런 분들을 통해 저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예술혼을 키워왔다고 봐야겠죠. 그때 저는 화가가 될까, 문학을 할까, 연극을 할까 고민하며 방황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시험을 앞두고 음악회에 쫓아다니고, 화랑을 찾았다. 대학에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굳이 진학한다면 철학과가 낫겠다 싶어 시험을 봤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재수할 생각도 없었어요. 함께 연극 구경을 다녔던 길명일(작고), 정경우 같은 친구들과 한강 건너 동작동 국립묘지 앞의 조그만 섬에 들어가 연극을 하며 살게 되었지요.”
그게 1960년대 중반의 일이다. 한강이 개발되기 전 국립묘지 앞 한강에 사구(砂丘)로 형성돼 있던 아름다운 반달 섬에서 1년 넘게 살았다. 그 섬의 땅 20평을 사들여 12평짜리 슬레이트 집을 지었다. 연극 연습장이었다.
“섬이 아름답고 예뻤어요. 지금은 개발로 인해 사라졌지만, 갈대가 우거지고 모래밭이 길게 펼쳐진 섬이었죠. 아베크족들이 더러 찾아오는 곳이었는데, 이곳에서 우리는 3만원짜리 나룻배를 하나 사서 강을 오르내리곤 했어요. 밖에서 보기엔 낭만적이었지만 그 안에서의 생활은 거렁뱅이처럼 비참했죠.”
시내에 나갔다가 섬에 들어가기 위해 강 한켠에 있는 쇠 난간을 두드리면 나룻배가 와서 실어가곤 했다고 한다. 그 생활이 지금 가장 아련한 추억으로 손씨의 가슴속에 살아있다. 사라진 모든 것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섬도 없어지고, 정취도 사라진 지금 더욱 그 시절이 그립다.
“1968년쯤 갑자기 학교에 가야겠다는 갈증 같은 것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주위의 권유로 서라벌예대 연극과를 지망했는데 수석으로 합격했어요. 수석이 아니었다면 학교에 다니지 않았을 거예요. 학비 때문이었죠. 은행원이었던 아버지한테는 대학에 간다는 말씀도 드리지 않았고, 더군다나 연극과를 지망한다는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거든요. 아버지가 원하는 대학에 가지 않고 풀씨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니 갈등도 적지 않았거든요. 아버지 신세를 지지 않으려다보니 장학금을 주는 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 누나들 학비 때문에 집안 형편이 어렵기도 했고요.”
번역극만 연극이냐
학교에 들어가기 전 이보라 선생 소개로 극단 산하의 차범석 선생을 만났다. 그를 통해 20대 초반의 ‘예술청년’은 연극에 심취해갔다.
-그 무렵은 번역극이 각광 받던 때 아니었습니까.
“추송웅 선생의 ‘검은 피터의 고백’ 등 번역극이 대단했죠. 번역극이 아니면 연극 반열에 오를 수 없다는 식이었으니까요. 전통극을 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인식됐었죠.”
젊은 연극인은 그러한 풍조에 대한 반발심이 생겼다. 남들이 모두 그렇다고 말하면 공연히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오기가 솔솔 피어나는 것은 예술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일까.
“무대에 오르는 배우는 금가루, 은가루를 머리에 칠하고 눈 주변을 시커멓게 분장하고 콧날에 진한 색깔을 칠해 우뚝 세우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서양사람처럼 보이려는 그런 모습들이 어설퍼 보이더라고요. 우리 것에도 분명 무언가가 있는데, 이를 배척하고 무시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어요.”
그 무렵 우리 민속극 중에는 탈춤, 인형극, 판소리, 굿 정도가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두현 교수의 ‘한국 민속극’을 보며 우리 것에 대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봉산탈춤의 무형문화재 이근성씨에게서 탈춤도 배웠다. 이후 팔도 탈춤을 익혔고, 양주산대, 오광대놀이도 배웠다.
“우리 것을 찾아다니면 어른들이 기특하다며 재워주고 먹여주곤 하셨지요. 그때 귀여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1970년대 초 그는 허규 연극연구소가 발족되자 여기에 참여한다. 민속극과 전통극을 현대적으로 실험하는 작업을 했는데, 이때 김영렬, 구자흥, 오승명, 김흥기 등과 함께 최인훈 작 ‘놀부전’을 만들었다. 손씨는 안무를 맡았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서 만든 극단이 1973년 창단한 극단 민예. 민예는 민족극예술극단의 약칭이다. 그만큼 우리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족극을 해보자는 취지가 깊이 스민 극단이었다.
“번역극만이 현대적이고 세련된 것이라는 인식은 너무도 잘못된 생각이었어요. 특히 민족극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들의 소일거리로 생각하는 데에는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첫 작품으로 내놓은 것이 ‘서울 말뚝이’. 연출과 안무를 손씨가 맡았는데 꽤 좋은 평가를 받았다. 우리 전통극도 재미있고 깊이가 있다는 식이었다. 이후 ‘한네의 승천’ ‘배비장전’ ‘애오라지’ 등으로 우리 극의 재창조를 시도해 연극계에 그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를 맞는다.
“자리가 잡히기 시작하던 1982년에 영국 연수를 떠났습니다. 재충전이 필요했던 거죠. 문예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떠난 영국 연수는 저에게 우리 정서와 정신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엔 단순히 번역극에 대한 반발로 우리 것을 찾았고 그래서 다소 관념적인 면이 강했으나 영국 유학을 통해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 것에 대한 인식을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정서나 우리 정신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저는 집단정신으로 봅니다. 말하자면 공동체 정신이죠. 놀이의 기쁨, 마당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영국 연수생활을 통해 단순히 멍석을 깔고 장구 치고 춤추는 것만이 마당놀이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거든요. 그동안 우리 전통극은 복고풍에 골동품적인 요소를 가미하는 것으로 본분을 다한 것처럼 여겨졌어요. 그러나 마당놀이란 ‘내가 두 발을 딛고 서있는 이 땅에서의 현장성’을 중시합니다. 시간적 위치인 ‘현재’와 공간적 위치인 ‘여기’,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인간다운 삶’이라는 개념을 외면해선 안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문제를 떠나서는 마당놀이의 의미가 없습니다. 패러디나 풍자를 통해 내용을 담아내는 전통극이라도 현재성을 띠는 것이라야 한다는 거죠.”
이 때문에 그의 마당놀이나 연극 속에는 사회적인 이슈들이 깊숙이 녹아들어 있다.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 이에 대한 저항을 담은 작품들이 많은 것. 허생전, 별주부전, 놀부전, 홍길동전 같은 전통 테마뿐 아니라 남북 분단문제를 다룬 ‘신이국기’, 반전 사상이 녹아있는 ‘오장군의 발톱’, 군부독재 시절 성고문을 당한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룬 ‘죽음과 소녀’ 등이 그것이다.
“옛날의 마당은 마을 송사를 치르고 타작하고 결혼과 장례를 치르는 곳이었습니다. 장구 치고 징 치고 놀이를 즐기는 소박한 삶의 현장이었던 거죠. 흔히 마당을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의 공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것도 틀린 것은 아니죠. 그러나 그 안에는 삶이 있고, 우리 나름의 생산성이 담겨 있거든요. 이를 전제로 분명히 어딘가에 있는 ‘마당정신’을 찾아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제 연극의 정신으로 삼고자 했던 거죠.”
두 발을 딛고 서있는 마당에서 우리의 사고구조와 정체성을 찾아낼 수 있다고 그는 거듭 강조한다.
“영국 연수시절 어떤 실험극도 정통극 정신이 바탕에 깔리지 않고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훌륭한 추상화는 기본 데생실력이 갖춰져야 가능하듯이 실험극도 정통극이라는 과정을 완벽하게 갖추어야 제대로 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마당극 형식의 현대극 재창조
1983년 귀국한 그는 극단 민예의 대표로 현장에 복귀했지만, 극단의 내분과 연극적 반성으로 자신의 전부였던 민예를 그만두고 손진책연출연구소를 열었다. 그러나 극단이 없으면 공연을 하지 못하던 때였다. 그래서 친구인 철학자 도올 김용옥 교수, 박범훈 교수, 무용가 국수호씨 등의 자문을 얻어 극단 미추를 창단했다.
“극단 미추를 통해 그동안 무조건적으로 ‘우리 것’이라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나 반성하게 됐어요. 형식을 전승한 것만을 우리 것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전통연극의 정신을 계승하되 형식은 때로 파괴할 수도 있다고 보고, 뮤지컬 ‘영웅 만들기’에서는 팝과 재즈발레식 안무로 마당극 형식의 현대극을 재창조했습니다. 정신을 찾는 데는 우리 형식만 취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겁니다. 대신 극에 어떤 메시지를 담을 것인가에 대한 역사인식은 철저히 민중사적 시각으로 설정해나갔지요.”
-시쳇말로 극단 미추는 마당놀이로 일어섰다고 봐야죠.
“많은 분들이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MBC에서 후원을 해준 덕분에 돈 걱정 별로 하지 않고 공연을 했고, 큰 성공을 거뒀죠. 그러나 ‘마당놀이’라는 우리 연극 장르를 정착시킨 보람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는 MBC와 결별해 미추 단독으로 공연하고 있습니다.”
지난 1981년 극단 미추와 MBC가 공동 주최한 ‘허생전’을 시작으로 마당놀이는 2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하나의 장르로 정착했다. 풍자를 바탕으로 갖가지 사회문제를 통렬하게 꼬집는 문제의식과, 전통 연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형식이 상승효과를 일으키며 대중들로부터 큰 공감을 얻었던 것. 30대의 나이에 처음 작업을 시작했던 미추 멤버들은 어느새 모두 중년이 되었다.
-극단을 운영하고 공연을 하다보면 역시 재원 조달이 가장 큰 문제일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연극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것이 아니어서 크게 문제 삼지 않습니다. 다만 요즘에는 배우들이 어느 정도 기량을 갖추면 어느새 다른 데로 스카우트돼 가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어요. 대표인 제 입장에서는 기업체의 후원을 따오는 데도 한계를 많이 느껴요. 그러자면 적극성을 띠어야 하는데 성격상 그러지 못하거든요.”
-문화예술계에서는 ‘손진책 그룹’ 하면 손진책, 국수호, 박범훈에 도올 김용옥 교수까지 한데 묶어 소개하곤 하는데, 편 나누기나 무리 짓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른 시각으로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분들과 함께한 작품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요.
“이번 개막식 공연도 무용은 국수호씨가 맡았고, 음악은 박범훈씨가 맡았죠. 오랜 친구로 나이가 비슷하고 생각이 같으니까 호흡이 잘 맞아서 공동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올 김용옥 교수가 쓴 ‘백두산 신곡’으로 네 사람이 함께 작업한 경우도 있습니다. 모두 창작 동반자로서 서로 깨우치고 자극을 받는 입장이어서 제게는 좋은 자산입니다. 이런 그룹 활동은 강조되어서 나쁠 것이 없잖아요. 좋은 작품을 내느냐 못 내느냐가 평가의 기준이 되어야겠지요.”
-집안 얘기로 돌아가볼까요. 연극한다고 했을 때 ‘고루한 집안’에선 반대가 심했을 텐데요.
“물론이죠. 아버지의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나중에는 자포자기하시다가 돌아가시기 직전, 하려면 제대로 하고 제일 잘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부인이 국악인 김성녀(중앙대 국악대 창작음악극과장)씨인데 늘 마당놀이에 참여했죠? 그래서 부부 예술인으로 부러움도 사지만, 동시에 둘이 ‘말아먹는다’는 농담 섞인 핀잔도 없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만났습니까.
“제가 1970년대 초 극단 민예에 소속해 있을 때 ‘입봉’을 했죠. 입봉이란 조연출이 처음으로 대극장 연출을 맡을 때를 가리키는 연극계 은어입니다. 그때 제가 우리 음악극 ‘한네의 승천’ 연출을 맡았거든요. 재공연을 준비하면서 천사 같고, 창녀 같고, 어머니 같은 주인공을 찾아야 하는데 기왕이면 신인을 쓰고 싶었어요.
극단 민예의 판소리 선생으로 김동애씨가 계셨는데 ‘제가 요즘 이런 신인을 찾느라 고심하고 있습니다’하고 말씀 드렸더니 김성녀씨를 소개해주셨어요. 극본을 쓰고 연출을 하는 김향씨와 여성국극단의 스타 박옥진 여사의 딸이고, 당시 박귀희씨로부터 가야금 병창을 배우고 있던 중이었어요. 동생인 김성애와 함께 ‘비둘기시스터즈’라는 이름으로 ‘까투리 사냥’ 앨범을 내서 활동한 가수이기도 했고요. 첫눈에 끼가 많은 연기자로 보였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분장실 의상바구니 속에서 커왔기 때문에 연기와 소리에는 재능을 타고난 여자였어요.”
본래 손씨는 ‘연극하는 사람이 가족을 데리고 산다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순진한 문학소년 같은 마음으로 독신으로 살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 김성녀씨도 홀로 살겠다고 마음먹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난히 방랑벽이 심해 바람같이 떠돌아 다니던 그녀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남자란 언제나 불확실하고 불안한 존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나자마자 불이 확 붙었고, 1년이 안돼 결혼했다.
“저는 무뚝뚝하고 잔정이 적은 사람입니다. 자상함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고, 성격도 내성적이어서 하루 종일 말을 하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래서 어떤 여자가 날 좋아하겠나 싶었죠. 연애가 무르익을 무렵 어느 날 ‘돈 벌어오라고 구박하지 않으면 결혼할 수 있다’고 농담조로 떠보았더니 좋다는 겁니다. 돈 때문에 사는 것은 아니라고요.
아내는 지금까지 돈 가지고 바가지 긁는 일은 없었고, 성격이 워낙 무던해서 결혼하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시절 많이 겪었죠. 신혼 초 수유리에 몇 만원짜리 사글세 방을 얻어 들어갈 때는 과연 결혼이 꼭 필요한 건가 회의가 들기도 했고요.”
-집에서는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바람처럼 살고 있던 제가 결혼을 한다고 나서니까,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고마워하시던데요.”
신혼여행은 인천 연안부두로 갔다. 을지로 입구에 있던 판코리아(옛 을지극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무작정 고속버스터미널로 나갔는데, 주말이라 표가 있을 리 없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인천으로 가 연안부두에서 바닷바람을 쐬다 운전기사의 안내로 어느 호텔에 들어가 첫날밤을 보냈다. 다음날 비가 와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이들 부부에게는 누구나 가보처럼 여기는 신혼여행 사진 한 장이 없다. 나중에 멋지게 여행을 하자고 약속했지만, 아직도 지키지 못한 부도수표다.
“아내도 아내지만 애들에게 미안해요. 한번도 함께 여행을 가본 적이 없으니까요. 하다못해 한강에 나가 유람선 타본 일도 없습니다. 이제는 아이들도 으레 그러려니 여기고 이모나 외삼촌하고 바캉스를 갔다옵니다. 그런 와중에도 애들이 바르게 커준 것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우리 것’의 힘은 무한하다
그의 가족은 이산가족이나 다름없다. 딸 지원(25)은 어머니의 전공을 따라 뮤지컬 배우로 데뷔해 영국 유학중이고, 국민대 영문과 3년 재학중인 아들 지형(23)은 학교 인근에 오피스텔을 얻어 살고 있다. 아내 역시 중앙대 예술대학이 있는 경기도 안성에 살고 있어 남편과 떨어져 있다.
“극단 미추 산방이 서울 교외라고는 해도 교통이 좋지않은 산골에 있다보니 서울 출퇴근이 여의치 못합니다. 그래서 함께 살 수가 없죠. 주말이나 제가 서울에 나갈 때만 가족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가장 보람된 일을 꼽자면 어떤 것을 들 수 있습니까.
“마당놀이를 하나의 장르로 정착시킨 점이라고 하겠죠. 젊은 세대에게 우리 것에 대한 인식을 심어준 것도 마당놀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연극의 지평을 넓혔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번 월드컵 개막식도 그동안의 마당놀이를 통해 얻은 연출 에너지가 작동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큰 힘이 되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것’의 힘은 무한하다고 봅니다. 우리 것으로 국제무대에 당당히 진출할 수가 있어요. 마당놀이는 살아있는 연극이자 세계 여러 민족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정서를 담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장르라고 믿습니다. 영어권의 플레이, 일본의 아소비, 독일의 스필, 프랑스의 주, 중국의 희(戱)에는 모두 마당놀이적 요소가 있죠. 형식이 다를 뿐 지향점이나 정신적 바탕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더욱 체계화해서 우리 특유의 콘텐츠로 개발해나가려고 합니다.”
-다른 계획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죠.
“미추 연극을 더욱 발전시키고 미추 연극학교를 정착시키는 일입니다. 재원만 충분하게 마련된다면 좋은 연극인을 배출할 수 있을 텐데 아직 힘이 미치지 못하는군요. 다음으로 미추 관현악단을 활성화시키고 싶습니다. 국악만으로 이루어진 수세적인 관현악단이 아니라, 기타, 피아노, 신시사이저 등을 함께 사용해 양악을 혼합하는 관현악단을 연희적 연주단체로 만들어보려 합니다. 거기에 우리 정신을 담아보는 것입니다. 미추 연희단을 만들어 전통연희도 세계성 있는 공연예술로 평가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일본이나 중국, 러시아, 미국 등 국제 교류 공연을 많이 가졌지만, 앞으로는 극단, 관현악단, 연희단이 함께 어우러진 ‘종합 한국문화상품’으로 정기 해외순회 공연도 가질 계획이다.
손씨와의 인터뷰는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개막식 때의 피로에서 서서히 벗어난 때문일까. 마지막 인터뷰에 이르자 한국인들만이 할 수 있는 형식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리겠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오로지 한길만을 걸어온 40년 연극인생이 주는 확신과 소신이었다.
“제 취미는 음악 감상입니다. 낚시도 바둑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 직업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음악이 너무 좋습니다. 클래식을 듣기도 하지만 우리 음악에 흠뻑 빠져들 때가 더 많지요. 우리 음악의 깊이와 넓이는 서양음악의 그것과 또 다른 개념으로 다가옵니다. 유장하면서도 유려하고, 열정적이면서도 한이 서린 우리 음악에는 서양음악이 따를 수 없는 면이 분명히 있어요. 이것을 우리는 너무 모르고 지나쳐 왔습니다. 이제 이것을 경쟁력 있는 예술 콘텐츠로 개발할 수 있다고 봅니다. 상황은 또 얼마나 좋습니까. 국력이 커지면서 한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어요. 한국의 예술을 열정적으로 해석하려는 외국인들도 늘고 있고요. 이제는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의 자신감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