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호

진흙 투구

  • 김옥채

    입력2004-09-07 16: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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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글을 헤매던 자가 돌아오고 있다.

    파푸운(Papuun). 호주대륙 위에 도마뱀 모양으로 떠있는 거대한 섬. 태양이 추락하여 정글 한가운데에 곤두박질친다. 빛의 잔해들이 불의 정령을 부르며 칼춤을 추고 가슴을 베는 축제를 벌인다. 그곳에선 사람의 무덤을 찾을 수 없다. 시체를 나누어 먹으면서 고인을 추억하는 식인풍습 때문이다. 배가 고파서 사람고기를 먹느냐는 질문에 아사로 부족의 전사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들은 실제 심각한 단백질 부족 현상을 겪고 있으면서도 배가 고프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 중에 ‘사람고기를 먹다’와 ‘추억하다’는 동일한 음가를 지니고 있다. 그곳에 무덤이 있다면 혹은 그 무덤을 누군가가 보았다면 그 무덤의 주인은 분명 빛의 광기에 휘몰린 시간들의 음산한 주문일 것이다.

    마닐라발 비행기는 30분 이상 연착되고 있다.

    인천과 파푸운 사이에는 항공노선이 없다. 수도인 ‘포트 모스비’의 잭슨빌 국제공항에서 마닐라까지 왔다가 인천행 여객기로 갈아타야 한다. 14년 전 웅호와 나는 지금과는 반대로 마닐라에서 잭슨빌 국제공항까지 가는 에어 파푸운 여객기로 갈아탔었다.

    미국의 평화봉사단이 한국에서 철수하던 해,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제1기 새시대 국제협력단’의 일원으로 선발되었다. 분명 민간단체의 프로그램이었지만 삼십 수년 전 칠촌 재당숙의 빨치산 입산경력까지 들추어내고 아무런 설명 없이 해병대에서 두 달이나 지옥훈련을 시켰다. 거기서 오척단구의 웅호를 만났다. 그는 퉁퉁 부어오른 무릎관절을 러닝셔츠로 조여매고서도 호각소리에 제일 먼저 반응했다.



    80% 가까이 자진해서 연병장 한가운데 놓인 종을 쳤다. 그 종만 치면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대부분 미국유학을 떠나고 싶은 가난한 청년들이었다. 선발대상국이 동남아시아 일대로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머릿속에 미국만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도 봉사와 헌신과는 거리가 먼 부류였다. 침투용 상륙보트를 머리에 이고 모래밥을 먹으면서 탈출을 꿈꾸었다. 무작정 이 지긋지긋한 땅을 떠나고 싶어서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걸러진 후에 우리가 받은 실무교육은 일주일이 전부였다. 언어학을 전공한 웅호는 목공선반의 제원을 외우고 톱날 갈아끼우는 시범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경제학과를 나온 나는 농사실무반에 편성되어 일주일 내내 연수원 옆 논에서 피를 뽑는 일만 반복했었다.

    가장 인기가 좋은 곳은 필리핀이었다. 아마도 영어가 공용어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6명 중에서 파푸운을 지원한 사람은 웅호와 나 둘뿐이었다. 우리는 벽에 붙은 명단을 보고서 서로 외면했다. 검도 3단에 차돌멩이같이 단단해 보이던 그도 나를 자신과 똑같이 생겨먹은 인간이라고 생각했을까.

    처음 비행기를 탄 우리는 똑같이 멀미를 했다. 속이 울렁거렸고 머리가 쪼개질 듯 지끈거렸다. 내내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검푸른 산호섬이 슬그머니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이 이십 수년 동안의 시간처럼 지루하게 반복되었다.

    파푸운 상공을 날고 있다는 기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밖을 내려다보는 순간 기묘한 색상대비가 눈을 찔러왔다. 진초록의 밀림 사이에 언뜻언뜻 비치는 흰 뼈 무더기들. 웅호는 그 자리에서 노란 위액까지 모두 토해내고 말았다. 우리에겐 어차피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이 제격이라는 듯 호된 속앓이였다.

    거의 탈진한 상태에서 공항청사에 들어섰다. 마중 나온다던 외교성 관리는 고사하고 출입국 관리 직원에게 잡혀 한참을 옥신각신해야 했다. 일본인과 중국인이 아닌 황인종을 의심하면서 엄연히 필리핀 주재 대사관에서 발급한 비자마저 외면하는 것이었다. 88올림픽이 열릴 코리아를 선전하는 것보다 10달러의 효력이 훨씬 컸다.

    항구도시지만 숨이 턱턱 막히는 덥고 건조한 바람이 불었다. 흑인들보다 검고 메마른 피부, 푸석푸석한 곱슬머리…. 그들의 넓게 퍼진 코마저 건조한 기후에 맞춰 진화된 모습으로 비쳤다. 공항 앞길에 즐비한 현대적인 건물들조차 마치 건재약방에 걸린 한약재 같다는 인상을 풍겼다.

    아무런 사전정보도 없었던 우리는 택시승강장으로 향하던 도중에 강도를 당했다. 백주대낮의 노상강도였다. 그들은 넋을 놓고 걷는 우리에게 권총을 들이대며 ‘텐 달러’를 요구했다. 권총보다 무서웠던 건 그들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피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시뻘건 피를 쏟아내는 광경은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뼈무더기를 떠올리게 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건 바로 ‘부아이’라는 마약성 음식의 즙이었다. 다카 열매와 대나무, 조개껍질을 함께 삶고 말린 다음에 빻은 하얀 가루를 부아이 열매와 섞은 것을 다시 부아이라고 불렀다. 그걸 씹어 먹으면 정신이 몽롱해진다. 그곳에선 애어른을 가리지 않고 모두 부아이를 질겅거리고 다녔다.

    우리나라로 치면 여인숙 수준에 불과한 모텔의 하루 숙박요금이 50달러에 이르렀다. 어떻게 된 계산법인지 하루를 묵으면 50달러고 이틀을 묵으면 110달러, 사흘을 묵으면 190달러를 요구했다.

    정부의 담당자는 부아이를 질겅거리며 사흘 만에 나타났다. 유리조각을 씹으며 위협하는 뒷골목 똘마니 같았다. 맨발에 양복차림을 한 그는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우리에게 대학을 나왔냐는 질문을 했다. 자신은 최고 명문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여러 명의 아내를 거느릴 수 있다며 젠체했다. 세번째 부인과 신혼여행을 다녀오는 길이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지참금이 적긴 하지만 얼굴은 예뻐요. 당신들은 아내가 몇 명이나 되지요?”

    알아먹기 힘든 피진(pidgin) 계열의 기형적인 영어로 그의 열일곱 살짜리 새 아내에 대해 끊임없이 주절댔다.

    “우린 여기에 일을 하러 왔습니다. 하지만 강도를 당했고 비싼 물가에 시달리고 있어요. 우리를 빨리 조치해주시오.”

    웅호의 말에 그의 안색이 금세 싸늘해졌다. 나중에 알고보니,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신의 아내 얘기를 하는 것이 그가 자란 동부 브갠빌 섬 부족의 전통이었다. 아내 얘기를 다 듣고서 ‘그런 마누라를 얻은 당신은 무척 훌륭한 사람입니다’라는 말을 해야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우리의 태도는 그에게 심한 모욕이었던 셈이다.

    그는 귀찮다는 듯이 서류를 뒤적이더니 몇 군데 서명을 했다.

    “가고 싶은 곳이 어디죠? 당신들이 원하면 이 땅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부담은 물론 당신들이 지는 것을 알고 있겠죠? 당신들의 안전을 우리 정부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서약서에 서명하면 일주일 내에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막무가내로 파푸운 지도를 들이밀었다. 가고 싶은 곳을 골라보라는 것이다. 그의 성의없는 태도에 낯이 붉어질 지경이었다. 나는 아무 곳에나 손가락질을 했다. 그는 피칠갑을 한 입으로 비죽거리며 웃었다. 내가 짚은 땅은 인도네시아의 속주인 ‘이리안 자야’였다. 이 나라가 동서로 동강나 있는 분단국가라는 사실을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험한 곳을 추천해주시오.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땅.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서 당신의 도움 따위가 필요없을 정도로 지독한 땅을 말이오.”

    그는 매년 새로운 부족이 인류학 학술지에 소개되고 있다는 곳을 가리켰다. 그러나 인류학자들도 들어가길 두려워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세픽(Sepic)강 연안의 참브리(Chambri) 지방이었다. 포트 모스비에서 북쪽 해안의 워워크(Wawake)까지 덜덜거리는 세스나 비행기로 갔다가 거기서부터는 엿새 동안 남쪽으로 걸어가야 했다. 워워크에서 목적지까지는 직선거리로 100km 남짓 밖에 되지 않지만 위험지역을 우회하기 때문에 길은 몇 배로 늘어났다. 돈맛이 단단히 들어있는 짐꾼들조차 참브리 얘기를 꺼내자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결국 통상요금의 두 배를 치르고서야 사람을 살 수 있었다. 그나마 출발당일에는 두 명이 나타나지 않았다.

    2000m가 넘는 산봉우리를 두 개나 넘고 세픽강의 지류가 만들어낸 우각호 늪을 수없이 우회하였다. 외팔이 안내인은 한쪽 손에 든 정글도로 능숙하게 길을 만들어 나갔다. 우리 앞길에 불쑥 끼어든 악어를 가리키면서 희죽거렸다. 저 악어의 친척이 자기 팔을 뺏어갔다고 말했다. 악어는 사람을 보고도 피하지 않고 시위하듯 우리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한 짐꾼이 배낭에서 빼낸 손도끼를 던지자 악어의 정수리에 그대로 박혔다. 우린 악어고기 파티가 끝날 때까지 그들을 기다릴 도리밖에 없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사람이 다닌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타알’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뱀이 풀을 쓰러뜨리고 지나간 자국이 길처럼 뻗어 있었다. 살만 씻겨 내려간 하얀 뼈무덤을 볼 때마다 진저리가 쳐졌다. 거대한 이구아나의 해골이 뜨악하게 나를 쳐다볼 때마다 이 길이 맞냐고 물어보았다.

    안내인은 곧 원주민들이 나타난다고 대꾸했고, 그의 말대로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돌촉을 끼운 긴 창을 든 원주민들이 우리를 에워쌌다. 통행세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협곡을 지날 때마다 괴성을 지르고 화살을 퍼부으며 나타난 각기 다른 부족들에게 통행세를 물어야 했다. 극락조 깃털로 장식한 부족과 성기에 길다란 막대기를 끼운 부족, 똑같은 모양으로 얼굴문신을 한 부족과 귀를 네모나게 잘라낸 부족….

    내 귀에는 모두 같은 말로 들렸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었다. 웅호의 설명에 의하면 천여 개의 언어, 전세계 언어의 절반 이상이 이 땅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바로 이웃한 부족들의 언어 사이에 한국어와 몽골어 정도의 유사성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은 몇 천년 동안 지속되어온 터부인 셈이었다.

    “우리는 왜 헛된 것만 찾으려 했을까? 이 길을 다시 걸어나올 수 없을 것 같다.”

    별똥별이 금을 그으며 열대의 밤하늘을 재단하고 있을 때였다. 웅호는 안내인이 농사지은 커피를 마시며 처음으로 자기 속내를 내비쳤다. 새삼스러웠다. 정글을 찾아온 자에게 감상은 맞지 않는 옷 같았다.

    안내인은 별똥별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자신의 부족 전설을 얘기해주었다. 옛날옛적, 인간이 신을 그리 부러워하지 않던 시절, 지상의 인간들은 별똥별로 마름질한 옷을 입고 지냈단다. 그 옷이 너무나 입고 싶었던 신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신이 그 말을 들어줄 리 없었다. 신의 핏줄을 타고난 자는 별똥별 옷을 입는 순간 지상으로 추락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이었다. 신의 아들은 아버지를 속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몰래 별똥별이 재단한 옷감을 하나씩 걸쳤고 마침내 지상의 인간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휘황한 옷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신의 아들이 자기 옷자락을 휘감는 순간 그는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면서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몹시 상심한 아버지 신은 인간들이 더 이상 별똥별 옷을 입지 못하도록 지상에 닿기도 전에 태워 없애버렸다. 그때부터 인간은 하늘에 오를 수 없었고 하늘의 친구를 사귈 수 없었다는 얘기.

    지상과 하늘 사이에 기둥을 세우려는 듯 높이 솟은 열대 티크나무 숲을 지나자 마침내 참브리 호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호수라고는 하지만 서울면적보다 넓어서 수평선이 보일 정도였다. 우리가 가고자 했던 호수 근처의 마을까지는 아직도 하루 반나절을 걸어야 했다. 짐꾼들이 휴식시간에 캥거루쥐를 사냥하려고 대나무 숲에서 쥐구멍을 쑤시고 다닐 때였다. 묘한 성대울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짐꾼들이 일순간 모든 행동을 중지했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수백 명의 전사들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앞의 여정에서는 보지 못한 엄청난 대열이었다. 하나같이 진흙투구를 뒤집어쓰고 온몸에 하얀 분칠을 했다. 당당한 체격에 쇠붙이 무기를 든 부족이었다. 초라한 가장행렬을 비웃으며 나타난 진짜들 같았다.

    맨발로 땅을 구르는 소리와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컥 토해내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마치 메기고 받는 뱃노래 같기도 했다. 삶과 불화가 생겨 끊임없이 뻑뻑거리는 소리…. 소리와 소리가 맞물려 사슬처럼 연결되어 내 목을 옥죄는 것만 같았다. 엎드려 귀를 막아보았지만 녹슨 파이프 안의 진동 같은 괴성들은 내 뇌수 안에 주파수를 맞춘 채 떠나지 않았다.

    그때 두려움을 수신하는 안테나를 부러뜨리고 나선 자가 있었다. 굽은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높고 평탄한 웃음소리. 웅호는 어느새 열대의 소리를 흉내내고 있었다. 내리꽂는 스콜같이 거침없고 수직으로 증발하는 수증기처럼 경쾌한 파장의 떨림으로 전사의 노여움에 화답했다. 전사들의 투구 속 공명음이 잦아들었다. 전사들은 웅호를 데리고 역시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 바람이 역풍으로 몰아쳐도 웅호의 웃음소리는 정글을 굽이굽이 돌아가며 오래도록 씻겨지지 않았다.

    아마도 안개 때문인 모양이다. 공항 청사 안의 사람들은 여전히 안개를 헤치는 발사위로 눅눅한 걸음걸이를 옮겨간다. 그러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습기가 마르길 기다리듯 누군가를 기다리고, 안개가 떠나간 자리를 차지한 가벼운 진저리처럼 곧 그리워할 누군가를 떠나보낸다.

    웅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세 명이 더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안개보다 훨씬 젖어 있었다. 우리 넷은 모두 초면이었다. 결혼식 피로연에 모인 고향친구, 고등학교 친구, 대학 친구같이 어색하기만 했다. 우리가 웅호에 대해 공유할 수 있는 화제는 없었다. 모두들 다른 색깔의 웅호를 추억하고 있을 것이다. 웅호를 함께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이 우리를 일행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아까부터 계속 눈을 감고 앉아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담배를 청한다. 그는 새벽 인력시장에 나온 공사장 인부 같은 행색이었다. 빛바랜 청재킷과 무릎이 나온 코르덴바지에 해병대 문양이 새겨진 가방을 메고 있었다. 둘이 밖으로 나서자 감색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친구가 시계와 도착시간표를 번갈아 보더니 우죽거리며 뒤따랐다.

    나머지 한 명은 여자였다. 네 벌을 간 먹물보다 더 검은 머리카락을 지녔다. 그보다 더 검은 눈동자와 윤기 나는 앞니보다 더 하얀 흰자위는 바닥에 닻을 내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담배를 가진 사람은 청재킷을 입은 사람뿐이었다. 우리는 청재킷을 입은 사내에게 담배와 불을 빌리면서 수인사를 나누었다.

    “이런 자리는 술이 더 어울릴 텐데요.”

    감색 정장을 입은 사내는 웅호의 대학 친구인 백립이었다. 그는 뒤를 밟히는 사람처럼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했다. 손과 발도 가만히 놀리지 못하는 성미같았다. 성긴 손놀림에 기어이 담배불똥까지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는 청재킷에게 다시 담배와 불을 빌리고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진짜로 술이 필요한 것 같아요. 우현이가 오면 우리 같이 갑시다. 제가 좋은 곳으로 모시지요.”

    이우현. 그들은 웅호를 그런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웅호는 그가 빌린 이름이었으니 가명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지난해 겨울, 웅호는 편지에서 진짜 웅호를 찾아달라고 부탁했었다. ‘동광산(銅鑛山) 폭동 진압’이라는 헤드라인이 박힌 영자신문에 빨간 글씨로 쓴 편지였다.



    웅호는 그곳 사람들이 시간이 남아 심심해서 미치고 싶을 때 남의 집 기둥뿌리를 뽑아온다고 했다. 웅호는 내게도 심심해서 미칠 지경이 되면 진짜 웅호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가롭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설령 찾는다고 해도 웅호의 이름 뒤에 붙은 ‘병적 미복귀’ 꼬리표만큼이나 별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실제 서웅호를 아는 사람은 많이 있었지만 그가 어디서 뭘 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서웅호와 직접 안면이 있는 사람은 50명쯤 되었다. 그리고 몇 다리 건너서 알게 된 수많은 사람까지 포함해서 나름대로 추적을 해나갔지만 대부분 몇 년 전의 행적을 그것도 누구누구의 입을 통해 전달받은 것이 전부였다. ‘5년 전에 마산에서 배관공으로 일하고 있더라. 서산 어디쯤에서 물막이공사를 하다가 강원도 어디쯤으로 옮겼다더라.’ 늙은 부친의 증언은 더욱 걸작이었다. ‘모올라… 그 놈이 내 씬지도 모르것고…. 당최 모르것당께…. 호박밭에 오얏씨 심갔는디 호박 주둥이 내밀드라고… 도시 모르것드라고….’

    서웅호 파일이 두꺼워져 갔지만 뚜렷한 행적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 내 방은 흡사 야전부대의 상황실같이 변해갔다. 한쪽 벽면을 다 차지할 정도로 커진 한국지도 위에 아스테지를 붙이고 서웅호의 이동경로를 추적했다. 그가 있었던 곳을 빨간색 펜으로 칠해놓았더니 한반도 지도 위에 온통 열꽃이 피고 말았다.

    10년 묵은 토끼의 굴을 찾는 심정이었다. 그의 지인을 수형도처럼 그려놓았더니 서웅호는 남파간첩의 총책처럼 맨 꼭대기에 그려졌다. 그도 점조직으로 조직을 운영하는지 한 다리만 건너면 선이 끊어져버렸다. 마지막으로 신문에 광고를 서너 번 내고 지쳐갈 만할 때 어느 노숙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덮고 자던 신문지에서 자기의 옛날 이름을 발견했노라고. 그렇게 찾아낸 사람이 청재킷을 입은 사람이었고 오늘에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우현 강학님답네요. 새삼스럽게스리.”

    그는 가방 안을 부스럭거리더니 깊은 곳에서 찌그러진 새 담뱃갑을 꺼내서 백립과 내게 다시 담배를 권했다.

    그는 이제 이우현으로 불러야 할 웅호가 야학을 운영할 때 만난 학생이었다. 야학에서는 선생님을 강학이라고 부르고 학생을 학강이라고 한다고 덧붙였다. “그깟 이름이야 열 개 아니라 백 개라도 빌려줄 수 있으면 빌려줬지요. 그게 뭐 대수겄어요. 그동안 그저 강학님 손 한번 잡고자파 했었는디 이렇게라도 연락이 돼서 반갑기 그지없구만요.”

    그러나 이름을 빌려준 대가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화로 짧지 않은 세월, 골 깊은 시절들을 내게 털어놓았다. 불고지죄와 범죄은닉죄, 사기협박죄, 공문서 위조죄에 범죄단체 구성죄…. 그는 우현이 한국에 없는 동안 이우현의 ‘카게무샤’로 활동했다.

    우현은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에 전설처럼 회자되는 비판문건을 남겼다. ‘…지금은 모두 조직을 떠나는 것이 조직을 위하는 유일한 대안이다. 혁명을 입에 올리지 않는 일이 절실히 요구된다. 가능하다면 혁명을 과잉 연산하고 있는 뇌의 전두엽 한쪽 면을 절개하는 방법도 괜찮다. 이유는 간단하다. 적들이 훨씬 진보적이고 적들이 훨씬 똑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모색을 했다. 그가 출국하기 직전에 만든 ‘국제 아나키스트 연대’의 조직을 마지막까지 고수하다가 잡혔을 때도 웅호는 이우현으로 행세했다.

    무정부주의자 조직 사건은 공안검찰에게도 골치였던 모양이다.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죄로 기소됐다가 형법상 범죄단체 구성죄의 적용으로 선고를 받았다. 일반적인 주류 강성의 운동권 조직과 같은 부류로 취급할 수 있는 혐의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였다. 검찰이 찾은 혐의는 압수한 문건에서 다량으로 발견되었지만 그걸 실정법의 테두리에서 엮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와 이론 공산주의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상부구조의 무시, 혹은 배제가 국가의 전복, 타도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두고 정치학계와 법학계에서 미지근한 논쟁이 일기도 했다는 후문을 그에게서 들었다. 제법 크다면 큰 사건인데 왜 그렇게 조용히 지나갔을까 하는 의문에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지라. 싸움에서 승자와 패자는 언뜻보면 서로 상종하지 못할 원수지간처럼 보여도 실은 한통속이에요. 패자가 없으면 승자가 없고 전리품도 없지라우? 약은 놈들은 아무나 적을 만들지 않는 법이죠. 전리품의 질을 따져서 적을 만들드라 이 말입니다. 우리 같은 비주류 적들은 게임에 끼워주지 않는 겁니다. 그냥 해프닝으로 취급하면서 웃어넘겨불드라고요. 검찰 수사관이 그럽디다. 주사파나 민중해방 잔류파가 되든지 하지 왜 영양가 없는 아나키스트를 하냐고 말입니다. 한통속이에요. 한통속…. 동지라고 불렀던 인간들이 지금은 판검사도 하고 국회의원도 하고 공기업 사장도 하잖습디까? 환장하게 뜨거웠던 열정을 파먹고들…. 이만한 자유와 민주도 다 자기들 덕이다, 하고 텔레비 나와서까지 요설을 까고, 386세대가 어쩌고저쩌고 하고. 강학님께서 그랬구만요. 누구한테 구걸해서 얻은 자유, 좋게 말해서 투쟁하고 지랄해서 얻은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그런 자유는 윤회의 감옥 속에 갇혀버린다, 자식새끼 손주새끼도 똑같은 말을 지껄이게 된다, 라고요. 자유는 스스로 그러한 것이고 열반이라고 했지라.’

    파출소 네 곳을 방화했고 시골 지서 무기고 약탈을 모의한 사건이 있었다. 자기 조직의 존재를 알리고자 했고 그들이 건설하고자 했던 자주적 공동집산체의 방어를 위한 준비의 일환이었다. 도심지의 빈 사무실을 점거하여 빈민공동체를 꾸리고자 했고, 방치된 국유림을 이용하여 경제활동을 계획했었다. 모든 건 우현이 미리 짜놓은 전술강령을 웅호가 거의 혼자 도맡다시피했던 것이다. 우현은 나아가서 비무장지대의 점령을 꿈꾸었다. 스무 살짜리들 서슬만 퍼렇게 살아있는 그곳에서 평화 공동체를 꿈꾸었고 북과 남의 총부리를 웃음으로 녹여버리려고 했다.

    우현은 장난기 가득한 꿈으로 세상을 상대하려고 했던 것 같다. 더 이상 진지한 꿈 얘기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안 후에 제 살을 뜯고 싶어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크게 한번 조롱해보고 정글로 떠나갔던 것이다.

    원망도 할 법한데 웅호는 우직한 마당쇠의 그것이었다. 우현이 달나라에 공동체를 세우려고 하면 우주선이라도 훔쳐오려고 할 것 같았다. 15명으로 시작한 조직이 혼자가 되었을 때에도 유인물을 만들고 노숙자들과 함께 빈 사무실을 점령했고, 고소를 당하고 감방에 갔다. 우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자신의 열 손가락 지문을 그라인드 페이퍼에 갈아버린 사람이었다. ‘잘 넘어간다 싶었는데, 기결수로 있을 때 정보부서에 근무하는 이우현 강학님 친구가 저 놈은 그 놈이 아니다, 하고 불어부렀지요. 한때는 혁명의 땀으로 밥 말아먹고 혁명의 피바다를 헤쳐가겠다던 사람이었죠. 재판을 다시 받고 곱절로 징역을 살았습죠. 그게 대수것어요? 뜻을 펼치러 간 강학님 신상에 폐를 끼친 게 잘못이었죠. 강학님은 제 불찰로 국제적인 위험인물이 되부렀구요. 강학님 은공을 그런 식으로 갚게 되다니 지가 사람이 아니죠. 나이 스물 넘도록 쌈박질에 갈보들 화대 뜯고 술 마시는 재주밖에 없던 지한테 인간이 뭔가,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가 뭔가, 세상이 나를 왜 살아가도록 하고, 세상을 향해 울부짖어야 할 이유를 알려주신 분한테….’

    둘의 인연은 그리 아름답지 않게 시작되었다. 청량리역에서 인신매매단 똘마니짓을 하던 웅호가 우현의 야학에 다니던 여자를 팔아 넘겼고 석 달을 쫓아다니다가 웅호를 찾아냈던 것이다. 그는 분명 우현의 목검에 한쪽 어깨쯤은 빠져버렸을 것이다. 그런 웅호를 데려와 정치경제학 교육을 시키고 크로포트킨을 알게 했고 투사로 키워냈다.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역시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여자는 미색 니트 셔츠 위에 군청색 재킷과 버버리 문양의 플레어 스커트를 입었다. 자칫 촌스러워 보일 옷 스타일을 그녀는 자기 분위기로 잘 여몄다. 백립이 붕 뜬 손놀림으로 캔커피를 하나씩 건넸다. 미지근했다. 그녀는 캔을 따지 않고 깍지 낀 손안에 그대로 두었다. 미지근한 커피가 그녀의 온기를 뺏어가는 것 같았다.

    우리 또래는 됐을까.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또 그녀가 왜 이 자리에 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정글에서 온 마지막 소식을 받던 날, 그녀는 내게 전화를 했고, 5번 게이트 옆 서적 가판대 앞에서 만나기를 청했다. 나는 그녀를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는 내 얼굴을 안다고 했다. 아이의 칭얼거림이 전화를 통해 들려왔다. 그것뿐이었다.

    청사를 드나드는 미끈한 스튜어디스들보다 단화를 신은 그녀가 더 커 보였다. 그녀가 우현을 만나는 상상을 슬쩍 해보았다. 둘다 서로 외면할 것 같았다. 살아가는 동안 가장 굵고 길고 질긴 인연의 끈을 삼았지만 이럴 수밖에 없다는 찰나의 눈빛을 주고 받으면서.

    “많이 늦나보죠? 제기…. 안개 때문인가요? 제격입니다. 고양이가 딴맘 먹기 딱 좋은 날씹니다. 우리 어머니가 그랬어요. 아마 이북에서나 쓰는 말인가봐요. 다른 사람한테는 들어보지 못했거든요. 이런 날 어머닌 하루종일 고양이를 굶겼어요. 마치 이런 날 떠나라고 고양이를 얼르는 것 같았죠. 그날은 하루종일 안개와 씨름을 했어요. 자울거리다가 샅바를 놓친 격이죠. 고양이는 안개비를 맞으면서 산으로 올라갔고요. 손바닥에 아직도 그 감촉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고양이가 내 손바닥을 핥을 때요. 그 놈은 비린 생선을 먹던 입으로 핥아도 냄새가 나지 않았어요. 예전부터 그렇게 훌쩍 떠나고 싶었을까요? 안개가 너무 싫어요. 안개에서 비린내가 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저 혼자일겁니다.”

    백립은 체한 사람모양 숨을 몰아가면서 말을 토해내듯 했다. 시계를 보고 얼굴을 몇 번 비비고 다시 시계를 보고 손톱 밑을 파고 발목을 돌리고 하다가 급하게 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도착 시간판의 마닐라발 RK832 여객기에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다. 짐을 챙기고 입국수속을 하려면 적어도 30분은 필요하고 그만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우리 일행은 도착홈 가운데에 서있었다. 여자는 우리와 조금 떨어져서 여전히 시선을 아래에 두었다. 허리까지 빠지는 뻘밭 같은 과거를 되새기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그런 상상이 그녀에게 더 어울리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공항 청사 바닥은 한 시간 넘게 집중하여 감상할 만한 대상은 되지 않는다.

    양쪽 문으로 여러 인종들이 뒤섞여 쏟아지고 있었다. 마닐라발 항공기 승객이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약속한 대로 노란 깃발을 들었다. 그러나 이 깃발을 보고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 제 기분이 어쩐지 아세요?”

    아무도 백립에게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취해야 할 것 같아요. 취하고 싶어요. 내 청춘이, 내 남은 생명이 모두 무너질 것 같아요.”

    웅호가 그를 한동안 빤히 노려보았다. 아직도 성한 곳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눈빛이었다. 그가 변호사라고 했던가. 먼저 자기를 동정한 후에 남을 변호했다는 로마의 키케로가 떠올랐다. 백립도 그런 방식으로 우현을 감싸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썩 유쾌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았다. 그가 설득하려는 사람 모두도 변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기다리던 비행기는 도착 시간판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사라져버렸다. 오지 않을 모양이다. 못 올지도 모른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다. 여자, 더 이상 검을 수 없는 눈동자를 지닌 여자가 목례를 하고 뒤돌아섰다. 웅호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귓속에 깊은 고랑을 파고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머릿 속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뇌 깊숙한 곳까지 갈아엎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아무리 튼튼한 종자를 심어도 싹을 틔울 수 없다는 사실을. 불모(不毛)의 청춘, 산성의 안개비가 내린다.

    여자는 택시 승강장에 서있었다. 우리 일행은 그녀를 잡지 않았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검은 눈동자가 슬픈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깊은 곳에서 먹빛으로 흔들리는 눈물…. 많이 마셔야 될 것 같다. 그녀와 우현의 몫까지.

    백립과 웅호와의 술자리는 예상대로 길어졌다.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허무와 고독과 퇴폐만 남은 청춘의 술자리. 미련을 길게 끄는 버릇만 남은 술먹는, 술자리의 들러리가 된 청춘. 마지막이길 바랐다.

    그들은 우현의 얘기를 듣고 싶어했다. 우현의 행적은 술잔을 털고 쓴 맛을 덜기 위해 귀안주로 올려졌다.

    ‘진흙투구를 뭘로 만드는지 아세요?’ ‘진흙이겠죠.’ ‘진흙은 조금밖에 안 들어가요. 초식동물의 똥이 주재료예요. 섬유질이 많아서 단단히 굳어지거든요.’ ‘그럼 그 냄새를 허구헌날?’ ‘냄새 없어요. 냄새가 나더라도 향긋하죠. 여자들 똥도 들어가니까.’ ‘진짜로 먹어봤어요?’ ‘배가 부르지는 않았어요. 진짜 맛들인 전사들이 몇 있어서.’ ‘맛은 어때요?’ ‘그렇게 똥그랗게 눈 뜨고 보지 마세요. 회가 동할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 청춘은 그렇게 스스로 울적해지고 싶어했고 서로를 감상하였다.

    웅호는 우현의 이름으로 거길 가겠다고 했다. 백립은 자신을 겁쟁이라고 자학하며 술잔을 집어던졌다. 왜 사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나는 마구 웃었다. 비겁했다. 미련 없는 마지막이길 바랐다.

    자동응답기에는 우현을 상자에 담아 오겠다던 노르웨이 인류학자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급한 사정이 생겨서 못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미국에 가야 합니다. 미스터 리 …는 포트 모스비 행정타운 뒤편 퀸 모텔에 있습니다. 모텔주인은 참브리 투쟁을 도왔던 동지입니다. 그가 잘 보관하고 있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정부군의 포로가 되어 3년 만에 파푸운에서 추방당했다. 나머지 원주민 포로들은 호주인이 경영하는 커피농장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잭슨 국제공항에서 본 관광안내서에는 파푸운이 곱슬머리 사람이란 뜻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본 건 진흙투구를 쓴 아사로 전사들뿐이다.

    우현의 마지막 투쟁은 외로웠다. 정부군의 대공세가 끝난 후 겨우 200명 정도만이 살아있었다. 세계혁명을 꿈꾸는 서구의 젊은이들이 참브리 투쟁을 돕기 위해 모여들긴 했지만 사진 찍기에 바빴다. 우현은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속였고 세계의 좌익계 팸플릿은 반쯤 깨진 진흙투구를 쓴 몽골리언 혁명전사를 소개하였다. 사진 속의 우현은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혁명의 더러운 입김이 닿지 않은 곳을 원했던 그는 그들의 투쟁성금이 아쉬워 포즈를 취했을 것이다.

    마지막엔 7명의 전사가 남았다. 그들은 아사로의 폐허로 가서 신의 죽음을 선포하는 축제를 벌였다. 따끈따끈한 적의 심장을 씹으면서 스스로 저주를 풀었다. 우현은 그 자리에서 내게 마지막 편지를 써서 사진을 찍는 노르웨이 인류학자에게 부탁을 했다.



    편지의 뒷부분은 해독이 불가능했다. 어린애 그림 같았다. 어쩌면 진짜로 뭘 그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부아이를 씹으면 머릿속이 현란한 영상으로 가득 차니까.

    쫓겨다니면서도 그들은 진흙투구를 벗지 않았다. 깨지면 속성으로 만들어 썼다. 적의 얼굴 가죽을 덧대고 진흙을 발랐다. 그들은 광장 화구에 승전비 같이 높은 불기둥을 세웠을 것이다. 전사의 마지막 진흙투구가 제물이 되었다. 스스로에게 바치는 제물인 셈이었다.

    정부군이 들이닥쳤고 전멸하였다. 아니 방탄조끼를 입은 노르웨이인은 살았다. 그가 우현의 죽음을 알려주었다. 살이 빠지는 풍토병에 걸려, 피골이 상접한 몰골에, 여덟 발의 총알을 맞으며, 부아이를 씹으며, 웃으며 죽은. 그리고 아사로의 마지막 전사가 되었다.

    우현을 납치해간 전사들은 코걸이를 한 포터 두 명의 두개골을 갈라놓고 갔다. 순식간에 이름 모를 날벌레들이 시체 주위로 몰려들었다. 일을 수습하는 동안에 또 두 명이 짐을 진 채로 줄행랑을 쳤다.

    안내인은 나를 참브리 지방 행정사무소에 데려다주었다. 꼭 전당포 같은 구조였다. 철창 칸막이 너머로 책상과 의자가 두 개씩, 캐비닛이 하나 있고 대형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경찰서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유일한 행정관서인 이곳에는 전화 한 대도 없었다. 연락수단은 두 달에 한 번씩 오는 헬기가 전부였다.

    관리는 풀어진 눈으로 부아이를 씹고 있었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는 마치 의자에 앉아서 입 속에 총을 넣고 자살한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열대과일의 당도와 고칼로리가 그를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비만으로 만들어놓은 모양이었다.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는 느린 동작으로 입을 움찔거리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죽음이 한발짝 더 가까운 곳에서 나를 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내키지 않았으나 관리에게 그간의 사정을 얘기했다. 내 말을 알아듣는지 어쩌는지도 몰랐고 내 말이 제대로 된 문장인지도 가늠하지 못한 채 그냥 되는 대로 주절거렸다. 두개골을 쪼개버린 살인자가 총을 입에 물고 자살한 시체 앞에서 넋두리를 하는 것만 같았다.

    아무튼, 도와달라는 말을 수차례 되풀이하자 할 말이 없어졌다. 할 말은 다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관리는 여전히 슬로모션으로 부아이를 씹고 있을 뿐이다. 이번에는 안내인이 피진 잉글리시로 나를 대변하는 듯했다. 관리는 그의 말을 다 듣고나서야 뭔가 반응을 보였다. 반응이래봤자 부하직원의 부축을 받고 의자에서 일어나 쓰레기통에 부아이 찌꺼기를 뱉는 게 전부였다. 입 주변이 피로 흥건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크게 움직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희망의 전조를 보는 것 같아 맘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가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남쪽으로 몇 십 마일 더 내려가면 조지 메모리얼 폭포가 있고 또 서쪽으로 얼마를 가면 악어의 집단 서식지가 있다는 식의 관광 안내도였다. 철창을 뜯고 달려가 그의 주둥이를 찢어버리고 싶었다. 영어를 생각해낼 겨를도 없이 나는 내가 아는 가장 흉칙한 한국 욕들을 그에게 퍼부었다.

    관리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지더니 다시 서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는 여전히 몽롱한 표정으로 말 한마디 없이도 우리 일행을 질겁하게 만들었다. 권총이었다. 부하가 와서 거들었다. 시에스타를 즐길 시간이란다. 안전장치를 풀고 권총을 겨누었다. 그들은 신변보호를 이유로 우리를 유치장에 가두어 넣었다. 뚱뚱한 관리는 치안업무까지 관장하는 모양이었다.

    간수를 붙들고 아무리 한국을 말하고 새시대 국제협력단을 설명해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안내인이 나를 바다를 건너온 사람이라고 소개했지만 역시 바다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이해하긴 힘들었다. 그들은 다 필요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느 부족 사람이냐는 말만 계속 물어볼 뿐이었다. 난감했다. 경주 김씨 족보를 들먹여야 하나? 내가 우물거리자 ‘네꽝 네꽝’하면서 자기들끼리 키득거렸다. ‘부족에서 추방된 자’라는 뜻으로 꽤나 재미있는 조롱거리라고 안내인이 말했다.

    그들에게 국가라는 개념은 아예 없었다. 파푸운은 그저 외국사람들이 그렇게 부를 뿐이라고 했다. 누군가 살인을 했고 납치를 했다는 말도 그들에겐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됐죠?”

    “그냥 그대로 놔뒀어요.”

    “그 놈들이 그냥 갔다는 말이요? 재미있는 놈들이야.”

    그들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기서 우선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달러 흥정을 붙여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하긴 한 발짝만 벗어나면 밀림지대가 펼쳐진다. 달러가 유통될 리 없었다. 가지고 온 짐과 흥정을 했더니 그건 이미 압수되어 뚱보 관리의 손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건 그렇고 아침에 물 한 양동이를 들여보내 주고는 식사가 끝이었다. 포터들은 자기 운명에 대해 초연한 듯 보였다. 물 한 바가지를 먹고도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모포에서 실을 빼내어 자기들끼리 실놀이를 하면서 희희낙락이었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한꺼번에 격심한 여독이 덮쳐왔다. 물 한 바가지를 마시면 두 배의 땀을 쏟아야 했다. 가시에 찔린 상처가 곪아 들어가서 일어나 앉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헛것이 보이다가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기를 반복했다. 바로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죽음, 몸서리가 쳐졌다.

    뭔가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주니까 ‘얌’이라는 감자로 갈아 만든, 떡도 아니고 빵도 아닌 걸 몇 개 가져다주었다. 공갈빵같이 입에 닿자마자 부서졌고 맛도 비슷했다. 그러나 그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옆에 있는 포터들이 군침을 흘려도 외면해버렸다. 우선 내가 살아야 했다. 그렇게 먹고 나면 다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반지는 ‘무무’라는 돼지고기 요리가 되어 돌아왔고, 끈 떨어진 시계는 후추가 잔뜩 들어 있는 도마뱀 스프로 변했다. 도마뱀 다리를 우적우적 씹어먹는 소리를 들으면서 다시 잠이 들었다. 주머니칼, 윗도리가 차츰 간수들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는 동안에 포터들은 하나둘씩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어 나갔다. 간수들은 내 바지까지 벗겨내고는 흰 피부를 보고 손가락질을 했다. 혼자 보기엔 아까웠던 모양인지 밖에서 열댓 명의 사람들을 끌고 들어왔다.

    부스럼딱지가 더덕더덕 붙어있는 아이 하나가 긴 꼬챙이로 나를 집적거렸다. 아이는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동물을 대하듯 했다. 자기 엉덩이를 까보이기도 하고 내 입안에 꼬챙이를 쑤셔 넣기도 했다. 이제 죽는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흔들리는 노란 빛깔의 시야가 펼쳐질 뿐이었다.

    버르적거리는데 손에 뭔가가 잡혔다. 짐꾼들이 씹다가 남겨둔 부아이였다. 시고 텁텁한 맛이 입안을 휘저어 놓았다. 도저히 먹을 만한 음식이 아니었지만 뱉어내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환영이 펼쳐졌다.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내가 보였다. 하늘엔 인간새들의 에어쇼가 벌어지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만났던 사람들이 전부 날아다니고 있었다. 앞뒷집에서 태어나, 십년 내내 나한테 얻어맞다가, 모래 채취선이 드나드는 강에서 스쿠루에 걸려 죽은 친구놈이 그 모습 그대로 바보같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스쳐지나갔던 여자들, 그 여자들과 붙어먹은 남자들, 이브껌만 씹던 학교 앞 당구장 볼딱쇠, 그의 주먹에 이가 나간 파출소 김순경, 이사님 안방마님을 노리던 동료 여직원, 두 여자에게 모두 버림받은 이사님, 토큰 가판대 할아버지의 검버섯 핀 손, 할아버지 가판대를 네번째 털다가 끝내 붙잡힌 가출 2년차 섬청소년, 주문 같은 노래를 부르며 집단으로 자위행위를 하던 짐꾼들, 스물여덟 조각난 두개골을 가졌던 그들, 너무 가까이서 데모 구경하다가 뒤에서 던진 화염병에 맞아 온몸에 중화상을 입은 후배,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여자후배, 시대를 저주하며 소주 한 병을 나눠 먹고서 학생회관 옥상에서 동반자살한 그들…. 그들을 투사로 만든 어이없는 군중…. 잠자리들처럼 떼로 날아다녀도 부딪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맥락을 벗어나는 암전(暗轉)이 꽤 길게 지속됐다. 내 머릿속의 무대는 어수선했다. 무엇을 옮기고 바꾸고 깨지고 감고 치우고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청테이프의 표시선을 따라서 몇 초 안에 새 무대가 완성된다. 웃음이 나왔다. 삶의 연출도 그러하리라.

    제 아무리 심각한 연극도 내겐 모두 코미디였다. 난 가끔 그 우스꽝스런 삶의 발작적인 변태과정을 즐기기 위해 대학로를 찾았다. 기호와 약속을 무시하고 보는 연극은 삶의 무정부성이 그대로 녹아있는 표본이었다.

    실가닥에 매달린 듯한 아슬아슬한 밝기의 조명이 서서히 들어왔다. 누군가 내 안에 들어와 현실과 환상을 50대50의 비율로 섞어 흔드는 것만 같았다. 뿌연 거품이 자지러지며 솟구쳐 올랐다. 내 안에는 남아있는 게 별로 없었다. 누군가 흔들었다. 나는 동전 몇 개가 들어앉아 있는 돼지저금통처럼 요란하게 흔들렸다.

    놀랍게도 나를 흔든 사람은 진흙투구를 쓴 전사였다. 이젠 정말 죽는구나! 두개골이 깨지고 걸죽한 뇌골수가 피범벅이 되어 흘러내리는 장면을 본 것도 같고 내 스스로 당하는 걸 느끼기도 한 것 같았다.

    그 다음 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남아있던 의식들이 급작스럽게 어디론가 내던져졌기 때문이다. 내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처럼 내 삶의 무대도 그처럼 암전 속에서 후다닥 종결되고 만 것이다. 나는 길들여져 온 대로, 난데없는 운명에 순응했다. 편안했다. 그렇게밖에 묘사할 수 없다. 그때 나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지금도 나는 죽음은 그런 것이라고 믿고 있다. 태허(太虛)가 궁창(穹蒼)을 메운 세상! 그래서 더욱 죽음의 공포가 강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멀리서 짐작되는 저 광대무변한 텅빔은 혼자서 거대한 외로움으로 부들거리고 있으니까. 태허와 한몸이 되지 않는 한 그 편안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때때로 고달픈 일상의 한켠에서 태허를 추억해보지만 그건 공포 그 자체였다.

    눈을 떴다. 태허가 공중폭발을 한 셈이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칠판을 가득 메운 경제수학 시간의 수식과 그래프 같은 것이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내가 누워있는 곳은 진흙투구를 쓴 부족의 마을이었다.

    얘기는 간단했다. 우현이 그들을 이끌고 행정사무소를 습격하여 나를 구해온 것이다. 그리고 사흘 만에 제 정신이 돌아왔고 부족은 내 건강을 기원하는 축제인지 푸닥거리인지 모를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우현을 잡아갈 때와는 또다른 웅얼거림이 진흙투구를 통해 공명되었다. 전사들이 바쁘게 왔다갔다했다. 마치 꼬치를 다 벗지 못한 검은색 애벌레들이 꿈지럭거리는 것만 같았다. 내 몸에 돼지기름을 두껍게 바르고 네댓 명의 전사가 눈 바로 위에서 창부림을 하고 있었다. 덮칠 기세로 내려오던 창들은 내 몸에 닿자마자 미끄러져 내렸다.

    나는 그들이 주는 음식이라면 무엇이든지 받아먹었다. 처음엔 묽은 죽으로 시작하여 빵과 생선, 고기, 딱딱한 나무열매와 새끼 거북의 뼈까지 가리지 않고 먹게 되었다.

    그들은 내가 일어나서 걷게 된 것을 기념하여 그들의 집 지붕만한 육지거북을 잡아와서 잔치를 벌였다. 거북의 생간을 씹어먹는 나를 보며 그들은 더욱 신나게 춤을 추었다.

    “너무 그렇게 인상만 쓰고 있지 마라. 좋든 싫든 이제 여기서 살아야 하니까. 맛있지 않니? 쟤들은 생간을 먹는 사람에게 동지애를 느끼는가 보더라.”

    진흙투구를 쓴 우현의 말이었다. 전사들과 똑같이 성기에 나무 파이프를 끼우고 피부마저 새까맣게 타버려서 목소리가 아니면 분간할 수 없었다.

    “뭐라고? 여기서 활동을 한다고? 이 살인마들이랑?”

    “그 포터들은 이 마을을 습격했던 부족 사람들이었어.”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다치고 적어도 한국하고 연락은 되는 곳에서 활동캠프를 차려야 되잖아. 여긴 해도해도 너무한 곳이야.”

    “연락은 뭐 하러 해? 활동비 받으러? 여긴 돈 같은 거 필요 없는 곳이야. 또 우리가 이 사람들한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니? 내 말은 그냥 여기 사람이 된다는 거야. 너도 꿈꾸던 그런 곳 아니냐?”

    그는 마냥 즐거워했다. 목소리가 제일 큰 사람도 우현이었다. 항상 사람을 옆에 끼고 다니면서 말을 배우고 웃고 떠들었다.

    수줍음이라곤 전혀 없는 마을 처녀들은 틈만 나면 우현의 성기막대기를 만져보려고 서로 다투기 일쑤였다. 유부녀들은 내놓고 그러지는 않았지만 식사 때가 되면 얌과 타로로 요리한 탄수화물 음식을 들고 줄을 섰다. 음식을 전해주면서 뒷사람의 눈총을 받으며 오랫동안 재잘거렸다.

    한번은 어느 주책맞은 아줌마 하나가 제 흥에 겨워 우현의 성기를 건드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문제는 말 많은 여자들 입방아가 남편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남편은 마을 광장에 마누라를 끌고 와서 원수에게 하는 것처럼 난폭하게 구타했다. 모두들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위에 빙 둘러서서 과격한 몸짓으로 남자를 응원하는 것이다. 여자는 입이 돌아갈 지경으로 얻어맞고도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여자가 겨우 숨만 할딱이고 있을 때 옆마을에서 남자들이 몰려왔다. 여자의 친척들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서로 목청을 높여 시비를 가리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발작을 일으키듯이 광장 귀퉁이로 달려갔다. 자기 머리를 석상에 마구 짓찧는 것이다. 단단해 보이던 진흙투구가 산산조각 났다. 남자는 자기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한 것 같았다.

    남자의 얼굴은 뭐랄까, 희번덕이는 눈동자로 광선총이라도 쏠 기세로 험악해져 있었다. 이쯤되면 뭔가 타협이 이뤄져야 했다. 부족의 어른들이 직접 여자의 친척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마을대표단과 여자의 친척대표단,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광장에 빙 둘러앉았다. 구경꾼들은 어떤 발언에는 야유를 퍼붓다가도 같은 사람의 다른 발언에는 동의를 표하는 듯 열광적인 춤을 추기도 했다.

    회의의 내용은 대충 이러했다.

    /부정한 여자를 돌려보내자./

    /안된다. 저 여자는 아직 아이를 낳아본 적도 없다. 저 여자 엉덩이를 보면 적어도 여덟 명은 낳을 수 있을 것이다. 자그마치 여덟 명이다. 전사 한 명이 부족해서 전쟁에서 지기도 한다. 저 여자의 아들이 열 사람을 먹여 살릴 식량을 농사지을 수도 있다./

    /그러면 그냥 살도록 내버려두자./

    /싫다. 저 년은 이제 내 여자가 아니다./

    /나도 싫다. 저 놈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우린 저 애를 시집보낼 때 세상이 열린 이후로 가장 많은 지참금을 주었다. 돌려달라./

    /배 째라. 당신들이 준 건 이미 똥이 된 지 오래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좋다. 데려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따르겠다./

    /다시 내 여자가 되지만 않으면 아무래도 좋다./

    /좋다. 그렇게 하는 걸로 결정한다./

    /이를 따르지 않는 자는 추방이고 집단으로 항명하면 전쟁이다./

    국민의례 같은 자질구레한 격식이 사이사이에 끼어들고 삐걱거리기도 했다. 토론자 각각의 이해관계들은 앞의 내용들처럼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우현도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회의는 때를 넘기면서 진행되었다. 문명의 시간으론 몇 번의 휴식이 필요할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해결책은 내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우현이 그 여자의 새 남편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들은 즉석에서 돼지 두 마리를 지참금으로 약속하였다. 여자의 남자 형제와 전남편이 한 마리씩 부담하기로 한 것이다.

    내게는 어이없고도 벼락 같은 우연으로 보였지만 우현이 놈은 그저 껄껄거릴 뿐이었다. 결코 우연이 아니라며 강한 부정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것만 같았다.

    하긴 그는 오래 전부터 이렇게 살 자신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온 게 분명했다. 그의 배낭 속에는 줄을 그어가며 읽은 ‘멜라네시아 언어의 구조’ ‘멜라네시아의 신화학’ ‘원시낙원 파푸운’ ‘일본의 파푸운 점령기’ ‘피진 잉글리시교본’ 같은 영어판 책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우현은 이들 부족 말로 ‘완뚝’이 되었다. 우현이 진흙투구를 썼고 이 부족 여인과 결혼을 했고 부족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완뚝이 되면 모든 불평등과 편견이 사라지고 전사의 자격이 부여되었다.

    내겐 모든 일이 충격이었다. 반면에 우현은 나날이 이 진흙 투구를 쓴 아사로 부족 사람이 돼갔다. 그가 어떻게 이 부족 사람들을 선동해서 행정사무소를 습격하고 나를 구해왔는지, 그 이전에 왜 전사들 앞에서 그렇게 웃었는지도 수수께끼였다.

    “궁금하나? 이건 사실 천기누설인데….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주의 법칙성이랄까, 그런 걸 믿어왔지. 순리대로 하면 질서가 잡히게 되어 있고 혁명도 가능하고 결국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어. 질서와 규칙 같은 거, 그게 중요해. 질서와 규칙은 워낙 많이 떠들어왔기 때문에 좀처럼 의심하지 않는 버릇을 갖게 됐단 말이야. 그런데 그런 게 사실 존재하지 않거든. 존재하더라도 그걸 따르다보면 코가 깨지기 마련이야. 멀쩡한 놈도 있다고? 넌 아직도 그런 미끼를 믿냐? 덥석 물었다간 횟감이 되고 말아.

    나도 처음 저들을 보았을 때 ‘이젠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고개를 처박고 싶었어. 고개를 처박는 게 인지상정이겠지.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어. 내가 한국에서 살 때 깨지고 부서지면서 결심한 바가 떠오르더구나. 거슬러서 살자, 그러면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우주의 무질서에 내 몸을 맡겨보자, 그게 바로 궁극의 질서이자 궁극의 선이다, 그래서 벌떡 일어난 거지. 카오스의 신비로운 문양이 내 머릿속에서 좌악 펼쳐지는 기분이었어. 웃으면서 뭘 생각했는지 아니? ‘미친놈처럼 사는 거 정말 재밌다, 정말 재밌다, 재밌어서 미칠 지경이다.’ 진짜 재밌지 않니?

    전사들은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았어. 처음 보는 짐승을 사로잡아 온 거지. 그런데 이 짐승이 재롱을 피우잖아.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칼 장난도 좀 치고…. 신기했겠지. 몇 가지 간단한 마술도 보여줬어. 뭐 그런 거 있잖아. 입으로 들어간 동전이 겨드랑이에서 나오고 하는 거 말이야. 쟤네들이 거의 경기를 일으키더라. 그때부터 내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려고 했어. 북쪽에 사는 신의 전령으로 대접했어.

    행정사무소는 저 사람들도 적으로 간주하더군. 가까운 어딘가에 생김새는 자기들이랑 똑같은 놈들이 이상한 옷을 입고 희한한 무기를 들고서 설친다는 소식을 듣고 예전부터 삐딱해 있었는데 좋은 핑계가 생긴 거지. 친구의 친구를 굶겨 죽이고 있었으니까.

    이들은 정말 전사였어. 뚱보 소장의 총에 세 명이 죽었는데 철저하게 복수를 하더군. 뚱보 소장을 포함해서 다섯을 죽이고 그 자리에서 한 주먹씩 살을 뜯어먹었어. 이 사람들 손톱은 짐승처럼 안으로 말려들어가 있어서 세차게 내리치면 웬만한 칼 못지않아. 뚱보 소장의 식도를 타고 내려가던 돼지고기는 정말 일품이라며 입맛을 다시던 사람도 있더라.”

    “그래서 너도 먹었니?”

    “적을 먹으면서 복수도 하고 적에게 죽은 동료도 추억하는 거야. 네가 죽었다면 저들보다 더 게걸스럽게 먹었을 거다.”

    소름이 돋았다. 예전에 한참 유행하던 식인종 시리즈가 생각났다. 목욕탕 안을 보면서 ‘누가 내 밥에 물 말아놨어’ 하고 말하는 식인종. 그 얘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깔깔거릴 수 있었을까. 그렇게 웃던 내가 나를 더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넌 아직도 예전의 버릇을 고치지 못했구나. 생각해봐라. 순리대로 행동했다면 넌 벌써 죽은 목숨이야. 알 수 없는 죄목으로 감방에 갇혔고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어. 거기에서 발악을 했더라도 넌 죽었고 가만히 있어도 넌 죽었어. 행정사무소를 불태우고 뚱보 소장의 멱을 따야 해결될 상황이었다구.

    …나 또한 식인행위가 역겨웠어. 하지만 삶의 새로운 설계도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사실 그렇지 않니? 죽으면 그냥 살덩이야. 동료의 죽음은 공동체의 또다른 원동력이 되어주고.

    …그리고 여기가 좋아. 우린 콜럼버스도 아니고 슈바이처 박사도 아니야. 문명의 더러운 입김이 닿지 않은 곳이야. 널 구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해줘.”

    나는 오도가도 못하고 우현의 신혼살림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다. 원형의 집이었다. 부엌과 방, 가축우리의 구분도 없으니 내 공간이 있을 리 만무했다.

    우현과 그의 신부는 여기 방식대로 남의 눈길 따윈 신경쓰지 않았다. 신랑은 신부의 젖통을 물고 살았고, 신부는 신랑의 성기에서 손을 뗄 줄 몰랐다. 조용하다 싶으면 해먹이 출렁거렸고 거침없이 교성을 내질렀다. 집이라고 해야 기둥 몇 개 박아 넣고 갈대 비슷한 풀로 지붕을 얹은 게 전부였다. 야자 잎으로 대충 빙 둘러놓은 게 벽이니 소리는 자연스레 밖으로 흘러나갔다. 사람들은 신혼부부의 교접소리에 장단을 맞춰 북을 두드리며 운동선수들 기합 같은 소리를 질러주었다. 풍요로운 생산을 기원하는 일종의 ‘풍년가’였다.

    일이 이 지경이니 밖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다. 내 상대는 주로 어린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아이들 또한 만만찮았다. 여자아이가 허리를 숙이면 남자아이가 뒤에서 삽입하는 시늉을 하는 놀이를 즐겼다. 폭력성도 어른 못지않았다. 악어 새끼를 잡아와 창던지기 시합을 한다. 돌도끼 같은 걸 만들어서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조그마한 녀석들도 화가 나면 돌도끼로 상대를 가격하기 일쑤였다. ‘먹어버릴거야’가 가장 보편적인 욕이었다. 그 욕을 들을 때마다 오싹해졌다. 재빨리 문명세계의 비슷한 관습을 기억해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꿈에 나타났다. 한국에도 ‘죽을래?’라는 욕이 있고 자주 쓰인다, 라고 얼른 돌려치는 식으로 놀란 가슴을 쓰다듬어야 했다.

    나는 서서히 지쳐갔다. 향수(鄕愁)는 사치스런 감정이었다. 그건 어느 정도 적절한 감정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가능한 호사였다. 내가 속해 있던 ‘질서’와 연결된 끈이 모두 끊긴 상태였고 원래의 곳에서 얼마나 멀리 떠밀려왔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이건 분명 타임머신을 타고 몇만년 전으로 왔거나 몇만년 후 모든 문명이 파괴된 후의 세상일 것이란 상상을 했다.

    문화상대주의? 물론 이곳에 오기 전에는 충분히 공감했다. 개고기를 먹지는 않았지만 그걸 혐오하는 자들을 혐오했다. 하지만 사람의 머리가죽을 벗겨서 박제를 만들어 기둥에 걸어둔 광경을 본다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자기 팔을 잘라간 원수, 자기 딸을 욕보인 치한, 자기 할아버지를 죽인 자의 손자…. 박제된 얼굴은 죽은 후에도 늙어갔다. 바싹 마른 가죽은 갈라지고 수축되고 변색되어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가지에 매달려 혼자 시들어가는 검은 열매처럼 추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점점 무뎌져 갔다. 섹스를 하는 부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도 메슥거리지 않았다. 여자는 그런 나를 보며 헤프게 웃었다. 사실 포르노 비디오를 즐겨보는 것과 하등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문명과 연결 지어서 생각하고 가치판단하는 작업도 힘들어졌다. 문명의 대척점에서는 죽음의 공포도 화석처럼 굳어지는 모양이었다. 부아이를 씹으면 내가 누구인지도 잊어버리곤 했다. 새로운 세계에 질식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놀거나 아낙네들의 허드렛일을 도우며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갔다. 그 일도 싫증나면 아이처럼 우현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실제로 사람들은 나를 우현의 큰아이라고 놀려대기도 했다.

    밖에서 목격되는 우현은 집에서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이제 그는 흉측한 진흙투구를 제 스스로 솜씨 좋게 만들 줄도 알았고 무기를 만드는 작업도 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새로운 세계에 중독되어 가고 있었다. 말라리아에 걸렸다가도 그들이 주는 노란 가루약과 독한 부아이를 먹고는 며칠 만에 생기를 되찾았다.

    우현은 ‘뭄사부’라는 사람의 집을 자주 찾았다. 그곳은 내가 동행할 수 없는 유일한 곳이었다. 보통 집보다 세 배는 컸고 부인이 일곱 명에 자식은 서른 명이 넘었다.

    그는 영향력 있는 빅맨(Bigman) 중의 한 명이었다. 빅맨은 멜라네시아 지역의 특이한 부족정치의 산물로서 부족장, 추장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추장은 상명하복식 위계질서에서 세습이 가능한 계급이고 착취로 제 힘을 과시하지만 파푸운 같은 멜라네시아는 이런 제도가 없었다. 대신 빅맨이 있는 셈이다.

    빅맨은 ‘베푸는 자’ ‘선량한 지도자’ ‘봉사하는 자’ 정도로 해석된다. 복잡한 정치구조가 존재하지 않는 이곳의 유일한 비공식적 직책이다. 비공식적이라서 이들을 따로 부르는 이름도 없다.

    이들은 구성원들의 재산을 착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것을 나누어주고 명예와 신망을 얻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부지런히 움직여서 많은 농사를 지어야 하고 많은 아내를 거느려서 노동력을 확대재생산해야 했다. 마을의 궂은 일을 도맡아서 처리하면서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는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가족들보다 더 극진히 그를 보살펴준다. 부족 사람들은 그런 빅맨에게 자신의 일을 상의하러 모여들고 자연스런 파벌이 형성된다. 부족 내에 자그마한 공동체가 이렇게 여러 개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의 빅맨이 대접을 소홀히 하면 거침없이 항의하고 날을 새면서 격론을 펼친다. 빅맨은 설득과 함께 시혜를 베풀어서 다독이고 다시 사이좋은 이웃이 된다. 빅맨이 된다는 건 매우 명예로운 일이지만 공동작업장에 조금 늦게 나온다든지 하는 사소한 잘못에도 존경을 못 받을 수가 있다. 그들은 그야말로 이 사회에서 ‘최고로 성숙한 인격자’가 돼야 한다. 어느 측근이 아무리 인격적인 결함이 있을지라도 그가 탈퇴를 한다면 그 빅맨의 지위는 위태로워진다. 이전에 빅맨이 어떤 존경을 받았든지 간에 졸지에 사람 하나 챙기지 못하는 바보가 되어버린다.

    “여긴 사람이 정착한 지 오천년도 되지 않아. 학자들은 집단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강력한 리더십을 형성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너도 그렇게 보니? 물론 학자들이 보기엔 국가라는 최고의 관념체를 소유한 적이 없는 미개인들이겠지. 여기 사람들은 심지어 추장을 섬긴 적도 없었으니까. 이성도 존재하지 않고 폭력적이고 짐승 같고 그러니까. 하지만 난 달라. 서구의 이성이 어떤 역할을 했지? 신사적인 그들이 어떤 야만적인 일을 했고 개새끼는 끔찍이 위하면서 자기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짓을 하고 있지? 너 같은 먹물에겐 진부한 얘기들이겠지. 우린 고작해야 알면서 행동하지 않는 걸 미덕으로 여기고 퇴폐적인 관념의 유희에 깊이 절여져 있으니까. 나는 이곳에서 아름다운 모순을 보고 있어.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세계관의 조화, 그게 여기서는 보여. 둘이 어울려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이 말이야.”

    빅맨 뭄사부는 우현에게 집과 가축, 경작지를 주고 자신의 참모로 삼았다. 그렇다고 뭄사부가 대단한 부자는 아니다. 또한 사치를 하는 것도 아니다. 자기 소유에서 떼어줄 것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설득해서 나누어주도록 중재했다.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의 경제시스템은 한마디로 소유는 하되 향유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동쪽 얌밭 옆 돼지 공동사육장에는 100마리의 돼지가 있고 돼지마다 주인이 정해져 있다. 그러나 주인이 자기 마음대로 돼지를 잡아먹을 수가 없다. 만약에 이런 기본적인 동의를 무시했다가는 몰매를 맞기 십상이었다. 고기 굽는 냄새를 피워 다른 사람들에게 고기에 대한 탐심을 심어 주기 때문이란다. 돼지를 잡더라도 주인은 마을사람들과 똑같은 양만을 먹을 수 있을 뿐이다. 기껏해야 애들 소꼽장난용으로 돼지 발톱 정도가 더 분배된다. 대신 그 사람은 존경을 받는다. 이렇게 질 좋은 고기를 만들어내려고 얼마나 수고했겠느냐, 오늘 내가 배불러서 행복한 건 저 사람 덕이다, 하면서 주인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른다. 그렇다고 거들먹거렸다간 공은 순식간에 욕으로 돌아온다.

    돼지뿐만 아니라 모든 재화가 그렇게 순환된다. 누가 얌이 없어서 끼니를 거른다는 소리가 들리면 얌을 충분히 저장하고 있는 사람은 지탄의 대상이 되고 끝내 아무것도 못 가지고 쫓겨나는 수도 있었다. 이들은 ‘얌은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인사말을 쓴다.

    결국 소유권이란 공동체가 각자에게 할당한 의무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의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사람에게는 존경이 따르고 그렇지 못하면 지탄의 대상이 된다. 한번 잘못을 한 사람은 소유를 더 늘리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성실하게 농사를 지으며 돼지를 치는지 보여주고 신뢰를 되찾으려 무진 애를 쓴다.

    부족 전체의 잉여 또한 부족을 위해 쓰인다. 다른 부족으로 시집 가는 처녀의 지참금에 보탠다든지, 무기를 만들기 위한 자금으로 지출된다든지, 축제를 위해 쓰인다든지 했다.

    이런 경제시스템은 물론 그 바탕에 자율적인 도덕률이 강력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반대로 서로가 서로를 규제하고 설득하는 순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이유 또한 경제활동과의 연관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우현은 소유권자에게는 명분을 주고 향유권자에게는 실리를 주는 경제운용 방식에 매료되었다.

    “기존의 현실 사회주의권에서 경직된 소유제도가 모든 구성원들에게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고 또 새로운 계급 질서를 낳았잖아.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 같은 능구렁이도 해결하지 못한 걸 이들이 실천하고 있어. 문자도 갖고 있지 않은 이 미개인들이 말이야. 여길 봐. 감격스럽지 않니? 이런 게 바로 자주적 공동 집산체일거야. 넌 더 잘 알 거 아니냐? 경제학 모형을 그려봐. 차선의 정리 따윈 발붙일 곳이 없겠지? 불평등지수가 영으로 나오지 않겠어? 리카도, 케인스, 사무엘슨 같은 사람이 여기를 봤어야 돼. 여긴 일반균형분석도 아닌 완전균형분석이 가능한 곳 아니겠어?”

    우현은 매일 뭄사부에게 부족의 질서를 배우고 와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또한 배운 걸 실천하기 위해서 눈물겨울 정도로 노력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제일 먼저 농사일터로 달려가고 밤늦게 돌아와서는 횃불을 들고 배수로를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산에서 지고온 돌로 우리나라 시골의 도랑 같은 물길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일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각종 쇠붙이 도구들이 유용하게 쓰였다.

    사람들 반응은 시큰둥했다. 뭐 하러 그렇게 힘든 일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우현은 그래도 벙글거리면서 그들을 설득해나갔다. 전염병이 무엇이고 그 전염병이 돌면 왜 마을사람 전부가 죽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똥 묻은 아이하고 같이 노는 아이는 십중팔구 똥을 묻히고 올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전염병도 마찬가지다. 전염병은 파리, 모기, 쥐 같은 동물이 옮긴다. 그 놈들은 발에다 더러운 잡신을 달고 다닌다. 그런데 그 놈들은 잡신의 보호를 받아서 무사하지만 음식이나 흙에 떨궈놓은 잡신들은 우리 몸에 들어와 우리를 죽이고 만다. 내가 오기 얼마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아이들이 왜 이유 없이 죽어가는지 아는가? 다 잡신들 농간이다. 그 놈들이 집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우리가 방어를 하면 되는 것이다.’

    말귀가 트인 것인지, 아니면 미친놈처럼 일하는 두 이방인이 안쓰러워서 인지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산에서 물길을 끌어와서 배수로에 연결하는 공사까지 계획되어 있으니 노동력에 비해서 엄청난 규모의 토목공사인 셈이었다.

    난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리적인 노동은 제쳐두고라도 이들의 뿌리깊은 관습과 정면으로 승부해야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완뚝을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어슬렁거리며 나타나긴 했지만 이 일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식대로의 방식이 있다. 잡신 때문에 누군가 죽었다면 잡신에게 복수를 하면 될 것이다. 우린 복수의 이름을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래 옳다.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것은 동의한다. 그러나 그 복수라는 게 맘에 들지 않는다. 허수아비 잡신을 만들고 불지른다고 일이 해결되는가! 내 심장 같은 우리의 형제가 다시 살아나오는가! 그가 가꾼 얌을 먹지 못하고 그가 키운 돼지를 먹지 못하고 그가 만든 무기가 없어 전쟁에서 패한다면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방법의 문제다. 달리 생각해보자. 복수를 할 필요가 없게 만들자는 것이다. 그 놈들과 영원히 상종하지 말자는 것이다.”

    “아니다. 죽은 우리의 형제들은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복수에 감사하며 우리를 지켜준다. 얌을 더 많이 거두게 하고 돼지 살이 더 오르도록 도와주고 빗나가는 화살을 바로잡아 적의 심장을 꿰뚫게 한다.”

    “그건 우리 생각이다. 우린 부아이를 씹고 타푸부를 태울 때만 죽은 형제를 본다. 그 형제들이 우리를 돌봐준다면 부아이와 타푸부가 없을 때에도 항상 우리 곁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없지 않은가! 죽은 형제는 우리가 복수를 해 주지 않더라도 우리를 돌봐준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자기처럼 잡신의 제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건 죽은 형제들이 원하는 일이다.”

    “아니다. 저 사람은 형제를 모독하고 있다.”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 형제를 사랑한다.” “저 사람은 우리 모두를 증오한다.”

    “아니다. 역사가 판단해줄 것이다.”

    “역사? 역사가 뭔가? 저 사람은 이상한 잡신을 몰고 다닌다.”

    우현이 쓴 진흙투구가 움찔거렸다. 그는 말릴 틈도 주지 않고 광장으로 질풍처럼 내달렸다. 그 기세를 멈추지 않고 머리를 석상에 들이받았다. 우현은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완뚝의 아픔을 슬퍼했지만 기운을 차린 우현에게는 다시 냉담했다. 그가 다시 배수로 얘기를 꺼내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무척 지루한 전쟁이었다. 그들은 일을 도와주면서도 예전과 똑같은 내용으로 시비를 걸었고 똑같은 논쟁을 벌였다. 입이 아파 그만둘 만도 했으나 지칠 줄 몰랐다. 우현이 역시 지지 않고 맞상대를 했다. 하긴 우현이는 3만명 앞에서도 연설을 했던 인물이니까.

    우린 그들이 과연 무슨 맘으로 저러는지 한번 떠보기로 했다. 짐꾸러미를 뒤져 수건이나 옷가지 같은 걸 줘보았다.

    “이걸 우리 형제들 수대로 똑같이 나누면 뭐가 되는가? 그렇게 되면 무슨 쓸모로 사용되는가?”

    얼굴이 달아올랐다. 우린 서둘러 그들에게 사과했다. ‘형제를 속이느니 차라리 팔아 먹어라’라는 그들의 격언이 떠올랐고 새삼스럽게 그들이 우러러 보였다.

    우리에 대한 불신은 여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게 끊임없이 호감을 보이던 처녀들도 찬바람을 일으키며 등을 돌렸다. 괜스레 쓴웃음이 나왔다. 어느 집 바로 옆에서 작업을 하는데 그 집 여자가 우리에게 오물을 끼얹기도 했다. 멀쩡하던 아이가 갑자기 아프다는 이유였다. 아이의 몸뚱이는 열이 올라 펄펄 끓고 있었다.

    샤먼이 와서 악령을 쫓고 약을 주었으나 차도가 없었다. 우현은 그동안 한번도 개봉하지 않았던 구급약상자를 열었다. 이런 약은 사용하지 말자고 약속했던 우현이었다. 해열제를 곱게 빻아서 그들이 신성시하는 나무 수액에 탔다. 물론 아이의 엄마는 그 약을 완강히 거절했다.

    “잡신을 묻혀왔지?”

    “아니다. 이건 처루부싱나무의 뿌리에서 수액을 받은 것이다. 신이 나타나서 이걸 먹이라고 했다.”

    “믿을 수가 없어. 당장 가지고 꺼져.”

    “만약에 이 약을 먹고도 낫지 않는다면 난 추방당해도 좋다.”

    여자는 잠시 갈등하더니 주위의 눈치를 살피다가 아이에게 약을 먹였다.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열이 내렸고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칭찬은 돌아오지 않았다. 약신(藥神)의 눈이 어두워져서 우현을 샤먼으로 착각하고 계시를 내렸다고 믿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우현이 샤먼의 흉내를 내고 다닌다는 모함을 하기도 했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돌에 치여 다쳤다. 그 중에는 신망이 두터운 빅맨도 포함되어 있었다. 때마침 결혼식이 있었는데 피곤에 지친 사람들 때문에 맥빠진 축제가 되기도 했다. 이 모든 원망이 우리에게 돌아왔다. 일이 이 지경이 됐으니 언감생심 오기 같은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배수로를 다 만들지 못하면 두고두고 더 큰 욕을 얻어먹어야 할 판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배수로 끝자락이 강물에 닿았다. 우기(雨期)의 시작을 알리는 굵은 빗방울이 초라한 준공식을 위로해주는 듯했다. 그래도 우리는 할만큼은 했다고 자부했다. 한 삽이라도 더 많이 파내려고 했고 멀쩡한 손마디가 없을 정도로 애를 썼다. 배수로의 자연정화를 위해 수초를 떠다가 심기까지 했다.

    마을에 돌아왔을 땐 수로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막아놓았던 산 계곡의 수문을 열어놓은 모양이었다. 물은 고이는 곳 없이 잘 흘러갔다. 이젠 큰물이 나도 집이 떠내려갈 일은 없을 것이고 악취도 덜할 것이다.

    “이건 사용하지 않겠다고 어깃장 놓는 여자는 없나 모르겠다.”

    “거기까지만 하면 다행이지. 저 사람들 침 뱉는 장소나 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그건 그렇고, 난 네가 걱정이다. 저기다가 배 띄우자고 할까봐 겁난다.”

    “염려마라. 운하를 판 건 아니니까….”우린 개운치 않은 피로로 며칠을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혼곤한 잠에 빠져 배수로가 마르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건 우현이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이곳에서 생활한 이후 처음으로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부인이 노골적인 신호를 보내도 반응이 없었다. 삐쳐서 밥을 주지 않고 나가도 잡지 않았다. 그녀가 여자들을 모아놓고 우현이를 험담하는 소리가 들렸다. 차라리 옛날 남편이 낫다는 말까지도 들려왔다.

    “이제야 저런 소리가 나오는구나. 하여간 저 여편네는 너무 착했다니까.”

    우현은 그렇게 대범한 척하면서 부아이를 씹었다. 그날 따라 더 깊은 환상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는 요즘 부아이를 씹으면 북극성 옆에 처녀가슴같은 모양을 한 카시오페이아 별자리를 자주 찾았다. 그곳에서 열심히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있으니 부지런히 날아와서 구경하라는 말을 했었다. 아마 제 욕심껏 엄청나게 큰 토목공사를 벌여놓았을 것이다.

    환각을 벗어날 때쯤 요란한 북소리가 들렸다. 축제를 알리는 북소리였다. 축제를 열 만한 구실이 없다고 생각한 우리는 의아한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가끔 북소리 장단을 익힌 개구쟁이들이 장난을 쳤다. 일단은 여기 사람들의 습관대로 물소뿔 피리를 불면서 밖으로 나갔다.

    장난은 아닌 모양이었다. 광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축제에 쓰일 제물이 묶여 있었다. 돼지와 호르쑤였다. 그들이 호르쑤라고 부르는 설치류 동물은 돼지 얼굴에 거북 등을 이고 있는 희한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 동물은 큰 축제에서만 쓰이는 귀한 제물이었다.

    제물을 가운데 두고 원무를 추었다. 제자리에서 발로 삼각형 모양을 재빨리 엇갈리게 밟는다. 동시에 두 손은 옆으로 큰 원을 그리면서 위로 모은다. 다음에는 고개를 아래위로 세 번 흔든다. 그러고 나서 한걸음 앞으로 나간다. 격렬한 북소리와 철제 탬버린 장단에 맞춰 몇 바퀴를 돌다보면 스스로 도취되고 만다. 게다가 모두 부아이 환각상태였다.

    칼로 자기 가슴을 그어대는 자해행위도 여기저기서 목격되었다.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고무되었다. 여자들은 앞다투어 전사의 피를 자기 얼굴에 비벼댔다. 춤동작과 노래소리는 더 격렬해지고 더 커져갔다.

    그들은 그렇게 진탕 흥을 돋운 다음에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제사음식은 ‘무무’였다. 고기를 주먹만하게 잘라낸 다음에 향신료와 얌을 넣고 바나나 잎으로 단단하게 묶는다. 그런 고기 덩어리들을 반나절 동안 달궈놓은 돌구덩이에 넣고서 흙과 바나나 잎으로 덮는다. 한참 후에 꺼내면 그게 무무가 된다. 제물 음식답게 맛은 상당히 좋았다.

    샤먼이 나와서 그들이 섬기는 신들을 모두 불러모으고 타로로 빚은 술을 뿌려 고수레를 한다. 잘게 부순 돼지 이빨도 사방에 뿌린다. 이가 빠진 신들을 위한 배려였다. 그런 다음에 무무가 사람들에게 분배되었다.

    무무를 먹는 데에는 일정한 규율이 있다. 가장 먼저 무무를 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축제를 벌일 수 있도록 많은 기부를 한 사람이나 축제의 주인공이다. 사람들은 무무를 가장 먼저 먹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한번도 그래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그날은 우현과 내게 첫 무무를 주는 것이었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우린 얼마전까지만 해도 지탄과 조롱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축제를 위해 제물을 바친 적도 없었다. 우리는 무무를 받지 않았다. 저들이 우릴 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신들은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음식은 모두를 위해 만들었지만 이 음식을 있게 한 건 당신들이다.”

    “믿을 수가 없다. 우린 아직도 불신받고 있다.”

    이번에는 뭄사부가 나섰다. 그는 가장 신랄하게 우리를 몰아세웠던 사람 중에 하나였다.

    “당신들은 현명하다. 그리고 본받을 만한 투지도 있다. 누구보다도 우리를 사랑한다. 우리는 그걸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말할 수 없었다. 그동안 너무나 괴로웠다. 상처받는 당신들을 보며 속으로 눈물도 참 많이 흘렸다. 그러나 우리는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들은 오만해진다. 그리고 우리를 얕잡아볼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를 지배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누구보다도 유능하고 성실한 당신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우리를 용서하라.”

    한방 크게 얻어맞은 셈이었다. 우현은 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서 사람들이 권하는 술을 마셨다. 쉰 막걸리 같이 시큼하고 들척지근한 맛이 나는 술이었다. 두세 잔만에 단박에 취기가 올랐다.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웃고 떠들고 치고 받고 하였다. 그들은 지극히 단순해 보이지만 어느 누구보다 자기 운명을 치밀하게 설계할 줄 알았다.

    모욕을 참지 못하기에 한이니 응어리니 하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이 우현의 눈물을 헤아릴 리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영문도 모르고 같이 울어 주었다. 형제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는 무능력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겐 이 모든 상황이 환각이었다. 헐떡이는 내 심장이 도리질쳤다. 혼탁한 피가 역류하는 듯했다. 심장이 뻥 터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잠시 태허의 중심으로 붕 들어올려지는 것 같기도 했다.

    새날이 밝았다. 그러나 우현과 사람들의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마을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었다. 조금 으슥한 곳에 들어가서 볼일을 보면 그만이었다. 우현은 화장실의 필요성을 알렸고 사람들은 우현의 뒤를 따라다니며 입씨름을 시작했다.

    화장실 공사가 끝나면 또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통적인 원시 화전 농법을 고수하는 이들은 경작지를 찾아서 더 깊은 곳을 찾아다녀야 했다. 그러다보면 맹수들의 습격은 다반사였고 다른 부족들과 영역을 두고 마찰이 빚어지고 끝내 전쟁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밭을 갈러 가는 그들의 행렬은 전선으로 향하는 병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우현은 새로운 농법을 제안했다. 분뇨를 나뭇잎과 가지를 태운 재와 섞어 열을 낸 다음 그걸 비료로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화전에 따르는 위험은 줄이고 소출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었다.

    흥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들끓었다. 사람들의 반대는 전과 양상이 또 달랐다. 사람들이 두셋만 모여도 우현을 헐뜯는 성토대회가 열리고 분노의 춤을 추었다. 한번 곡식의 종자를 심고 거둔 자리에는 집도 짓지 않는 그들이었다. 땅의 정기를 모두 빼앗겨서 집이 무너진다고 믿고 있었다. 자기들 생존과 직접 연결되는 일이었기에 그들의 두려움은 자못 심각한 수준이었다.

    분뇨를 옮겨 담는 작업을 방해하고 화장실을 부수는 행패도 일삼았다. 애꾸눈 샤먼은 제 몸에 야자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화전의 신에게 용서를 비는 분신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우현은 뭄사부를 찾아갔다. 나도 그때쯤에는 이미 완뚝으로 인정받아서 그 자리에 동석할 수 있었다. 그새 부인이 한 명 더 늘었고 아이도 두 명이 더 태어났다. 그의 늙은 첫부인부터 시작하여 아직 탯줄도 떨어지지 않은 갓난애까지 한 명 한 명 상대해가면서 덕담을 주고받았다. 방문객 본인은 물론이고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과 손자, 그 손자의 아들까지 축복을 해주고 농사와 사냥, 하다못해 돌절구의 상태까지 인사말에 올랐다. 일이 이러하니 건성으로 지나갈 수 없었다. 서로 상대방 집안 구석구석을 알아야 하고 또 애정을 두고 있어야 가능했다.

    우현은 빅맨들 앞에서 현란한 전사의 화법을 구사했다. 그렇지 않으면 상대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였다. 파찰음을 발음할 땐 입과 동시에 왼쪽 발을 세게 한번 구르고 한 문장이 끝나면 절도 있는 목소리로 얼씨구 하는 식으로 장단을 넣는다. 되도록 침을 많이 튀기면서 말하는 것이 전사의 품격을 높이는 방법이었다. 연설을 하는 전사의 가슴은 흘러내린 땀과 침으로 범벅이 되고 만다.

    할 말이 다 바닥나자 우현은 상대의 대답을 듣기 위한 제스처를 반복했다. 제스처라기보다는 거의 춤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입장단을 맞추었다. 그러나 잿빛 도는 진흙투구를 쓴 뭄사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늘 높이 솟은 고사목에 황혼을 등지고 앉은 수리같이 한 곳만 응시하였다. 그에게 결정권은 없었지만 그의 의견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 아들을 잃은 신은 분노했고 신성(神性)을 바꾸었다. 한마디로 오만해지기 시작했다. 하늘의 별은 더욱 빛났고 우리에게서 더 멀어졌다. 사람들은 하늘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눈조차 뜨지 못했다.

    사람들은 별똥별이 떨어진 곳을 찾아 헤맸다. 그 잔해는 태초의 슬픔까지 불러올 정도로 처참한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목젖을 토해내며 슬프게 울었다.

    신의 아들은 평화를 더해주었고 인간의 고뇌를 감해주었다. 그는 신도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믿었다. 또 그는 스스로 인간이 되기를 원했다. 여자와 사랑을 나누었고 함께 땅을 갈았다. 신에 대한 존경을 여자에 대한 사랑과 풍작을 위한 노력으로 바꾸도록 설득했다.

    하늘의 별은 지금처럼 높지 않았다. 아이들은 별을 안고 잠들었고 별에 따뜻한 마음의 씨를 심고 가꾸었다. 별똥별로 마름질한 하늘의 옷은 영혼을 다독였고 분노를 잠재웠다. 그 옷을 입으면 인간은 하늘빛깔로 빛났다. 아니 원래 인간은 그런 향기 있는 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우주적 희열을 호흡할 수 있었다. 갈망도 없었고 힘들게 싸짊어지고 가야할 희망도 없었다.

    그러나 신의 아들이 죽은 후 모든 게 달라졌다. 신은 인간이 아들을 죽였다며 으르렁거렸고 인간은 신이 아들을 죽였다고 억울함을 대지에 호소하였다. 반짝이는 제 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별들조차, 겨우 옷장식품에 불과했던 그들조차 우리에게 등을 돌렸다.

    인간 사이에서도 분열이 있었고 상상할 수 없었던 살인이 자행되었다. 우리는 엉뚱한 곳에 분노의 화풀이를 했던 것이다. 마음의 문은 닫힌 지 오래였고 서로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인간은 지상에 떨어진 별똥별로 가면을 만들어 썼다. 하지만 신의 분노는 화산처럼 뜨거워져만 갔다. 독수리를 보내 가면 속에 숨어있는 눈을 파먹게 했다. 더러는 신을 상대로 싸움도 했지만 그들은 가면을 벗었기 때문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인간은 신에 대한 분노를 인간에게 돌렸고 전쟁은 격해졌다. 남은 것은 허무와 절망뿐이었다.

    인간은 신에게 용서를 비는 제사를 올렸다. 신은 별똥별의 잔해마저 태워없었기 때문에 진흙으로 두껍게 가면을 만들어 썼다. 신은 이걸 가면이라 여기겠지만 우린 이것을 투구라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걸 쓰고 신을 상대로 한 의로운 싸움을 할 것을 맹세하며 눈물을 흘렸다. 신은 투구 안에 숨겨진 인간의 눈물을 보지 못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린 아직도 진흙투구를 벗을 수 없다. 신에게 우린 ‘저주받은 인간’ 아사로 부족일 뿐이다.”

    뭄사부가 말한 부족의 전설은 미묘한 파장으로 다가왔다. 그 파장이 무지의 벽을 허물고 인식의 지평으로 향하는 걸 느끼기는 했다. 하지만 표류할 뿐 제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

    “당신은 말을 하고 있지만 우린 실제로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난 당신에게서 안으로 잠긴 감옥을 본다. 당신은 열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라면 좀더 솔직해져라. 당신은 그 열쇠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좀더 기억해봐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후세는 자기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열쇠의 존재 따윈 알지도 못할 것이다. 열쇠는 어디 있는가?”

    “우리도 언젠가는 진흙투구를 벗을 날이 있을 것이다. 맨얼굴로 춤을 추고 맨얼굴로 땅을 갈고 맨얼굴로 적을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언젠가는 맨얼굴로 신이 우리에게 한 것처럼 내려다보며 침을 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 날이 올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우린 그걸 겁낸다. 아무도 준비를 하지 않는다. 우린 신에게 버림받은 후 희망을 창조해냈다. 우린 단지 그 희망 안에서만 산다. 아무도 그걸 깨뜨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젠가는 올 날을 알고 있지만 그날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난 마법을 믿는 사람을 경멸한다. 또한 의로운 사람이 찾아와 마신을 물리치고 마법을 풀어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더 경멸한다. 나는 일부러라도 신의 저주를 불러오고 싶다. 내가 그걸 해보이고 싶다. 신의 가면을 벗기고 벗겨서 맨얼굴을 한 그를 잡아오겠다. 나는 더욱더 많은 가면을 준비하겠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무기로 싸워야 한다.”

    빅맨들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사람들은 빅맨이 들려주던 얘기를 몸으로 보여주는 듯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도와주지도 않았고 방해하지도 않았다.

    우현도 마을 일에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침이면 도시락을 싸가지고 버려진 밭에 올라가서 고랑을 파고 거름을 주고 씨를 뿌렸다. 부엉이 소리가 들리면 괭이를 놓았다. 허리를 펴면 입에서 단내가 올라왔다. 부족의 커다란 축제인 성인식을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로만 즐겨야 했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뭐가 문제일까?”

    “신이 내린 저주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문제가 아닐까? 순응하지도 못하고 적극적으로 항명하지도 못해. 이상하지 않니? 그들이 부족의 주신(主神)에게 바치는 제사라는 거, 그게 너무 경박스러워. 마지못해 시어머니 밥상 차리는 며느리 같단 말이다. 그리고 그들이 왜 철저히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어왔는지 차츰 알 것 같아. 자신들은 무고하게 당했다, 이런 공동의 피해의식이랄까, 뭐 그런 거겠지. 신은 자신들을 돌봐주지 않지만 더 큰 재앙을 내릴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그게 강력한 공동체의 정신으로 이어졌겠고. 누군가의 지배를 미워하고 따라서 계급을 만들지 않았어. 선악의 경계가 명확한 점도 그런 맥락이겠고.”

    “쉽게 말해서 뒷골목 똘마니들의 동류의식쯤 된다는 건가?”

    “차이가 있다면 자기를 비하하지 않는 거지.”

    “난 그런 소외의 논법을 믿지 않아. 패배한 자들이 이렇게 건강할 수 있는 걸까? 그것도 복수를 꿈꾸면서.”

    “소외는 물화(物化)일 수만도 없고 본능의 승화로도 설명할 수 없어. 인간 존재를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야. 이미 제도와 관습이 됐어. 나는 저들의 신화와 철학을 믿어. 저들이 우리보다 나은 것은 신에게 구걸하지 않는다는 점이지.”

    “내가 헛것을 좇고 있단 말인가?”

    “아니, 저들의 대화법으론 저주를 내린 신이 진짜를 감춰두고 있다는 거지.”

    진흙투구 안에서 거친 공명음을 만들어내는 우현의 숨소리를 들었다. 그의 손도 숨소리에 맞춰 파르르 떨렸다. 강한 부정의 손사랫짓을 보는 것만 같았다. 우현은 일이 다 끝나도 밭고랑에 앉아 일어날 줄을 몰랐다.

    “두 달만 있으면 이 놈의 작은 씨알들은 지신(地神)의 머리를 딛고서 애 머리통만한 얌으로 커 있을 거야. 뿌리에서 주렁주렁 딸려 나오면서 이런 투정을 할지도 몰라. 조금만 기다려주면 지신의 심장을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우현은 그렇게 자기를 추스르는 말을 하고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열대의 밤은 낮에 이어지는 시간대가 아니다. 그건 전혀 딴세상이라고 여겼고 전혀 딴세상에서 사는 방식으로 살았다. 낮동안 신의 세계와 싸워 승리한 기념으로 매일밤 광장 한가운데 화구에 불을 지폈다. 그 불은 마치 승전비처럼 도도하게 솟구쳐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주었다.

    밤이 되면 그들은 신의 세상을 잠재우고도 남아있는 힘을 과시하기 위해 춤을 추었다. 가면을 쓰고서 불 앞에서 으르렁거렸다. 꽁지에 불을 붙이고 높이 튀어 올랐다가 스러지는 불나방들은 승전의 불꽃놀이인 양, 밤하늘을 마름질하는 별똥별인 양 아사로 부족의 세상을 축하하였다. 아사로 부족은 밤이 되면 마음의 힘도 육체의 힘도 세어진다고 믿었다. 그들은 이웃부족들에게 ‘밤에 출정(出征)하는 부족’-와코므-라는 별칭을 얻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달이 호수의 배면을 가르다 지쳐 모습을 감추는 그믐날, 나는 이곳에 온 후 두번째 성년식(成年式)을 보게 되었다.

    한 달 전에 치러진 성년식은 예비절차의 성격이고 이번이 본래의 성년식이었다. 열 살과 열다섯 살짜리 남자가 성년식의 주인공이 된다. 열 살짜리는 예비성인이 되는 것이고 열다섯 살짜리는 완전한 성인이 되는 것이다.

    열 살짜리는 한 달 동안 부모로부터 격리되어 외딴 장소에서 살게 된다. 뛰어난 전사의 지도로 공동생활의 기본 규율과 아사로 부족의 역사 따위를 공부하게 된다. 반면에 열다섯 살짜리들은 어느 부족의 영역도 아닌 깊은 숲으로 사냥을 떠나는 출정식을 갖는다.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소년들도 꽤나 있어서 이들은 비장한 각오로 예비성년식을 맞는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 달이 되기 전에 마을에 내려와서는 안된다. 추방이라는 가혹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본 성년식은 열 살짜리들의 할례의식과 전사가 되어 돌아오는 자들의 환영식을 겸한다. 거듭난 전사들을 위해 연거푸 나흘 동안 축제가 이어진다. 아이들이 없는 동안에도 마을에서는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행사를 매일 갖는다.

    분명 모두가 즐기는 성대한 축제였으나 그해의 성년식은 아이들을 떠나보낸 직후부터 계속된 신의 분노로 어수선하기만 했다.

    첫 징후는 산을 흔드는 거대한 폭발음이었다. 채 익지 않은 코코넛 열매가 저절로 땅에 떨어질 정도였다. 사람들은 지진이 일어난 줄 알고 모두 호숫가로 피란을 떠났다. 모두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들려오는 폭발음에 마을의 일상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건강한 임산부가 사산을 했고 샤먼은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앓아 누웠다. 전사들의 호방한 웃음이 그치고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온종일 떠나지 않았다.

    처음엔 우현과 나도 똑같이 두려움을 느꼈다. 우현은 어렵사리 채석장의 다이너마이트 폭파음을 기억해냈다. 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을 입으로 내뱉는데에 한참이 걸렸다. 인상을 쓰며 서로에게 ‘그거 있잖아. 그래 그거 비슷한 거. 그거 무슨 상도 있잖아. 아니 그거 말고’하면서 지난한 스무고개 끝에 답을 찾았다. 하지만 그 해답은 지진보다 더 두렵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다시 접해보는 문명의 소리가 이렇게 큰 공포의 감정으로 다가올 줄은 우현도 미처 짐작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빅맨들에게 그 소리의 정체에 대해 설명하는 데에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아무리 쉽게 설명을 해준다고 해도 그들이 문명의 파괴적 속성을 이해할 리 없었다. 빅맨들은 회의를 열었고 정찰대 파견을 결정하였다.

    우현은 진흙투구를 벗고 문명의 옷을 입기로 했다. 만일을 대비해 협상을 하려면 그런 옷차림이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입을 옷이 없었다. 입고 왔던 옷은 행정사무소에서 모두 뺏겼고 여벌로 준비한 옷도 샤먼의 머리 장식으로 쓰인 까닭이다.

    우현이 앞장서고 몸이 날랜 스무 명 정도의 전사가 뒤를 따랐다. 해가 완전히 떨어진 후에 출발하여 서쪽으로 다섯 시간쯤 걸어갔을까, 소리를 더듬어 갈수록 그믐날 밤이 점점 환해졌다.

    급기야 우린 온천단지의 야경같이 밤을 밝힌 거대한 공사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어느 전사의 표현대로라면 그것은 신의 분노를 담은 거대한 화구였다. 그가 그렇게 말할 만했다. 100m가 넘을 것 같은 기중기와 각종 중장비 트럭들이 시뻘건 눈을 뜨고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벌채된 나무들이 곳곳에 화산오름처럼 쌓여있었으나 단순한 산판은 아닌 것 같았다. 나무가 잘려나간 곳에 폭파 흔적들이 있었다. 원주민들이 화차에 돌을 실어 밀고 다니는 광경도 있었다. 감독관 같아 보이는 백인 남자가 그들에게 뭔가를 지시하며 돌아다녔다.

    전사들은 적의와 두려움에 찬 신음소리를 내며 시선이 의지할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성질 급한 전사는 당장 치고 들어가서 적들을 깨부수자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천하를 호령하던 아사로 전사들은 주춤거리기만 했다.

    “코앞에서 이 난리가 났는데 우린 왜 몰랐지? 저만한 장비들이 어디서 왔단 말이야? 도로도 보이지 않잖아!”

    “아마 수로를 이용했던 모양이다. 세픽강 어느 지류로 빙 돌아서 운반해 왔겠지. 파그위 지방에 미국계 원목회사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은데, 그것 같기도 하고.”

    “산판은 아니야. 나무 베는 데 다이너마이트가 왜 필요하겠어?”

    “저쪽을 봐. 철제 빔이 보이지?”

    “광산이다!”

    우현의 얼굴에 불길한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가는 게 보였다.

    “진흙투구가 왜 필요한지 알겠어.”

    날이 밝으면 공사장 관리와 만나 자세한 내막을 듣기로 했다. 그 역할은 우현이 맡고, 나는 다섯 명의 전사와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했다. 마을에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열대의 밤은 짧았다. 다급한 맘이 전사들을 채찍질하는 것 같았다. 우린 단거리 육상선수들처럼 내달려 날이 밝기 전에 마을에 도착했다. 할례를 치른 꼬마전사들의 훌쩍거림이 내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북과 춤과 노래의 아우성에 묻혀 들리지 않아야 할 소리였다. 마을은 축제의 끝물답지 않게 차분했다. 아니, 오히려 평상시보다 더 가라앉아 있었다.

    광장에는 울긋불긋 치장한 열댓 개의 새 진흙투구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성년식의 주인공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그들은 해가 뜨기 전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맨정신으로 축제의 밤을 지새운 사람들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나와 동행했던 전사들은 자기가 보았던 정체 모를 공포를 떨리는 목소리로 중구난방 떠들었다.

    “신의 분노였다. 분노가 번지고 있다.”

    “이미 시작되었다. 나는 벌써 그 빛에 눈을 찔렸다.”

    “왜 우리에겐 신을 이기는 신화는 없는가! 우리가 만들자. 당장 싸우러 가자.”

    “신은 소리로도 분노했다. 어마어마하게 큰 신의 돼지들은 소리로 우리 귀를 멀게 할 것이다. 우리의 손은 두 개뿐이다. 눈과 귀를 어떻게 동시에 가릴 수 있는가!”

    “당장 모든 돼지들을 다 끌고 가서 그 곳에 바쳐야 한다. 그들은 굶주려 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기회를 노리고 있다. 마을까지 오기 전에 빨리 서둘러야 한다.”

    그들은 전사의 화법을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품격이 떨어지는 전사의 말을 제지하지 않았다. 신의 분노를 직접 보지 못한 청중들은 전사들보다 더 두려워했다.

    “아니다. 그들은 신의 분노도 아니고 신도 아니다. 전사들은 처음 봤겠지만 내가 살던 곳에선 늘상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맨손으로 흙을 파는 사람들은 괭이를 든 우리를 보고 놀랄 것이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괭이보다 좀더 큰 도구로 흙을 파고 있는 것뿐이다.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가 두려워하면 그들이 오만해진다.”

    내 말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광장은 앞일에 대한 불안으로 출렁거렸다. 전사들은 물론이고 여자들과 이제 막 할례를 마친 꼬마들까지 무기를 들고 설쳐댔다. 하지만 의견은 하나로 뭉쳐지지 못했다. 연륜 높은 빅맨들도 어찌할 줄 모르고 측근들과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는 형편이었다.

    해가 중천에 떠서 신의 세계 한복판을 망보고 있을 때 열다섯 살짜리 전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맹수를 잡아오지 못하고 동료의 주검을 끌고 왔다. 그들은 전리품인 측량삼각대에 시신을 묶어서 왔다. 열일곱 명 중에 아홉이 죽고 둘이 실종되었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진흙투구가 깨진 처참한 모습이었다.

    모두 총상이었다. 사람들은 죽은 전사의 뱃속에서 터져나와 있는 내장을 집어넣으며 천지가 떠나갈 듯 울부짖었다. 살아돌아온 전사들은 신의 전사들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그들은 흰구름 빛 색칠을 했고 독수리의 부리를 들고 다녔다. 신의 분노는 독수리의 부리에서 번쩍번쩍 뿜어져 나왔다. 그 부리가 저 멀리 있었는데 형제를 덮쳤고 형제는 말 한마디 없이 픽픽 쓰러졌다.”

    전말은 이러했다. 전사들이 이구아나를 쫓아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을 때 측량을 하던 백인기술자들과 맞닥뜨렸다. 양쪽은 서로 놀라 창과 총을 겨누었을 것이다. 백인 한 명이 허공에 공포탄을 쏘았으나 그 소리에 놀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백인들은 총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창을 꼭 쥐고 있는 그들이 두려웠을 것이다. 전사 중의 한 명에게 총을 쏘았고 다리에 맞아 쓰러졌다. 전사들은 일제히 창을 던지고 칼을 휘둘렀다. 그들은 총을 쏘며 달아났다. 세 명이 죽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총의 위력을 알았다. 두려웠으나 복수를 해야 했다. 공사현장에 가서 기습을 감행했다. 그러나 역시 동료 몇을 더 잃고 물러나와야만 했다. 마을을 떠난 지 사흘 만에 그들을 보았고 이때까지 치고 빠지며 싸웠던 것이다.

    장례식은 처연했다. 아사로 부족은 그토록 비참하게 망가진 주검을 앞에 두고 장례를 치른 적이 없었다. 그 순간은 신의 분노도 한낱 복수의 대상에 불과했다. 야자 기름으로 닦아내어도 주검은 있는 그대로 처참했다. 아사로 부족은 구더기가 끓는 살을 뜯으며 죽은 자를 추억하고 복수를 약속했다.

    우현의 일행은 복수의 노래를 들으면서 마을로 돌아왔다. 그들은 이미 어린 전사들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공사장 인부들로부터 습격을 하던 아사로의 어린 전사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평화를 약속했다. 그러려면 우리도 변해야 한다. 우리 말고도 다른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필요한 것을 구하러 왔다. 쇠붙이를 만들 돌을 찾고 있다. 우리가 허락한 적은 없지만 국가라는 집단이 그걸 승인했다. 그들은 목적을 이루면 곧 떠날 사람들이다. 그곳은 우리 불멸의 아사로 부족 땅이 확실하지만….”

    “바로 저 사람이다. 신의 군대는 저 사람과 똑같은 옷을 입었다. 저런 옷을 입은 신의 군대가 형제를 죽였다.”

    그가 본 백인들의 옷차림은 사파리 작업복에 챙이 긴 모자, 등산조끼와 가죽작업화를 가리켰다. 공교롭게도 그건 우현의 옷차림과 유사했다.

    살아 돌아온 전사의 말은 들끓는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아직 피비린내를 씻지 못한 전사들이 우현과 나를 겹겹으로 에워쌌다. 적과 형제의 구분이 모호한 지근거리였다. 누구하나 섣부르게 한발 나서기만 하면 전사의 대열이 앞으로 우르르 쏟아질 것 같았다.

    “우리에게 복수를 하겠단 말인가? 형제를 죽인 아사로가 신 앞에서 어떻게 정당할 수 있는가!”

    우현은 그 자리에서 자기가 입었던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알몸이 되었다. “나는 이 옷을 입고 있는 동안 진흙투구가 너무나 쓰고 싶었다. 내가 만약 계속 살아있다면 진흙투구를 쓰고 그들과 맞설 것이다. 뭘 망설이는가? 내게 진흙투구를 씌우고 어서 나를 찔러라. 그리고 실컷 추억하라. 내 심장은 형제의 뱃속에서 세세토록 뜨거울 것이다.”

    전사들은 주춤거렸다. 그러나 결기가 풀어진 건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를 나무덩굴로 친친 동여매고서 그 위에 커다란 바위를 얹어놓았다. 바위를 나무 지지대로 여러 군데 받쳐 놓아서 꼼짝달싹 못하게 하였다. 이건 원래 적을 고문하는 도구였다. 용을 쓰며 가슴을 들어올려야 겨우 지상의 공기 한 줌을 얻어 마실 수 있었다.

    누군가 우리에게 흙을 떨지 않은 얌을 뿌리째 던졌다.

    “이것이 재앙을 불러온 씨다. 이들은 썩은 정기를 우리에게 먹이려고 했다.”

    미처 지신의 심장을 구경하지 못한 얌들이 얼굴 위로 수북이 쏟아졌다. 흙이 코로 들어와 숨쉬기가 더 힘들어졌다. 갈수록 힘이 빠져 나갔다. 벌꿀 체내리는 것 모양으로 거대한 무게에 질린 무언가가 내 몸에서 계속 꾸역꾸역 밀려나는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그들이 내 몸을 뒤집었다. 바위는 치워져 있었지만 움직일 수 없었고 여전히 가쁜 숨이 들락거렸다. 사정은 우현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전사들은 우리를 떠메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우현의 아내가 오열하는 소리가 길게 따라왔다. 그녀는 추방된 자의 아이를 배고 있었다. 한 꼭지의 부아이가 간절히 그리웠다.

    동굴 안이었다. 거기서 며칠이 지나갔다. 나는 죽은 사람보다 더 조용히 누워있어야 했다. 야자나무를 타다가 떨어져서 허리를 다쳤다. 눈 어두운 뱀 타알이 제 몸통을 내 옆구리에 부딪히고는 움찔 놀랬다. 동굴 안에서는 나도 타알처럼 눈이 나쁜 짐승이었다. 눈 어두운 짐승끼리의 싸움은 결심을 하기까지 꽤나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타알은 옆에서 내 정체를 의아해하며 잠시 멈춰섰다. 그러고는 다시 구불구불한 자기 길을 스윽슥 밀고 나갔다. 어차피 배를 불리고 동굴을 찾은 타알은 서로 무시하자며 꼬리로 내 어깨를 툭 쳤다. 내일은 기운을 차려 배가 고파 있을 저 타알과 겨뤄보기로 했다. 저 놈만 있으면 발 다친 캥거루쥐 같은 건 잡지 않아도 될 터였다.

    우현은 뭄사부와 함께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나보다 타알을 먼저 발견했다. 놈은 머리를 빳빳이 곧추세우고 우리를 노려보았다. 뭄사부는 타알의 머리 위에 횃불을 빙빙 돌렸다. 타알의 머리는 횃불에 밀려 똑같은 원을 그렸다. 곧이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타알의 정수리에 와서 멈췄다. 우현이 막대기로 축 늘어진 타알을 들어올렸다.

    “전쟁이 일어났다.”

    “기어코 공사현장에 들어간 거야?”

    아랫배가 아파왔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면 종종 그러했다. 아마도 성적표가 배달되던 어느 날부터 그랬을 것이다.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 아린 배를 쓰다듬으며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었다.

    “어젯밤에 출발했대. 지금쯤 시작했을 거다. 가봤자 이미 다 끝났을 거고.”

    “뭄사부는 왜?”

    “출정을 막았는데 역부족이었지 뭐. 뭄사부는 대화를 원해. 그래서 나를 찾아온 거야.”

    “대화? 불가능하잖아. 더군다나 일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무조건 마을의 철거를 주장한다면서? 그 가당찮은 정부의 허가증만 들이밀면서 말이야.”

    “지금으로선 불가피한 일이야. 오히려 더 잘됐는지도 모르지. 앉아서 당하느니.”

    호주로부터 독립한 지 이제 겨우 10년 남짓한 나라였다. 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세련된 통치기술을 갖추지도 못했다. 그들의 통치권이 미치는 곳은 실상 항구도시 몇 군데에 불과했다. 그 주제에 경제개발을 명분으로 외국기업에게 밀림을 팔아 넘기고 있었다. 식민지 시대부터 외국에 기생해 살아가던 관리계층은 이들에게 로비자금을 받아 배를 불렸다.

    이 땅의 원래 주인인 원주민은 쫓겨나서 도시로 흘러들어 몸을 팔고 ‘라스칼’이라는 떼강도로 변신했다. 고향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외국계 기업의 광산이나 벌목장, 커피농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 파푸운 산 커피는 세계적으로 가격경쟁력이 가장 뛰어났으니 그들의 임금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아사로 부족을 괴롭히던 자들은 동광산을 개발하려고 하는 중이었다.

    “저들은 진짜 광산업자도 아니야. 브로커 같은 놈들이지. 몽땅 다 까벗겨 봐서 먹을 게 있으면 웃돈 얹어서 파는 게 목적이야. 먹을 게 없어도 벌목 수입이 있으니까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야. 도랑 치고 가재 잡겠다는 속셈으로 무조건 뒤집어놓고 보는 거야. 우리 부족 영역도 이미 계획에 포함되어 있어. 여긴 아직도 서부개척시대다.”

    우리는 우선 마을로 내려가보기로 했다.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형제들이 처한 위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뭄사부가 우리의 구명을 돕겠다고 한 약속이 작으나마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마을은 파헤쳐진 무덤 같았다.

    아비규환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붙들고 절규했다.

    그곳엔 승전의 축제와 전쟁의 광기가 함께 뒹굴고 있었다. 축제 의상을 입은 샤먼도, 무무를 물고 있던 아이들도 모두 쓰러져 있었다. M16 총탄이 무쇠 같던 전사의 어깨뼈를 날려버렸다. 여자들은 아랫도리를 여밀 만한 힘도 없이 치욕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만삭이던 우현의 아내는 땅에 떨어진 붉은 꽃처럼 넓은 꽃잎을 한껏 벌리고 있었다. 핏빛 꽃잎은 계속 커져갔다.

    살아남은 자들은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평소 원한이 있던 이웃 부족들의 습격이었다. 동광산에서 백인 감독관 몇 명의 목을 따와 기세 등등하던 부족민들은 축제를 벌였고 축제의 한복판에 습격이 있었다. 적들은 원주민이었지만 총을 들었다. 광산업자의 사주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전쟁은 날로 격해졌다. 그 가운데 우현이 있었다. 전사들은 독침을 들고서 적을 기습하여 상당한 양의 무기를 탈취할 수 있었다. 우린 마치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게릴라를 양성하는 교관이 되어 있었다. 문무대에서 받은 군사교육이 이렇게 쓰이다니. 사격연습을 끝낸 전사의 복잡하게 얼킨 눈빛이 진흙투구 안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또다른 복수를 불러왔고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함께 축제를 열던 사람들, 처음으로 그들의 살을 먹었다. 그들이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의 일부가 조금씩 도려져나가는 것 같았다. 아득한 시간 저 아래로 계속 추락하는 느낌, 언젠가는 모두 도려져 텅 빈 무게로 가라앉을 내 홑겹의 영혼.

    마을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서 요새를 쌓았다. 총과 탄약이 외부에서 계속 조달되었다. 참브리 호수 인근에 있는 부족들 대부분이 무장을 하게 되었고 마을을 버린 채 산 속으로 들어갔다. 전쟁은 일상을 모두 앗아가버렸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기에 약탈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거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런 얘기 말고.”

    “솔직히 말할까? 신과 내 두려움이 모두 죽을 때까지.”

    “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왜 여기까지 왔지?”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 춘추시대에 도척(盜)이라는 사람이 살았대. 그러니까 공자하고 같은 연배겠지? 공자도 이 사람을 알고 있었다니까 꽤나 유명했나봐. 도척은 지금으로 말하면 떼강도였어. 졸개가 무려 1만여 명이나 됐다고 하니까 대단한 보스였겠지. 지방의 군웅들도 이 사람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대. 길을 비켜주고 자기 땅은 그냥 지나가 달라고 상납을 하고. 또 자기 적을 공격해 달라고 뇌물을 주기까지 했다니까 알만하지. 포악하기는 또 전 중국 역사를 통 털어도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는 거야. 그가 지나간 자리엔 백년 동안 사람이 살지 못할 정도였지. 살인과 방화 같은 건 기본이고, 비싼 소금을 논과 밭에 들이부어 놓아서 농사도 못 짓게 해놨던 거야. 내가 보기에는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나라 하나 세워서 천자 노릇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유랑민 피를 타고났는지 도통 그런 생각은 안했어. 어떤 사서(史書)는 그가 춘추시대를 살았던 사람 중에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적어놓았더군. 천하를 통일할 수도 있었다는 거야. 또 웃기는 일은 그의 형은,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유명한 현인(賢人)이었어. 둘이 대면한다고 생각해봐. 무척이나 재밌겠지?

    사마천은 사기에서 도척에 대해 잠깐 언급했어. 사마천은 냉철한 역사학자는 되지 못해. 오히려 인간적인 면을 많이 풍겨. 그는 도척의 평가에 대해 고민했어.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천벌을 받아 마땅한데, 천하의 악한 도척은 왜 벌을 받기는커녕 천수를 누리다가 부하들의 애도 속에서 죽었냐는 거야. 선악의 명확한 경계를 가져야 했던 사마천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딜레마였던 거지. 선현들의 도덕을 들먹이며 그들의 잣대로 재보아도 안되고 이렇게 해도 안되고 해서 대충 얼버무렸어. 그럴 수도 있다고.”

    “그래서?”

    “널 흔드는 잣대에서 내려오라고. 살인하지 마라 하는 도덕은 혼란만 더 키워. 여긴 전쟁중이고 우린 이미 도척이 되어버렸으니까.”

    정부의 비호 아래 광산업자들은 골칫거리인 부족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죽고 말 것이다. 국면전환이 절실히 필요했다. 우현은 휴전과 동맹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때론 휴전회담의 자리가 곧바로 교전터가 되기도 했다.

    무장을 한 부족들은 두 편으로 나뉘게 되었다. 광산업자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광산을 수비하는 부족과 그렇지 않은 부족. 적이 좀더 명확해졌다는 것 빼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참브리 호수 주변의 정글은 등껍질을 벗긴 거북처럼 처참한 몰골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로 반갑지 않은 변화가 있긴 했다. 마침내 세계에서 몇 번째 순위에 들 대규모 동광이 발견되었고 새로 연합한 부족들은 박격포를 가지게 되었다. 박격포로 광산에 총공세를 펼쳤지만 광산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파헤칠 땅이었던 것이다. 다음날이면 보란 듯이 더 큰 공사가 진행되었다. 공격을 감행하는 횟수가 증가했지만 피해는 이쪽이 훨씬 컸다.

    광산에서 가져온 워싱턴포스트 신문에는 무너진 베를린 장벽 사진이 있었다. 장벽을 깨서 팔아먹는 장사가 성행한다는 기사도 읽었다. 그 신문 국제란 한쪽 귀퉁이에 파푸운의 계엄령 선포 소식이 들어 있었다. 벌써 보름이 지난 신문 내용이었다.

    정부군의 전체 병력은 3000명. 그중의 절반이 참브리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식민모국의 군사고문관을 모시고 있었고 첨단 무기로 무장을 했다. 전투헬기가 날고 요새에 로켓포탄이 날아들었다. 더 깊은 산으로 쫓겨가서 반대편 등성이를 타 넘으면 거기에도 적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용맹한 아사로 전사들도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전투에서 허벅지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게 마지막 전투였다. 선봉에 섰던 우현의 결사대는 포위망을 뚫고 정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우현의 마지막 모습은 쫓기는 도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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