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군대에서는 해마다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이 사라진다. 2000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1999년 한 해에 230명의 젊은이가 군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유가족 중 상당수는 “죽음의 의혹이 명백하게 해소되지 않았다”며 군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들과 행동을 함께하며 눈물을 닦아주는 천주교 인권위원회 이철학 신부를 만났다.
“곽○○ 이경. 2001년 4월 입대해 서울 모 경찰서에서 복무하던 중 두 달 만에 4층 내무반에서 추락해 사망. 경찰 측은 ‘부대에 적응하지 못해 스스로 떨어졌다’고 추정. 유족은 다음날이 누나 생일이어서 면회가 예정돼 있었다는 사실, 부검과정에서 발견된 가슴과 다리의 멍 등을 들어 구타에 의한 추락사 의혹 제기. 경찰은 1차 수사에서 ‘가혹행위는 없었다’고 발표했으나, 유족과 인권단체의 항의에 의해 이뤄진 서울시경의 재조사 과정에서 부대 내 폭력과 가혹행위가 드러나 관련자들 구속. 그러나 ‘타살이라는 확증이 없으므로’ 자살로 수사종결.”
군의문사. 이 말은 수사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아 유족이나 인권단체가 보기에 명백하게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군대 내 사망사고를 의미한다. 이러한 사고가 발생하면 그 원인과 처리과정에 의혹을 품은 유족들은 수사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지만, 폐쇄적인 환경과 ‘군사보안’을 이유로 부대 측이 정보제공을 꺼려 마찰을 빚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이들 유족을 지원하기 위해 ‘군의문사·군폭력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발족한 것은 지난해 5월. 1998년 2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발생한 김훈 중위 사망사고와 관련해 인권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한 지 3년 만이다. 그간의 활동과정에서 김훈 중위 사건 이외에도 많은 군내 사망자 유가족들이 있음을 확인한 후 이를 지속적으로 다루기 위해 대책위를 출범시킨 것이다. 대책위는 의문사 유가족들로 이루어진 ‘군의문사 진상규명과 군폭력 근절을 위한 가족협의회’(이하 군가협)와 함께 2002년 6월 현재 모두 31건의 군의문사 사건조사에 참여하고 있다.
“교회는 눈물이 있는 곳에”
출범 이후 대책위를 이끌고 있는 이철학(45) 신부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의정부 녹양동 성당을 찾은 것은 햇볕이 유난히 뜨겁던 6월 초의 평일 오후였다. 예배당을 꽝꽝 울리는 유행가 소리가 성당에 들어서던 기자의 귀를 파고들었다.
“가거라~ 사람아∼, 내 하나의~ 사람아∼”
거룩해야 할 성당을 가득 메운 유행가가 생경스러워 살짝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60∼70대 할머니들이 ‘노래 강사’의 지도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다.
“금요일 오후에 동네 할머니들을 위해 노래교실을 열고 있어요. 점심때는 무료급식을 하기 때문에 신자가 아니라도 주변의 연세 드신 분들이나 극빈자들이 많이 오시죠. 따뜻한 식사 한 끼 드시고 노래도 한 자락 하시고…. 다들 좋아하세요.”
의아해하는 기자의 표정을 눈치챈 이철학 주임신부(45)가 빙그레 웃으며 덧붙인다.
“1999년 이곳으로 부임하면서 가능한 한 많은 분들이 교회를 사용할 수 있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성당 지하에는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상담소를 운영하고 있고요. 교회가 닫혀있을 필요는 없죠. 세상과 함께 숨쉴 때 교회도 비로소 살아있는 거니까요.”
시위현장에서 만나는 ‘열혈 사제’들과는 사뭇 다른 조용한 목소리, 국방부와 ‘맞장뜨기’를 서슴지 않는 강성 인권단체의 수장으로는 영 어울리지 않는 외모의 이신부가 대책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까닭을 언뜻 알 것도 같다. “억울한 눈물이 있으면 어디라도 달려가야 하는 게 사제의 의무”라고 그는 설명했다.
대책위는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군의문사 사건 유가족들을 돕고 있다. 첫째는 조사활동. 의혹을 제기하는 유족이 있을 경우 상담을 통해 사건을 살펴보고, 함께 부대를 방문한다. 부검에 참여해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 의혹이 있는지 확인하고 군 검시관의 발표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사들과 함께 살펴 미비한 점을 찾아내기도 한다. 가장 주안점을 두는 것은 부대 측이 사건을 ‘자살’로 예단하는 것을 막는 일. 수사당국과 유족 간의 불필요한 마찰을 막기 위한 중재도 중요한 기능이다.
두번째는 법률구조사업. 국가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거나 유공자등록 거부를 취소하도록 소송을 제기하는 일에 법률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법률분과위원회에서 함께 일하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들의 조언이 이 부분에서 큰 힘이 된다고 이신부는 말한다. 더불어 군대 내 사망사고에 관한 보훈규정 등 관련법을 개정하는 일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
유가족을 위로하는 일도 대책위의 역할이다. 매년 천주교, 불교, 개신교 연합 추모제를 열고, 사망자의 장례식을 부대장으로 치를 수 있도록 영결식을 중재하는 일을 하고 있다.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역시 조사활동입니다. 사고발생 이후 군 당국의 처리과정이나 대응이 미숙한 경우가 너무나 잦고, 민간단체인 대책위가 사건에 참여하는 것을 부대에서 못마땅해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죠.”
군대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하면 1차 조사는 해당 부대의 헌병대가 맡는다. 대부분의 경우 헌병대 담당 조사관과 사망자의 상급자는 같은 부대 내에서 친분관계에 있다. 수사결과에 따라 해당 지휘관은 엄정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현장보존이나 사고이유에 대한 면밀한 분석보다는 조속한 시일 내에 사건을 마무리짓는 데 급급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 대책위와 군가협의 판단이다.
“많은 경우 일단 사망원인을 자살로 단정짓고 조사에 착수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조사가 미처 이뤄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유족들에게 ‘자살이 확실하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타살의 확증이 없으므로 자살’이라는 식이지요.
자살로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도 그 원인은 천편일률적으로 사망자 본인의 문제로 한정짓습니다. 내성적인 성격, 가정문제, 여자문제, 금전문제 등은 ‘고정 레퍼토리’나 다름없으니까요. 부대 측의 이러한 결과발표에 대해 유족들이 이의를 제기하면 그때부터 지리한 싸움이 시작되는 겁니다.”
유족들이 확인하기도 전에 사고현장을 정리하거나 시신을 닦고, 사망자가 입고 있던 옷을 세탁하는 경우도 있다. 한마디로 “사건 수사의 기본 원칙도 없다”는 게 이신부의 지적이다.
“부대 입장에서는 유족들이 귀찮을 수도 있겠지요. 지휘관으로서는 사망사고가 일어나면 인사고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니 하루 빨리 마무리짓고 싶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유족이 최대한 납득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공개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유족과 함께 정확한 사인을 찾아내면 될 것 아닙니까. 왜 굳이 쓸데없는 오해를 사고 분란을 일으키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군사보안지역이라는 이유로 유족들의 현장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사망사고와 관련해 관계자들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유족들의 눈에는 사건축소나 진상은폐를 위한 시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대책위가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군측은 보안업무시행규칙 등을 근거로 민간인인 유족들이 사건현장을 촬영하거나 소대원 등 목격자들과 면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하면 ‘군 당국의 조사와 발표만을 믿어야지, 유족들이 개별적으로 조사활동을 해서는 안된다’는 분위기다.
“1차 조사가 끝나고 유족이 ‘이러이러한 사항 등 미비한 점이 너무 많다’고 의혹을 제기하면 부대는 항상 그 부분에 대한 대답만 만들고는 ‘재조사를 마쳤다’고 말합니다. 사건 전체에 대한 재조사가 아니라 유족이 지적한 일부 사항에 대해서만 답변을 마련하는 수준인 거죠.”
1999년 국방부는 김훈 중위 사건과 관련해 군의문사를 둘러싼 사회적 여론이 증폭되자 특별합동조사단을 출범시켰다. “모든 것을 한 점 의혹 없이 밝힌다”며 가동된 특조단은 2년 여의 조사활동을 벌였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조단이 접수한 166건 가운데 사망사고 분류를 변경한 것은 모두 17건. 이는 변사나 일반사망, 병사에서 순직으로 바뀐 숫자다. 대부분 공무수행의 범위를 좀더 넓게 해석한 최근의 판례에 따른 것일 뿐, 타살 의혹을 밝혀내거나 자살원인을 새롭게 찾아낸 경우는 없었다. 지난해 9월 대책위와 유가족들은 명동성당 입구에서 “차라리 특조단을 해체하라”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신부는 “엄혹한 1980년대가 없었다면 지금쯤 평범한 직장인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당시 꽤 잘 나가는 공기업에 다니던 직장인 이철학의 삶을 뒤흔든 것은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대대로 천주교를 믿어온 이신부 가족들이 다니던 대구 지역 성당에까지 사건의 파장이 밀려들었다.
“제가 참여했던 성가대에서 한 형제가 ‘미 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인 김현장, 문부식을 위해 기도하자’고 제안했죠. 그랬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며칠 후에 형사들이 와서 캐묻고 가더군요. 순간 느낌이 왔죠. ‘아, 이런 거구나.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신앙인으로서의 양심과 사회문제가 다른 게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를 때리고 지나가더군요.”
인생 바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웬만큼 자리를 잡았으니 이제 결혼해서 아이 낳고 알콩달콩 살아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던 20대 초반의 젊은이는 짧지 않은 고민 끝에 1984년 신학교에 입학했다. ‘Pro Mundi Vita(세상의 생명을 위하여)’라는 신약성서 요한복음의 한 구절이 사목의 지표가 됐다. 생활인으로서의 삶, 가족 안에서의 행복과는 영원한 이별이었다.
“생각이 많았죠. 1980년대에 신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고민과 맞서야 한다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습니다. 주일학교 여교사들이 꽃다발을 들고 왔다갔다 하는 것에 마음을 뺏기는 낭만은 정말 한 순간이었어요. 밤 늦은 시간에 열리는 기도회, 그리고 유인물 만들기가 계속됐습니다.”
그 시절 이신부와 함께 공부하던 많은 동기들 중 대부분은 사제가 됐지만, 일부는 신학교를 떠나 세상에서의 싸움을 선택했다.
“50여 명의 동기들 중에 유난히 운동가가 많은 것은 그 시절의 분위기 때문일 거예요. 지금 대책위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홍기영 간사도 제 동깁니다. 제가 함께 일하자고 제의해 끌고오다시피 했죠.”
1991년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이신부는 사제서품을 받고 사목활동에 나섰다. 1989년 임수경 방북, 그 뒤를 이은 문규현 신부의 방북과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으로 천주교가 민주화운동의 주요 축 가운데 하나로 활동하던 시절이었다. 정의구현사제단 사제들과 함께 움직이며 ‘교과서 밖의 사목’을 고민하던 이신부는 1996년 10월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에 부임하면서 비로소 제 역할을 만났다고 회고한다.
“평화시장에는 교회가 따로 없었습니다. 상인들과 노동자 등 주위에 신도만 1000명이 넘었지만, 자발적인 공동체가 전부였지요. 창고 자리였던 평화시장 6층의 작은 방을 개조해 사제관 겸 성당을 만들었습니다.”
늦은 밤에야 영업을 시작하는 상인들을 위해 밤을 새가며 시장을 누비는 ‘현장사목’이었다. 신도가 교회에 오기를 기다리는 대신 교회가 직접 신도들을 만나기 위해 나서는 3년간의 현장활동은 더할 수 없이 귀한 경험이었다고 한다.
“활동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냐”는 물음에 그는 예상하지 못한 답을 했다. “‘천주교’의 이름을 걸고 군대와 맞서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게 가장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는 것.
“군종 교구에서 시무하시는 신부님들이 가장 난색을 표하시더군요. 군대의 사기문제도 있는데 지나치면 안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그분들도 내심으로는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소속이 있으니까요. 당장 저희가 유족들과 함께 현장에 나가 조사활동을 벌이면, 부대 내 분위기가 싸늘해져 사목활동에 지장이 있다는 겁니다. 그분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운함을 누를 수는 없더군요.”
이신부가 말하는 또 다른 문제는 천주교 인권위원회의 위상과 관련된 부분이다. 인권위원회는 천주교의 공식기구가 아니다. 오히려 ‘천주교 신도들로 이루어진 인권NGO’에 가깝다는 것이 대책위의 설명. 대책위는 사용중인 사무실 공간을 제외하고는 서울대교구나 주교회의로부터 별도의 재정지원을 받지 않는다.
“교회 연락처 수첩에는 아직도 정의구현사제단의 전화번호가 없습니다. 공식기구가 아닌 임의단체라는 거죠. 갑갑한 마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 ‘임의단체’들의 활동 덕분에 천주교가 얻은 소득이 얼마입니까. 약자를 위해 힘쓰는 교회, 사회를 위해 나서는 종교라는 천주교의 이미지는 상당 부분 그들의 덕분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는 더 적극적인 자세로 이들을 감싸 안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가 이 쉽지않은 싸움에 뛰어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신부는 그 이유를 “한마디로 마음이 약해서”라고 설명했다. 생때같은 자식이 군대에 갔다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 현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유가족의 슬픔이 가장 큰 동기였다는 것이다.
“사망원인을 놓고 계속되는 과정에서 가족들이 입는 심적·물질적 피해는 상당히 심각합니다. 우선 많은 경우 시신을 땅에 묻지 못하고 1년이고 2년이고 냉동고에 보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시신이 국립묘지로 가는 게 아닙니다. 군에서 마련한 ‘영현 보관소’에 시신이 보관되는데, 이 시설 역시 가족들이 보기에는 가슴 아플 만큼 썰렁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가족 중에 누군가는 사건에 매달려 생업을 포기하다시피 해야 합니다. 소송이라도 걸게 되면 그 경제적 부담 또한 만만치 않지요. 가장 결정적으로 유족들을 무너뜨리는 것은 ‘그런다고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오겠냐’는 주위의 설득이고요.”
대책위에 따르면 사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거나 조사에 진전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규명을 포기하는 유족들도 많다. 오히려 끝까지 남아 재조사를 관철해내는 유족들의 수가 훨씬 적다는 것.
“그렇지만 활동을 계속하는 가족들의 경우 차츰 문제의식이 달라지는 것을 자주 확인하곤 합니다. 단순히 내 자식의 죽음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군대 내부의 환경이나 문화가 문제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는 거죠. 아직도 상당부분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군대 내 불합리를 개혁하기 위한 운동으로 목적이 바뀌는 겁니다.”
이신부는 유족들과 군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필요한 오해를 막으려면 사망사건의 실체를 명확히 할 수 있는 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우선 조사과정에서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제3자가 사건조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군과 민간단체가 합동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이를 유족에게 그대로 공개한다면 잡음은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국방부 등 상급기관에서는 진상을 규명하고 군폭력을 근절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는 걸 느끼곤 하지만 예하 부대에 내려가면 말처럼 실현되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자료공개와 함께 더욱 전문화된 수사기관이 사건을 맡는다면 더욱 좋겠지요. 1차 수사를 담당하는 부대 헌병대가 얼마나 심도 있는 법의학 지식을 갖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군대 내에서 발생하는 사망사고를 전담하는 기관이 있다면 수사 관계자와 해당 부대 지휘관의 관계에 대한 유족들의 의심도 사라질 테니까요.”
자살사고도 국가책임
이신부는 “근본적으로는 군에서 사망한 사람에 대해 국가가 적극적인 책임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국가책임론’이란, 명백히 부대 외의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군대 내에서 발생한 자살사고 역시 국가가 그 보상을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외부와는 일정부분 단절된 ‘군대’라는 환경에서 일어난 사건인 만큼 개인의 탓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것.
“한국은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설령 개인적으로 유약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군대라는 특수한 환경에 놓이지 않았다면 자살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국가가 일정부분 그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군대에서 축구를 하다가 다리를 다치면 공상(公傷)으로 처리되어 국가유공자가 됩니다. 자살이라고 해서 여기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모순입니다.”
더욱이 구타나 강압, 가혹행위에 의한 자살이라면 전적으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 국가에겐 병사들이 자살을 생각할 만큼 부당한 상황에 놓이지 않도록 감독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당연히 이들은 국가유공자로 대우해야 한다는 게 대책위의 주장이다.
실제로 최근 들어 군대 가혹행위에 따른 자살자는 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법원 판결이 늘고 있다. 5월26일 서울행정법원은 육군 모 포병부대에서 복무하다 자살한 엄모 이등병의 유가족이 제기한 ‘국가유공자 등록거부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견디기 어려운 가혹행위를 당해 결국 목숨을 끊은 만큼, 엄씨의 사망은 군인으로서 직무수행 중 숨진 경우에 해당한다”는 취지였다.
“가혹행위에 따른 자살은 이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만, 군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자살사건이 명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다보니 아직 갈 길이 멉니다. 투명한 진상확인과 유족이 납득할 만한 사건조사가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것만이 본질을 해결할 수 있는 거지요.”
6월5일은 무척이나 더웠다. 전날 열린 2002 한·일월드컵 한국-폴란드전 승리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거리는 햇볕에 후끈 달아오른 채였다. 거리는 온통 축제의 기운으로 들떠 있었지만, 서울 종묘공원에는 ‘군의문사 군폭력 희생자 합동추모제’라는 검은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군복을 말쑥하게 차려 입은 20여 젊은이들의 영정이 단상 위에 놓여 있었다. 추모사를 낭독하는 이신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이 젊은이들은 왜 죽어갔던 것일까요. 흔히 하는 말처럼 군대 울타리 안에서 죽은 이들은 그냥 ‘개죽음’을 했을 뿐일까요. 아니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차가운 냉동고 안에서 ‘내가 죽어야 했던 이유를 밝혀달라’며 소리없이 외치고 있는 이 젊은 넋들은, 비민주적인 관행과 폭력이 남아있는 군대를 바꾸기 위해 죽어간 것입니다. 억압적인 군대문화 대신 합리와 이성, 정의가 살아있는 군대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기 위해 죽어간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만드는 일, 대한민국의 군대를 우리의 자식들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군대로 바꾸는 일이 여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남겨진 몫입니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 갔다가 죽음을 맞았지만, 나라가 정해놓은 추모의 대상에서 제외된 영혼들. 이들을 위해 추모제가 열린 이날은, 이름하여 ‘호국보훈의 달’ 6월, 현충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