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대국 건설을 위해 서방과의 관계 개선에 승부를 건 푸틴 대통령. 그는 마치 300년 전의 표트르 대제처럼 러시아를 고립 속에서 끌어내 세계의 주류국가로 부상시키려는 도전을 시작했다. ‘러시아의 비상(飛翔)’. 이것이 21세기 러시아 차르(황제)의 꿈이다.
이날 오전 두 정상은 크렘린궁에서 ‘역사적인’ 전략핵무기감축협정과 ‘양국의 새로운 전략적 관계에 대한 공동선언’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전세계 언론은 “양국이 이 정상회담 하나로 오랜 대립과 갈등 관계를 풀고 새로운 협력시대를 열었다”고 찬사를 보냈다.
이제는 5번이나 만나 제법 친숙해진 푸틴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의 표정도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만찬 분위기가 무르익자 푸틴 대통령이 갑자기 식탁에 놓인 캐비어(철갑상어알)를 가리키며 참석자들에게 “이걸 어떻게 잡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의아해하는 좌중을 돌아보며 “어부들은 카스피해에서 철갑상어를 잡아 제왕절개 수술을 해서 알을 채취한 뒤 다시 바다로 돌려보낸다”고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순간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일부 외신은 “뻣뻣하기로 유명한 푸틴 대통령이 취임 2년을 넘기더니 이제는 제법 유머가 늘었다”고 평했다.
그런데 다음날 러시아 관영 RTR방송은 실제 캐비어를 채취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철갑상어의 배를 가르고 알을 꺼낸 후 실로 꿰매고 다시 놓아주는 장면이었다. 이렇게 풀려난 철갑상어는 생존율이 90%가 넘고 다음해에 다시 잡아 또 캐비어를 채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기술이 실은 러시아가 값비싼 캐비어 최대 생산국이 된 비결이라는 설명까지 이어졌다.
서방에 대한 손짓
푸틴 대통령의 ‘농담’은 알고보니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진실도 농담처럼 태연스럽게 말한다. 가슴속에 있는 진심을 알아채기 힘들다. 그래서 서방 지도자들이 160㎝대의 단신인 그를 어려워한다. 이런 푸틴 대통령이 집권 2년째를 맞은 올해 승부수를 던졌다. 그가 집권초부터 혼신의 힘을 다해 매달렸던 외교적 노력의 성과가 마침내 가시화됐다.
푸틴 대통령은 미·러 정상회담을 마치자마자 5월28일 이탈리아 로마로 날아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19개국 정상과 만났다. 이 회의를 통해 러시아는 NATO의 정식회원국은 아니지만 회원국과 동등한 자격으로 의사결정권을 가지게 됐다. 러시아 언론은 나토가 더 이상 ‘19+1체제(19개 NATO회원국과 러시아)’가 아니라 ‘20체제’로 개편됐다고 평가했다.
러·NATO정상회의를 마치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다음날 푸틴 대통령은 유럽연합(EU) 로마노 프로디 집행위원장과 의장국인 스페인의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총리, 하비에르 솔라나 대외문제 담당집행위원(전 NATO 사무총장) 등 EU 지도자들을 만났다. 프로디 집행위원장은 “러시아에 ‘시장경제(market economy) 국가 지위’를 부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푸틴 대통령이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선물이었다.
EU의 뒤를 이어 6월6일 미국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돈 에번스 미 상무장관은 “러시아가 지난 10년 동안 이룬 눈부신 경제적 변화를 반영해 러시아에 시장경제 지위를 부여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에 앞서 부시 미국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축하해주었다.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미·러 정상회담 등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러시아에게 ‘시장경제국가 지위’를 달라”고 강력히 요청했으나 확답을 받지 못했다. 미 상무부가 그동안 러시아가 시장경제국가의 자격이 있는지를 판정하는 조사작업을 벌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또 시장국가 지위 부여는 최종적으로 의회의 승인사항이기 때문에 행정부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러시아가 기다려온 ‘시장경제국가 지위 획득’이란 무엇인가? EU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은 전세계 국가를 시장국가와 비(非) 시장국가로 구분하고 통상 등에서 차별적으로 대우한다.
보통 미국 정부는 해당국 통화(通貨)의 태환성(兌換性·currency convertibility), 임금이 시장경제에 맞게 결정되는지의 여부, 정부의 외국투자기업 소유와 생산통제의 정도, 자원분배과정에서의 정부 개입 등을 면밀하게 검토해서 일정한 조건을 만족시켜야만 시장경제국 지위를 준다. 러시아의 경우 미국 상무부가 9개월 동안 시장국가가 될 조건이 되는지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국가로 인정받으면 뭐가 달라질까? 가장 큰 차이는 미국과 통상분쟁이 일어났을 경우 비시장국가는 더 큰 불이익을 당한다는 점이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예를 들어 미국으로 수출되는 생산품이 미국의 반(反)덤핑 적용을 받아 제재를 당할 경우 미국이 덤핑이나 관세 마진을 고려할 때 시장경제지위가 없으면 시장경제 지위가 있는 다른 나라의 가격과 비용을 기초로 마진을 정한다.
러시아는 그동안 미국이 러시아의 시장경제 지위 인정을 미루는 바람에 특히 금속, 핵연료, 비료, 티타늄 산업 등에서 어려움을 겪고, 연간 15억달러의 손실을 입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러시아가 시장경제 지위를 얻음으로써 러시아의 수출품이 미국에서 반덤핑 제소로 인하여 받는 불이익이 줄어들게 된 것이다.
게르만 그레프 러시아 경제통상부 장관은 러시아에 시장경제 지위가 부여돼 일부 러시아산 제품에 부과되던 반덤핑관세를 피할 수 있게 됐다며 기대를 나타냈다. 러시아는 이제서야 미국의 다른 주요 교역 상대국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상징성’이다. 영국 에섹스대(University of Essex) 김병연(金炳椽·경제학) 교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시장경제국가의 지위가 갖는 상징적 효과”라고 말한다. 국제사회로부터 러시아가 정상적인 시장경제국가로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올해는 러시아가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포기하고 시장경제로 가는 개혁을 시작한 지 10년이 된다. 1992년 1월부터 러시아는 가격자유화와 무역자유화 국영기업 사유화 등을 시작, 시장경제로 가는 험난한 장정에 올랐다. 그동안 러시아 국민들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난생 처음 경험하는 경쟁, 실업, 늘어난 부정부패, 사회주의식 사회복지 붕괴, 빈부격차 등을 경험했다. 10여 년 동안 국민총생산(GDP)과 산업생산이 줄어들었고 화폐개혁과 외환위기로 인한 채무지불연기(모라토리엄) 사태를 맞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0년 만에 비로소 경제체제 변화를 위한 러시아의 노력이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러면 지금까지 왜 러시아는 미국으로부터 비시장국가 취급을 받아왔을까?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미국이 보기에 러시아 경제가 아직 완전한 시장경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올해 3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관련 청문회에서 러시아 측은 “이미 러시아 GDP의 86%를 민간기업이 창출하고 있으며 통화 태환성도 안정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측은 (특히 미국 재계에서는) “러시아의 부정부패와 독특한 사법제도는 공정한 경쟁의 규칙을 부인하는 국가들의 전형”이라고 반박했다.
러시아의 전신인 구 소련은 과거 냉전시대 미국으로부터 비시장국가가 아니라 아예 반(反)시장국가 취급을 당했다. 구 소련이 붕괴한 후에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 구 소련 국가들은 여전히 ‘비시장국가’로 남아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냉전이 끝났지만 경제관계에는 사실상 냉전시대와 달라진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러시아 등은 오래 전부터 미국과 EU에 구 소련과의 차별성을 들며 시장국 지위 부여를 요청해왔다. 그러나 미국은 올해 3월에서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에 독립국가연합(CIS) 국가 중 최초로 시장경제국 지위를 부여했다.
위대한 러시아 재건의 꿈
러시아가 시장경제로 가는 개혁의 길이 어려웠듯이 세계경제에 통합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는 여태껏 세계무역기구(WTO)에도 가입하지 못했다. 중국이 먼저 WTO 회원국이 되자 러시아의 발걸음도 바빠졌다. 그런데 미국과 EU로부터 시장경제국으로 인정받았으니 WTO 가입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마이크 무어 WTO 사무총장은 EU의 결정이 있자마자 “내년 중순 러시아의 WTO 가입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물론 러시아의 WTO 가입이 실현되기까지는 여전히 많은 장애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동안 세계 경제체제의 변방에 머물러 있던 러시아가 이제 세계경제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만은 확실하다.
푸틴 대통령은 크렘린궁과 워싱턴의 백악관을 잇는 전화를 통해 “우리는 러시아를 시장경제국가로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축하합니다”라는 부시 대통령의 말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표정한 그지만 아마도 마음속으로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외쳤을지 모른다.
집권 초부터 꾸준히 추진해온 친(親)서방 실용주의 노선이 드디어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이 꿈꾸고 있는 ‘위대한 러시아 재건’의 첫걸음을 내디딘 셈이다. 2000년 5월 푸틴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 서방은 긴장했다. 1999년 12월 갑작스럽게 사임한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의 뒤를 잇기 전까지 서방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정체에 대한 불안감도 있었지만 악명 높은 소련 비밀경찰인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의 이 조그만 사내가 전세계를 다시 냉전시대의 동서 대결구도로 몰아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우려 때문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어렵다지만 여전히 막강한 핵전력을 가진 군사대국 러시아 아닌가? 더구나 푸틴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지방정부의 권력을 중앙정부로 흡수하고 반대 언론을 탄압하는 등 권력집중화를 추진하면서 이러한 서방의 의구심은 더욱 커졌다. 다시 러시아에 독재정권이 등장해 서방을 위협하는 것은 아닐까?
지난해 미국에서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러시아와 미국 등 서방진영의 관계는 더욱 아슬아슬해졌다. 더구나 ‘힘에 의존한 외교’를 내건 강성의 부시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50여 명의 미국 주재 러시아 외교관을 ‘스파이’라며 집단 추방했다.
러시아는 똑같은 수의 미국 외교관을 맞추방했다. 미국은 1972년 구 소련과 맺은 탄도탄요격미사일(ABM)협정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했다. 그리고 러시아와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사일방어(MD)체제를 단독으로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세계는 이제 다시 신냉전시대로 돌아가는가?
그러나 이러한 서방의 (특히 언론의) 호들갑을 보면서 푸틴 대통령은 혼자 특유의 알 듯 모를 듯한 쓴웃음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애초부터 서방과 쓸데없는 신경전이나 소모적인 군사, 외교적인 대결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위대한 러시아의 재건’은 먼저 러시아의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는 이류국가”라고 선언했다. 국민의 다수가 빈곤에서 헤매고 있는데 핵무기가 있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그는 전임자 옐친 대통령과 달랐다. 러시아 개혁의 아버지 옐친은 민주화와 시장개혁을 고집스레 밀어붙였다. 물론 무리한 개혁으로 빚어진 부작용과 국민들의 원성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옐친 대통령 역시 기본적인 외교노선은 친서방정책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서방과의 관계를 위험한 대결 국면으로 몰아갔다.
1999년 NATO가 구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자 옐친 대통령은 “NATO의 확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섰다. 그는 심지어 “서방은 우리가 핵무기를 갖고 있다는 점을 잊고 있다”며 협박하기까지 했다. 서방진영은 기본적으로 친서방주의자면서도 때때로 예측하기 힘든 옐친 대통령의 행보에 불안해하고 피곤해했다. 서방은 옐친 대통령의 임기 말에는 이미 그를 ‘고집스러운 술주정뱅이 노인네’ 정도로 취급했다.
이것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옐친 대통령의 독특한 개인적인 성격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소련시절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더불어 세계를 양분하고 사회주의 진영을 이끌던 초강대국 소련에 대한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서방이 러시아를 무시한다고 느낄 경우 옐친 세대는 즉각적인 분노로 반응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1952년생인 푸틴은 달랐다. 1980년대 KGB 요원으로 동독에서 활약하면서 그가 지켜본 것은 사회주의 이념과 함께 쓰러져가는 거대한 ‘소련 체제’였다. 그는 ‘위대한 소련’에 대한 향수보다는 ‘몰락해가는 소련’에 대한 씁쓸한 기억이 더 강했다.
무명의 정치 신인인 푸틴 대통령이 2000년 3월 대선에 ‘위대한 러시아 재건’을 들고 나섰을 때 대다수 국민은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10여 년 만에 초강대국에서 ‘빈곤한 대국’으로 전락하는 동안 상처받은 자존심을 그가 회복시켜 줄 것으로 믿었다.
자존심보다는 실리를
그러나 푸틴의 ‘코드’는 일반 국민들의 정서와 달랐다. 그는 ‘자존심’보다는 ‘실리’를, ‘과거에 대한 미망’보다는 ‘현실’을 선택했다. 푸틴 대통령은 KGB 출신이기 때문에 선거 과정에서 러시아의 전통적인 보수세력인 군부와 군수산업계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이들은 푸틴이 당선되면 국방비를 증액하고 다시 군수산업에 대한 지원을 늘릴 것으로 믿었다. 더불어 자신들의 영향력도 소련 시절처럼 커지리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이들의 판단은 빗나갔다.
푸틴은 지난해 자신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세르게이 이바노프를 국방장관에 임명해 군개혁 임무를 맡겼다. 이바노프 장관은 푸틴 대통령의 KGB 시절 동료였다. 러시아 역사상 군 출신이 아닌 국방장관은 처음이다. 푸틴이 이바노프를 내세운 것은 군 출신 국방장관으로서는 군개혁을 밀어붙일 수 없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다.
군개혁의 핵심은 현재 120만명인 러시아군의 규모를 더 줄이고 궁극적으로는 아예 징병제를 폐지하고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소수정예의 군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많은 장성과 대령의 수도 대폭 줄인다.
푸틴 정부는 미국과의 핵전력감축 협상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결국 지난 5월 미·러 정상회담에서 현재 각각 6000기 정도 남아있는 양국의 공격용핵탄두 수를 앞으로 10년 동안 1700∼2200기 규모로 대폭 줄이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핵감축에 소극적인 미국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러시아로서는 언제 쓸지도 모를 핵탄두를 유지하기 위해 가뜩이나 부족한 국력을 낭비하는 것이 아깝기 짝이 없었지만 미국은 현재의 핵전력을 그대로 가지는 것이 군사력 우위를 지키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결국 러시아는 군축에 대한 국제여론과 명분을 등에 업고 미국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러시아는 올해 베트남 캄란만에 있는 해군기지와 쿠바에 있는 레이더기지를 폐쇄하고 러시아군을 철수시켰다. 경제 형편상 더 이상 해외 군사기지를 유지하기가 벅차기도 했지만 전세계를 무대로 한 미국과의 군사경쟁을 사실상 포기했다는 강력한 신호였다.
특히 쿠바 레이더기지는 냉전시대 미국을 겨냥해 만든 것이다. 더 이상 미국에 적대적인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미 신군사 독트린에서 러시아군의 작전지역을 ‘전세계’가 아니라 러시아와 동맹국(CIS지역)으로 한정시켰다.
물론 이러한 푸틴의 군개혁에 대해 군부와 공산당 등 야당은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추구하는 ‘위대한 러시아’는 소련과 같은 군사대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에 부시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미·러 관계는 일시적으로 경색됐지만 푸틴 대통령은 극적인 화해의 순간을 기다렸다. 지난해 미국 9·11 테러 참사는 기회였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이 주도한 대테러작전을 적극 지원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구 소련 지역이며 러시아의 앞마당인 중앙아시아에 미군의 주둔을 허용했다는 점이다.
역시 공산당이 들고 일어났고 국내 언론까지 가세해 집권 후 처음으로 여론조사에서 지지도가 떨어지는 상황을 맞았지만 푸틴 대통령은 요지부동이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이룰까”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치르면서 서방에서 푸틴에 대한 신뢰와 인기는 급상승했다.
푸틴 대통령은 왜 서방과의 관계개선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경제를 살릴 길은 서방의 지원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푸틴 정부가 들어선 후 러시아 경제는 급속도로 회복되고 있다. 10여 년 동안 계속돼온 마이너스 성장을 끝내고 1999년부터는 계속 3∼5%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푸틴의 업적이 아니다. 1998년 8월 외환위기로 러시아 루블화 가치가 순식간에 6분의 1로 폭락하면서 국제시장에서 러시아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진 것도 하나의 원인이지만 무엇보다도 석유 때문이다.
1999년부터 계속된 국제 유가 강세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은 제2의 산유국이며 석유수출국인 러시아의 경제가 저절로 좋아진 것이다. 러시아 경제에서 석유와 가스 등 천연자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전체 수출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석유 덕분에 최근 3년 동안 해마다 500억달러 이상의 무역수지 흑자를 올렸다. 그러나 이것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러시아는 예산을 편성하거나 경제계획을 세울 때마다 유가를 주요 기준으로 삼는다. 이러한 경제구조에서는 국제유가의 하락과 함께 러시아 경제도 다시 추락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경쟁력 있는 산업이라고는 철강과 석유화학 무기 등 몇 개 남아있지도 않다. 석유수출로 벌어들이는 달러로 1500억달러나 되는 외채를 갚고 산업에 투자하기는 벅차다. 결국 외국자본을 끌어들여 산업을 일으킬 수밖에 없으니 서방의 협력과 지원은 필수적인 것이다.
물론 국내의 투자여건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다. 아직도 공산당과 농민당 등 좌파는 외국인에게 토지 매매를 허용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부패와 관료주의도 여전하다. 푸틴 대통령은 이제 안정된 서방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국내 개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것이다.
최근 러시아에서는 푸틴을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자였던 고(故) 덩샤오핑(鄧小平) 주석에 비교하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과거 초강대국의 자존심을 버리고 서방의 신뢰와 지원을 얻어내 경제부터 재건하는 푸틴의 실용주의 노선이 ‘죽(竹)의 장막’을 걷어치우고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잘사는 게 최선’이라며 덩샤오핑이 내걸었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닮았다는 것이다.
등소평과 푸틴의 공통점
푸틴 대통령은 활발한 정상외교를 하면서 러시아를 방문한 외국 정상에게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꼭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집권 후 가장 먼저 러시아를 방문한 서방 지도자인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도 이곳에서 만났고, 5월 미·러 정상회담은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했지만 회담이 끝난 후 푸틴 대통령은 부인 류드밀라 여사와 함께 부시 대통령 부부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직접 안내해 도시 곳곳을 보여주었다. 그만큼 옛 제정러시아의 수도였던 이 도시에 대한 푸틴의 애정과 자부심은 대단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푸틴의 관계는 각별하다. 그는 1999년 총리가 되기 전까지 평생을 정보기관과 크렘린궁 등 음지에서 일했다. 공개적인 공직으로는 1990년대 초 KGB를 잠시 떠나 모교인 상트페테르부르크대 부총장과 고향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을 지낸 것이 유일하다.
집권 후 동향 출신들이 대거 정·관계의 주요 직위에 포진해 ‘페테르 마피아’라는 비난 여론이 따갑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천도설까지 나오는 판이지만 푸틴은 신경 쓰지 않는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어떤 도시인가? 러시아 역사상 첫 계몽군주인 표트르 대제가 18세기 초 북국의 늪을 메우고 유럽의 도시를 본따 건설한 인공도시다. 표트르 대제가 누군가? 유라시아의 대국이면서도 유럽의 변방으로 무시당하던 러시아를 개방과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서구화하려던 인물이다.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것은 조금이라도 유럽과 가까운 곳에 ‘유럽을 향한 창’을 열기 위해서였다.
표트르 대제는 신분을 감추고 굴욕을 감수하면서 직접 유럽 곳곳을 다니면서 조선술 군사학 등 유럽의 선진문명을 배워 러시아에 심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추구했던 근대화는 200여 년 후인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좌절됐고 러시아는 70년 동안의 사회주의 실험에서 실패하고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푸틴이 등장한 것은 단지 역사의 우연일까?
푸틴 대통령은 마치 300여 년 전의 표트르 대제처럼 러시아를 고립 속에서 끌어내 세계의 주류국가로 부상시키려는 도전을 시작했다. 러시아의 국가문장(紋章)은 과거 제정러시아가 사용하던 쌍두독수리다. 70년 동안의 상징이던 낫과 망치를 던져버린 독수리, ‘러시아의 비상(飛翔).’ 이것이 21세기 러시아의 ‘차르(황제)’ 푸틴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