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회택 차범근 허정무…. 히딩크 이전의 한국대표팀 감독은 스타플레이어 출신이었으며,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유능한 기능인이었다. 반면 히딩크는 이방인이고, 위기의 순간에 지휘봉을 잡았다. 그런데도 히딩크는 역대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필자는 히딩크가 기능인이 아니라 경영인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고 분석한다. 히딩크의 리더십과 노하우는 축구의 범주를 넘어 향후 한국사회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기본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지도자다. 기본기가 충실해야만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옳은 판단이다.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면서 그동안 우리가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수들을 지도하는 것도 뛰어나지만 상대팀을 분석하는 능력도 탁월하다. 국내 지도자들보다는 좀더 과학적이다. 데이터에 근거한 전술 도입을 중요시하는 자세는 한국대표선수들이 한 단계 성숙할 수 있는 훈련 방법이다.
또 한 가지는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이 가진 생각을 꿋꿋이 밀고 나간다는 점이다. 모든 일에 신념을 가지고 임하는데, 그것이 세계적인 명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라운드를 벗어나서는 선수들에게 별다른 터치를 하지 않는다. 프로는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는 의도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의 심리상태를 정확히 읽어내는 데 천재성이 있는 것 같다. 어린 선수들이 조금 튄다 싶으면 길들이기를 하는데 이것이 히딩크식 컨트롤 방식이라고 보면 된다. 리더는 항상 모범을 보여야 하고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야 한다는 점에서 그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내가 부상으로 쉬고 있을 때 부상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선수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를 하지 않고 그라운드에 나섰을 때 그 선수의 몸 상태를 보고 평가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히딩크 감독과 한국 지도자들과의 차이점을 솔직히 말한다면 그는 굉장히 긍정적이고 낙관적이다. 한국 지도자들은 하프타임 때 플레이가 맘에 들지 않은 선수를 향해 눈물이 찔끔 날 만큼 질타를 한다. 물론 정신 바짝 차리라는 의도이며 이것이 효과를 내 후반에 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선수들은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 결국에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장담할 수 없다.
히딩크 감독은 전반에 일어난 전체적인 포인트를 한두 개 잡아서 지적할 뿐이다. 개인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11명이 같이 들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수비 위치를 설명하면서 서로에 대한 커버플레이 등을 곁들여 얘기하는 정도다. 이 정도만 해도 대표선수라면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이 해야할 역할을 파악한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이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지도자라 할 수 있다. 서양인이 동양문화나 정서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텐데 그나마 잘 적응해나간 점을 높이 사고 싶다.”
한국축구의 ET 히딩크
“개인적으로 히딩크식 전략의 가장 큰 핵심은 그가 우리 선수들의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준 점이 아닐까 싶다. 선후배의 위계질서나 상명하복의 엄격한 구조를 허물어 선수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한 점일 것이다. 경기를 보고 있으면 선수들의 자율성 순발력 상상력 등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여, 아예 선수들의 영혼이 푸른 잔디 위에서 펄펄 날아다니는 듯하다. 예전에 선수들의 어깨에 얹혀 있던 모종의 억눌림 조급증 등은 말끔히 사라졌다. 이제 우리는 한(恨)의 축구에서 벗어난 게 틀림없다…. 무엇보다도 한 개인의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현시키키 위해서는 그 사람의 영혼을 자유롭게 풀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가능성과 희망의 총량이 얼마나 커질까.”
“축구에는 3A원칙이 있다. 3A란 정확한 예측(anticipation)-예측에 따른 전술의 변화(adaptive)-빠르게 행동하는 것(act fast)이다. 상대팀에 대해 정확히 분석하고 여기서 나온 데이터를 토대로 4-2-4, 4-3-3 같은 포메이션을 개발해 채택한다. 그리고 상대팀보다 빠르게 공격해야 승리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축구에서 스타플레이어인 공격수-미드필더-수비수가 모두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충분히 소화해야 하듯이 기업경영도 마찬가지다. 5~10년 뒤 기업환경 변화를 예측하고 이에 맞게 빠르게 결정을 내리는 것이 CEO의 임무다.”
“정말 놀라운 것은 한국인들은 훌륭한 리더와 함께라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성취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축구대표팀은 최근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괄목할 만큼 성장한 실력으로 한국국민에게 감동과 찬사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한국 축구선수들의 능력이나 기술, 승리에 대한 강한 의지는 히딩크 감독이 만든 것이 아니다.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이 자신의 능력과 기술을 최대한 발휘하고 승리에 대한 의지를 굳힐 수 있도록 선봉에 나섰던 것 뿐이다.”
“공은 누군가 오기를 바라는 방향으로는 절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축구를 통해서 배웠다. 그것은 나의 인생에 많은 도움을 줬다. 사람은 때때로, 특히 대도시에서, 소위 올바르다는 말을 듣는 존재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대축구에서 축구감독은 ‘축구기술자’인가 아니면 ‘축구경영자’인가. 트루시에 일본대표팀 감독의 어시스트 겸 통역을 맡고 있는 디바디는 “트루시에에게는 현대축구의 90%는 팀관리나 심리학 등 매니지먼트다. 훈련은 10%에 불과하다. 그는 선수들에게 ‘당신들은 인간이며 성인이다. 위대한 선수가 되려면 좋은 인간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휴머니즘과 교육은 모든 것의 열쇠”라고 말한다.
히딩크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그는 이 부분에 대해선 거의 확신범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팀을 경영한다. 그는 단순한 ‘축구기술자’가 아니다. 6월5일 로이터통신은 “한국의 히딩크 감독은 축구기술만 아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축구 전체를 아우르는 매니저”라고 보도했다. 국내 언론들도 ‘히딩크의 리더십을 배우자’며 히딩크의 지도력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이런 면에서 역대 한국대표팀 감독인 이회택-차범근-허정무 감독은 축구기술자 쪽에 무게가 쏠린다. 그들은 대한민국 최고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다. 당연히 축구에는 도사다. 대한민국에서 축구를 제일 잘 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국가대표 감독이 돼야 한다. 뭐가 이상한가. 한국 축구팬들에게 이러한 접근방식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물어보자. 히딩크 감독은 현역시절 네덜란드 최고 스타플레이어였던가. 아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네덜란드 국가대표 감독이 됐는가. 바로 이런 시각에서부터 한국축구와 유럽이나 남미의 선진축구는 차이가 나기 시작한다. 2002한일공동 월드컵에 참가한 32개국 감독 중엔 현역시절 스타출신도 있지만 대부분은 현역 때 별로 이름을 떨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국가대표 감독이 됐을까.
그것은 간단하다. 그들은 선수로서는 성공 못했는지 모르지만 ‘축구경영자’로서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사람들이다. 최고경영자(CEO)가 반드시 최고의 기술자일 필요는 없다. 최고경영자는 조직의 구성원들을 하나의 팀으로 묶어 최고의 힘을 발휘하게 하면 된다. 한마디로 ‘사람관리’에 도사가 돼야 한다. 사람관리엔 축구실력보다는 어쩌면 심리학이 더 필요할지 모른다. 마침 히딩크는 심리학책을 잘 본다. 얀 룰프스 기술분석관에 따르면 히딩크는 폴란드와의 첫 경기를 앞두고 축구심리학 책을 탐독했다고 한다. 선수들에게 어떻게 하면 자신감을 심어줄 수 있을까 고심했다는 것. 그래서 그는 심리전의 대가다. 경기중 불리한 판정에 대해선 물병을 걷어차는 등의 격렬한 항의로 심판에게 압박감을 준다.
6월4일 폴란드와의 경기 때도 폴란드선수가 설기현에게 심한 태클로 파울을 하자 “제기랄(FUCKing), 저건 퇴장감이야” 하며 물병을 걷어차고 테크니컬존을 벗어나 격렬하게 항의했다.
최성용은 “히딩크 감독은 모든 것을 심리적인 면까지 생각한다. 꼭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코미디언 이주일씨의 변심
히딩크는 500일 만에 한국국가대표 23명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한국선수들은 히딩크가 지시한 대로만 하면 뭔가 이뤄진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파워 프로그램을 통한 체력강화’와 ‘강팀만을 상대로 한 경험축적’을 통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크게 늘었다. 이영표는 프랑스와의 평가전에 앞서 “프랑스선수도 사람이다. 다리가 세 개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내 개인기가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든다”고 말한다.
히딩크는 어떻게 그 짧은 기간에 대한민국 최고의 선수 23명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히딩크의 영입에 앞장서 반대했던 병상의 코미디언 이주일씨는 “난 거액을 들여 히딩크 감독을 영입한다고 했을 때 강력하게 반대했다. 명장이지만 우리 선수들과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보니 내 판단이 틀렸다. 정말 히딩크는 특별한 지도자”라고 말했다. 울산현대의 김정남 감독은 “베스트11 선수들은 자연히 감독을 따르게 돼 있다. 문제는 그 뒤에 있는 선수들이다. 이들은 감독에게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리거나 심지어 팀이 곤경에 빠지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다. 그래야 자신이 출장할 수 있으니까”라며 축구감독으로서 선수관리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이런 면에서 히딩크에게 베스트11은 없다. 그는 늘 “난 월드컵을 베스트23으로 준비한다”고 말할 뿐이다.
고독한 마이웨이 축구인
국내 감독들은 이러한 히딩크에 대해 “빨리 베스트11을 정해 전술훈련을 반복해야 한다”고 질책했다. 그러나 히딩크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상대에 따라 23명의 선수 모두를 골고루 맞춰 쓴다. 공세로 나설 때-역습을 노릴 때-문을 잠글 때 등 그 상황에 따라 거기에 가장 적합한 선수를 뽑아 쓸 뿐이다. 가령 한국팀 공격수인 황선홍-최용수-차두리-이천수-최태욱-안정환 중에서 붙박이로 출전하는 선수는 없다. 상대에 따라 그 조합이 수시로 바뀐다. 그러다보니 선수들은 늘 긴장한다. 언제 나갈지 모르니 늘 몸과 마음을 준비해 둬야 한다. 그리고 선의의 경쟁이 일어 늘 적당한 긴장감이 있게 된다. 히딩크 감독은 “베스트멤버는 통상적인 선수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전략에 따라 구성한다”고 말했다.
한국팀 김현태 코치는 “히딩크의 이런 지도를 거치며 한국팀은 선수층이 말할 수 없이 두터워졌다. 이젠 누구 한명 없어도 조금도 표시가 나지 않는다. 자연스레 선수들은 더욱 긴장하게 되고 그 때문에 전체적인 기량이 향상되었다”고 말한다. 신문선 SBS 해설위원도 “국내 지도자는 베스트11 선정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히딩크는 선수들의 능력을 정확히 평가해 개발하고 상대에 따라 전술과 선수운용을 달리해 효과를 보고 있다. 4대1로 이긴 스코틀랜드와의 평가전에서도 예전 같으면 체력이 강한 유럽 수비수들을 의식해 장신의 공격수를 선발 출장시켰겠지만 이천수 박지성 등을 이용해 한국선수들의 장기인 민첩성과 순발력으로 승부했다”고 분석했다.
월드컵 경기는 격렬하다. 한 경기가 끝나고 나면 부상선수 한두 명은 반드시 나오게 돼 있다. 과거 한국대표팀은 이럴 경우 대책이 없었다. 베스트 11명과 그 나머지 벤치에 있는 선수들간의 경기력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이영표가 개막 직전 부상을 당했어도 폴란드전에서 이을용이 그 자리를 훌륭히 메워준 것이 그 좋은 예다. 선수간의 실력 차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날 컨디션에 따라 출장 여부가 결정될 뿐이다.
히딩크가 처음부터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체력과 스피드’다. 기술은 짧은 시간에 향상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가 택한 것은 현실적으로 향상이 가능한 ‘체력과 스피드’다. 히딩크는 이것을 밑바탕으로 전술훈련을 병행했다. 스코틀랜드의 포크츠 감독은 “한국선수들의 강한 체력과 스피드에 벤치에 앉아있는 나조차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고 토로했다. 한국-폴란드전을 본 네덜란드의 한 기자는 “한국선수들의 체력은 유럽 빅리그 최상급 수준이었다. 마치 태엽 인형처럼 전혀 지치지 않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기업으로 말하면 체력은 튼튼한 재무구조와 같다. 재무구조가 튼튼해야 ‘공격 경영’을 할 수 있다. 히딩크는 원래 공격축구의 신봉자다. 그러나 그것은 네덜란드팀이나 레알 마드리드 같은 세계적인 스타들이 있는 팀을 이끌 때의 얘기다. 히딩크는 한국팀을 맡고 나서 ‘수비 우선의 축구’로 돌아섰다. 그는 그만큼 현실주의자다. 그는 모든 선수에게 상대가 공을 잡았을 때는 수비수가 되고, 우리가 공을 잡았을 때는 공격수가 되라고 한다. 한마디로 ‘토털사커’다.
아무리 공격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더라도 수비를 못하면 히딩크의 눈밖에 난다. 개인기가 좋은 안정환이나 윤정환을 한때 꺼려했던 것도 바로 이 수비력 부족과 체력 부족 때문이었다. 안정환을 “TV가 만든 스타”라고 하고, 윤정환을 “팀이 J리그 2부로 떨어졌는데 거기엔 플레이메이커인 윤정환의 책임도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하며 탐탁지 않게 생각한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히딩크는 경영목표인 월드컵 16강을 달성하기 위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맞춰 조금도 흔들림 없이 인사(선수선발)를 하고 그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줘 동기를 유발했다. 또한 잘못된 관행(연고주의)을 없애고 능력에 맞는 대우(멀티플레이어 우대)를 하고 실적(그라운드 안에서 얼마나 어떻게 뛰나)으로 평가해 조직원들의 불만 소지를 없애고 일방적 상하지시 관계로 이뤄진 의사소통 시스템을 쌍방소통 관계로 바꿨다.
히딩크의 지도방법은 인터벌훈련으로 요약된다. 히딩크는 피로회복 속도를 중시한다. 그는 이를 위해 다양한 통계와 측정기구를 사용했다. 그가 레이먼드 베르하이옌을 통해 도입한 파워프로그램은 20m 왕복달리기나 미니게임을 통해 심폐기능을 단련하는 것이다. 이중에서도 일종의 왕복달리기인 셔틀런은 일본 프로팀에선 이미 보편화된 것이며 최근 전남 등 국내 프로팀에도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녹음된 테이프 신호(일명 삑삑이)에 맞춰 10m 간격으로 놓여있는 콘(삼각뿔)을 터치하고 돌아오는 형식으로 갈수록 뛰는 속도가 빨라지는 반면 쉬는 시간은 짧아진다. 이것은 선수들의 심장과 허파가 축구리듬에 맞춰 적응하게끔 고안된 것이다.
보통 120회가 넘어가면 뛰는 속도는 시속 18㎞에 육박하는데 5초의 휴식시간 동안에 심박수를 빨리 떨어뜨리지 못하면 다시 뛰는 것이 불가능하다. 체력훈련은 셔틀런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셔틀런이 끝나면 곧바로 4-4 혹은 5-5 미니게임에 들어간다. 이것은 왕복달리기로 배출된 젖산을 풀어주는 운동이다. 이것도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경기당 8∼10분씩, 심할 땐 7, 8회까지 계속된다. 이 게임도 횟수를 더할 때마다 중간 쉬는 시간이 짧아진다. 3월 스페인 훈련 때는 10분 게임후 휴식시간이 4분이었지만 5월 서귀포훈련에선 1분으로 줄었다.
히딩크는 선수들에게 맵고 짠 음식은 입에 대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히딩크는 선수들이 열량이 높은 과자나 초콜릿을 먹고 있으면 그 자리서 빼앗아 땅에 던져버리거나 밟아버릴 정도로 엄격하다. 그 대신 근력 강화에 좋은 쇠고기 돼지고기 콩나물 시금치 등을 권한다. 한국식의 짜고 매운 탕 종류는 못 먹게 하고 아침에 된장찌개, 점심에 미역국 등 비교적 담백한 것만을 허용할 뿐이다.
히딩크는 월드컵 개막 사흘 전이자 첫 경기 일주일 전인 지난 5월28일 경주 캠프에서 선수들에게 뜻밖에 하루 휴가를 주었다. 옛날 같으면 깜짝 놀랄 일이었다. 선수들은 한동안 당황했고 기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주위 분위기는 폴란드와의 첫 경기를 앞두고 비장함과 긴장이 고조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전 한국감독 같으면 필요하다고 생각해도 그 시점에서 휴가 주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휴식은 할 일을 안하는 것으로 여기는 한국적 사고방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98프랑스월드컵 때 현지 언론이 훈련하고 나면 하루종일 호텔방에서 나오지 않는 한국팀을 일컬어 “놀 줄 모르는 절간의 스님 같은 팀”이라고 비아냥댔을 때와 비교해볼 때 격세지감이 든다.
미국과의 대전을 하루 앞둔 6월9일 히딩크 감독은 6월1일 경주 시민운동장에서 훈련을 하다 부상한 이영표를 직접 데리고 경주 화랑교육원 운동장에 나가 강도 높은 트레이닝을 시켰다. 가벼운 달리기로 몸을 푼 이영표는 주로 좌우 터치라인을 파고든 뒤 문전으로 볼을 올리는 인터벌훈련으로 약 1시간10분간 땀을 흘렸다. 히딩크 감독은 이날 이영표에게 심박수를 체크하는 가슴띠와 손목시계를 채우고 훈련을 시켜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를 최종 확인했다. 히딩크는 훈련이 끝난 뒤 “이영표는 포르투갈전에나 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이영표의 회복속도가 생각보다 빨라 오늘밤까지 지켜본 뒤 결과가 좋으면 미국전 엔트리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히딩크는 부상선수의 출전 여부도 심박수 등을 체크해 과학적으로 철저하게 파악한다. 그동안 국내 감독들은 선수들의 컨디션이 어떤지를 주관적으로만 판단해왔다.
그러나 히딩크는 훈련중에 주기적으로 심박수를 체크, 그 변화에 따라 선수들의 컨디션 상태를 파악한다. 심박수는 선수들이 100%로 훈련하고 있는지 아니면 꾀를 부리고 있는 것까지 체크할 수 있어 어떤 선수가 꾀를 부리면 과감히 주전에서 빼기도 했다. 물론 ‘베스트11’의 결정도 철저히 과학적인 데이터에 따른다. 또 올초부터는 훈련 강도를 주기적으로 높였다 낮췄다 하면서 전력을 상승시키는 ‘5일 주기화 원리’를 이용해 월드컵 본선 때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맞춰왔다. 월드컵 개막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5월16일 스코틀랜드전, 21일 잉글랜드전, 26일 프랑스전 등 5일 간격으로 실전을 한 것이다. 이것은 6월4일 폴란드전, 6월10일 미국전, 6월14일 포르투갈전의 주기를 염두에 둔 평가전이었다. 전문 물리치료사를 통해 부상당한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관리, 부상회복 속도를 높인 것도 그렇다.
히딩크는 스코틀랜드를 4대1로 이기고 1박2일의 짧은 휴가가 끝난 5월19일 서귀포훈련장에서 갑자기 주치의 마사지사 등 20여 명의 모든 스태프를 집합 시켰다. 이것은 히딩크 부임 이래 처음 있는 일. 히딩크는 스코틀랜드 대승과 휴가 이후 들뜬 분위기를 어떻게 가라앉힐지 고민하다가 이들을 불러모은 것이다. 히딩크는 이날 근엄한 표정으로 “선수들에게 요즘은 신경이 예민해지고 긴장감이 절정에 이르는 시기다. 부디 긴장을 늦추지 말고 선수들을 위해 빠짐없이 신경을 써라. 물론 월드컵 성적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다함께 최선을 다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곧이어 벌어진 훈련장에서 운동장 밖으로 나간 공을 지켜보던 팬이 던져주자 “도대체 왜 팬이 축구공에 손을 대느냐. 스태프는 어디 갔느냐”며 고래고래 호통을 쳤다. 훈련이 끝난 후엔 선수들에게 “자만하지 말고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하자”고 말했다.
# 리더쉽 12 철저한 현실주의자
히딩크는 “한국선수들은 빠른 스피드를 지닌 데다 오른발 왼발을 고루 잘 쓴다. 그러나 한국선수들의 개인기가 아무리 좋아져도 유럽 남미 선수들처럼 향상될 수는 없다. 이것은 유소년축구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일이다. 물론 전세계 어디를 봐도 한국선수들처럼 투지 넘치는 선수들은 없다. ‘반드시 이기겠다’는 투지를 정말 높이 산다”고 말했다. 핌 베어벡 수석코치는 “히딩크는 지독히 현실적인 사람이다. 만약 16강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서울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2000년 12월 대한축구협회에서 히딩크를 국가대표감독으로 영입키로 한 뒤 축구협회 가삼현 국제부장이 히딩크를 처음 만났을 때 히딩크는 가부장에게 물었다. “만약 내가 선수들에게 아무런 설명 없이 지금 당장 모두 나무에 올라가라 하면 선수들이 아무런 불평 없이 나무 위에 올라갈 수 있겠는가”라고. 이에 가삼현 부장이 “아마 그럴 것이다”라고 하자 히딩크는 “좋은 전통”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히딩크가 대표팀을 맡은 뒤 한국축구는 철저한 수비축구를 고집했다. 골을 먼저 먹지 않아야 공격도 해볼 수 있다는 지론이다. 공격력이 좋은 이영표보다는 수비력이 좋은 이을용을 왼쪽 미드필더로 쓰는 것이나 수비형 미드필더에 수비력에 비해 공격력이 떨어지는 김남일을 중용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그래서 그의 수비전술은 안전제일주의다. 아군의 공격대형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공격하다가 끊겨 역습당하는 것보다 우리 공격대형이 갖춰질 때까지 후방에서 공을 돌리는 것을 선호한다.
히딩크 축구는 언뜻 보면 옛날 차범근 허정무 축구보다 훨씬 느리고 백패스가 많다. 왜 그럴까. 예전에 한국팀은 무조건 앞으로 빠르게 나가는 것만을 중요시했다. 그러다보니 나중엔 제풀에 지쳐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서두르다가 상대편에 공을 빼앗겨 역습을 당해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이다. 겉만 빠르고 그럴 듯했지 실속은 없었다. 히딩크는 백패스에 대해 전혀 뭐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앞이 막히면 백패스를 하라고 권장한다. 무리하게 전진패스를 하다가 빼앗기는 것보다는 백패스를 해서라도 우리가 공을 가지고 있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농구경기처럼 슬슬 후방으로 돌리다가 빈틈이 보이면(물론 이것도 우리팀 선수가 활발한 움직임으로 공간창출을 해서) 번개같이 2-1패스, 주고 빠지는 월패스, 오버래핑, 스위치 플레이 등으로 속공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슬로 슬로하다가 퀵하는 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다. 유럽축구에서 보는 스타일과 거의 비슷하다. 히딩크는 “공을 무리하게 빼앗으려 하지 말고 쫓아가는 시늉만 하다가 우리 수비지역까지 일찌감치 내려가서 수비하고 다시 전진해 올라가면서 압박하라고 지시한다. 스리백과 수비형 미드필더는 자리를 굳게 지켜 최소한 4명이 수비지역을 벗어나지 말라. 그런 가운데서도 30m 공수간격은 유지하라”고 말한다.
황선홍은 “멀티플레이어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데 내가 보기에 히딩크 감독은 포지션의 전문화를 더 강조한다. 이것 저것 하려 들지 말고 한 가지만 충실히 하라는 것이다. 수비형 미드필더가 공을 빼앗을 때도 그로 하여금 공격에 나서지 말고 템포만 조절하라는 것이 그 좋은 예다. 내가 스트라이커로 나설 때에도 좌우 사이드로 나가지 말고 또 많이 움직이지 말고 페널티에어라인 주위에서 위치를 지키며 한번에 크게 움직일 것을 주문한다. 이번 서귀포 훈련을 통해 숨이 턱밑까지 찼다고 느껴지는 데도 계속 뛸 수 있었던 것에 내 스스로 놀랄 때가 많았다”고 말했다.
홍명보도 “히딩크 감독의 주문은 함부로 태클에 들어가지 말고 상대 공격수를 끝까지 따라가며 수비하는 러닝 디펜스를 하라는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공격으로 나설 때도 수비형 미드필더 이상으로 올라가지 말 것을 주문한다. 그럴 땐 백업으로 들어오는 남일이와 호흡이 잘 맞는다. 이번 서귀포의 과학적 훈련 덕에 개개인이 자신의 몸상태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송종국은 “히딩크 감독이 나에게 요구하는 임무는 스피드다. 단순히 빨리 뛰는 게 아니라 경기 운영을 빠르게 가져가라는 뜻이다”고 말했다. 윤정환은 “내겐 팀전체의 밸런스를 생각하라고 했다. 재능을 숨기지 말고 최대한 발휘하고 좀더 책임감을 가지고 경기를 풀어나가면 널 쓰겠다고 말했다. 다른 해외파와 마찬가지로 체력과 컨디션이 정상에 오르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히딩크는 큰 대회를 준비하면서 어느 시기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5월2일 제주훈련을 앞두고 선수단에 한발 앞서 코치진을 데리고 훈련장 후보지인 서귀포 강창학구장과 동부구장을 찾아 잔디상태, 주변환경 등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그는 훈련장은 첫째 선수들의 부상을 방치할 수 있어야 하고, 둘째는 그라운드 잔디 상태가 좋아야 하며, 셋째는 훈련의 집중도를 높일 수 있는 주변환경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히딩크는 제주 서귀포 동부구장은 잔디가 웃자라고 끈끈하게 뭉쳐 있는 데다 땅이 딱딱해 부상 위험이 높다고 말하고 다른 곳을 선택했다.
에메 자케 전 프랑스대표팀 감독은 “히딩크는 네덜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 세계축구의 흐름을 훤하게 꿰뚫고 있는 대단한 지도자다. 아주 수준 높은 축구를 구사한다. 한국축구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히딩크 감독을 무조건 신뢰하고 한국축구 내부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 히딩크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아는 지도자다. 그의 훈련법이 한국에 좋은 효과를 줄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팀을 맡았을 때부터 월드컵 기간을 하나의 전략적 연장선상에 놓고 한국축구를 경영했다. 평가전 부진으로 비난 여론이 빗발칠 때도 그는 체력훈련을 강행했고 이 선수 저 선수를 투입하면서 시험을 계속했다. 언론이 이를 비난했을 때도 그는 아는 체 모르는 체 아랑곳없이 자신의 계획을 밀고 나갔다.
이용수 기술위원장은 “훈련의 완급을 조절하면서 개막 직전까지의 일정을 톱니바퀴처럼 조정해놓은 걸 보고 역시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박항서 코치는 “히딩크 감독은 계획적이고 치밀한 사람이다. 선수들이 선의의 경쟁을 하도록 유도하고 동기부여도 잘한다. 특유의 카리스마와 리더십으로 큰 규모의 축구대표팀을 관리해 나가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성격은 매우 적극적이고 급하다. 다혈질적이기도 한데 뒤끝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평가전 등 성적에 구애받음 없이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는 훈련계획을 묵묵히 밀고 나갔다.
비장의 카드 ‘파워프로그램’
히딩크가 부임한 2001년 1월 이후 3월까지 1단계 훈련은 ‘패스’였다. 한국선수들은 상대의 볼을 가로챈 뒤 찬스가 아닌 상황에서도 무리한 패스를 시도, 공격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경향이 있다. 한마디로 불필요한 볼소유가 많다. 히딩크는 3개월간 패스의 강약 조절법과 볼트래핑 훈련을 중점 실시했다. 히딩크는 2001년 4월부터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대회 직전까지는 2단계 훈련으로 선수들에게 포지션별 역할과 임무를 명확히 인식시켰다. 주로 7-7게임을 통해 수비와 미드필드, 포워드진이 각자 위치에서 수행해야 할 임무를 깨우치게 했다. 자기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절제된 움직임과 수비임무, 즉 팀플레이를 주문했다.
히딩크는 2001년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을 위해 훈련소집을 했을 때 3단계훈련으로 웨이트트레이닝에 중점을 두었다. 각자 개인의 약한 부위를 근력으로 보완하는 훈련을 했으며 각 개인들에게 체력강화 프로그램을 따로 주어 대표팀 소집이 없을 때도 각자 그 프로그램에 따라 근력보완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2001년 9월 4단계 훈련부터는 이젠 어느 정도 선수들의 근력이 보완됐다고 보고 파워프로그램을 도입했다. 3-3게임이나 기구 없이 한 발로만 하는 훈련, 왕복달리기(셔틀런) 등이 바로 그것이다. 11월, 12월 평가전을 앞두고도 지속적인 파워트레이닝을 실시, 경기결과보다는 체력을 향상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이때부터 국내 일부 지도자들은 빨리 베스트멤버를 구성해 전술훈련을 반복해야 한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몸이 피로한 상태에서 한편으로는 강팀과 평가전을 갖고 또 한편으로 체력훈련을 강행하면 부상자만 양산될 뿐이라고 비판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2002년 1월 5단계 훈련부터 히딩크는 체력훈련과 전술훈련을 동시에 하기 시작했다. 체력훈련은 주로 축구선수에게 요구되는 민첩성과 순간 스피드, 유연성에 관한 것이다. 전술훈련은 상대공격수가 원톱일 때 4백, 투톱일 때 3백시스템 등 상황에 따른 다양한 전술훈련을 실시했다. 이 훈련에서 선수들은 어떻게 경기를 풀어나가는가 하는 경기운영 능력을 배웠다. 이러한 가운데 2월 미국골드컵대회에서 성적이 좋지 않자 일부 언론을 비롯한 국내 축구인들의 히딩크 비난이 최고조에 달했다. 심지어 히딩크 사임론까지 거론됐다.
그러나 히딩크는 특유의 유머스러운 화법과 ‘나의 길을 가련다’는 고집으로 계속 자신의 프로그램에 따라 밀고 나갔다. 마침내 2002년 4월 터키와의 평가전에서 훈련성과가 확연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터키전은 그동안 훈련해왔던 선수들의 절제된 움직임, 공수 간격유지, 자연스러운 압박 등이 돋보인 경기였다. 선수들은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역할을 잘 이해하게 됐고 움직임 또한 무조건 미친 듯이 뛰는 것에서 생각하며 뛰는 ‘절제형 플레이’로 바뀌었다. 이것은 5월16일 스코틀랜드와 가진 평가전에서 더욱 세련되게 나타났다.
한국 국민들이 온통 16강에만 매달리고 있을 때 히딩크는 오직 ‘업그레이드’만 생각했다. 16강은 그 다음 문제라는 게 그의 소신이다. 그는 1년4개월동안 한국축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는 데만 온 힘을 쏟았다. 히딩크는 월드컵을 한 달 남긴 상황에서야 비로소 실질적인 전술훈련에 돌입했다. 월드컵 한 달 전까지 그는 오로지 선수들 체력과 전술이해도를 높이는 데 진력했다. 홍콩 칼스버그컵대회에서 노르웨이에 2대3으로 진 이래 2001년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프랑스에 0대5로 지고, 또 그 다음 체코와의 평가전에서 0대5로 지자 언론에서 히딩크의 별명을 ‘오대영’으로 붙였다. 히지만 그는 “경기결과에 창피해할 필요는 없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겠다. 선수들의 자질은 훌륭하다. 난 선수들이 몰랐던 부분을 조금씩 깨우쳐줄 뿐이다”고 선수들을 격려했다.
2002년 2월 미국 골드컵대회에서도 저조하자 히딩크 회의론, 감독교체론까지 나왔지만 히딩크는 “월드컵 준비과정일 뿐이다. 지더라도 강팀과 계속 경기해야 한다. 나도 한국팬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승수를 쌓고 싶으면 네팔이나 방글라데시 같은 팀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월드컵 무대에서 첫승을 바란다면 그 같은 속임수를 쓸 수 없다. 강팀을 상대로 계속 실전훈련을 해야 한다”며 흔들리지 않았다.
축구인들의 ‘히딩크 흔들기’
박종환 감독 등 국내 일부 축구인들은 “유럽선수와 한국선수는 다르다. 유럽선수들은 대회 한 달 전에만 모여도 충분히 전술이나 조직을 소화해낸다. 그러나 한국선수들은 그게 안된다. 빨리 위치에 따라 두 배수를 뽑아 끊임없이 반복훈련을 해야 한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축구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히딩크 감독은 끊임없이 선수들을 교체하고 있지만 한국선수는 모두 거기서 거기다. 그날 컨디션에 따라 모습이 다를 뿐이다. 월드컵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언제까지 선수들 테스트나 하고 체력훈련이나 하고 있을 거냐”며 골드컵 성적 부진에 대해 비판했다.
그러자 히딩크는 “이번 골드컵에서 밖으로 드러난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경기 내용면에서는 한국이 항상 우위에 있었다. 많은 유럽전문가들도 골 결정력문제를 빼놓고는 모든 면에서 한국이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제 남은 것은 다 이겨놓은 경기를 강탈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수십년간 실패한 프로그램으로는 16강에 갈 수 없다. 결코 쉬운 길로 가지 않겠다. 강인한 체력이 곧 실력이다. 현재 한국팀에 적용하고 있는 체력 프로그램은 1998년 네덜란드팀에 적용해서 큰 효과를 본 것이다. 당시 네덜란드팀은 후반 25분부터 체력적으로 상대를 압도했다. 3월 유럽전지훈련에서도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병행하겠다”고 분명히 했다.
왜 히딩크는 체력훈련에 매달렸을까. 그것은 간단하다. 축구수준이 떨어지는 한국으로선 지금보다 ‘더 많은 움직임과 더 심한 압박’만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은 예선전 없이 본선에 올랐다. 유럽팀들은 클럽경기가 5월까지도 계속된다. 그만큼 체력적으로 준비가 돼 있다. 또한 한국의 6월 날씨는 습기가 많고 후텁지근하다. 부상자가 속출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히딩크는 꿈쩍 않는다. “훈련도중 다치는 건 어쩔 수 없다. 부상이 두려워 계속 소극적으로만 훈련할 수는 없다. 우리 목표는 6월이다. 그때에 맞춰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3월 유럽전지훈련에서 히딩크가 매긴 3월 현재 한국의 체력점수는 스피드 80점, 지구력 60점, 파워 50점. 히딩크는 “98프랑스월드컵에서 네덜란드가 유고 아르헨티나를 연파할 때 터진 골은 상대가 지쳐 운동량이 떨어지는 후반이었다”고 말했다. 히딩크는 “나의 목표는 물론 16강이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나의 최종목표는 한국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것이다. 축구에 대해선 내 방식이 있다. 난 누가 뭐래도 내 방식을 밀고 나가겠다”고 말했다. 히딩크는 2001년 1월 부임 때 “선수단 내에서의 룰은 긴장유지를 위해 꼭 필요하다. 룰을 잘 따라줄 때 나는 선수들에게 매우 자상하고 점잖은 지도자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냉정하게 대처하겠다”고 경고했다.
히딩크는 1996년 유럽선수권대회 때 천방지축으로 소문난 다비즈가 인종차별 문제로 백인 선수들과 충돌을 일으키고 코칭스태프에게도 폭언을 일삼자 대표팀에서 내쫓아버렸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을 앞두고 다비즈가 “선수단 내의 룰에 잘 따르겠다”고 용서를 빌자 그때서야 비로소 다비즈를 합류시켰다.
최태욱은 “히딩크 감독이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하고 이것을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가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또한 기존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선수들이 자신의 특기를 살릴 수 있도록 배려하는 자세도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유상철도 “히딩크 감독에 감동한 것은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다. 히딩크 감독은 승리해도, 크게 패배해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 경기결과에 관계없이 자신을 추스르고 선수들을 대하는 모습을 볼 때면 정말 놀랍다”고 감탄했다.
히딩크는 평소 많이 웃고 재미있는 농담을 자주 한다. 훈련 때도 웃으며 선수들을 뒤에서 껴안거나 선수들 엉덩이를 발로 가볍게 차는 등 격의 없이 행동한다. “장난도 전술”이라며 악동 같은 기질을 발휘할 때도 있다. 식사 휴식시간에 선수들과 마주치면 여지없이 농담을 하거나 장난을 건넨다. 그러나 월드컵을 한 달 앞둔 5월훈련에서는 180도로 돌변해 훈련장이나 숙소에서 굳은 표정을 지었다. 선수들은 “요즘 감독님은 훈련소 조교보다 훨씬 무섭다”고 한 목소리다.
2001년 1월10일 김포공항에 입국한 히딩크 감독 주위에는 100여 명의 취재진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숙소로 발을 옮겼다. 그래도 사진기자들이 계속 카메라를 들이대자 그는 마지막 컷이라는 뜻에서 “파이브 포 스리 투” 하며 카운트다운을 했다. 그리고 “댕큐”라는 말을 던지고 사라졌다. 기자회견에서도 “배가 고프니 그만 끝냈으면 좋겠다”라고 한다든지 “더 질문이 없으면 일어나겠다”고 농담했다. 경기에 진 뒤 회견할 때도 전혀 울적해 하지 않고 재미있는 농담이나 유머로 시작한다.
한번은 어떤 기자가 월드컵이 앞으로 400일 남았는데 감회가 어떠냐고 묻자 히딩크는 “그것은 숫자놀음에 불과하다. 가능한 한 400이라는 숫자가 0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고 말했다. 2001년 1월 막 부임했을 때 히딩크는 한국코치진에게 의도적으로 장난을 걸었다. 가령 선수들과 함께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박항서 코치의 등을 히딩크가 온몸으로 안아 누르며 “스트레칭은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한 것이라든지, 기자회견장을 나오면서 갑자기 김현태 코치의 목을 마치 프로레슬러가 헤드록을 걸 듯이 팔로 둘러쥐고 흔든 것 등이 그렇다. 이것은 한국코치진과 말이 통하지 않아 친해지기 어려운 데다 한국코치진들이 지나치게 경직돼 있어 이를 풀고자 한 것이다. 그동안 국가대표팀 코치들은 차범근 허정무 감독 밑에서 말소리 한번 크게 내지 못했었다.
# 리더쉽 16 매스컴을 활용하라
히딩크가 부임한 지 얼마 안됐을 무렵 횟집에서 생선회를 맛있게 먹던 히딩크, 얀 룰프스, 핌 베어백 네덜란드 코치진이 기름장과 함께 접시 위에서 꿈틀거리는 낙지가 나오자 한동안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히딩크 감독은 재빨리 “한국과 네덜란드의 협력과 우호증진을 위해 얀(테크니컬코디네이터)이 시식을 하도록 하겠다”고 지명했다. 그러자 얀은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꿈틀거리는 낙지를 입에 넣고 꿀꺽 삼켜버렸다. 이를 본 핌 베어벡 코치가 “저는 대표팀이 월드컵 4강에 오르면 먹겠습니다”며 위기를 모면했고, 히딩크는 “목표가 그것밖에 안돼. 나는 한국팀이 결승에 오르면 이 음식을 먹겠다”며 피해갔다.
히딩크는 5월 서귀포훈련 도중 어느날 “오늘 아침에 4개 스포츠신문을 보니 1면 톱이 모두 야구기사였다. 외국에서는 요즘 월드컵이 코앞에 닥쳐 모든 언론이 월드컵 이야기뿐인데 정작 개최국인 한국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나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축구기사는 창의적인 것이다. 창의적인 기사거리를 가지고 내게 물어온다면 내 머릿속의 수백 가지 주제들을 모두 내놓지 않을 리 없다”고 말했다. 히딩크는 때로 “월드컵 때 최고의 컨디션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한국의 일부 언론은 경기 결과만 놓고 나에 대해 잘못된 여론을 조장한다”거나 “유럽에서는 방송기자들이 저돌적이고 신문기자들이 온순한데 한국에서는 방송기자들이 온순하고 신문기자들이 저돌적인 것 같다”고 말한다.
히딩크는 “난 신문이나 방송을 잘 보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축구철학과 전술적인 일관성을 지키는 방법이다. 아니, 10개 신문을 펼쳐보면 내 전술과 경기에 대한 분석이 모두 제각각인데 그것을 어떻게 다 소화해내느냐. 여론을 다 수렴하다보면 내 축구철학이 흔들릴 수 있고 전술적인 완성도가 방해받을 수 있다. 난 오로지 나의 길을 갈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언론에 등을 돌리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심각한 경우에는 기자들의 보도를 참조한다”고 말했다. 그는 훈련 때도 욕을 많이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애정이 담긴 욕이다. 가령 선수들이 자신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는 “야, 이 돌대가리야(Fucking! Head)”라고 쌍욕을 하다가 그 선수가 다시 잘하면 “오 굿 보이(Good Boy)”라고 하는 식이다.
폴란드와의 접전을 앞둔 6월1일 히딩크는 일부 스포츠지에 보도된 ‘최용수, 히딩크에 항명’ 기사에 관해 극도로 화를 냈다. 히딩크는 갑자기 기자들의 ID카드를 하나씩 살펴보다 그 스포츠지의 기자를 발견한 뒤 “당신은 여기에서 나가라. 앞으로 이런 질 떨어진 기자들과는 얘기하지 않겠다. 다음부터 이 신문과는 모든 인터뷰를 거절한다”고 말했다. 이어 히딩크는 “최용수는 정말 아프다. 최용수는 자신에 대한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해 무척 화가 나 있다. 최용수는 몸싸움을 사리지 않는 등 팀을 위해 헌신하는 선수다. 난 그가 부상에서 100% 회복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 리더쉽 17 아이스맨처럼 냉정하게
히딩크는 확신을 심어주지 못하는 선수는 가차없이 제외한다. 화려한 기량보다는 조직적 플레이를 중시한다. 고종수 같이 90분 내내 운동장을 어슬렁거리는 선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체력과 상대를 제압하는 투지의 유상철과 김남일 같은 선수를 좋아한다. 히딩크는 선수들은 어느 포지션을 맡더라도 이를 소화해내야 한다는 토털사커 철학 아래 팀전술을 모르는 선수는 아무리 잘하더라도 냉정하게 제외한다. 국내에서 뛰어난 기량을 갖췄다고 평가받았던 고종수나 안정환 윤정환 등도 수비가담이 미흡하면 언제든지 교체했고 팀플레이 없이 잔기술로 버티려하면 즉시 질책한다.
히딩크는 특정선수를 불러 ‘개인면담’을 하지 않는다. 전술토의는 모든 선수들이 모인 공개미팅에서 이뤄지고 선수 전원은 포지션을 불문하고 팀전술을 충분히 알고 나가야 한다. 물론 히딩크는 23명 전원에게 반드시 기회를 준다.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이면 끝없이 믿는다. 설기현이 그런 경우다. 그러나 제 아무리 유명한 선수라도 제 컨디션을 발휘하지 못하면 얼음장같이 냉정하게 벤치에 앉힌다.
히딩크가 코칭스태프에게 내린 제1계명은 ‘절대 선수를 질책하지 말라’는 것이다. 잘못을 해도 선수 스스로 생각해 이야기하게끔 해야 절대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수 선발 때도 ‘저 선수는 안돼’라는 부정적인 말을 안쓴다. 대신 숨은 가능성 찾기에 적극적이다. 미드필더 이을용이 왼쪽 윙백으로 자리를 굳힌 것이나 윙백 이영표가 미드필더로 기용되는 것이 바로 좋은 예다. 히딩크는 “난 선수들을 칭찬은 하지만 비난하지는 않는다.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을 치는 것은 우리팀 내부에서만 한다. 그것이 나와 선수의 약속이고 신의다”고 말한다.
히딩크는 언론에서 선수를 칭찬할 때나 잘못을 지적할 때도 누구를 꼬집어 하는 방식이 아니고 일반적이다. 혹시 잘못을 지적할 때는 반드시 칭찬하는 말 다음에 넌지시 비판한다 또 비판을 하면 반드시 그 뒤에 선수들을 칭찬한다. 다음과 같은 말들이 그 좋은 예.
“한국선수들은 기술이 좋다. 하나같이 왼발 오른발 양발을 자유자재로 잘 쓴다. 유럽팀에도 양발을 자유자재로 쓰는 선수는 많지 않다.”
“한국선수들이 약하다고들 하는데 난 동의할 수 없다. 계속 그렇게 생각하는 게 문제일 뿐이다.”
“네덜란드나 스페인 선수들은 실력이 뛰어나 자기 포지션에서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있어 자기 생각과 맞지 않을 때는 감독에게 강하게 어필한다. 하지만 개성이 강해 도리어 해가 될 수 있다. 한국선수들은 수동적이긴 하지만 그 열정과 성실성은 훌륭하다.”
“고종수는 훌륭한 선수다. 기술은 타고났다. 그러나 현대축구에선 선수들이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한국선수들은 어떤 포지션에서 뛰든 매우 헌신적이고 공격적이며 빠르다. 그러나 배기량이 아무리 큰 자동차라도 마냥 고속으로 달릴 수는 없다. 너무 저돌적인 플레이를 하다보니 쉽게 전술적인 위치를 잃는다. 자연히 선수들 사이의 밸런스도 깨진다.”
한국팀이 골을 넣거나 혹은 먹었을 때 히딩크의 칭찬이나 꾸지람 방식도 독특하다. 보통 감독들은 실수한 선수를 꾸짖고 골을 넣거나 도움을 준 선수를 칭찬한다. 그러나 히딩크는 팀 전체로 설명할 뿐이다. 골은 11명 전체가 넣거나 11명 전체가 먹는다는 것. 맨 앞의 공격진에서부터 수비가 안돼 미드필드진에서 밸런스가 흐트러졌고, 결국 수비진에서 막아봤지만 골을 먹었다는 식이다. 골을 넣을 때도 수비진에서 첫번째 패스가 잘돼 상대가 당황했고 그 다음 미드필드진에서 선수들이 공간 확보를 해줬기 때문에 공격진이 골을 넣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도훈은 “히딩크 감독은 절대 질책하지 않는다. 선수가 깨닫도록 차근차근 설명한다. 그러나 한번 기회를 줬는데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면 그대로 끝장”이라고 말했다. 홍명보의 말도 의미심장하다.
“난 그동안 이회택 김호 박종환 차범근 허정무 감독 등 다섯 분의 대표팀 감독을 모셔봤다. 히딩크 감독이 내가 여태껏 모신 감독들과 가장 구별되는 것은 확실한 목적의식을 갖고 훈련에 임한다는 것이다. 패스연습이면 반드시 패스연습만 시킨다. 거기에 체력훈련이 함께 이뤄지는 경우는 없다. 전체적인 훈련량은 많지 않다. 그러나 고도의 집중력과 긴장을 필요로 한다. 생각하는 축구를 하지 않으면 단번에 휘슬을 분다. 30분만 훈련해도 녹초가 된다. 개인에 대한 직접적인 꾸지람은 전혀 하지 않는다. 훈련에서 안된 부분만 지적한다. 선수들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운동장에만 나가면 엄청난 에너지로 선수들을 장악한다.”
히딩크는 선수들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절대 인격적으로 수모를 주는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는다.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발목 부상한 홍명보에게 자신의 승용차를 선뜻 내주면서 경주 캠프로 먼저 내려보낸 것이나 이영표가 부상으로 폴란드전에서 뛰지 못해 기자들이 이영표를 엔트리에서 제외할 것이냐고 묻자 단호하게 “이영표는 우리팀과 끝까지 간다”라고 말한 것에 잘 나타나 있다.
# 리더쉽 19 기본이 중요하다
히딩크는 기본을 굉장히 중시한다. “항상 고개를 들고 플레이하라. 고개를 들어야 동료의 위치와 주변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거나 “공간을 비워두지 마라. 뒷걸음질치면서 수비하라. 가만히 서서 막다간 상대 스피드에 쉽게 뚫린다. 성급하게 공을 띄우거나 전방으로 올라가지 마라”고 주의를 준다.
# 리더쉽 20 계산하고 행동하라
히딩크는 훈련시작 직전 선수들에게 “오늘 오전 훈련은 한 시간만”이라고 말한 뒤 선수들의 모든 힘을 쥐어짜 기진맥진할 지경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조금만 더”라고 말한다. 선수들이 죽을 듯한 모습을 보여도 먼 산을 보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등 딴청을 부린다. 또한 훈련 때 히딩크는 제스처가 크고 목소리도 화통 삶아 먹은 듯 걸걸하다. 거기에다 끊임없이 떠드는 수다쟁이에 욕쟁이다.
가령 오늘은 송종국을 마음먹고 혼내려고 작정했다면 먼저 송종국의 연습경기 플레이를 지켜보다가 “쿠키, 쇼맨십 부리는 플레이는 하지 마라, 퍼킹(Fucking!)” 욕을 섞어 혼낸 뒤 연이어 “수비수가 상대선수 다리 사이로 공을 빼려는 것은 위험한 플레이야”라고 다그친다. 그런데도 송종국이 의욕이 넘치면 “혼자서 너무 많은 걸 하려 하지마”라며 고래고래 고함을 친다. 히딩크는 갖가지 표정과 대화술로 선수들의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낸다. 직설적인 언사로 고래고래 소리쳐 선수들을 바짝 긴장하게 만들다가도 한순간 재치있는 유머로 팀분위기를 부드럽게 한다.
서귀포 훈련중 휴가 때 히딩크는 이용수 기술위원장, 박항서 코치와 함께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했다. 보기플레이 수준인 이들은 18만원씩 갹출해 스킨스 게임을 가졌다. 스킨스게임의 경우 해당 홀 승자가 없을 경우 그 다음 홀로 스킨스가 이월되는 것이 보통. 그러나 히딩크는 기발한 제안을 했다. 바로 첫 번째 비기는 홀의 상금은 18홀, 그 다음 홀은 17번홀, 그 다음 홀은 16번홀로 이월시키자는 것. 만약 1번홀에서 9번홀까지 모두 비기고 두 홀의 상금이 모아진 10번홀에서 다시 비겼을 경우 상금을 다시 18번홀로 이월하는 식이다.
히딩크는 “축구에서 경기 종료 15분이 중요하듯 골프도 장갑을 벗을 때까지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방식이 최고”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이날 라운딩에서 히딩크의 제의가 적중해 전반 9홀은 대부분 비겼으며, 스킨이 쌓인 후반으로 갈수록 긴장감이 더했다는 전언이다.
그러나 일부에선 ‘한국인 감독이 히딩크와 똑같이했을 경우 과연 선수들이 말을 잘 들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 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부분도 있다. 이것은 월드컵 개막 전부터 인터넷상에 떠돈 ‘히딩크의 미래’에 촌철살인의 유머로 잘 나타나 있다. 우선 ‘히딩크의 미래’를 보자.
▼어이없이 1승도 못 거두고 16강 실패시=또다시 온갖 비난이 쏟아진다. “역시 우리는 안돼” 하는 자괴감과 함께 냄비 언론의 히딩크 죽이기가 시작된다. 일부 아쉬워하는 성숙한 한국인들의 고별인사를 받으며 히딩크는 쓸쓸히 고국 네덜란드로 돌아간다. 아픈 기억을 간직한 채….
▼상당히 선전하고 1승도 거두나 16강에는 실패할 때=모두들 너무나 아쉬워하며 눈물 흘리는 국민이 많다. 일부 냄비 언론들이 히딩크 죽이기를 시도하겠지만, 많은 국민들은 “그래도 히딩크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며 그를 두둔한다. 히딩크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많은 한국인들의 환송을 받으며 네덜란드로 떠난다.
▼16강에 오를 때=온 국민이 열광하며 ‘히딩크 귀화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희망과 용기를 심어준 히딩크는 자랑스럽게 고국으로 돌아간다.
▼8강에 오를 때=이때부터 히딩크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미 5000만에 해당하는 ‘히딩크 스토커’가 양산되어 강제로 귀화하게 된다. 한글로 된 ‘히딩크 위인전’이 나온다.
▼4강에 오를 때=히딩크는 정몽준과 함께 ‘축구당’을 만들어 정계에 진출한다. 정몽준은 대통령으로 나오고 히딩크는 ‘총재’가 된다. 물론 제1당이 된다.
▼결승에 오르면= ‘히딩크파’와 ‘정몽준파’가 나뉘어 내전이 일어난다. 그러나 히딩크파가 압도적으로 제압하고 남한을 차지한다. ‘히딩크 일당독재’가 시작되며 전국 방방곡곡에 히딩크 동상이 세워진다.
▼우승하면=단군신화와 각종 종교는 자연히 없어지고 ‘히딩크교’가 전국을 휩쓸어 우리나라는 히딩크교 제정일치의 ‘전제군주제 사회’로 된다. 히딩크의 말을 적은 어록을 온 국민이 외우고, 그의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닌다.
아무리 유머라지만 너무 심한가. 그러나 여기엔 한국사람들의 ‘냄비근성’이 잘 나타나 있다. 겉으로 웃지만 속이 뜨끔하다. 사실 한국축구사상 한가지 분명한 것은 히딩크와 같이 ‘선진경영 기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국내 지도자는 아직까지 없었다는 것이다.
‘히딩크식’주식투자 비법
언론도 이것을 주목한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히딩크식 경영기법’ ‘히딩크식 리더십’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한 인터넷 신문에서 시작된 ‘히딩크식 주식투자 필승 7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히딩크식 주식투자’는 히딩크의 리더십을 주식투자에 대입한 것이다.
▼‘미인주’로는 안된다=남들도 쳐다보는 미인(이동국 고종수) 즉 대중들에게 인기가 좋은 스타보다는 미인이 될 수 있는 자질(박지성 차두리 이을용 김남일)에 주목하라.
▼돈은 ‘머리’가 아닌 ‘엉덩이’로 벌어라=참고 기다리면 좋은 가격에 팔 수 있다. 단기간의 성과에 급급해 ‘단타매매’에 주력하다가 보면 손해보기 십상. 장기계획을 세우고 그 플랜에 따라 꾹 참고 꾸준히 나가다 보면 언젠가 그 과실이 떨어진다.
▼남들이 뭐라든 신경쓰지 말라=내 원칙대로 선발한 선수(주식)들은 반드시 제몫을 한다. 언론의 보도에 일희일비 하지 말라. 언론은 나중에 손해봐도 결코 책임지지 않는다.
▼펀더멘털=기초체력(자산가치)을 갖춰야 하고 하체(재무구조)가 튼튼해야 한다. 체력과 스피드가 부족하면 아무리 좋은 전술 전략도 별 의미가 없다. 정신력도 체력이 뒷받침돼야 강해진다.
▼과감히 손절매하라=공격도 중요하지만 수비(손절매)를 못하면 큰 대회에서 이기지 못한다. 부상중인 고종수를 대표팀에서 제외한 것은 더 이상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한 결단이다.
▼다른 주식의 가격을 쳐다보지 말라=남(일본대표팀 트루시에 감독)이 특정 종목에서 돈 벌어 갑부됐다고 초조해 하면 백전백패다. 차분히 내 종목이 오를 때를 기다리면 상대를 꺾을 수 있다.
▼한 종목에만 의존하지 말라=스트라이커는 한 선수(종목)가 아닌 안정환 설기현 황선홍 최용수 등 여러 선수(종목)를 둬라. 항상 대체가 가능한 히든카드(포트폴리오)를 가져라. ‘히딩크’는 ‘히든카드’의 약자다.
그런가하면 히딩크 감독이 한 광고에서 “저스트 원(Just One)”이라고 말한 것을 두고 “본선에서 딱 한 골만 허용한다는 얘기다” “딱 한 번만 진다는 얘기다” 등 기발한 해석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히딩크는 결코 ‘영웅’이 아니다. 프로정신에 투철한 축구감독일 뿐이다. 축구선진국에서 이름을 날린 감독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했을 것이다. 황소 같은 뚝심과 소신도 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웃 일본의 트루시에 감독도 소신이라면 히딩크 못지않다.
히딩크의 ‘생각하는 축구’ ‘체력과 스피드를 중시하는 축구’ ‘스위퍼를 없앤 4-4-2’ 등은 국내 지도자들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이다. 다만 아무도 실행에 옮기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면에서 ‘히딩크’가 외국인이라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했다. 더구나 그는 2000년 12월 한국축구가 시드니올림픽 예선탈락-아시안컵 3위 등으로 만신창이가 됐을 때 영입됐다. 차범근-허정무로 이어지는 한국의 내로라하는 스타를 사령탑으로 써봤지만 한국축구는 늘 제자리만 맴돌 뿐이었다. 이에 대한축구협회는 체면이고 뭐고 다 버리고 세계적 명장을 모셔오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98프랑스월드컵을 우승으로 이끈 전 프랑스감독 에메 자케를 영입 1순위로, 히딩크를 영입 2순위로 정하고 물밑교섭 끝에 히딩크와 계약에 성공한 것이다.
1순위로 거론된 에메 자케는 거듭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완곡한 거절로 성사되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 히딩크는 계약할 때 자신의 입지를 유리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먼저 그는 계약조건에 선수선발 작전 훈련 등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축구감독의 권한에 대한축구협회가 감놔라 배놔라 하지 말 것을 명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요구하는 지원에 대해 모든 것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당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이었던 축구협회로서는 이런 요구를 안 들어 줄 수 없었다.
결국 히딩크는 자기의 권한을 계약서에 명확히 하고 출발할 수 있었고 이것이 그를 외풍으로부터 자유스럽게 해줬다. 바로 이런 점이 과거 영입했던 크라머나 비쇼베츠 감독과 다르다. 더구나 당시 축구팬들은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외국인 감독인 히딩크에게 한번 모든 것을 맡겨보자는 분위기였다. 그만큼 한국축구에 대한 절망감이 깊어 히딩크에 대한 비판이나 견제는 생각지도 않았다.
이것은 스웨덴 출신의 스벤 고란 에릭손 감독이 잉글랜드 사령탑을 맡아 ‘잉글랜드 축구’를 확 바꾼 경우와 비슷하다. 에릭손 감독은 잉글랜드의 촌스런 ‘킥 앤드 러시’ 축구를 세련된 ‘현대축구’로 바꿔버렸다. 에릭손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악습’과 ‘관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잉글랜드인들이라고 ‘영국축구의 한계’를 몰랐겠는가. 그들은 밥보다 축구를 더 즐기는 축구도사들이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더 세계축구의 흐름에 정통한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축구종가라는 ‘체면’과 ‘관행’ 때문에 선뜻 고치지 못했던 것뿐이다. 에릭손은 냉정하다. 골이 들어가도 점잖게 박수를 치는 정도다.
히딩크는 곰곰이 생각할 때 오른손 엄지손톱을 입에 넣고 뜯는다. 아이들 같다. 책이나 서류를 볼 땐 돋보기를 코 끝에 걸쳐 쓴다. 이럴 땐 꼭 이웃집 할아버지다. 그러나 그는 쇼맨십도 강하다. 그런데도 밉지 않다. 개구쟁이 같기도 하고 장난꾸러기 같기도 하다. 특히 골을 넣었을 때 골 세리머니를 보면 10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힘있게 뻗쳐 앞뒤로 두세 번 흔든 뒤 벤치를 박차고 나오며 냅다 ‘오른 주먹 어퍼컷’을 허공에 내지른다. 한 발 내디디며 한 번, 또 한 발 내디디며 두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멈춰서며 어퍼컷 꼬리를 혜성처럼 하늘 높이 쳐올린다. 그의 ‘숯검댕이 눈썹’만큼이나 강렬하다. 그의 복코만큼이나 익살스럽다. 그렇다. 히딩크는 운동장에 있을 때 아름답다. 그와 축구 얘기를 하면 황홀하다. 그를 ‘신화’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예의’가 아니다.
히딩크는 말한다. “난 영웅 같은 것엔 관심 없다. 좋아하지도 않는다. 난 내 일을 좋아하고 내 일을 할 뿐이다. 난 대애∼한민국 축구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작은 독재자’로 만족한다”
선수들의 생각은 어떨까. 최근 어느 일간지에서 23명의 대표팀 선수들에게 ‘히딩크 감독이 온 이후로 가장 큰 변화가 무엇이냐’라고 묻자 ‘강호들과 경기를 통한 자신감 획득(14명)’‘선진 교수법에 따른 개인 기량 향상(5명)’‘실력 위주 선수 기용(4명)’이었다고 대답했다. 또한 ‘멀티포지션 이동’에 대해선 23명 모두가 “긍정적”이라고 대답했다.
최강의 히딩크 사단
히딩크가 한국대표팀 감독을 맡은 것은 돈보다는 월드컵 개최국 감독으로서 월드컵 본선무대에 선다는 매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히딩크는 일단 “한국축구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선뜻 맡을 수는 없다.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감독을 맡기로 결정한 뒤엔 “한국축구를 모르면 감독을 할 수 없다. 한국선수들에 관한 것과 한국축구에 대한 자료를 가능한 한 많이 보내달라”고 축구협회 관계자에게 요청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로 직전까지 대표팀을 맡았던 융무후(허정무 전대표팀 감독)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허감독 밑에서 같이 일했던 코치진(박항서 김현태 정해성 최진한)을 자신도 코치로 계속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여기엔 히딩크다운 두 가지 깊은 뜻이 있다. 하나는 한국코치진을 통해 한국선수들의 특성을 빨리 파악하고 한국선수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을 때 징검다리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계약기간이 끝난 후에도 자신의 축구철학이 한국에서 계속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히딩크가 전적으로 한국의 코치진에 의지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도 이른바 ‘히딩크사단’이 있다. 우선 핌 베어벡(45) 수석코치는 네덜란드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감독(1989~91)과 일본 J리그 NTT오미야 감독을 역임한 실력파다. 중국 상하이의 선화FC와 홍콩축구협회 기술고문도 맡아 아시아축구에도 정통하다. 선진축구 이론에 해박한 그는 한국 수비진의 조직력을 다지는 데 1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히딩크 감독과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대표팀의 선수 교체와 전술 운영 등을 논의하는 ‘작전참모’ 노릇도 충실히 해냈다. 11명의 선수들이 톱니바퀴 돌아가듯 유기적으로 움직일 정도로 대표팀의 전술적인 완성도가 높아진 데는 과학적이고 치밀하게 훈련 프로그램을 작성한 베어벡 코치의 공이 컸다.
얀 룰프스(38) 테크니컬코디네이터도 있다. 그는 키가 196㎝의 꺽다리다.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1997년 네덜란드 TV해설가를 역임한 이론가다. 대표팀의 기술분석과 대 언론관계 업무를 담당한다. 선수 개개인의 기술력을 분석해 자료로 만드는 업무를 주로 한다.
아프신 고트비(39) 비디오분석관은 대표팀 경기와 상대 경기를 담은 비디오를 컴퓨터로 분석해 히딩크 감독이 작전을 수립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대표팀이 미드필더 4명을 일자로 세우다 중앙 미드필더 2명을 앞 뒤로 배치해 마름모꼴로 바꾼 것도 고트비 분석관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중앙 미드필더 1명이 뒤로 처지면서 긴 패스 한번에 수비가 뚫리던 고질적인 약점이 해소됐다. 이란계 미국인 고트비는 미국 UCLA 졸업 후 2년여 동안 여자축구팀 코치를 하다 전력분석가의 길로 접어들어 현재까지 10여 년간 암스테르담 아약스 등 네덜란드 명문클럽과 자메이카 대표팀 분석관으로 활동해왔다. 그는 대표팀의 경기가 열릴 때마다 캠코더로 쉴 새 없이 경기장면을 녹화한 뒤 밤새 편집하고 분석해 상대의 장단점과 고쳐야 할 점을 자료로 만들어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에게 제공한다.
레이먼드 베르하이옌(31) 피지컬트레이너는 선수들에게 ‘저승사자’로 통한다. 네덜란드 왕립축구아카데미에서 운동생리학을 전공한 뒤 1998년 프랑스월드컵 때 네덜란드 대표팀 체력담당 트레이너를 맡아 히딩크 감독과 인연을 맺었다. 그가 꾸민 다양한 메뉴의 체력 강화 프로그램은 한없이 고되고 지겨울 수도 있는 체력 훈련을 선수들이 웃으면서 받도록 효율성을 높였다. 3월 스페인 전지훈련 때부터 한국팀에 합류했다. 한국선수들의 체력을 단시간내 유럽선수에 맞먹는 수준으로 올려놓은 일등공신이다.
히딩크는 자신이 데려온 보좌진들을 통해 한국팀에게 선진기술을 가르치고 한국코치진들을 통해 한국선수들의 장단점을 파악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만의 독특한 축구를 만들어냈다. 히딩크가 창조한 한국축구는 유럽과도 다르고 남미와도 다르다.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90분간 쉬지 않고 밀어붙이는 축구, 특유의 빠른 스피드에 강한 정신력과 투지를 접목한 축구, 한 명의 스타에 의존하지 않고 전원이 수비수와 공격수가 되는 수평적 조직축구, 상대와 상황에 따라 포메이션이 수시로 변하는 카멜레온 축구, 거친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는 용맹스러운 축구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것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월드컵을 통해 방향을 제대로 잡았고 한 차원 향상된 것만은 분명하다.
한국축구의 ‘작은 독재자’
히딩크의 스태프는 20여 명이나 된다. 코치진에 핌 베어벡 수석코치와 박항서 정해성 김현태(GK) 등 한국인 코치 3명 등 4명이 있다. 여기에 ‘연수’중인 최진한 청소년대표팀 코치까지 더하면 5명. 또 테크니컬코디네이터(개인 매니저) 얀 룰프스, 물리치료사 3명(아노, 빌코, 한국인 최주영씨), 체력담당트레이너 베르하이옌, 비디오분석관 아프신 고트비, 장비담당에 김대업 주무, 윤성원 대리가 있고 김현철 주치의, 히딩크 감독 통역인 전한진 과장, 언론담당관인 허진 외교통상부 사무관이 있다.
과거 대표팀에는 코치 2명, 트레이너 1명, 주무 등 행정담당 2명, 의료 및 마사지사 2명 등 코칭 스태프가 10명이 채 안됐다. 그러나 히딩크는 많은 스태프들을 고용해 이들의 일을 철저히 분업화했다. 체력 프로그램-비디오 분석-전술교육-부상선수 관리 등을 각 코치들에게 맡기고 보스로서 강한 카리스마를 발휘해 자신을 중심으로 선수단을 똘똘 뭉치게 했다. 자신의 말대로 그는 한국축구팀의 ‘작은 독재자’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경쟁을 유도해 조직에 활기를 불어넣으면서도 ‘유머나 장난 걸기’ 등을 통해 팀을 부드럽게 이끌었다.
히딩크는 어떻게 조직을 장악하고 그 조직을 바꿔나갔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히딩크의 조국인 네덜란드 사람들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세계는 신이 만들었고 네덜란드는 우리가 만들었다’고 자부한다. 바다보다 낮은 땅이 많아 댐을 쌓아야 했던 만큼 환경이 열악하다. 살기 위해선 주위 나라와 모두 친하게 지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개방적이다.
가령 네덜란드 집집마다 걸린 창문 커튼은 가리개가 아니라 행인들을 위한 하나의 ‘디자인 장식’이다. 실내를 멋진 그림과 꽃 등으로 치장하고 예쁜 커튼을 살짝 제쳐 보여 행인들의 눈길을 끈다. 어둠이 깔려 불을 켜도 결코 커튼을 드리우지 않는다. 집주인의 인테리어 솜씨를 맘껏 자랑한다. 네덜란드엔 고정관념이란 게 없다. 세계 최초로 안락사법도 만들었다. 동성간의 연애뿐만 아니라 결혼도 OK다. 아이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의 성을 따른다. 이혼이 늘어가는 세상에 아이의 성이 자주 바뀌지 않도록 한 것이다. 마약판매도 자유다. 마약판매를 허용해 마약중독자들의 범법행위를 막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보통 3, 4개 나라말을 능숙하게 구사한다. 히딩크도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독일어 영어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히딩크가 한국에 와서 받은 인상은 그의 조상인 하멜과 큰 차이가 없다. 하멜은 1653년 8월 배가 난파하여 제주도에 표류한 뒤 13년여 동안 조선 땅에서 살다 탈출했다. 하멜은 표류기에서 당시 조선사람들에 대해 “양반이나 상민들은 일반적으로 교육에 온 힘을 다한다. 어릴 때부터 선생에게 맡겨 독서와 작문을 익히게 하니 조선사람들은 여기에 무한한 쾌락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엄격한 수단을 쓰지 않고 모든 것을 자유롭고 유쾌한 방법으로 가르치되, 선조들의 학문과 공적이라든지 혹은 크게 된 이들의 명예를 이야기해주는데 이것이 아이들을 자극하고 근면하게 한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대단하고 부모가 자식에게 받는 존경도 대단하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서로 뗄 수 없을 정도로 친밀하여 만일 부자 중의 한 사람이 부정한 행위로 벌을 받게 될 경우에는 다른 사람도 책임을 진다”고 말했다.
히딩크도 한국선수들의 ‘학습의욕’을 높이 평가한다. 또한 윗사람을 공경하는 것도 높이 평가한다. 히딩크는 한국선수들의 순수성과 열정에 깊이 감동했다. 그는 5월26일 프랑스와의 평가전을 끝내고 가진 네덜란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선수들은 내가 지시하는 점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노력했으며 한결같이 착하고 순수하다. 난 한국선수들을 사랑한다. 그들의 순수함은 나를 들뜨게 한다. 실력의 우월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다”고 말했다. 히딩크는 지난 5월15일 스승의 날에 한국선수들이 그에게 여행용 화장품세트를 선물했을 때 깊이 감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기장 안에서의 위계질서에 대해선 강하게 비판한다. 히딩크는 “하나의 문화로서 유교적 질서는 존중하지만 경기장에서만큼은 그것이 마이너스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선수들로 하여금 “형”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했다.
# 리더쉽 1 솔선수범
히딩크는 2001년 1월 한국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한국음식이든 뭐든 아무런 거부감 없이 잘 먹었다. 육류는 물론 팔보채 등 중식, 주꾸미 데친 것이나 어묵 등 해산물까지 가리는 것이 없었다. 쌀밥은 말할 것도 없고 불고기 정식, 생선구이 생선회도 맛있게 먹었다. 식탁에서 포크를 쓰지 않고 젓가락이나 숟가락을 사용했다.
2001년 1월 대표팀 전용버스 안전운행-승리기원 발차식 고사 때는 활짝 웃고 있는 돼지머리 입에 만원짜리를 끼워넣기도 했다. 다리가 아파 무릎을 꿇지는 못했지만 서서 절하기도 했다. 2002년 1월 16강 기원 북한산 등반 때는 네덜란드에서 막 수술한 무릎을 움켜쥐고 자신의 말에 따르면 “생애 첫 등산”을 했다. 하산 후엔 거리낌없이 발가벗고 기자들과 대중탕에 들어가 사우나를 했고 그후 가진 회식 땐 기자들에게 등 떠밀려 애창곡인 ‘마이 웨이’를 불렀다. 경영학 교수는 “히딩크의 성공은 한국축구의 보수주의와 네덜란드의 합리주의가 기가 막히게 결합해 피운 꽃”이라고 말했다.
히딩크는 처음 선수들과 가까이 하기 위해 훈련장으로 이동할 때 항상 선수단버스를 이용했다. 5명의 코치 중 꼭 한국인 코치 한 사람을 대동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훈련장으로 향했다. 이렇게 되니 축구협회는 히딩크를 위해 따로 마련해놓은 승용차를 치울 수밖에 없었다. 히딩크는 한국문화를 이해해야 한국축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히딩크는 핌 베어벡 코치와 축구협회가 준비한 한국의 아시안컵대회 경기 비디오테이프를 하루 2개 이상 보며 한국팀의 장단점 분석에 골몰했다. 한국에 온 이래 그의 하루 평균 수면시간은 4, 5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히딩크는 2001년 1월16일 월드컵 개막 500일을 앞두고 열린 KBS-TV ‘열린음악회’에서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 웨이’를 신청했다. 이것은 누가 뭐라든 ‘나의 길’을 가겠다는 다짐의 표시이기도 했다.
히딩크는 한국팀 분석이 끝나자 곧바로 팀 장악에 나선다. 그가 한국팀에 부임한 후 내린 첫 지시는 네 가지. 첫째 모든 선수단은 식당에 동시에 입장해 동시에 식사를 끝내라. 둘째 훈련할 때나 밥을 먹을 때는 물론 어디에서나 선수단은 복장을 통일하라. 여기에는 축구협회 직원도 예외일 수 없다. 셋째 식사시간이나 공식업무중엔 휴대전화 벨이 울려도 받지 말라. 넷째 선수단 미팅은 선수단 이외 그 누구도 참관 금지다. 물리치료사 운전기사는 물론 더 중요한 사항일 때는 주무와 통역도 배제하겠다.
히딩크는 솔선수범해 자신부터 이 사항을 지켰다. 훈련초기 식사시간에 히딩크 감독을 찾는 국제전화가 네덜란드에서 걸려오자 “식사시간이기 때문에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한국기자들과 첫 기자회견에서도 10분밖에 안됐는데도 식사시간에 늦는다며 서둘러 끝냈다. 히딩크는 2001년 1월 매서운 바닷바람이 부는 날씨에도 훈련시간에 선수들과 똑같이 트레이닝복만 입었다. 결코 귀가 시렵다고 모자를 쓴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차범근 감독이 이끌던 98프랑스월드컵 때 대표팀 숙소에는 축구협회 관계자나 기술위원 등 선수들과 별 관계 없는 사람들이 함께 묵으면서 선수들의 집중력을 해쳤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이번엔 그 누구도 선수숙소에 얼씬 못한다. 그는 축구협회 관계자들이 대표팀 운영에 잔소리를 하려하면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거부한다. 이용수 기술위원장은 지난 2월 북중미골드컵 기간에 “나도 대표팀 코칭스태프 미팅 때 못 들어간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정도다.
히딩크는 처음엔 선수들의 이름 중 박씨와 김씨 발음조차 구분 못하더니 2001년 1월 울산전지훈련 후 채 한 주가 되기도 전에 80%가 넘는 선수들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했다. 히딩크가 선수들의 이름을 외우는 시간은 주로 식사 때. 선수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상석에 앉아 틈틈이 날카로운 눈매로 선수들을 응시했다. 전날 연습경기에서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거나 비디오 모니터링을 통해 얼굴을 기억한 선수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이름과 연결시키기 위해 응시했던 것이다.
# 리더쉽 2 냉철한 선수선발
히딩크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혈연 지연 학연으로부터 자유롭다. 이것은 히딩크가 국내 지도자들과는 달리 선수선발에서 자유롭다는 것을 뜻한다. 차범근 감독은 최근 “98프랑스월드컵을 앞두고 당시 축구협회는 선수선발 때 매스컴을 비롯한 주위의 견해를 잘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고 말해 선수선발에 전권을 행사하지 못했음을 실토했다. 그러나 히딩크는 대한축구협회와 계약할 때 전권을 위임받는 조건으로 감독직을 수락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협회나 외부 입김에 관계없이 자신의 축구철학에 맞는 선수를 선발했다.
그의 축구철학은 최전방 공격수와 최후방 수비수 사이를 30m 이내로 좁히고 90분 내내 어떤 팀에도 밀리지 않는 체력전과 스피드전을 펼쳐 경기를 지배하고 압박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박지성 송종국 김남일 최태욱 이천수 이을용 이영표 차두리 설기현 등 체력과 스피드가 좋은 선수들이 선발됐다. 이에 대해 일부 국내 지도자들이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정종덕 전 건국대 감독은 “박지성 송종국은 축구선수라기보다는 마라톤 선수이고, 설기현은 땅만 내려다보고 다니는 선수다. 경기 리딩 능력이 있는 고종수 윤정환을 냉대하는 히딩크는 지도자로서 자질이 의심된다”고까지 혹평했다. 또한 일부에서는 힘만 좋지 경기력이 형편없는 차두리의 선발에 대해 눈총을 보냈다.
그러나 히딩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차두리가 코스타리카전에서 마침내 골을 터뜨리자 “차두리는 스피드와 폭발력이라는 특화된 무기를 가진 잠재력이 뛰어난 선수다. 상대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후반 중반 이후에 투입해 승부수를 띄우겠다. 차두리는 내가 몇년 전에만 발견했으면 훨씬 좋은 선수로 키워놓았을 것이다. 물론 차두리가 누구 아들인지는 잘 알고 있지만 왜 계속 발탁했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은 없었다. 나는 주어진 찬스를 놓친 것은 탓하지 않는다. 하지만 찬스를 만들고자 하는 의욕이 결여됐을 때는 강하게 비난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간 경기력이 좋지 않았음에도 계속 차두리에게 힘을 실어줬다”고 말했다.
히딩크의 관점은 골드컵에서 외국감독들이 차두리를 아주 ‘위협적인 선수’라고 평가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것은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선수가 누구일까 하는 관점에서 본 것이기에 히딩크의 생각과 같다. 그들도 차두리의 ‘스피드와 체력’을 무섭게 본 것이다. 그렇다고 히딩크 감독이 차두리를 편애하는 것은 아니다. 히딩크는 차두리가 평가전에서 잇따라 결정적인 슛찬스를 무산시키자 이에 대한 질책은 하지 않고 엉뚱한 점에 대해 혼을 냈다. 그것은 슈팅을 하고 난 뒤 차두리의 태도에 관한 것. “스타의식을 버리고 골 지역에서는 최대한 슈팅에 집중하라. 단 1초 만에 볼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데 고개를 뒤로 꺾고 아쉬운 표정을 지을 여유가 어디 있느냐”며 혼쭐을 낸 것이다.
박항서 코치는 “히딩크 감독은 고정적인 각도 혹은 선입견에서 선수를 보지 말라고 강조한다. 좁은 소견에서 벗어나 넓은 시야로 선수를 선발하고 키워내라는 게 그의 주문이다. 그러나 솔직히 나 자신도 여전히 기존의 고정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종수도 “히딩크 감독은 말은 하지 않지만 선수 모두를 꿰뚫어보고 있다. 또한 선입견이나 주변 이야기만 듣고 선수를 평가하지 않고 훈련과 경기를 통해 선수 기량을 정확히 파악한다”고 말했다. 히딩크는 취임 이후 23명의 엔트리가 정해지기까지 꼬박 1년3개월 동안 64명을 테스트했다. 그리고 32차례 A매치에서 13승9무10패를 기록했다.
히딩크호에서 스타란 없다. 히딩크는 오자마자 16강을 자신했다. 선수들과 한국 국민들에게 “내가 한국축구의 해답은 아니지만 16강이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리고 선수들의 팀워크를 단단하게 하기 위해 식사할 때나 잠자리에 들 때라도 복장통일을 강조했다. 그는 축구대표팀의 ‘작은 독재자’라고 자칭하면서 코칭스태프 등 모든 선수단에게 그렇게 해줄 것을 요구한다. 가령 식사도중 긴급한 전화가 걸려 오면 히딩크는 “식사시간엔 대한축구협회의 전화라도 안된다. 대표팀 내에서는 오직 내 전화만 받아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할 정도다. 그는 선수단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감독을 향해 집중력을 가져야 훈련성과가 높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부드럽다. 그가 히틀러식 독재(?)를 하는 것은 훈련할 때나 경기할 때 등 집단으로 만날 때뿐이다.
히딩크는 감독 취임 얼마후 한국축구팀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홍명보를 “몸이 안돼 있다”는 이유로 제외했다. 목표와 가치를 분명히 하고 선수단의 리더라 할 수 있는 홍명보를 대표팀에서 뺀 것이다. 경영학 서적 ‘하이 파이브’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되새겨보면 히딩크가 왜 홍명보를 팀에서 일단 제외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공동의 조화는 개인적 기술을 팀기술로 바꿔준다. 훈련된 사람들은 팀을 새로운 수준으로 이끌고 그 새로운 수준이 다시 표준이 된다. 유능한 선수가 떠나면 팀은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겠지만 곧 정상을 되찾을 뿐더러 그 팀은 처음 시작할 때보다 더 높은 수준의 팀이 된다.”
“홍명보도 팀의 일부일 뿐”
홍명보가 빠진 이후 한국팀은 승패를 떠나 활력이 넘치기 시작했다. ‘젊은 피’들이 펄펄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송종국이 그 대표적인 예다. 만약 홍명보가 있었다면 송종국은 후보로 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홍명보가 없는 사이 송종국은 홍명보를 능가할 정도로 컸다. 이천수 최태욱 등도 마찬가지다. 또한 팀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골드컵 부진으로 여론의 눈총을 받고 있긴 하지만 예전보다 한 단계 높아진 것은 분명하다.
아프신 고트비 한국대표팀 비디오분석관은 “지난해 한국이 홍콩 칼스버그컵에 출전할 당시와 최근의 경기 비디오를 분석해보면 전술이나 선수 운영면에서 한국팀이 전혀 다른 팀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미드필드에서 선수들은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밀리지 않는다. 히딩크 감독이 경기를 지배한다고 말하는데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한국사람들은 자기팀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것 같다. 한국팀은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다. 이것은 경기와 선수들의 플레이를 분석하는 입장에서 하는 얘기”라고 말했다.
이 얘기가 맞다면 이젠 홍명보가 한결 높아진 팀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 히딩크는 최근 홍명보의 역할에 대해 “홍명보도 그저 팀원의 일부일 뿐이다. 그도 다른 선수들과 똑같이 경쟁해야 하며 잘 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분명히 못박았다. 물론 홍명보를 재발탁한 뒤엔 히딩크의 말도 달라졌다. 히딩크는 3월1일 “홍명보가 후배들과 선의의 경쟁을 통해 주전을 꿰차겠다고 말한 것을 알고 있다. 이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부상을 딛고 빠르게 정상 컨디션을 되찾은 데 이어 강한 정신력까지 보이고 있어 흐뭇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홍명보 한 사람에만 의지하는 한국팀 플레이가 홍명보가 8개월동안 나가 있음으로 해서 11명 전원이 서로 의지하고 나아가는 팀으로 변한 것이다.
그라운드에 독불장군은 없다
2001년 골키퍼 김병지가 파라과이전에서 하프라인까지 볼을 치고 나왔다가 볼을 빼앗기자 바로 대표팀에서 제외했다. 김병지는 우여곡절 끝에 다시 발탁됐지만 이제 김병지에게서 튀는 행동은 없어졌다. 히딩크는 말한다. “유명세는 필요없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그라운드에서 보여주는 실력이다. 행여 팀워크를 해칠 수 있는 겉멋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이탈리아리그에서 뛰고 있는 테크니션 안정환도 체력과 적극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대표팀에서 제외했다가 안정환이 코스타리카전에서 죽을 둥 살 둥 뛰자 그때서야 못이기는 체 그를 대표팀에 뽑았다. 안정환은 후에 “체력이 부족하다거나 너무 오랫동안 후보로 앉아있어 경기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말했다.
초기에 히딩크의 황태자로 불리던 설기현이 부진하자 히딩크는 그를 3월26일 터키와의 평가전에서 종료 직전인 후반 45분에 최용수와 교체 투입했다. 그러나 그가 들어가자마자 10초후에 경기종료 휘슬이 울렸다. 설기현은 공 한번 제대로 차보지 못하고 나왔다. 그때 히딩크는 “과거 일본파에 비해 체력 경기력에서 앞섰던 유럽파가 이제는 뒤처진다”며 설기현을 질책했다. 설기현은 “터키전에서 10초 동안 출전한 것을 계기로 많은 자극을 받았다. 이젠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훈련에 임한다”고 말했다.
현대축구에서 보통 한 선수가 볼과 접하는 횟수는 90분 경기 기준 60∼70회 정도다. 펠레가 ‘축구황제’인 것은 이 볼터치 횟수에서 그대로 입증된다. 펠레는 그가 뛴 4번의 월드컵대회에서 경기당 평균 96회 볼을 터치했다. 물론 지단도 유로2000 이탈리아와의 결승전(연장전 120분 프랑스 2대1승)에서 팀내 최다인 109회 공을 받았다. 90분 경기기준으로 보면 지단의 볼터치 횟수는 81.7회. 펠레에는 못 미치지만 다른 선수보다는 훨씬 많다.
한마디로 펠레와 지단은 1960∼70년대의 브라질팀이나 오늘날 프랑스팀에서 전력의 30% 이상을 차지하는 ‘핵(DNA)’이다. 양팀과 맞서는 팀은 이들을 어떻게 막느냐에 승패가 갈린다.
그러나 그만큼 위험 부담도 크다. 이들이 부상이라도 당하거나 컨디션이 나쁠 때는 대안이 없다. 더구나 아무리 탄탄한 조직이라도 팀원 중 한 사람이 스타로 뜨기 시작하면 다른 팀원들은 그 스타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된다. 덩달아 조직도 그 스타에 의존하는 비중이 갈수록 커진다. 그것이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1998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프랑스팀은 글자 그대로 ‘다인종 연합의 무지개팀’이었다. 그러나 4년후 프랑스팀은 ‘지단의 팀’으로 변했다. 신흥 축구강국으로 떠오른 포르투갈도 어느새 ‘피구의 팀’이 됐다. 이번 월드컵에서 프랑스가 개막전에서 세네갈에게 0대1로 패하고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앙리가 퇴장을 당한 가운데 0대0으로 비긴 것도 지단을 중심으로 한 플레이를 하다가 지단이 빠지니 팀플레이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이 미국에 2대3으로 패한 것도 피구가 컨디션 난조로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프랑스와 포르투갈은 팀워크의 팀인 세네갈 우루과이에게 ‘동네북’의 수모를 당했다.
현대경영의 요체는 시스템과 팀워크다. 개인의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덴마크나 미국 한국축구팀엔 이렇다할 스타가 없다. 특히 덴마크는 수비-공격 역할 분담이 철저한 ‘끈끈한 축구’의 전형이다. 한국은 전원공격 전원수비의 ‘수평조직 축구’를 한다.
조직에서 스타란 너무 커지면 ‘계륵’과 같다. 팀워크가 사라진다. 달빛이 너무 밝으면 주변의 별들은 빛을 잃는다. 이런 면에서 히딩크가 이끄는 한국축구는 철저히 분업화한 ‘수평축구’다. 공격수비수가 따로 없다. 상대방이 볼을 잡는 순간 그 주위 공간에는 한국선수가 숫적인 우위를 보인다. 그만큼 많이 뛰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
홍명보는 히딩크의 지도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처음 히딩크 감독의 여러가지 새로운 지도방식을 접했을 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내가 한국대표가 된 지 11년째지만 여태까지 한번도 배우지 못한 것을 배움으로써 비늘을 한겹 벗었다고 생각한다. 히딩크 감독은 경기운영의 밸런스, 상황에 따른 다양한 플레이에 관해 정확하게 지적했다. 난 여태까지 경기중에 경기운영에 대해서 다른 선수들에게 지시하거나 조언해왔지만 감독으로부터 그런 부분까지 직접 지시받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는 조직의 일체감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예를 들어 연습할 때에도 오늘은 파란색 반팔셔츠를 입는다고 결정하면 모두 그 복장으로 오전을 보내야 한다. 물론 감독도 똑같은 옷차림을 한다. 심지어 협회 사람들까지 선수와 똑같은 옷차림을 해야 한다. 식사하러 갈 때도 모두 같은 옷을 입고 가야 한다.
당연히 처음에는 반발이 있었다. 옷입는 것까지 일일이 지시를 받아야 하는가 하고.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일정한 규칙만 지키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감독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선수들의 불만은 사라졌다. ‘바로 이것이 히딩크 스타일이로구나’하고 이해하게 된 것이다.
히딩크가 감독이 된 뒤 한국팀에 일어난 첫번째 변화는 선수들의 컨디션 관리가 확립되고 선수들이 생각하는 축구를 요구받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한국축구는 무조건 체력 훈련이었기 때문에 처음 얼마 동안은 선수들이 ‘히딩크가 감독이 되니 몸은 피곤하지 않은데 머리가 아프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히딩크 감독은 탁월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방법론을 무리하게 선수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이 알아듣게 계속 설득한다. 우리 세대는 ‘뛰는 것이 바로 공격이다’라고 배웠고 오로지 뛰고 또 뛰는 연습만 해왔다. 히딩크는 이런 방식을 완전히 부정한다. ‘무조건 뛰지 마라. 자신의 포지션에 책임을 져라. 확률이 낮은 슛을 하기보다는 찬스를 만들기 위해 패스 하라.’ ‘위험한 구역에서 안이하게 패스를 하다 커트당해 역습을 당하는 것보다 정확히 시야를 확보하고 반대편을 보라’ 이것이 그가 말하는 경기운영의 밸런스다. 여태까지 체력훈련 일변도였던 한국선수들이 히딩크 감독의 방법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한국축구는 진정 다시 태어날 것이다.”
송종국도 “잘못을 지적할 땐 호랑이 같지만 농담과 쇼맨십을 섞어가며 사기를 북돋울 때는 마치 할아버지 같다”고 말했다. 최은성은 “히딩크는 선수들을 컨트롤하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다. 선수들의 정신이 해이해지는 것을 보면 바로 지적한다. 칭찬할 때는 좀 오버하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지난해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에 처음 출전했을 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게임에 나갈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면서 ‘게임을 즐기라’고 말해준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갈수록 그가 좋아진다”고 말했다. 고종수는 “히딩크 감독은 훈련장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규칙을 강조한다. 그러나 약간의 규칙만 지키면 생각보다 아주 편안하다. 운동 외에 다른 것에는 신경쓰지 않아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지도하는 내용들이 상당히 구체적이다. 그리고 항상 생각하는 축구를 강조한다.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패스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자신이 직접 그려가면서 할 수 있도록 창조적인 행동을 요구한다”고 덧붙였다.
히딩크는 언론의 인터뷰가 고종수 김도훈 등 일부 스타선수들에게만 집중되자 팀워크를 의식해 “후보선수와도 가급적 인터뷰를 해달라”고 기자들에게 부탁했다.
히딩크는 골을 먹거나 넣었을 때도 누구를 꼬집어 거론하지 않는다. 히딩크에 따르면 골은 팀 전체가 내주고 팀 전체가 넣은 것이다. 보통 감독들은 실수한 선수를 꼬집지만 히딩크는 무조건 팀 전체로 생각한다. 골을 먹어도 앞단계의 수비에서부터 공격까지 이렇게 저렇게 조직력이 흔들려 먹은 것이고, 골을 넣어도 뒷선에서부터 차근차근 조직력이 뒷받침돼 그렇게 된 것이다. 책임감과 우리, 즉 팀이 먼저다. 그는 원칙과 강력한 카리스마로 선수단을 장악한다. 1996년 유럽선수권 때 네덜란드팀의 흑인소장파와 백인노장파의 반목을 수습한 것이나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다비즈 클레이베르트 등 세계적 스타들을 한 손에 장악한 것도 바로 이 카리스마였다. 히딩크는 이탈리아 발렌시아 감독시절 브라질의 말썽꾸러기 호마리우가 매번 미팅시간 1분 전에 나타나 기다리는 감독과 주전선수들을 골탕먹이자 다음 미팅시간엔 자신의 시계를 조작하고 그 시계로 정시보다 늦게 나타난 호마리우를 미팅룸에서 쫓아버리고 경기 멤버에서 제외하는 등 초강수를 두어 호마리우를 거들먹거리는 스타에서 순한 양으로 만들기도 했다.
독불장군에겐 미래가 없다
히딩크는 “내가 이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엄한 규칙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본 트루시에 감독이 나카타 히데토시를 다루는 방법도 히딩크와 비슷하다. 트루시에는 나카타에게 “독불장군에겐 미래가 없다. 이기적인 선수는 결코 월드컵에서 뛸 수 없다”며 팀워크를 강조했다. 그러나 나카타가 자숙하는 모습을 보이자 “나카타는 5명의 매니저와 2명의 의사와 함께 헬기를 타고 다녔지만 지금은 자전거를 애용한다. 인간적으로 그가 달라진 게 중요하다”며 그를 품에 안았다.
지난 16년 동안 통산 80%가 넘는 승률을 자랑하는 미국의 명문 듀크대학 농구팀 종신 코치 마이크 셔세프스키는 ‘동기 유발의 장인’으로 꼽힌다. 그는 팀원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도록 한다. 후보선수뿐만 아니라 응원하는 학생들까지 팀의 일부로 여긴다. 모두가 ‘우리가’ 돼야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수를 스카우트할 때도 실력보다는 인성을 중시한다. 그는 팀의 ‘사기’를 승리의 제1요소로 친다. 그는 ‘모든 게임’에 ‘모든 선수들’로 하여금 자신이 팀에 꼭 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도록 한다. 그는 선수들에게 ‘네가 지금 이 순간 최고의 선수’라고 말해준다. 찬양하고 고무하고 조장한다. 그는 말한다. “경기중 선수의 손에 공이 들어온 순간 그 공은 ‘그 선수의 공’이 아니라 ‘우리의 공’이라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고. 히딩크가 바로 그렇다.
히딩크는 선수들에게 늘 “감독이 하라는 대로만 하지 말고 자기 생각과 다르다면 감독에게 언제든 따질 건 따지라”고 요구한다. 그래야 팀에 발전이 있다는 것이다. 선수들이 너무 순종적이고 말을 잘 들어 불만(?)이다. 이렇게 성실한 선수들이 이 세계 어디에 또 있는가. 그러나 바로 이것이 창조축구에는 큰 걸림돌이라는 게 히딩크의 생각이다. 식사를 할 때도 선후배가 같이 앉아 먹으며 대화를 하도록 한다든가 좀 튀는 이천수나 고종수를 격의 없이 대하는 것이다.
히딩크는 “한국선수들은 어린애처럼 순진하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팀의 실수는 100% 골로 연결되는 반면 한국은 상대방 실수를 골로 연결시키지 못한다. 물론 한국선수들은 존경스러울 정도로 성실하고 강한 훈련에 잘 따라준다. 그러나 외국에서의 경기 경험이 부족한 탓에 노련하지 못한 게 결정적 단점이다. 한국선수들은 기술적으로 절대 유럽선수들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창조적이지 못하다. 특히 젊은 선수들은 선배들이 무엇인가 해주기를 바란다. 스스로 창조적인 플레이를 해야 될 나이에 위를 바라보고 있다니 안될 말”이라고 안타까워했다.
히딩크는 3월 유럽전지 훈련에서 한국팀의 수준을 각 부분별로 점수로 표시했다. 프랑스나 아르헨티나 등 선진축구팀을 100점으로 했을 때 한국팀에 가장 부족한 것은 선수들간의 커뮤니케이션. 히딩크는 이 부분에 20점으로 최하위점수를 줬다. 대신 내적 동기부여(100점), 헌신도(99점), 기술(85점), 스피드(80점) 부분엔 후한 점수를 줬다.
왜 커뮤니케이션이 문제인가. 히딩크는 3-4-3포메이션을 그린 뒤 각 위치별로 한국선수들의 나이를 써넣었다. 그리고 경기할 때 의사전달 방향을 화살표로 표시했다.
“자 봐라. 최전방 공격수 세 명의 나이가 왼쪽 공격수부터 19-32-24세로 이뤄져 있다면 이들의 의사전달 방향은 32세 공격수가 왼쪽 19세 선수와 오른쪽 24세 선수에게 일방적으로 정해질 뿐이다. 더구나 후방 미드필더진에 24-18-27-22세의 후배들이 포진해 있다면 32세 공격수는 이들에게도 지시만 하지 듣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경기에선 미드필더의 지시에 따라 공격수가 움직여야 할 경우가 더 많다. 물론 윗사람을 공경하는 한국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축구에서는 경기중에 선수들간의 쌍방향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으면 좋은 경기를 펼칠 수 없다. 선배가 후배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식은 정말 곤란하다.”
한국식의 엄격한 선후배 위계질서는 그라운드 안에서는 해악이다. 선배가 일방적으로 후배에게 지시를 내리고 후배는 이를 고스란히 따르는 것은 안된다. 그라운드 안에서는 누구나 동등하다. 상황에 따라 변화가 있을 뿐, 일방적인 지시는 말도 안된다. 그라운드 안에서의 대화는 모두 반말로 하라. 막내 이천수가 최고참 홍명보에게 ‘명보야, 이쪽으로 패스해’라는 식으로 말하라. 조직 내부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은 갈등의 소지를 없애고 업무 효율성을 높인다.
인간관계(sociogram)에 따른 선수들간의 보이지 않는 권위의식도 문제다. 경기도중 선수간에 쌍방향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고 선배가 후배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식의 커뮤니케이션만이 존재함으로써 결국 전력 극대화에 많은 지장을 초래한다. 히딩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젊은 선수들은 전술훈련이나 경기를 할 때 고참선수들에게 자주 얘기하라. 식사할 때도 선후배가 섞어 앉아 먹어라. 마사지 받을 때도 선배가 먼저 받지 말고 마사지룸에 도착하는 순서대로 받아라”고 지시했다.
이에 대해 김태영은 “경기할 때 가끔 ‘태영이’하고 부르는 후배도 있다. 경기하다보면 위험상황이 닥치는데 이때 서로 반말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한다. 주위에 상대팀 선수가 압박하면 ‘태영이 간다 간다’ 하고 신호를 보내주거나 코너킥 방어벽을 쌓을 때 후배 골키퍼가 선배한테 ‘아무개 좀더 왼쪽’하고 고함치기도 하는데 호칭이 중요한 게 아니라 ‘콜 플레이’의 목적을 더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말했다. 막내축에 드는 최태욱은 “훈련중 선후배간에 반말을 하게 된 데에 대해 부담은 없다. 그것도 플레이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예전에는 막내들이 공도 챙기고 훈련 후 뒷정리도 해야 했는데 그런 것 신경쓰다보니 자연히 휴식시간도 줄어들었다. 이젠 딱딱한 위계질서가 없어져 좋다”고 말했다.
3선의 밸런스를 살려라
히딩크는 경기장에서 지시를 내리는 주체는 선수의 나이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반드시 공을 가지고 플레이하는 선수의 옆에 있는 선수나, 더 넓은 경기 시야를 가지고 있는 후방에 있는 선수여야 한다며 이를 훈련했다. 가령 골키퍼는 수비수에게, 수비수는 미드필더에게, 미드필더는 공격수에게 의사를 전달한다. 경기장 전체를 보면서 서로 해야할 역할을 알려줌으로써 플레이를 유기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서 전제가 되는 것은 위치별로 자기 임무를 확실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임무에 철저히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히딩크는 자기 임무를 벗어난 선수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철저히 제동을 걸었다. 이에 따라 선수들이 자기 임무를 확실히 이해하고 동료들과 의사소통이 원활해짐으로써 수비-미드필드-포워드 등 3선이 좁은 간격을 유지하면서 공수전환을 빨리 할 수 있게 됐다. 이 3선 간격이 좁게 유지되면 상대에 대한 압박은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또 공격은 빨라지고 정확해진다.
그러나 언젠가 그가 가고 나면 이 호칭문제가 어떻게 될까. 가령 지금도 “대표팀에 존경하는 선배가 없습니다.” “월드컵 때 한국팀 첫 골은 내가 넣겠습니다.” “야구에는 박찬호 같은 월드 스타가 있는데 축구는 차범근 감독 이후 없어서 열받습니다.” “잉글랜드든 프랑스든 내가 보여줄 수 있는 만큼 보여주겠습니다”라며 톡톡 튀는 막내 이천수(21) 등 나이 어린 후배들의 행동에 대해 선배들은 마음이 꼭 편한 것만은 아니다. 이천수는 히딩크 감독이 경기중에 성과 존칭을 빼고 이름만 부르게 했을 때 멈칫멈칫하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열 살 이상 나이차가 나는 선배들에게 스스럼없이 ‘명보’ ‘태영’ 하고 불렀다. 전국가대표 고정운은 “젊은 선수들이 너무 당돌하고 맹랑해 못마땅한 점이 있다. 히딩크가 위계질서를 무너뜨리려 하지만 한국의 선후배 관계는 하루 이틀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 팀워크를 해칠 수도 있다. 대표팀 고참선수들이 나에게 자주 불만을 얘기한다. 유럽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선후배 질서가 뚜렷하게 존재한다”고 말했다.
서정원도 “막상 월드컵 무대에 서면 엄청난 긴장감이 몰려온다. 이를 컨트롤해줄 수 있는 사람은 코칭스태프가 아니라 경험 많은 선배들이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선배는 후배를 아끼고 후배는 선배를 존중해야 응집력이 생긴다”고 거든다. 수원삼성의 김호 감독도 “대부분 지도자들은 다루기 쉬운 젊은 선수들을 선호하지만 성공보다 실패할 확률이 높다. 젊은 선수들을 많이 기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노장선수를 안배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주장 홍명보는 “운동장에선 선후배 관계없이 선의의 경쟁을 해야 한다. 과거엔 운동장에서 후배가 선배에게 요구하는 건 용납되지 않았다. 이것은 결코 경기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축구장을 나오면 선후배간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 갑자기 스타가 된 어린 선수들의 경우에 이런 면을 간과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고 점잖게 훈계했다. 홍명보는 “프랑스월드컵 직전의 대표팀 분위기는 최고로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선후배간 의사소통이 100% 잘 이뤄져 단결된다는 느낌이 없었다. 나부터 일본에 진출해 있었고 다른 선수들 중에도 해외파들이 많았기 때문에 대표팀에서 오래 지내지 못하는 이들을 한데 묶어줄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해준 선배가 없었던 것 같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결국 이 문제는 원활한 쌍방 커뮤니케이션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리 크게 걱정할 일은 못되는 것 같다. 형이라고 부르느냐 아니냐의 호칭문제가 아닌 것이다.
가령 미국의 경우 1990년대 구조조정기에는 혹독하게 몰아붙이는 경영자들이 각광을 받았다. ‘편집광만이 살아 남는다’라고 했던 앤디 그로브 인텔 전회장이나 제너럴 일렉트릭의 잭 웰치 회장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구조조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호황을 맞으면서 좀더 민주적인 리더가 각광받고 있다. 유명한 경영분석가 짐 콜린스가 겸손한 리더의 전형으로 제시한 킴벌리 클라크사의 다윈 스미스 같은 사람이 그 같은 신경영자형의 하나다. 현재 한국대표팀은 구조조정기나 마찬가지다. 이런 의미에서 히딩크 감독은 적절하다. 그러나 이 다음 단계에선 어떤 유형의 감독이 와야 될지 그것은 앞으로 찬찬히 연구해볼 일이다. 가장 좋은 것은 히딩크가 계속 팀을 맡는 것이다.
히딩크는 포지션별로 2~3명씩 묶어 무한경쟁을 유도한다. 김병지-이운재의 골키퍼 경쟁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김병지와 이운재는 평가전에서도 연속으로 나온 경우가 거의 없다. 한번은 이운재가 나오면 다음 경기는 김병지가 나오는 식으로 그들을 끊임없이 경쟁시킨다. 일부에선 지나친 경쟁시스템은 선수들의 몸을 굳게 만드는 부작용을 일으킨다고 지적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4월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맹활약한 안정환과 차두리를 중국과의 평가전에는 출전시키지 않았다. 히딩크는 선수를 함부로 깎아내리지도 않지만 칭찬에도 조심스럽다. 그 대신 같은 포지션에서 경쟁하고 있는 선수를 보란 듯이 출장시켜 경쟁심을 유발한다. 훈련을 게을리하면 제 아무리 스타라도 애써 외면한다. 마찬가지로 자신감이 지나쳐 오버하는 경우 가차없이 경고한다. 튀니지와의 평가전에서 이천수가 큰 실수 없이 교체된 이면에는 기량연마보다는 매스컴에 연연하는 이천수의 생활태도에 대한 경고 메시지가 담겨 있다.
유상철은 “선수들끼리 주전경쟁을 벌이게 하기 위해 경기가 열리는 전날까지도 포지션을 말해주지 않는다. 히딩크 감독은 경기 당일 오전에 가서야 포지션을 알려준다”고 말했다. 개인기가 좋은 안정환이나 이천수에겐 “자신감이 넘치다 보면 개인 플레이를 하기 때문에 팀 플레이나 전체적인 전술의 틀이 무너진다. 좀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고 경고한다. 이영표는 “히딩크는 나에게 딱 한 가지를 고치라고 했다. 너무 여러가지를 하려 들지 말고 맡은 일만 확실하게 하라고 말했다. 상대 역습 때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수비가 어려워진다는 것이었다. 전에는 동료를 도와주는 것이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는데 히딩크 감독의 말을 듣고보니 그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특정 포지션에 한 선수를 고정시키지 않는다. 보통 한 선수는 최소한 2가지 이상의 포지션 역할을 소화할 것을 요구한다. 이천수는 “경기장에 나가기 전까지 내가 어느 위치에 서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늘 긴장해야 하고 여러 포지션에 대한 역할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축구경기는 전쟁이나 같다. 어떤 일이 어디서 일어날지 모른다. 한 선수가 부상으로 빠지면 다른 사람이 곧바로 그 역할을 해야 한다. 송종국 박지성 유상철 등은 상황에 따라 수시로 포지션이 바뀐다. 상대팀 감독이나 선수들은 이에 대비를 하기가 이만저만 골치 아픈 게 아니다. 미국의 어리나 감독은 “도대체 유상철이나 박지성 송종국의 포지션이 뭔지 모르겠다”며 한국기자들에게 하소연할 정도다. 처음 히딩크가 선수들의 위치를 수시로 바꾸자 국내 일부 감독들은 “지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빨리 베스트11과 포지션을 정해 전술 반복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히딩크는 아는지 모르는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결국 히딩크가 옳았다. 이것은 일본의 트루시에와 미국의 어리나 감독도 멀티 플레이어를 좋아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만큼 작전의 운용 폭이 커지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선수들이 여러 위치를 경험하면서 선수들간의 협동수비와 팀워크가 좋아진다. 전술 이해도가 높아져 시야가 넓어진다. 임기응변과 위기대처 능력도 눈에 띄게 좋아진다. 멀티플레이어의 대표적인 예가 박지성과 송종국이다. 이 중에서도 박지성은 국내 전문가들의 눈총이 따가웠다 . “골을 터뜨리거나 제대로 된 어시스트를 기록하지도 못하는 박지성을 왜 히딩크는 꾸준히 선발 출장시키는가” 하는 것이 그 주된 내용이었다. 그러나 박지성은 결국 히딩크의 생각대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90분간 줄기차게 뛰어도 지치지 않는 체력과 가끔 벼락 같은 중거리 슛으로 상대 수비를 흔들어놓는다. 주된 임무가 공격이면서도 역습을 당하면 가장 먼저 상대 공격수나 미드필더를 잡는다. 어느 감독이 이런 선수를 예뻐하지 않겠는가.
리더쉽 6 公은 公, 私는 私
축구는 축구고 사생활은 사생활이다. 그는 애인 엘리자베스를 대동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 말한다. 사적인 질문엔 왜 남의 사생활을 물어보냐며 불같이 화를 낸다. 물론 선수들 사생활에도 전혀 간섭 안한다. 술을 마시든 담배를 피든 전혀 ‘불간섭주의’다. 그러나 선수들은 술을 마시라고 해도 못 마신다. 워낙 체력훈련의 강도가 세 옛날같이 밤에 시내로 술을 마시러 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히딩크는 서귀포에서 5월17일부터 1박2일간 선수들에게 짧은 휴가를 주며 “당신들은 다 성인들이다. 자기의 행동에 책임질 나이가 됐다. 짧은 휴가 동안 무슨 일을 해도 개의치 않겠다. 나 또한 휴가시간을 갖겠다. 성생활은 인위적으로 막거나, 너무 지나쳐도 좋지 않다. 개개인의 성생활은 스스로 판단할 문제다. 인종별 개인별로 생리학적인 특성이 다를 뿐 아니라 생활패턴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휴가중 선수들 성생활 문제는 간섭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홍명보는 “히딩크는 가식이 없다. 노장에 대한 프리미엄도 없고 어린 선수들에 대한 편견도 없다. 선수들의 생활도 개인에게 맡긴다. 담배 술 여자문제에 대해 한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 개인생활에 대해선 철저히 맡겨둔다. 하지만 그라운드에만 나가면 엄청난 에너지로 선수들을 꽉 틀어쥔다. 무서움보다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고 말했다.
# 리더쉽 7 크레믈린식 정보독점
대표팀의 훈련시간 같은 사소한 사안도 히딩크의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른다. 당장 오늘 오후 훈련이 몇 시에 시작되는지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다. 경기가 있는 날 선발 출전 선수가 누구인지도 전혀 알 수 없다. 히딩크는 철저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이 주인공이 돼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쳐다보게 한다. 허진 언론담당관은 “히딩크는 정말 크렘린이다. 선수들과 언어가 안 통하는 것을 이용해 정보를 독점한 뒤 선수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고 혀를 내두른다.
히딩크는 “선수에 대한 평가는 말하지 않겠다. 나름대로 평가하고 있지만 그것은 나를 위한 정보일 뿐 공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미국과의 경기를 앞두고 히딩크는 “나를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출전 멤버나 훈련 상황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말라”고 선수단에 엄명을 내렸다.
히딩크는 축구중독자다. 5월20일 그는 새벽3시에 벌어진 미국-네덜란드 평가전을 보면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의 잠자는 시간은 하루 4∼5시간밖에 안된다. 그는 축구경기 비디오광이다. 보통 하루에 2∼3경기는 보고 잔다. 어느땐 고트신 비디오분석가와 함께 밤새도록 한국팀경기 비디오를 보고 약점 등을 분석한다. 월드컵 기간중에도 그는 틈만 나면 한국과 상대할 팀뿐만 아니라 다른 팀의 경기도 TV를 통해 지켜보며 각팀의 전술 등을 분석했다. 훈련 때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성에 차지 않으면 직접 선수들과 몸을 격렬하게 부딪히기도 한다. 어느땐 선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자상하게 개인교습을 하다가도 맘에 안 들면 그 자리에서 고함을 친다.
어퍼컷을 먹이는 듯한 그의 골 세리머니도 열정적이다. 에메 자케 전 프랑스 감독은 “축구는 열정과 관대함 인내의 스포츠다. 열정은 기쁨과 힘이고 관대함은 상대에 대한 배려다. 인내는 아시아인들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지혜다. 난 이런 아시아인의 삶의 자세를 좋아하고 배우려 애쓰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축구를 ‘삶의 학교’라고 한다. 인생에서 생겨나는 모든 일은 그라운드에서도 일어난다. 축구에는 삶처럼 슬프고 위험하기도 하며 기쁜 일도 많다”고 말했다.
이런 의미에서 히딩크는 축구와 궁합이 딱 맞는다. 그만큼 그는 축구밖에 모른다. 모든 것을 축구와 관련지어 생각한다. 히딩크는 이번 월드컵 기간에 전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에게 각 경기를 보고 어디가 몇 대 몇으로 이길 것인지 ‘내기’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도 코칭스태프와 5000원 정도씩을 걸고 내기를 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그 이유를 “월드컵과 같은 큰 대회에서 지나치게 우리 경기에만 신경을 쓸 경우 오히려 긴장만 고조될 뿐 훈련효과를 높이는 데 좋지 않다. 배팅을 통해 월드컵을 즐기면서 긴장도 풀고 세계축구 흐름도 파악하면 훈련효과를 두 배로 높일 수 있다. 한국선수들은 긴장은 잘하지만 이완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실제 그는 이번 배팅에서도 코치들을 거의 다 이겼다. 그만큼 그의 분석력은 탁월하다. 히딩크는 코치진들에게 “젊은 코치들이 나만큼도 세계축구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감독을 보좌하려 하느냐”며 눈총을 줬다고 전해진다.
# 리더쉽 9 독해져야 살 수 있다
히딩크는 유럽·남미팀들의 교묘한 플레이에 당하기만 하는 순진한 한국축구를 독하게 만들었다. 그는 퇴장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상대 기를 꺾을 수 있는 플레이를 원한다. 히딩크는 5월4일 서귀포 훈련 도중 갑자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격분했다. 그것은 예비엔트리에 포함된 여효진이 7대7 미니게임 도중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진 상대편 최용수를 친절하게 일으켜주며 “괜찮으세요”라고 했기 때문. 히딩크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득달같이 여효진에게 달려가 “게임에 집중하라. 그(최용수)를 돕지 말라. 실전에서도 그럴 것이냐”며 혼쭐을 냈다.
히딩크는 “한국선수들이 감독의 지시를 받아들이고 임무를 완수하려는 자세는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유럽팀에 주눅들어서는 유럽과의 차이를 줄일 수 없다. 두려워해서는 이길 수 없다. 그들과 당당히 맞서 싸워야 한다. 이기고 있을 때도 계속 밀어붙이는 강인함이 없으면 이길 수 없다. 조금만 느슨해지면 언제든지 동점을 허용할 수 있다. 선진축구는 아주 도전적이고 거칠다. 그래서 훈련을 시킬 때 내가 심판을 보기도 하는데 사소한 파울엔 휘슬을 불지 않을 때도 있다. 처음엔 선수들이 왜 휘슬을 불지 않냐고 항의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국제대회에 나가보면 심판이 사소한 파울에도 휘슬을 불 때가 있다. 선수들은 그러한 사소한 것에 신경쓰면 안된다. 오직 경기에 몰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히딩크는 가끔 미니게임 훈련에서 분명히 A팀의 볼인데도 불구하고 “B팀의 볼이다”고 일부러 다른 팀에 볼을 던져준다. 이에 대해 한국선수들이 아무런 항의 없이 볼을 차면 “왜 이렇게 반항정신이 없느냐”며 질타한다. 정식경기 중엔 코너킥이나 드로인 선언 때 자꾸 자기 볼이라고 제스처를 해야 심판으로부터 어드밴티지를 얻는다고 지적한다.
# 리더쉽 10 강팀과의 담금질
히딩크는 “한국선수들이 여러 번의 해외 원정을 통해 악조건을 극복하는 방법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한국은 월드컵 본선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어떻게 팀을 이끌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일단 선수들의 소극적인 자세가 문제였다. 하지만 지난해 9월 이후를 보면 강팀과도 주눅들지 않고 대등한 경기를 하고 있다. 공수가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우리는 결코 쉽지 않은 길을 택했다. 아시아선수들이 약하다고들 말하는데 나는 동의할 수 없다. 계속 그렇게 생각하는 게 문제다. 그렇게 자포자기하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세계수준에 다가설 수 있다. 한국팀은 강팀을 만나면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좀더 긍정적으로 나서야 한다. 프랑스와 같은 강팀과 싸운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플레이하면 발전이 있다”고 말한다.
히딩크의 축구철학은 한마디로 ‘지배(Dominate)와 압박(Press)’이다. 90분내내 경기를 지배하며 경기의 주도권을 쥐는 것이다. 그러려면 공간과 시간을 상대보다 먼저 점유하고 지배해야 한다. 공간에서의 ‘수적 우세’와 ‘공간 선점’을 해내야 한다. 당연히 체력과 스피드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히딩크가 흔히 “운동장에서는 체력과 스피드가 앞서는 선수가 결국 이길 수밖에 없다”거나 “두 번 이상 볼을 터치하지 말고 낮게 패스하라”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윤정환과 안정환 등 테크니션보다는 체력과 스피드가 뛰어난 어린 차두리를 좋아하는 것도 그렇다. 히딩크는 이런 자신의 철학을 실현하는 데는 실전 경험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깨지더라도 강한 팀과의 실전을 원한다. 그는 “감독의 임무는 선수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들이 강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강하고 똑똑한 선수들이 있어야 하고 이런 선수들은 큰 게임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 리더쉽 11 과학적인 훈련과 심리전
레이먼드 베르하이옌 피지컬트레이너, 고트비 비디오분석관 등을 영입해 과학적 훈련을 실시했다. 히딩크가 “전에는 선수들이 순간동작을 한 후 심장박동수가 180대에서 120대의 정상맥박으로 돌아오는 데 3분씩 걸렸지만 이제 유럽선수 수준인 1분 안팎으로 단축됐다. 그만큼 회복속도가 빠르다”고 자신하는 것도 과학적 훈련의 결과다. 황선홍은 “훈련방법이 다양하고 재미있다”고 말한다. 이영표도 “무조건 강도 높은 훈련보다 새로운 방법을 많이 시도하고 왜 이 훈련을 시키는지 이해시킨다. 규율 안에서는 굉장히 엄격한데 벗어나면 참 재미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