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호

“동생들 문제는 내 책임, 그러나 희생양은 될 수 없다”

DJ 장남 김홍일 의원의 심경 고백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입력2004-09-06 14: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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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인은 때를 잘 맞춰 말해야 한다. 너무 일찍 얘기하면 역효과를 내기 쉽고, 너무 늦게 발언하면 상품가치가 떨어진다. 지혜로운 정치인이라면 때가 아닌 경우, 말문을 닫아야 한다. 현직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 의원이 바로 그런 처지에 놓여 있다. 하지만 김의원은 ‘신동아’의 끈질긴 인터뷰 요청에 조심스럽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김홍일 의원은 이따금씩 측근들과 노래방을 찾는다. 그는 한번 마이크를 잡으면 여러 곡을 불러야만 직성이 풀리는 체질이다. 그래서 측근들은 김의원이 7∼8곡의 레퍼토리를 다 부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김의원의 애창곡은 나훈아의 ‘사랑’과 김원중의 ‘바위섬’이다. 멜로디가 무난한 데다 무엇보다 가사가 마음에 든다는 것이 김의원의 얘기다.

    ‘행여 당신 외로울 땐 내가 당신 친구가 되고, 행여 당신 우울할 땐 내가 당신 웃음 주리라.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사랑)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 곳에, 세상 사람들 하나둘 모여들더니,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바위섬과 긴 파도라네’(바위섬)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게 마련이다. 노래의 가사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할수록 애정을 갖게 된다. 김의원이 부를 때마다 마음이 편해진다는 ‘사랑’과 ‘바위섬’의 공통된 정서는 아마도 외로움과 그리움일 것이다. 김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의 장남이자 ‘국민의 정부’ 탄생의 일등공신이었지만, 동생들이 연루된 게이트가 잇따라 터지면서 정치적 부담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민주당이 6·13 지방선거에서 완패하면서 또다시 ‘김홍일 희생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김의원이 노래를 통해 외로움과 그리움을 호소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미국에 다녀와서 봅시다



    ‘신동아’가 김의원측에 인터뷰를 처음 요청한 것은 2001년 10월이다. 당시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은 ‘정현준 게이트’의 ‘3K’ 중 한 명이 김의원이라고 주장했으며, 안경률 의원은 ‘이용호 게이트’의 배후인물로 김의원을 지목했다. 때마침 김의원이 제주도 휴가를 떠나면서 정학모 LG스포츠단 사장, 박종열 대검 공안부장 등과 동행한 사실이 밝혀져 정국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또한 11월엔 “김의원에게 ‘건달을 만나지 말라’고 조언했다”는 정성홍 전 국정원 경제과장의 주장까지 터져나왔다.

    야당의 집중공세에 김의원은 선별대응으로 맞섰다.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문제에 대해서는 짤막하게 반박하고,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사안은 소송을 불사했다. 실례로 김의원은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문제삼은 여운환씨와의 관계에 대해 “우연한 만남이었다”고 주장했으며, 제주도 휴가를 ‘총체적 부패여행, 김홍일 커넥션’으로 몰아세운 한나라당 대변인을 검찰에 고소했다.

    한나라당의 ‘김홍일 때리기’는 10·26 보궐선거에서 짭짤한 효과를 보았다. 한나라당은 당초 접전을 예상했던 서울 구로을과 동대문을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낮은 투표율도 변수였지만, 김의원과 관련된 언론보도가 표심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보궐선거가 끝난 뒤 한나라당에서는 조심스럽게 페이스 조절론이 등장했고, 민주당에서는 ‘반(反)동교동’을 전면에 내세운 정풍운동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김의원은 민주당 내에서도 표적이 되었다.

    ‘신동아’는 이 무렵 시중에 나돌고 있는 각종 루머의 진상을 김의원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다. 날마다 수많은 의혹이 쏟아지고 있는 데 비해 김의원의 해명은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의원은 한사코 인터뷰를 고사했다. “루머는 루머일 뿐이고, 진실은 분명히 밝혀질 것”이라는 게 김의원측의 답변이었다.

    2001년 12월 말. ‘신동아’는 두번째로 김의원측에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 때도 김의원을 곤혹스럽게 만든 사건들이 연이어 터졌다. ‘민주당 당료 최택곤씨가 검찰 간부들에게 김의원 명의의 격려금을 전달했다’는 언론보도가 나왔고, 곧이어 박정훈 전민주당 의원의 부인 김재옥씨가 “김우중 전대우그룹 회장이 보낸 돈 상자를 김홍일 의원이 직접 찾아갔다”고 폭로했다.

    이번에도 김의원은 사안별로 분리대응했다. 돈 살포설을 보도한 언론사에 강력히 항의하는 한편, 김재옥씨 주장에 대해서는 “그 분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김의원은 언론사에 대한 소송은 가급적 자제했다. 왜 그랬을까. 이 무렵 한 측근은 김의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의원님, 어려울 때 도와줄 곳은 그래도 언론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억울하지만 언론사와는 잘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의원은 평소에도 “기자들이 나를 많이 동정해줘서 늘 고맙게 생각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2002년 1월 초 국회에서 기자와 마주쳤을 때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언론이 아버지를 너무 몰아치는 것 같아서 화가 날 때가 많아요. 하지만 저한테는 잘해줘요.”

    아무튼 김의원은 이번에도 인터뷰를 거절했다. 하지만 ‘신동아’가 거듭 요청하자, ‘지켜지기 힘든’ 약속을 하나 했다. “미국에 다녀와서 봅시다”. 이 무렵 김의원은 신병치료를 위해 미국행을 서두르고 있었다. 최소 달포(한달 반) 이상 걸리는 장기체류 일정이었다. 그의 몸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정치권에서는 민주당 경선을 목전에 두고 떠나는 김의원의 행보를 예사롭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김의원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는 게 민주당 사람들의 공통된 얘기다. 그것은 김의원이 현직 대통령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해왔고, 또 현직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김의원은 애초부터 민주당 대통령후보를 뽑는 현장에 참석할 수 없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의원은 출국 직전 기자들과 만나 “미국에서 돌아오면 동교동의 의견을 모아 경선에 간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면에 나서지는 않겠지만, 소신은 분명하게 밝히겠다는 뜻이었다.

    2002년 1월7일 김의원은 미국으로 떠났다. 로스앤젤레스의 UCLA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서였다. 다음날 이희호 여사가 김의원을 간병하기 위해 출국했다. 수술은 비교적 잘 끝났다. 청와대는 “경과가 좋다”는 논평을 발표했고, 김의원측은 “물리치료를 꾸준히 할 경우, 상당 부분 회복될 수 있다”는 병원측의 진단내용까지 공개했다.

    2월 말. 정치권에 김의원이 조만간 귀국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김의원은 이때까지 치료가 덜 끝난 상태였다. 그래서 귀국은 3월로 미루어졌는데, 민주당 경선이 변수로 등장했다. 경선을 치르는 와중에 김의원이 들어올 경우 ‘김심(金心)’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김의원의 측근을 찾아와 “당분간 들어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김의원이 귀국을 미루는 사이 정치적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이번엔 두 동생에 관한 루머가 김의원의 발목을 잡았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이 김홍걸씨의 미국 한미은행 예금계좌 입출금 자료를 폭로했고, 곧이어 최규선 미래도시환경 대표와 김홍걸씨의 관계가 최씨의 비서였던 천호영씨의 증언을 통해 공개됐다. 또한 김홍업 아태재단 부이사장과 김성환씨의 자금거래 의혹이 터져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러자 한나라당은 김의원까지 포함한 ‘DJ 친인척 국정조사’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김의원의 지역구인 전남 목포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민주당 후보 경선을 앞두고 불공정 시비가 벌어진 것이다. 김의원은 2001년 가을 차기 목포시장을 염두에 두고 김흥래 전행정자치부 차관을 접촉한 일이 있다. 김 전차관이 목포시장 경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현직 시장을 비롯해 출마를 준비중이던 후보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김의원은 지구당위원장으로서 이 같은 사태를 외면할 수 없었고, 결국 최악의 조건에서 귀국을 서둘러야 했다.

    민주당 경선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 4월27일 김의원이 마침내 돌아왔다. 주변에서는 귀국을 만류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김의원은 “내가 무슨 잘못이 있냐”며 고집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또 홍걸씨와 최규선씨의 관계가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홍걸이에게 여러 차례 ‘최규선과 가깝게 지내지 말라’고 충고했으며, 아버지(김대통령)도 그렇게 얘기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김의원은 의식적으로 홍걸씨 문제가 가족비리로 확대되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김의원은 정치권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 목포시장 후보경선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다. 그는 “처음엔 김 전차관을 밀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유경선을 해야 한다’고 얘기해서 현재 중립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김의원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목포 현지에서는 김의원의 마음이 김 전차관에 쏠려 있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김의원이 귀국하고 나흘 뒤인 5월1일. 목포에서는 ‘작은 이변’이 나타났다. 목포시장 후보경선에서 전태홍 목포상공회의소 회장이 김 전차관을 누른 것이다.

    5월 중순, 정국은 더욱 뜨거워지고 있었다. 민주당은 국민경선제를 통해 ‘노풍(盧風)’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홍업씨와 홍걸씨에 관한 의혹이 연이어 터져나오면서 ‘노풍’도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한나라당은 ‘DJ 3형제’를 싸잡아 비난했고, 민주당에서는 ‘김홍일 희생론’이 등장했다. 일부 소장파 의원들은 “김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을 경우, 집단행동도 불사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토요일 밤의 기습 방문

    물론 김의원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나는 아버님 임기가 끝날 때까지 할 일이 있다. 정치는 그만두고 싶다고 해서 그만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김의원과 가까운 동교동계 의원들도 거들었다. 한화갑 대표는 “지역구민의 결정이 중요하다”고 말했고, 최재승 의원은 “의원직 사퇴는 동료의원들이 얘기할 부분이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신동아’는 이 무렵 김의원 인터뷰를 다시 추진했다. 이번에도 김의원은 완곡하게 사양했다. 기자가 “‘미국에 다녀와서 보자’고 했던 약속을 거론하자, 김의원측은 “상황이 이렇게까지 꼬일 줄 몰랐다”고 답했다. 김의원은 “동생들이 물의를 일으킨 마당에, 형이 나서서 얘기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말도 했다.

    정상적인 취재로는 인터뷰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기자는 인터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김의원이 무척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사석에서 “동생 일만 아니라면…”이라며 당당하게 나설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아쉬워했다고 한다. 인터뷰를 하고 싶어도 응할 수 없는 상황. 김의원은 그것을 가장 답답해했다.

    6월1일 밤 11시30분. 기자는 김의원이 집에서 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예고 없이 서교동 자택을 찾았다. 초인종을 누르자 비서가 달려나왔고, 현관 앞에 김의원이 나타났다. 그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들어와서 차나 한잔 하자”고 말했다. 측근들에 따르면 김의원은 최근 수개월간 밤늦게 손님을 맞은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먼저 건강부터 물었다. 김의원은 1970~80년대에 민주화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그 후유증으로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발음을 정확하게 못하는 신병을 앓아왔다. 김의원이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측근들은 한동안 기대에 부풀었다고 한다. 출국 전과 비교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귀국한 뒤 치료에 전념할 수 없었다. 미국 병원에서는 ‘물리치료를 꾸준히 받아야 한다’고 권고했지만, 국내 정치상황은 그를 한가롭게 놓아주질 않았다.

    “몸은 좋아지는 것 같은데, 아직도 조금만 무리해도 피곤해요. 요즘엔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더 힘들어요.”

    김의원은 건강관리에 철저하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날마다 수영장을 찾는다. 여느 정치인 못지않게 식사모임이 많지만, 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없다. 아주 기분이 좋을 때 맥주와 사이다를 섞어 3분의 1잔 정도 마실 뿐이다. 이런 김의원을 바라보는 보좌진의 마음은 안타깝기만 하다. 한 측근은 이런 말까지 한다.

    “의원님이 다른 정치인처럼 밤에 룸살롱 가서 술 마시고, 주말에 지인들과 필드에 나가서 골프치는 모습을 본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아요.”

    김의원은 질문에 거의 답하지 않았다.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심정으로 기자를 집안에 들여놓기는 했지만, 인터뷰는 거절하겠다는 뜻이었다. 다만 그는 세간의 소문에 두서없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러다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에 부딪히면 ‘노코멘트’라며 말을 끊었다.

    “대통령과 비서실장으로부터 함구하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가족문제가 나오니까 아버지(김대통령)께서 그렇게 얘기하신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김의원은 인터뷰가 어려운 사정을 길게 설명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워낙 민감한 시기라서 자신의 얘기가 정확하게 전달되기 어렵다는 점과, 재판과 수사가 진행중인 동생들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인터뷰 고사의 주된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김의원이 던지는 말 속에서 그의 고민을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김의원은 민주당 소장파들이 자신의 탈당과 의원직 사퇴 문제를 거론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탈당’이라는 말이 나오자 얼굴색이 다소 붉어지는 모습이었다.

    “민주당은 내가 몸담았던 당이고, 현재 몸담고 있는 당이며, 앞으로도 몸담을 당이에요. 내가 몸을 던져서 당이 좋아질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가겠습니다. 민주주의가 살고 당이 살 수 있다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탈당문제와 관련, 김의원의 한 측근은 최근 “이런 상황에서 당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의원이 탈당할 경우 정국은 엄청난 파장에 휩싸일 것이라는 게 그의 견해다. 하지만 김의원의 또 다른 측근은 “대통령도 당적을 버리는 마당에, 못 떠날 것도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의원의 지역구인 목포에서는 “차라리 당적을 버리자. 당을 떠나서 홀가분하게 지역발전에 힘쓰는 게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아직까지 김의원이 직접 관련된 비리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김의원은 여야 모두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민주당의 소장파는 당을 위해서 ‘희생양’이 되라고 요구하는 반면, 한나라당은 아직까지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게이트의 배후인물로 김의원을 주시하고 있다. 김의원으로서는 둘 다 억울할 수밖에 없다. 야당은 그렇다치고 민주당 소장파가 제기한 이른바 ‘장자책임론’은 김의원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고 있다.

    ―화가 난다거나 억울하다는 생각은 안 듭니까.

    “그런 게 없다면, 하나님이죠. 열가지 중 한가지만 화를 내고, 나머지는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어요.”

    ―그럴 때는 어떻게 기분을 풉니까.

    “예전에는 쇼핑을 자주 했는데, 요즘엔 힘들어요. 아내한테 SOS를 쳐서 하소연하고 그럽니다.”

    김의원은 확실히 민주당 소장파들이 서운한 모양이다. 기자가 “대통령이 탈당하던 날, 민주당 사람들 표정이 무척 침울했습니다”라고 말하자, 김의원은 “눈이 참 좋으시군요. 내 눈에는 그게 보이지 않던데요”라고 받았다.

    제가 검찰청에 나가렵니다

    동교동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김의원은 홍업씨와 홍걸씨에게 깊은 애정을 가졌다고 한다. 아버지(김대통령)가 거물 야당 정치인으로 험하게 살다보니, 동생들은 자연스럽게 장남인 김의원에게 의지할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김의원은 지난해 ‘나는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는다’라는 자서전을 출간했는데, 여기에도 동생들에 대한 감성이 진하게 배어 있다.

    ‘나는 홍업이가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이모가 꼭 와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모에게 편지를 썼다. ‘이모. 홍업이가 중학교에 들어갑니다. 입학식에 꼭 오셔야 합니다. 만약 그날 이모가 참석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모를 보지 않을 겁니다.’ 그날 이모는 만사를 제쳐두고 홍업이 입학식에 참석했는데, 학부형 좌석에 앉아 많이 우셨다.’

    홍걸씨의 검찰 출두 직전에 벌어졌던 김의원의 행동에서도 동생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읽을 수 있다.

    5월14일 미국 시애틀에 거주하던 홍걸씨는 일본을 거쳐 극비리에 귀국했다. 최규선씨를 통해 이권청탁과 함께 돈을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서다. 이 무렵 김의원은 어머니 이희호 여사에게 전화를 걸어 동생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목포로 떠났다. 다음날 일간신문에 홍걸씨가 검찰에 출두한다는 언론보도가 나오자 김의원은 급히 보좌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생이 출두할 때 내가 검찰청에 나가야겠다.”

    보좌진들이 놀란 건 당연했다. 두 사람이 모두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김의원이 동생의 출두 모습을 보기 위해 검찰청에 나간다는 것은 해외토픽에 나올 만한 일이다. 홍걸씨가 출두하던 16일 아침, 김의원은 검찰청행을 의식한 듯 말쑥한 차림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이희호 여사에게 연락했다. “어머니,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김의원은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마음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때서야 보좌진들도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홍걸씨를 면회했습니까.

    “아직 못했어요. 위로해주고 싶은데 주변에서 자꾸 말려서 좀 늦어질 것 같아요. 생각보다는 수감생활을 잘 견디고 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정치권에서는 김의원이 벤처회사 설립 문제를 놓고 홍걸씨와 다투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사실인가요.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막내(홍걸씨)하고 나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납니다. 아버지와 아들처럼…. 불화 같은 건 없었습니다.”

    ―장남으로서 평소 동생들을 어떻게 관리해왔습니까.

    “지난 연말에 가족모임이 있었어요. 그 자리에서 제가 ‘지금까지는 아버지가 우리를 도왔지만, 이제부터는 우리가 아버지를 도와야 한다’고 얘기했어요. 그런데 내 말이 힘이 없었는지 이런 사고가 터졌습니다. 형으로서 큰 책임을 느낍니다.”

    김의원은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김대통령을 수시로 찾아갔다. 동생 문제도 있지만, 김대통령의 건강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김의원은 청와대를 다녀올 때마다 측근들에게 “대통령은 생각보다 건강하시니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김의원은 기자에게 김대통령의 근황에 대해서는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홍걸씨의 친어머니인 이희호 여사에 대한 죄송스런 마음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친어머니보다 더 잘해주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셋째(홍걸씨)를 잘 돌봐주라는 마음으로 여겼어요. 홍걸이는 어려운 시절에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어쩝니까. 큰형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으니….”

    예상대로 김의원은 할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자신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와 언론보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생각을 밝혔다. 그는 불쑥 여운환씨와의 관계를 확대 해석한 신문들을 비판하다가, 김영삼 전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와 자신을 비교하기도 했다.

    “언론이 여운환씨 문제를 보도하면서, 내가 조폭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썼잖아요. 그런데 여운환씨는 조폭과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어요. 나는 정말 억울해요.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고…. 나는 그 사람을 한번 만나서 인사한 게 전부인데, 언론은 그걸 문제삼았어요. 내가 그 사람하고 무슨 일을 꾸민 것도 아니고, 가족과 함께 비행기 타고 제주도 간 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김현철씨처럼 국정에 개입하거나 인사에 관여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자리를 맡지 않았어요. 연청 때 같이 일했던 사람들도 이번 지방선거에서 전혀 배려하지 못했습니다. 나와 친한 사람들은 나 때문에 오히려 피해를 보고 있는 상황이에요. 그런데도 루머는 김현철씨보다 제게 더 심한 것 같아요.”

    ―한나라당에는 과거 민주화운동을 함께한 정치인들이 많은데, 그분들도 김의원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참 좋은 분들이에요. 복잡한 문제도 잘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하지만 며칠 지나면 전혀 다른 상황이 됩니다. 요즘 같아서는 정치하는 사람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정치라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하려고 정치를 시작한 게 아닌데, 답답한 심정입니다. 우리 당과 남의 당을 따질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당보다 나라가 먼저인데, 정치인들이 당만 앞세우는 것 같아요.”

    자정을 넘기면서 김의원은 다소 피곤한 모습을 보였다. 기자가 “김의원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정식으로 인터뷰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자, 김의원은 “지금은 힘들다. 내 처지를 이해해 달라”고 답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길 20여 분. 김의원은 12시50분쯤 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인터뷰를 해야 할 것 같다. 자세한 건 내일 얘기하자.” 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의원은 현관 앞까지 배웅했다. 그는 비서의 부축을 받지 않은 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최근 수년 래 가장 건강한 모습이었다.

    하루만에 취소한 인터뷰

    6월2일 오전. 김의원의 측근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터뷰는 어렵다는 얘기였다. 김의원의 보좌관은 “김의원이 밤새 고민했고, 아침에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후 ‘신동아’와 김의원 측은 수차례 입씨름을 벌였다. 하지만 김의원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지방선거 때문에 목포에서 살다시피했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6월9일 11시50분 기자는 목포행 비행기를 탔다. 목포에 도착했을 때 김의원은 모 호텔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김의원은 몸이 불편하다보니 선거운동 방식도 다른 정치인들과 차이가 있다. 직접 현장을 누비는 일은 거의 없고, 그룹별로 접촉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날도 김의원은 시간대별로 다양한 모임에 참석했다.

    오후 3시30분. 김의원이 목포에 내려올 때 묵는 이로동 아파트에 도착했다. 아파트 입구에는 붉은색 미니버스가 서 있었는데, 김의원이 목포에서 타고 다니는 차량이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이후 김의원이 목포지역을 순회할 때면 여러 대의 검은색 승용차가 따라붙었다고 한다. 김의원은 그것이 시민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준다며, 미니버스를 구입해 당직자들이 함께 움직이도록 조치했다는 후문이다.

    김의원은 민주당 전태홍 목포시장 후보의 선거운동원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목포는 무소속 김정민 후보가 앞서가다가 민주당 전태홍 후보가 추격하는 중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목포에서 이상기류가 형성됐다는 것은 김의원에게 엄청난 부담이다. 하지만 그는 밝은 모습으로 선거운동원들과 농담까지 주고받았다.

    불쑥 나타난 기자에게 김의원은 “나 인터뷰 안 해요”라며 방어선을 쳤다. 그리고는 기자가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선거 얘기를 계속했다. 화제는 전남도청 이전문제였다.

    김의원은 2001년 한해 동안 목포를 70여 회나 방문했다. 이 때문에 서울-목포간 마일리지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측근들에 따르면 김의원은 서울에서 피곤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목포에 도착하면 활기를 찾는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 김의원은 “목포에 도착하면 어머니 품에 안긴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호남지역에서는 무소속 돌풍이 거세게 일었다. 이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인기하락,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 스캔들, 경선과정의 불협화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과거에는 민주당 공천이 곧 당선이었지만, 이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급기야 민주당 지도부는 광주시장 후보를 교체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현역 민주당 의원이 오히려 무소속 후보를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목포시장도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혼전으로 치러지고 있었다. 1998년 선거에서 아깝게 낙선한 목포대 김정민 교수는 선거 초반 민주당 후보를 월등히 앞섰다. 하지만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지지율 격차가 크게 좁혀졌다. 호남권 전체에서 무소속 후보가 약진하는 가운데, 광주시장과 목포시장 만큼은 정반대의 양상을 보인 것이다. 이것은 두 지역이 갖는 정치적 특수성과 무관하지 않다.

    한때 민주당 목포시장 경선에 나서려다가, 김의원의 권고를 받아들여 출마를 포기한 최기동 목포시의회 의장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전태홍 목포시장 후보의 총괄상황실장을 맡고 있다.

    “예전에는 감추어져 있던 것들이 다 까발려지니까 대통령이 모든 것을 잘못한 것처럼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대통령이 으째 그랬으까이’ 하면서 안타까워한 거죠. 그런데 거리에 나가서 ‘구체적으로 뭐가 잘못이냐’고 따지면서 하나하나 설명하니까 사람들 마음이 바뀌더라고요. 사실 과거 정권과 비교하면 빙산의 일각이잖아요. 제가 노인들 앞에서 ‘대통령이 지금 청와대에서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이제 목포시민들이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면 목포시민들이 유달산에 저택을 지어서 모셔오자’고 말하니까, ‘옳소’ 하면서 박수를 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김홍일 의원의 지역구인 목포에서도 대통령 아들의 비리는 선거의 최대 쟁점이었다. 무소속 김정민 후보 캠프의 박종빈 본부장은 “홍업씨와 홍걸씨 문제 때문에 김홍일 의원도 큰 타격을 받고 있다. 목포 시민들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김대중 대신 이회창을 찍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며, 12월 대선에서도 민주당이 고전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맞서 김홍일 의원 측은 동생들 문제와 자신의 거취를 철저히 분리하고 나섰다. 최기동 의장은 “솔직히 김의원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 구체적인 물증은 아무것도 없다. 시민들은 우리가 정권을 잡으면 엄청나게 달라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결과가 그렇지 않아서 서운해하고 있을 뿐이다”고 말했다.

    나는 부족한 점이 많아요

    오후 5시. 김의원이 측근들과 함께 집을 나섰다. 그는 미니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목포지역 운송업체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서다. 차 안에서 수행원들과 일정을 점검하던 김의원은 창 밖을 바라보며 한마디 툭 던졌다. 차창 밖으로 대형 건물이 하나 보였는데, 바로 목포예술회관이었다. 그는 국민의 정부에서 호남지역이 특혜를 받고 있다는 세간의 시각에 무척 신경쓰는 모습이었다.

    “저게 말이에요. 노태우 대통령이 목포에 와서 준 선물입니다. 30억원을 지원받아서 공사를 시작했는데, 도중에 돈이 다 떨어졌어요. 그러다가 제가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130억원 이상을 더 투입해서 완공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아버지가 대통령 되신 다음에 만들었다고 뒷말들을 하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5시20분. 김의원은 예정시간보다 40분 일찍 식당에 도착했다. 김의원이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곁에 바짝 다가섰다. 기자가 취재수첩을 펴들기 무섭게 그는 “인터뷰는 안 한다고 했습니다”라며 물러섰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오는 사람’을 막지 않았다. 김의원의 말은 일주일 전보다 훨씬 알아듣기 어려워 보좌관이 곁에서 내용을 풀어주었다. 지방선거를 지원하느라 무리한 모양이었다. 그러고보니 걸음걸이도 훨씬 힘들어 보였다.

    김의원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것은 1980년대 초다. 김대중 대통령은 감옥에서 풀려난 뒤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김의원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너만은 남아서 나 대신 동교동을 지켜주었으면 한다. 네가 남아 있어야 훗날을 기약할 수 있지 않겠느냐.” 물론 그 이전에도 김의원은 동교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정치행보를 시작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형제들 중에서 누가 아버지를 도와드릴 것인가를 진지하게 얘기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맏형으로서 책임을 지고 나선 겁니다. 아버지를 대통령으로 만들기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했지만, 저는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김의원은 당초 1988년 13대 총선 출마를 준비했었다. 하지만 1987년 대선에서 양김씨가 분열한 데 따른 비난여론이 높아 포기했다. 1992년에는 권노갑 의원의 도움을 받아 목포에서 출마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신민당과 민주당이 합당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공천을 최종 결정했던 조직강화특위에서 권노갑 의원이 ‘김홍일 공천론’을 꺼내자, 민주당측 인사들은 “당을 깨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포기하라”고 반발한 일이 있다.

    이런 이유로 김의원은 1992년 12월 아버지가 정계은퇴를 선언한 뒤에야 목포지구당 위원장을 맡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권노갑 의원이 희생했다. 자신의 지역구를 물려준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권 전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동교동계의 좌장이다. 그래서 김의원은 그를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살아왔다.

    권노갑 전의원과 김의원. 두 사람 사이에는 때때로 갈등기류가 형성되기도 했지만, 동교동의 구심에는 언제나 그들이 있었다. 그래서 2001년 정풍파동 때도 두 사람이 가장 먼저 쇄신 대상으로 꼽혔다. 2002년 5월, 권 전의원은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권 전의원이 감옥에서 무척 억울해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두 분 사이가 좋지 않다는 얘기도 들리고….

    “억울하고 안하고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아버지도 몹시 괴로운 심정일 겁니다. 우리 모두 마음 아파하고 있어요. 우리가 무슨 원수 사이도 아니고…. 선거 때문에 아직까지 면회도 못 갔어요. 얼마 전엔 역사책 10여 권을 사서 보내드렸고요. 어려울 때마다 여러 모로 도와주셨던 분인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서 동교동 구파를 대표하는 김옥두 의원이 낙선했습니다.

    “그분도 괴로울 겁니다. 저는 할 말이 없어요.”

    ―민주당 정풍운동 과정에서 ‘동교동’이라는 이름은 투명하지 못한 구시대 정치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풍겼습니다.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서로 양보하고 충실해야죠. 월드컵을 보면서 국민들이 기뻐하는 걸 보세요. 스포츠에선 되는데 정치는 그게 안되고 있어요.”

    김의원은 정치에 입문한 뒤 가슴에 세 가지 소원을 품었다고 한다. 첫째, 아버지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 둘째, 아버지가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한다. 셋째, 아버지는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아야 한다. 이제 두 가지는 이루었고, 나머지 하나는 아슬아슬한 시험을 거치고 있다. 김대통령은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한 데 이어 탈당 카드까지 꺼냈지만, 상당수 국민들은 김대통령과 민주당을 동일시하고 있다. 결국 민주당의 운명이 김대통령에 대한 평가까지 좌우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아버지께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다고 봅니까.

    “물론이죠. IMF를 극복하고 경제를 안정시켰잖아요. 남북관계에서도 높이 평가받을 일이 많아요. 그런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12월 대선에서 민주당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이긴다고 봐요. 이길 수 있도록 열심히 싸워야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경쟁력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저는 좋은 사람이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선출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이겨야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한 뒤 아태재단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아태재단은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나는 아태재단 문제를 잘 몰라요. 그쪽에는 관심을 가진 적도 없어요.”

    목포에서는 이겼지만…

    6·13 지방선거는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한나라당은 16개 광역단체장 가운데 11곳에서 이겼다. 반면 민주당은 호남과 제주에서만 승리했다. 민주당은 수도권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데 그쳤고, 아성이나 다름없던 호남에서도 기초단체장 13곳을 잃었다. 그러자 민주당 초재선 의원들은 긴급 모임을 갖고 ‘제2의 쇄신’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또다시 김홍일 의원의 탈당과 의원직 사퇴 문제가 거론됐다. 이들은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 문제가 선거 패배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인식한 것이다.

    김의원은 민주당의 완패가 굳어지던 13일 저녁 목포에서 당선자 축하모임을 주최했다. 당초 경합지역으로 분류됐던 목포에서는 민주당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시장과 광역의원 선거에서 완승했고, 기초의원 내천자 17명 가운데 13명이 당선됐다. 하지만 김의원은 이날 시종 표정이 어두웠다.

    “목포는 성적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결과가 나빠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6월15일 일부 언론에 김의원의 탈당과 의원직 사퇴 문제가 기사화됐다. ‘신동아’는 이에 대한 김의원의 입장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측근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을 뿐이다.

    “나는 지금껏 당을 위해 열심히 일해왔다. 이번 선거에서도 우리 당을 지지해달라고 거리로 나갔다. 그리고 내가 맡은 지역에서 승리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김의원은 민주당 쇄신파의 주장을 보고받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한다. 한 측근은 “‘동생들 문제를 법에 따라 엄정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대통령과 특수한 관계이기 때문에 탈당하라’는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방선거 패배가 김의원과 무슨 관계냐? 이 시점에서 김의원이 탈당해도 DJ의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는 것이 민주당의 현실이다”라고 주장했다.

    김의원은 반발하고 있지만, 어차피 그의 행보는 독립변수가 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민주당이 지방선거 패배의 후유증을 어떻게 극복하냐에 따라 김의원의 선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노무현 대통령후보의 대선전략과 홍업씨의 사법처리 여부, 개혁파 의원들의 선택과 정계개편의 방향, 그리고 8·8 재보선과 12월 대선레이스…. 향후 김의원의 거취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변수들이다. 그의 앞에는 숱한 걸림돌이 놓여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우군’은 줄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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